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지』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살 만하고 경치가 빼어난 곳이 무등산 자락에 자리 잡은 원효계곡 일대이다. 여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이룬 광주호 변에는 16세기 사림문화가 꽃을 피웠던 장소인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 취가정, 독수정, 풍암정, 면앙정 등의 정자들이 있다. 기름진 들이 널따랗게 펼쳐진 담양에는 큰 지주가 많았고 그 경제력에 힘입어 봉건시대의 지식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그들은 중앙정계로 진출했다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이곳에 터를 잡고 말년을 보내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광주호 상류 자미탄(紫薇灘)을 중심으로 호남가단(湖南歌壇)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16세기 조선사회를 뒤흔들었던 사화 때문이었다.
담양 면앙정기름진 들이 널따랗게 펼쳐진 담양에는 큰 지주가 많았고 그 경제력에 힘입어 봉건시대의 지식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전남 담양군 남면 지석리 광주댐 상류에 위치한 소쇄원(瀟灑園)은 남쪽으로는 무등산이 바라보이고 뒤로는 장원봉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데 이 터를 처음 가꾸었던 사람은 양산보였다. 그는 15세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간 뒤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신진사류의 등용문이었던 현량과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받지는 못했다. 그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조광조는 화순의 능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세상에 환멸을 느낀 양산보는 고향으로 돌아와 별서정원 소쇄원을 일구면서 55세로 죽을 때까지 자연에 묻혀 살았다.
흐르는 폭포와 시냇물을 가운데 두고, 대봉대(待鳳臺)에서 외나무다리를 지나 그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감상하도록 만들어진 소쇄원에는 열 채쯤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봉대, 광풍각(光風閣), 제월당(霽月堂)만이 남아 있다. 소쇄원은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계곡, 담벼락, 연못, 폭포, 계단, 다리 등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자연스러움을 연출하고 있어 우리나라 정원문화의 최고봉 또는 ‘건축문화의 백미’라고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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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호 상류 자미탄을 중심으로 호남가단이 형성되었다. 이 주변에는 16세기 사림문화가 꽃을 피웠던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 취가정, 독수정, 풍암정 등의 정자가 있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성산 자락에 자리 잡은 식영정(息影亭)은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자신의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석천(石川) 임억령을 위해 1569년에 지은 정자이다. ‘식영’이란 장자의 고사 중에서 “도를 얻은 뒤 제 그림자마저 지우고 몸을 감춘다”라는 대목에서 따온 것인데 이곳의 경치와 주인인 임억령을 찾아 수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등이 그들이다. 그중에서 김덕령, 김성원, 정철, 고경명을 식영정의 4선(仙)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후 식영정은 스승의 자취보다 제자 송강의 터로 더 유명해졌다.
김성원의 가계가 몰락한 뒤 「성산별곡」을 지은 송강의 후손들이 이 정자를 사들여 관리해 온 탓에 정자 마당에는 송강문학비가 들어서 있고 입구에도 ‘송강가사의 터’ 라는 기념탑이 서 있다. 세월의 흐름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식영정 근처에는 그 사이 가사문학관이 들어섰지만 그곳으로 오르는 돌계단만은 옛날 그대로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것은 이미 옛말이고 2년도 안 되어 강산이 변하는 세상이다. 광주호가 들어서 옛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지만 댐이 생기기 전 정자 앞의 냇가에는 배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어서 자미탄이라고 불렀다.
식영정에서 자미탄을 건너 산길을 올라가면 환벽당(環碧堂)이 나온다. 식영정 아래쪽에 서하당을 세운 김성원과 환벽당을 세운 김윤제는 자미탄 위에 다리를 놓고 서로 오가며 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김윤제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인 충효리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말년을 보냈던 터였다.
취가정(醉歌亭)은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의 원혼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인 김만식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1890년대에 지은 건물이다. 정자를 짓게 된 사유가 재미있다.
송강 정철의 문인인 권필(權韠)은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서 벼슬을 하지 않고 야인으로 일생을 보낸 인물이었다. 그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전공을 세웠지만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나타나 한 맺힌 노래 한마디를 부르는 것이었다.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게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또한 뜬 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바라고저.
김덕령의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들은 권필은 꿈속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지난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천명을 어찌하랴.” 김덕령의 노래를 빌어 이 시를 지은 권필은 광해군 때 척족의 방종함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는 죄로 친국을 받은 뒤 귀양을 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전송 나온 사람들이 건네준 술을 마시고 그다음 날 죽었다고 한다.
진나라 때 시인인 도연명의 『책자(責子)』에 나온 「하늘의 운수가 참으로 이러할진대」라는 글이 있다.
백발은 양쪽 귀밑머리를 덮고, 피부도 이제는 탄탄하지 못하다. 내 비록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하나같이 종이와 붓을 좋아하지 않는다. 큰아들 서(舒)는 열여섯 살이나 되었는데, 게으르기가 짝이 없다. 둘째 아들 선(宣)은 열다섯 살이지만 학문에 뜻을 두지 않는다. 그다음 옹(雍)과 단(端)은 열세 살인데, 여섯과 일곱을 구별하지 못한다. 막내아들 통(通)은 아홉 살이 되었건만, 배와 밤을 알 뿐이다. 하늘의 운수가 참으로 이러할진대, 우선 술이나 들자.
한 가문의 운수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구국의 행동도 시대와 군주를 잘못 만나면 운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슬픈 사연들이 얼마나 많은가?
전주 오목대 © 유철상
[네이버 지식백과] 무등산 자락의 원효계곡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2012.10.5, 다음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