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가서 하늘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오 10,7-15)
"As you go, make this proclamation: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Cure the sick, raise the dead, cleanse the lepers, drive out demons. Without cost you have received;
without cost you are to give.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사랑을 이스라엘이 어떻게 배신했는지 호세아 예언자가 전해 준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셨으나 그들은 우상 숭배에 빠졌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어 하늘 나라를 선포하고 그 표징을 보이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전대에 돈도,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돈도,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고 사람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예수님의 엄격함과 복음 선포의 급박성은 무척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 까닭은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예수님의 철저함을 외면하고자 할 위험이 더 크다는 사실을 성찰하며, 20세기에 제작된 종교 영화 가운데 문제작의 하나로 꼽히는 ‘마태오 복음’을 떠올립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이탈리아의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입니다. 무신론자이자 가톨릭의 가르침과 달리 산 그가 예수님에 관한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아시시에 머물 때 요한 23세 교황의 방문으로 말미암아 한참 동안이나 호텔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갇혀 있다시피 하였습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던 그가 무심코 호텔 방에 비치된 성경의 ‘마태오 복음’을 읽은 것이 이 영화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대단한 찬탄을 받기도 했으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영화가 묘사한 예수님 상을 비판하였습니다. 20세기의 대표적 영성가 토마스 머튼 신부는 이 영화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 영화의 그리스도는 젊고 놀랍도록 초연하며 진지하여, 지난 19세기 교회 예술에 묘사되었던 친절하고 너그러운 예수는 분명 아니었다. 그는 부드럽지 않고 단호하였다. 어느 면에서는 무자비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머튼은 우리가 정말 놀라야 할 것은 많은 신자가 이러한 예수님 상에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감독이 그린 그리스도의 모습은, 복음을 있는 그대로 읽은 것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머튼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사랑이란 엄격하게 요구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었는가? 특히 사랑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나 남을 속이고 착취하려는 경향과 부딪칠 때는 어떠한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보고자 하는, 나에게 편안한 예수님의 모습만으로 변질시킬 수 있습니다. 때로 도전이 되는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도 늘 새롭게 만나려는 준비된 마음이야말로 그분의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미국의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Herbert Marcuse)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풍요로운 감옥’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감옥의 생활이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자유를 억압받는다는 것이지요. 즉, 이 시대가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지고는 있지만, 이 안에서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유를 억압받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감옥 속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갖춰져 있고, 텔레비전 수상기와 오디오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가 없을 때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유를 나의 것으로 소유하지 못할 때 감옥에 갇힌 것과 똑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진실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현대 사회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영적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텔레비전이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문명의 이기라고 말할 수 있는 각종 가전제품들 역시 ‘반드시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꼭 그렇지만은 않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있으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꼭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불필요한 것에 자유롭지 못할 뿐인데 말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파견하실 때, 참으로 없어보이게 파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못하게 하며,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못하게 합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한 시대도 아니었고, 또한 신용카드가 있어서 현금 없이 다닐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지요.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금이 있어야 하고, 전교를 위해 걸어 돌아다니기 위해 보따리와 여벌 옷 그리고 신발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또한 짐승이나 강도들을 물리치기 위한 지팡이 역시 반드시 필요한 도구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꼭 필요한 것만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즉,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에 의지하는 우리가 아니라, 소유하려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께 의지하고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이제는 세상의 것들이 꼭 필요하다고 고백하는 어리석은 우리가 아닌, 주님만이 꼭 필요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세상이라는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 주인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서로 통하기 위해서 모든 말이 있는 것이다(미우라 시온).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 중에서
“스님도 도를 닦고 있습니까?”
“닦고 있지.”
“어떻게 하시는데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에이, 그거야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까? 도 닦는 게 그런 거라면, 아무나 도를 닦고 있다고 하겠군요.”
“그렇지 않아. 그들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고, 잠 잘 때 잠은 안자고 이런 걱정에 시달리고 있지.”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온갖 걱정으로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김대열신부-
우리가 이 말씀을 늘 가슴에 담고 살 수 있다면, 참 많은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많은 시간을 욕심으로 채우며 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것이라는 것을 떠올려봅니다. 일일이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이름 석자부터 시작해서 내 것이라는 것을 제법 많이 가지고 삽니다. 하지만 과연 진정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까요?
우리는 많은 이유를 대며 감사할 일들을 부정하며 삽니다. 그 중 하나가 소유개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것을 내가 쓰는데 누구에게 감사할 일이냐는 논리지요. 사실 이러한 논리는 세상을 비정하게 만드는 논리입니다. 절대적 가난에 빠진 이들을 만들고, 온갖 종류의 차별을 허락하며,
권력에 목을 매는 적자생존의 세상을 만듭니다.
이 세상,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이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적어도 이러한 논리에 맞추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소유의 개념에 대한 전환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것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돌려드려야 할 것들입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들 어느 것 하나 들고 갈 수 없는 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항상 시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시간에 모든 것을 걸 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유해야 할 것은 삶의 내용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내용은 이 세상을 떠날 때 반드시 들고 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소유라면 미련 없이 던져버려야 합니다.
내 자랑, 하느님 자랑
-이수철신부-
지난 밤 무척 더웠고 내내 하느님만 생각했습니다.
늘 하느님을 목말라 했고
지금도 목말라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살아있는한 하느님을 목말라할 것입니다.
하느님만으로 행복했고, 하느님만으로 부요했고, 하느님만으로 자유로웠습니다.
내일(7.11) 요셉수도원에서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1989.7.11.일 사제서품) 감사미사를 앞두고
지난 세월 뒤돌아보며 저절로 나온 고백입니다.
지난 3일간(7.7-9일) 참 행복했습니다.
어제(7.9) 저녁식사 때는 여기 장충동 수도형제들이 마음을 다해 미리 제 은경축을 축하해 줬습니다.
축가를 우렁차게 불러줬고 케이크를 자를 때는 우레와 같은 축하의 박수를 쳐주니 행복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수도형제들의 축하가 최고의 기쁨입니다.
또 전날(7.8)에는 남양성모성지와 요당리성지를 순례하며 성모자상을 껴안고 사진을 찍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이 장면으로 하루는 온통 행복했고 살아있는 한 영원히 잊지 못할 장면입니다.
난생 처음 성모자분을 껴안고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여러분에게 보냈고 유쾌한 답도 받았습니다.
-*신부님, 넘 귀여우세요.ㅎㅎ 성모님 품에 어찌도 그리 잘 맞게 안기셨어요?
*아름다운 사진이네요.
*신부님의 단순한 마음과 오로지 성모님께 의지하는 순수한 마음이 들어있어요.
*우와, 이제 신부님도 드디어 카톡세계에 입문하셨군요. 사진이 아주 근사합니다.
*예수님과 신부님이 성모님 치맛자락 감싸시다니. 신부님 맞는가요. 즐겁고 행복해 보입니다.
*와우! 여기가 어딥니까? 아주 젊어 보이십니다.
*이 사진 예술이네요.ㅎㅎ 너무 잘 어울리네요-
모두 부러워하며 즉시 답을 보내 저의 행복에 동참한 착한 도반들입니다.
이어 전날(7.7)의 행복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수도원 입회전
초등학교 교편시절 마지막 해(1981년 초등학교6년) 제자들 10명이 저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무려 졸업후 33년만이니
당시 13세의 아이들은 모두 46세의 장년이 되었지만(나는 33세에서 66세가 됨),
여전히 순수한 동심으로 스승인 저를 너무 반기고 좋아했고
모임이 끝났을 때는 모두 나와 함께 걸어 장충동 수도원 문 앞까지 바래다 주고 떠났습니다.
참으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 온 제자들이었습니다.
식사시에 찍은 사진이 너무 자랑스러워 몇분에게 카톡으로 보냈고 즉시 답도 받았습니다.
- *어머나 이렇게 많이 모였어요? 벌써 40대들이네요. 참 대견스럽고 훌륭하네요.
하느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절로 감사 찬송이 나오네요.
*다들 훌륭히 됐을 거 같은 모습들이 좋네요. 신부님은 선생님으로도 성공하신 분이란 증인들!-
바로 은경축을 앞두고 하느님 주신 풍요한 선물들입니다.
제자랑 같지만 결국은 하느님 자랑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랑이듯이 하느님은 우리의 자랑입니다.
감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제 자랑, 하느님 자랑을 오늘만은 하고 싶습니다.
올해 안식년을 맞기 전, 1989년 7월 11일 사제서품후 2014년 오늘까지,
외국에 나가 있었던 2년 남짓의 기간만 빼놓고 저는 요셉수도원에서 하루하루 전부를 쏟아 살았습니다.
한 번도 성무일도 빠진 적 없고, 한 번도 미사 빠진 적 없고, 하루도 강론 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참 치열하게 살았고 바로 이에 대한 고백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시입니다.
아픈 적도 거의 없었고 웬만한 아픔은 이기고, 밥은 안 먹더라도 미사와 기도는 꼭 참석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늘 목말라 했고 사랑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기적이요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위업입니다.
그러니 제자랑 같지만 결국은 하느님 자랑입니다.
저절로 터져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사랑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듯, 하느님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있습니다.
새무얼 울만이 '청춘'이란 시가 생각이 납니다.
-진정한 청춘이란 젊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젊은 정신 속에 있다.
중요한 것은 풍부한 상상력, 타오르는 정열이다.
펑펑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당신 정신은 오늘도 신선한가?
생동감이 넘치는가?
용기 없는 정신 속에 청춘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대한 사랑을 위해 드러내는 용기와 모험 속에 청춘은 존재한다.
용기 없는 20대 라면 그는 이미 노인, 용기 있는 60대라면 그는 한창 청춘이다.-
새무얼 울만(영국 시인) -
시인이 이 시를 지은 것은 그의 나이 일흔 여덟 살 때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도들에게서 주님을 빼놓으면 완전 허무이듯이, 저 역시 주님을 빼놓으면 완전 허무입니다.
주님 함께 계시기에 의미 충만한 사도들의 삶이었듯이 저 역시 그러합니다.
과연 무엇을 보고 살아있다 할 수 있는지, 과연 살아있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 없이, 주님을 모르고 살았던 이들 과연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묻게 됩니다.
하느님을 몰라 육신은 살아있어도 정신은, 마음은, 영혼은 죽은,
'참 나'를 잊고 사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진정 주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영혼이 살아있는 사도들입니다.
주님과의 일치의 정도가 살아있음을 재는 척도입니다.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존재감 충만한, 진정 살아있는 삶입니다.
하여 가장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충만한 존재감을 느끼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주님만으로 부요했고 행복했고 자유로웠기에,
이런 무소유의 가난은 사도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무소유의 텅 빈 가난을 통해 실현되는 하늘나라요 샘솟는 주님 평화의 선물입니다.
호세아 역시 하느님과 일치의 삶을 살았던 예언자였습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했던 호세아였습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무한한 연민과 인내의 사랑을 지닌 하느님이요,
이런 하느님의 연민과 인내의 사랑을 닮았던 호세아는 진정 살아있는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단도리한 호세아 예언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만이 우리 삶의 전부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지혜16,20참조).
아멘.
근본에 충실하라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말 타면 종 두고 싶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아홉을 가지면 열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우리 믿는이들도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때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활용하는 것뿐입니다.
성경말씀을 기억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 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것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19-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제발, 가진 것에 의지 하지 말고 주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중국춘추전국시대 송나라 학자였던 장자(莊子)는 집이 가난했다. 참다못해 이웃 위나라를 다스리던 문후(文侯)를 찾아가 곡식을 사기위해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위 문후는 흔쾌히 승락하면서 영지에서 수입이 들어오면 그 때 은 삼백냥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 하루가 급한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에 붕어 한 마리가 퍼덕이고 있었습니다. 동해에서 온 붕어는 길가던 제게 물을 한 바가지만 갖다주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쪽 오나라와 월나라 왕을 찾아가는 길인데, 그곳 서강의 강물을 끌어다가 살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붕어는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선생이 강물을 끌어다 준다지만 (나는 이미 죽었을 테니) 건어물 가게에서 나를 찾는 편이나을 것이오'라고 했습니다."***홍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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