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런 사적이 또 있을까, 인천 경서동 녹청자 요지
- 최석훈 시민기자
- 업데이트 2025.03.14 22:57
인천을 걷다 마주치는 보물들 (48)
인천투데이=최석훈 시민기자|인천 서구 경서동 녹청자 요지(仁川 景西洞 綠靑瓷 窯址)는 1970년에 국가지정유산 중 사적으로 지정됐다. 지금은 사라진 지정 번호로 211호이니 매우 이른 시기에 그 가치를 인정받은 문화유산이다. 녹청자 요지는 ‘녹청자’라는 청자의 한 종류를 굽던 가마터란 뜻이다. 국가 사적 인천 경서동 녹청자 요지의 2025년 모습. 그런데 가마터는 골프장 안에 평장(平葬, 봉분 없이 평평하게 묻힘)돼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낮은 울타리와 안내판뿐이다. 이게 뭐여, 국가 사적이라더니. 사적이란 사적(史蹟)은 문화유산법에 따르면 “절터, 옛무덤, 조개무덤, 성터, 궁터, 가마터, 유물포함층 등의 사적지(史蹟地)와 특별히 기념이 될 만한 시설물로서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큰 것”이다. 수원 화성, 서울 풍납동 토성, 경주 황룡사지, 서울 한양도성 등이 있다. 인천에는 강화에 삼랑성, 고려 왕릉들, 참성단, 초지진 등 십여 개가 있고, 인천 본토에는 계양산성과 답동성당, 이 녹청자 요지 단 셋뿐이다. 그런데 저 모습이다. 이것을 국가 사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불국사와 같은 격의 사적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과거의 모습과 지금 이런 모습인 이유
예전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 도요지의 옛 모습. 출처 국가유산포털.
이곳에 가마터가 있다는 사실은 1949년 무렵 당시 인천시립박물관장 이경성이 발견하고 보고해 알려졌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주도해 1965년 12월∼1966년 5월까지 네 차례 발굴조사를 했다. 초기 미술사학자로 우리 문화유산에 관한 고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을 쓴 최순우가 발굴조사 책임자였다. 이 가마터는 폭 1.2m, 깊이 7.3m로 작지만, 서민들이 썼던 자기인 녹청자의 첫 발굴 가마터로 중요한 유적이다. 최순우는 녹청자가 청자의 초기 형태가 아닌가 하는 의문점을 이 도요지에서 함께 발굴되는 분청사기를 논거로 해소하고, 여말 선초인 14세기에 조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냈다. 발굴 이후 도요지는 서구에서 1977년 처음 슬레이트 지붕을 놓은 보호시설을 설치했고, 2002년에 강화유리 지붕으로 시설을 개선했다. 그러나 도요지가 있는 땅에 1970년 부평 시-사이드(C-side) 컨트리클럽(1985년 인천국제컨트리클럽으로 개명)으로 개장한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출입마저 어려워져 도요지 관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이미 5년 전에 문화유산을 발굴한 곳에 어떻게 골프장이 들어선 것일까. 당시는 군사정권 치하. 수도권에 골프장을 만들어 외국 바이어들을 접대하겠다는 목적으로 조성됐다고 한다. 녹청자 요지 보호각 안 모습. 국가유산포털.
그래서 추가 발굴은 시도도 하지 못하고, 가마터는 위 사진처럼 덮은 채로 다만, 가마터의 위치를 알리는 구실만 하는 보호각이 유지됐던 것이다. 그마저도 2017년 무렵 정비한 결과 없애고, 깔끔하게 묻어 주변 땅과 판판하게 다져 지금처럼 울타리와 안내판만 남기게 된 것이다. 같은 국가 사적인 광주 충효동 요지나 도 기념물에 불과한 충주 미륵리 요지 등 여러 유적이 가마터의 남은 모습을 볼 수 있게 복원해 놓았다. 비스듬히 늘어선 가마를 직접 볼 수 있다. 경서동 요지가 땅에 묻힌 이유는. 사유지라서 그렇다. 다른 곳처럼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추가 발굴이 필요한데, 엄두도 내지 못하고 결국 보존을 선택하고 말았다. 국가 지정 사적 따위는 사유지 앞에서 큰소리는커녕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녹청자란 무엇인가 녹청자박물관 소장 출토지 미상 녹청자 반구병(盤口甁). 입이 쟁반처럼 넓은 병이란 말이다. 녹청자(綠靑瓷)라는 용어는 1965년 경서동 가마터를 발굴한 최순우가 ‘가칭’(假稱, 임시로 부름)한 것이다. 최순우는 ‘녹청자요지발굴조사개요’에서 녹청자를 “비교적 정선된 청자계의 얇은 태토(胎土)위의 조질(粗質)의 녹청색시유(綠靑色施釉)를 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태토는 바탕흙을 말하고, 조질은 거칠거나 질이 낮은 것을 말하며, 시유는 유약을 바른 것이다. 최순우가 주목한 녹청자의 핵심은 녹청색의 거친 유약에 있다. 청자 하면 고려청자의 비색(翡色)을 떠올릴 것이다. 맑고 은은한 비취색. 12-13세기 고려청자 절정기의 성취이다. 1123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1091~1153)이 남긴 기행문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송나라 청자색과 구별하며 극찬했다는, 바로 그 고려청자의 색이다. 비색청자나 상감청자 등의 고급 자기인 사기(沙器)는 당연히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고, 상류층이 썼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사기를 쓸 수는 없는 일. 생활 용기로 누구나 쓸 수 있는 도자기도 필요하다. 그 수요를 담당한 청자가 바로 녹청자이다. 이후 녹청지 도요지로 추가 발굴된, 해남 진산리 가마터 등에서 출토되는 녹청자는 생활용기인 접시류와 자배기, 병, 항아리 등이 대다수이다. 녹청자박물관 학예사에 따르면, 경서동 녹청자는 10-11세기에 청자가 보편화되면서 고급형 청자와 공존했던 보급형 청자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녹청자박물관
녹청자요지에서 400m 남짓 떨어진 곳에 녹청자박물관이 있다. 역시 사유지인 골프장 안에 박물관을 세울 수 없어서 요지와 떨어지게 됐다. 경서동 녹청자 요지에 대한 학술자료 제공과 출토 녹청자에 대한 학술조사와 연구를 위해 2002년 ‘녹청자 도요지 사료관’으로 처음 문을 열었으며, 2010년 현재 건물을 새로 지어 옮기면서 ‘녹청자박물관’이 됐다고 한다. 1층에는 전시실이, 2층에는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강의실이 있다. 도자기를 빚는 교육프로그램이 아주 잘 되어 있고,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1층 전시장의 반이 작품 전시장이다. 경서동 요지 출토 유물.
그러나 박물관 설립 취지인 학술 연구가 왕성한지는 의문이다. 경서동 녹청자 요지나 녹청자에 대한 논문을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전시관에 접시·도침(陶枕, 도자기를 괴는 물건) 각 1점과 파편 한 무더기밖에 없는 경서동 출토 유물도 더 늘려야 한다. 설립 목적이 경서동 요지에 대한 학술자료 제공인데, 너무 빈약하다. 박물관 학예사는 발굴처가 발굴 유물을 소장하게 되는 관행을 토로하였으나, 출토지에 들어선 전문 박물관으로서 자료 확충에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최순우는 발굴조사개요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이 발굴에 보여준 인천시장 및 인천박물관장의 비상(非常)했던 열의를 여기에 기록한다.” 특별한 열의는 바라지도 않는다. 인천시와 서구청 등 관계자가 경서동 녹청자 요지의 복원을 위해 상식적인 노력을 해 주기를 바란다. 묻혀버린 가마는 이렇게 생겼다. 박물관에 전시된 발굴조사보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