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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시인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 독일 뮌헨 대학교에서 수학
현재 한양대 독문학 교수로 재직중
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
1979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을 발표. 제1회 녹원문학상 수상
1984년 2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제 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1994년 5시집<아니리>로 제 4회 편운문학상을 수상
시집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대장간의 유혹> <누군가를 위하여> 산문집 <육성과 가성>
<살아남은 자의 슬픔>등 번역 시집과 영역 시집 독역시집 등
--------------------------------------------게시 목록----------------------------------------------------
어린 게의 죽음 / 김광규
묘비명 / 김광규
좀팽이처럼 / 김광규
안개의 나라 / 김광규
밤꽃 향기 / 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 김광규
생각의 사이 / 김광규
인디언과 다른 점 / 김광규
도다리를 먹으며 / 김광규
연통 속에서/김광규
달력 / 김광규
어린 게의 죽음 / 김광규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 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서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묘비명 / 김광규
단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좀팽이처럼 /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2006년 2월호, <젊은 시인들의 중견 시인 읽기>
안개의 나라 / 김광규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밤꽃 향기 / 김광규
술잔처럼 오목하거나
접시처럼 동그랗지 않고
양물처럼 길쭉한 꼴로
밤낮없이 허옇게 뿜어내는
밤꽃 향기
쓰러진 초가집 감돌면서
떠난 이들의 그리움 풍겨줍니다
대를 물려 이 집에 살아온
참새들
깨어진 물동이에 내려앉아
고인 빗물에 목을 축이고
멀리서 고속철도 교각을 세우는
크레인과 쇠기둥 박는 소리에 놀라
추녀 끝으로 포르르 날아오릅니다
참새들이 맡을 수 있을까요
아까운 밤꽃 향기
시집 - 처음 만나던 때(문학과지성사)
대장간의 유혹 / 김광규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 김광규
네가 벌써 자동차를 갖게 되었으니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운전을 배울 때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을
네가 대견스러웠다
면허증은 무엇이나 따두는 것이
좋다고 나도 여러 번 말했었지
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길가의 과일 장수나 생선 장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 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너의 눈은 빨라지고
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앞으로 기름값이 또 오르고
매연이 눈앞을 가려도
너는 차를 두고
걸어다니려 하지 않을 테지
걷거나 뛰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남들이 보내는 젊은 나이를 너는
시속 60km 이상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네가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너무 가볍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생각의 사이 / 김광규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인디언과 다른 점 / 김광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콜로라도 고원을 달려가던 인디언이 갑자기 벌판 한 가운데서 내려달라고 고집했다.
그렇게 고속을 달려가면, 영혼이 육신을 쫓아올 수 없기 때문에, 육신을 멈추어 서서 영혼을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점보제트기를 타고 유럽에서 한국까지 불과 열 시간만에 날아온 날, 현지 시간 적응한답시고, 반주 곁들여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자명종이 울리는 새벽에 눈을 뜬 순간, 여기가 어딘가, 어는 호텔 방인가, 국제선 여객기 속인가, 어느새 집에 돌아왔나, 분별이 안 되어 어리둥절……
억지로 아침 먹고, 늠름하게 출근하니, 그때부터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소화가 안 되고, 화장실에 못 가고, 하품만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정신은 서울에 돌아왔지만, 육체는 아직도 서양의 어느 도시를 헤매고 있구나
인디언과 다른 점인가
정신보다 느린 나의 육체가 우랄알타이 산맥을 넘어 고비 사막을 지나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를 찾아오려면, 앞으로 두 주일은 더 걸릴 듯
도다리를 먹으며 / 김광규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연통 속에서 / 김광규
바닷가 나무 없는 벌판에
직각으로 꺾어진 시멘트 건물
겨우내 비워둔 방
석유난로 연통 속에서
새끼참새 우짖는 소리
짚가리도 처마도 없고
아무 데도 깃들 곳 없어
바람막힌 연통 속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음산한 서북향 연구실에서
난로불도 못 피우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창가를 서성거린다
연통 속에서 함석을 긁는
새발짝 소리 안쓰러워
달력 / 김광규
TV 드라마는 말할 나위없고
꾸며낸 이야기가 모두 싫어졌다
억지로 만든 유행가처럼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글도 넌더리가 난다
차라리 골목길을 가득 채운
꼬마들의 시끄러운 다툼질과
참새들의 지저귐 또는
한밤중 개짖는 소리가 마음에 든다
가장 정직한 것은 벽에 걸린 달력이고
작은 사내들.
- 김광규 -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그들은 어서 빨리 늙지 않음을 한탄하며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 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 파티에 나가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아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
작아졌다
그들은 마침내 작아졌다
마당에서 추녀끝으로 나는 눈치 빠른 참새보다도 작아졌다
그들은 이제 마스크를 쓴 채 담배를 피울 줄 알고
우습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웃을 줄 알고
슬프지 않은 일도 진지하게 오랫동안 슬퍼할 줄 알고
기쁜 일은 깊숙이 숨겨둘 줄 알고
모든 분노를 적절하게 계산할 줄 알고
속마음을 이야기 않고 서로들 성난 눈초리로 바라볼 줄 알고
아무도 묻지 않는 의문은 생각하지 않을 줄 알고
미결감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다행함을 느낄 줄 알고
비가 오면 제각기 우산을 받고 골목길로 걸을 줄 알고
들판에서 춤추는 대신 술집에서 가성으로 노래 부를 줄 알고
사랑할 때도 비경제적인 기다란 애무를 절약할 줄 안다
그렇다
작아졌다
그들은 충분히 작아졌다
성명과 직업과 연령만 남고
그들은 이제 너무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나 홀로 집에
김광규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교대역에서
김광규
3호선 교대역에서 2호선 전철을
갈아타려면 환승객들 북적대는 지하
통행로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내려야 한다 바로 그 와중에서
그와 마주쳤다 반세기 만이었다
머리만 세었을 뿐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늙은 소나무
김광규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 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 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동을 싸 바르고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 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다시 목련
김광규
사월이 오면
목련은 왜 옛마당을 찾아와 피는 것일까
어머님 가신 지 스물네해
무던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잎이 눈을 뜰 때면
어머님은 내 옆에 돌아와 서셔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신다
하루 아침엔 날이 흐리고
하늘에서 서러운 비가 나리더니
목련은 한잎두잎 바람에 진다
목련이 지면 어머님은 옛집을 떠나
내년 이맘때나 또 오시겠지
지는 꽃잎을 두손에 받으며
어머님 가시는 길 울며 가볼까
영산
김광규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엇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이었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앗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하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이 불현듯 보고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미 낯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산은 이 곳에 없다고 한다.
능소화
김광규
7월의 오후 골목길
어디선가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서투르게 흉내내는
바이올린 소리
누군가 내 머리를 살짝 건드린다
담 너머 대추나무를 기어올라가면서
나를 돌아다보는
능소화의
주황색 손길
어른을 쳐다보는 아기의
무구한 눈길 같은
자유시
김광규
시를 어떻게 만드는가
그것은 자유다
다만 종이에 써서
누구에겐가 보여 주고
발표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시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책상서랍에 넣어 둔 것은
시가 아니다
마음껏 발효할 수 없을 때
좋은 술은 익을 수 없어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를 받아
마시는 술은 피처럼
진하지도 않고
깊은 향기도 없다
(자유시는 그러므로
자유로운 시도 아니고
자유에 관한 시도 아니다)
다만 여기에 세금이 붙는다
나 홀로 집에
김광규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술병
김광규
건강증진센터의 진단과 처방을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내
술을 끊었다
지나간 반세기 동안 즐겨온 술을
끊어버리자
술 마시던 나와
술 끊은 나 사이에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 개의 나 가운데
어느 쪽도 편들 수 없어
괴롭다
오랫동안 술 마셔온 나는
이미 늙고 병들었으니 불쌍하고
얼마 전에 술 끊은 나는
아직 어리니까 손자처럼 귀엽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서 시달리다가
몸과 마음이 갈라져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 것 같다
쓰러져 건강하게 살기는
더욱 힘들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