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SKOON
"...광왕의 경제적 능력은 그가 전쟁에서 보여주었던 전략 능력과는 반비례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가 행해온 경제정책들 또한 그의 전략중 하나였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다시 한번 광왕을 일류 정치가 혹은 일류 사기꾼이라고 평가하겠다. 이건 의외로 간단한 결론이다. 만약 내 말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 책을 덮고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라. 그는 지금의 세계 경제가 파탄난 원인 제공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신력 195~197년)에는 수많은 이들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자신이 취해야할 실리는 모두 취하지 않았던가?"
<암바트리 하이에피다의 '역사의 패러독스' 중>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듣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두 귀를 틀어막게 만들 정도의 엄청난 소음이 어딘가에서 계속하여 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소리의 근원지는 의외로 가까웠다. 그 것은 파라피스 왕궁에서도 웅장함을 대표하는 건물 중 가장 으뜸으로 내세우는 명 건축물인 '기사의 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물론 총 면적 10만평이라는 거대한 토지 위에 세워진 기사의 관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그 소리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이 천둥소리 비슷한 소음은 분명 기사의 관 안에 아련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사의 관은 십자형의 3층 건물로서, 건물 내부는 모두 7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관의 1층은 청기사단, 적기사단이 차지하고 있었고, 2층은 철기사단과 은기사단, 그리고 금기사단이, 마지막 층인 3층은 성기사단과 근위 기사단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소리의 출처는 성기사단이 자리 잡고 있는 3층에서 나고 있는 소리였다. 그것도 성기사단의 기사넘버 50안에 드는 자들에게만 출입이 허락된다는 '단련의 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계속적으로 들려오는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음과, 간간이 들려오는 무언가 부셔져 쓰러지는 듯한 굉음. 아마도 격렬한 병장기의 부딪힘 소리가 아닐까?
"으아아아아!!!"
한 남자의 기합소리, 혹은 절규가 홀 전체를 뒤흔들었다. 지금 그의 손에는 부러진 검이 들려있었다. 어찌나 검을 격렬하게 휘둘렀는지 손아귀가 찢어져 피조차 흐르고 있었다. 물론 그가 성기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평소 성기사들이 입는 백색의 의복을 입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파라피스 기사도의 상징으로 내세워지는 고귀한 성기사가 훈련용 무구도 없이, 왜 이리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댄단 말인가?
100여명도 넘게 수용할 수 있을 듯한 넓은 홀의 바닥 곳곳에는 이미 부러진 검에서 나온, 부서진 검이 몇 자루인지도 분간이 안갈 만큼의 깨지고 박살난 금속의 파편들이 널려있었다. 아마도 이 기사는 벌써 수 시간 동안 이곳에서 검만을 휘둘러대고 있었던 것 같았다.
기사의 붉은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축 늘어졌다. 온 몸의 근육도 완전히 풀렸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기사, 하이알드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부러진 검을 또다시 바닥으로 내팽개치고는 홀 사방의 벽면에 비치되어 있는 무구함에 다가가 마지막 한 자루 남은 검을 뽑아들었다.
하이알드는 검을 잡자마자 독기 어린 눈으로 눈앞에 보이는, 검을 휘두르는 자세를 연마하기 위해 개인 훈련용으로 세워진 철대들을 향해 또다시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분노하게 만들었는가?
이미 그의 입에서는 쉰내가 날 정도로 목이 말라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너무나도 많은 운동량을 소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땀을 비 오듯이 쏟고 있으면서도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또다시 검이 부러지자, 그는 이제는 아예 맨손으로 철대를 내리찍었다.
"제기랄!!! 제기랄!!!!"
하이알드의 주먹에서 피가 튀었다. 그러나 그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성이 났는지 계속하여 미친 듯이 철대를 내리치고 있었다. 결국 수십 번의 칼질에 약해졌던 철대는 그대로 꼬꾸라져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철대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다시 한번 천둥소리를 기사의 관 곳곳으로 퍼트려댔다.
"하아…… 하아……"
결국 단련의 홀에 세워져 있는 50대의 철대를 모두 쓰러뜨린 하이알드. 그는 그래도 성이 안 차는지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 자신의 주먹을 꽉 쥐며 자신의 화를 풀 또 다른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어딘가에서 결국 그런 무모한 하이알드의 행동을 저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둬라, 하이알드."
등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냉랭한 목소리에 하이알드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아무런 말없이 홀 어딘가로 걸음을 옮겨갈 뿐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들려온 냉소적인 목소리가 하이알드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너는 화가 나면 언제나 이곳에 폐를 끼치는 구나. 조금쯤은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 그게 싫다면, 기물 파손으로 나라에서 나오는 네 녹이 줄어든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해보는 것도 좋겠지."
"이죽거리지 마라, 라켄. 난 지금 네 얼굴을 뭉개버리고 싶은 심정이니까……"
하이알드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러나 깊은 분노가 베어있는 목소리가 라켄이라는 남자에게로 향하여 졌다. 단련의 홀 출입구의 측면에 몸을 기대어 팔짱을 낀 채로 한동안 말없이 하이알드를 지켜보고만 있던 라켄은, 하이알드의 협박 비슷한 말에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팔짱을 풀며 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단련의 홀 안을 환히 비추는 마법등 아래 라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단정히 쓸어 넘긴 금발과 양쪽으로 길게 찢어져 매서워 보이는 눈매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단단히 화가 나있군. 그래서 내가 여기로 온 거다. 네가 또 어떤 쓸데없는 행동을 할지 모르니까."
하이알드는 자신의 등 뒤까지 걸어오며 이죽거리는 라켄의 말을 들어줄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단지, 하이알드는 그에게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은 사실만이 있을 뿐이었다. 대답에 따라서는 정말로 라켄의 면상을 뭉개버릴지도 모르는 질문이었다.
"……너는 알고 있었지? 지하 감옥의 존재를. 그리고 아피스트로님이 단죄의 탑에 갇혀 계시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
라켄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러나 라켄이 단호한 만큼, 하이알드의 분노도 한계를 넘어서고 말았다. 하이알드는 무서운 기세로 라켄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라켄이 입고 있는 성기사의 백의가 잔뜩 구겨지며 라켄의 목을 심하게 압박해갔다. 하이알드는 본심인지 라켄의 멱살을 잡은 손에 전혀 여유를 두지 않았다.
"그래!? 그래 라고!? 이 자식!!!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 거냐!?"
"……내가 무슨 짓을…… 했던가?"
라켄의 목소리가 하이알드의 힘에 눌려 조금 힘겹게 나왔다. 그러나 라켄의 표정은 하이알드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오히려 하이알드에게 무저항 상태의 몸을 대놓고 맡겨놓을 뿐이었다.
"네놈이 우리 모두를 속였잖아!!! 3년 전에 네놈은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아피스트로님과 면회를 다녀올 자격을 얻었었다!!! 가보았다면 사실을 알았겠지!? 그런데도 넌 아피스트로님이 잘 계시다고 모두에게 거짓말을 지껄여댄 것 아니냐!!!"
"……그때마다 난 아피스트로님의…… 면회를 거절당했다…… 하지만 난 너희들에게 그렇게 말한 일을 잘못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바로 너 같은…… 녀석들이 있기 때문에……"
"뭐라고!?"
라켄의 대답에 하이알드의 손아귀 힘이 점점 더 강해져 오고 있었다. 라켄은 그 힘에 당하고 있는 당사자인 만큼,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처음보다 더 냉소적인 목소리로 하이알드에게 묻고 있었다.
"만약 그때…… 내가 사실을 말했다면…… 넌 어떻게 했을 거라 생각하나?"
"당연히!! 단죄의 탑에 쳐들어가서라도 진상을 확인해 봐야지!!! 네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냐!!?"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으니까 그렇게 말했던 거다."
라켄의 대답에 하이알드는 잠시간 라켄을 노려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이알드도 라켄의 말뜻을 잘 아는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하이알드는 라켄의 행동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감정들의 충돌에 휩싸여 라켄의 멱살을 잡은 하이알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손에서 나오던 피가 라켄의 백색 의복을 붉은 빛으로 적셔갔다. 그렇게 한동안 라켄과 하이알드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라켄의 의지는 확고했다. 자신이 한 일에 잘못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하이알드는 점점 더 더러워지는 자신의 기분을 느끼며 라켄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잘 들어, 라켄. 난 지금 네 잘난 헛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지금 난…… 최악의 기분이다."
"그래서…… 위원회에 쳐들어…… 가기라도 할 건가……?"
"아아……! 지금 당장이라도 쳐들어 가주지!! 그 자식들의 면상을 완전히 갈아 엎어주겠어!!!"
그의 말에 드디어 라켄의 참을성의 한계도 바닥이 났다. 라켄은 날카롭게 찢어진 자신의 두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멱살을 잡은 하이알드의 두 손목을 자신의 양손으로 세차게 잡았다. 마치 힘겨루기를 하는 것처럼. 그러자 하이알드의 손이 조금씩 라켄의 멱살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이알드, 어쨌든 넌 기사다. 기사로서 그런 불경스런 말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흥, 시덥 잖은 기사도 따위엔 관심 없어!! 어차피 귀족 놈들이 제 편한 대로 정해 논 룰일 뿐이다!!"
하이알드는 그렇게 소리치며 라켄의 멱살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바닥으로 떨쳐내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이알드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켄의 시선을 외면하며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차라리…… 휘겐 녀석의 뒤를 따라서……"
"그만둬라, 하이알드. 지금 네 말은 휘겐들을 모욕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개소리 말라고 했지. 라켄…… 지금 네 녀석의 헛소리를 들을 마음은 없다고……"
하이알드가 다시 한번 독기 어린 눈으로 라켄을 쏘아보았다. 아마 하이알드의 눈에는 지금, 그가 누누이 욕하고 있는 자문 위원회의 모습과 라켄의 모습이 겹쳐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게 당연할런지도 몰랐다. 하이알드뿐만이 아니라, 성기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지는 '공적(公敵)'인 자문 위원회를 편드는 발언을 하는 라켄의 모습이 곱지 않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켄의 말은 하이알드의 분을 부추기려는 듯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들이 분명 말했을 거다. 우리에겐 자신들과 다른 선택을 하라고. 그랬기 때문에 나는 이 6년 간 기다려……"
"웃기지마!!! 그래서 이 6년 간 기다려서 뭐가 남았다고 하는 거냐!!? 네 말대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냈나!!? 그것도 아니면 나라를 뒤집어엎을 힘이라도 얻은 거냐!!?"
"하이알드!!!!"
하이알드는 순간 멍한 표정으로 라켄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침착함을 유지하던 라켄의 입에서 처음으로 큰 소리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라켄은 이제까지의 냉정한 태도가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평상시의 그답지 않은 높은 목소리로 하이알드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는 넌 도대체 이 6년 간 무엇을 얻은 거냐!? 왜 그 날, 분쟁을 싫어하는 피에르도가 너를 말리며 너와 피 터지도록 싸웠다고 생각하나!?"
"빌어먹을!!! 얻은 것 따위가 무엇이 있겠어!!! 모조리 잃은 것투성이다!!!"
"아니! 넌 얻었을 거다! 적어도 네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 그 사실만은 깨달았을 거야! 에르체와 휘겐이 우리에게 남겨준 마지막 충고였다! 네 행동에 피에르도의 입장이, 그리고 다른 성기사들의 입장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해 보았나!?"
"…………"
"지금의 너라면 알 수 있겠지. 이제 주위의 사람들 정도는 생각해 줄 수 있지 않나……?"
결국 라켄의 말에 하이알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납득은 할 수 없다. 이것이 하이알드의 지금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그 위대한 성기사 '아피스트로 휴테르만'의 현재 모습을 확인한 후였다. 그가 철저하게 망가져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하이알드였다. 그랬기에 그는 라켄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마음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니, 마음의 끝자락에서라도 라켄의 말을 수긍하는 것조차 허용할 수 없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단 말이다……!! 개 같은 위원회의 놈들의 낯짝을 보기만 해도 이가 갈려 미치겠다고!!!"
하이알드는 라켄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외쳤다. 라켄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아피스트로가 어떤 모습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아피스트로를 자문 위원회의 귀족들은 전쟁에 참전시키지 위해 출감시킨 것이었다. 이건 그들이 그간 아피스트로의 상태에 관심도 없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아피스트로가 지금과 같은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자문 위원회의 콧대 높은 9인의 대(大)귀족들이 그런 처사를 내렸을까?
하이알드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들려오는 라켄의 대답은 냉랭했다. 이미 라켄도 겉모습만 냉정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가 하이알드의 앞에서는 절대 하면 안 되는 말까지 내뱉고 있는 것을 보자면 말이다.
"그래서 다시 라이아드칸의 광견으로 돌아갈 생각이냐……?"
그 순간, 하이알드의 표정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심하게 구겨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오른손 주먹이 꽉 쥐어져 라켄의 면상을 향해 순식간에 뻗어나갔다. 그러나 라켄은 하이알드의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빠르게 허리를 틀어, 하이알드가 내뻗은 강력한 주먹을 피하고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죽여 버린다…… 라켄……"
허공을 항해 크게 헛손질을 하고만 하이알드는, 분에 찬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라켄을 향해 망발을 내뱉고 말았다. 물론 하이알드의 이런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라켄이었기에 그의 망언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라켄은 단지 하이알드와 마주보며 하이알드의 다음 공격을 대비하는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난 상대가 적의를 품고 달려드는데, 가만히 당하고 있을 정도로 기사적이진 못하다."
라켄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활짝 열려져있던 단련의 홀 출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하이알드와 라켄이 동시에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특히, 라켄의 표정에는 당황함이 크게 어렸다. 만약 이런 모습을 다른 이들이 보기라도 한다면!?
"정말…… 너희들은 별 수 없구나. 이 꼴을 같은 성기사들이라면 모를까, 혹여 다른 기사들이 보면 이만저만한 망신이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며 출입문 안으로 느긋이 걸어 들어온 사람은 남자였다. 성기사의 백색 의복을 보아할 때, 이 남자도 꽤나 고위급의 성기사인듯 싶었다. 나이는 대략 20대 중반 정도로, 특이할 만한 점이라면 파라피스에서는 매우 드문 검은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그러나 그 모습을 확인한 라켄에게는 그저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적어도 검은머리의 성기사나 라켄이 걱정하던 망신은 당하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유우……"
라켄의 입에서 안도의 말처럼 그 기사의 이름이 한숨 비슷하게 흘러나왔다. 그 검은머리의 기사 유우는 하이알드와 라켄의 사이로 유유히 걸어 들어오며 양쪽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이렇게 싸워놓고 또 술한잔이면 잊어버릴 것을…… 도대체 둘은 왜 매일 싸우는 거야?"
"……넌 관계없으니 빠져."
유우의 말에 하이알드가 여전히 라켄에 대한 분이 풀리지 않은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자 유우는 조금 섭섭하다는 표정을 하이알드에게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도 어쨌든 대대장 중 하나라고. 아까부터 대충 들었는데 난 왠지 라켄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데?"
"흥, 너도 결국 겁쟁이란 소리냐?"
하이알드는 유우의 대답을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유우 또한 라켄처럼 별말 없이 6년 간 침묵만 지키고 있었으니까. 라켄은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보겠다고 말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닌 듯싶지만, 도대체 이 녀석과 또 하나의 대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하이알드는 유우를 책망 어린 눈으로 노려보며 '겁쟁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유우에게도 하이알드의 성격에 대한 파악은 이미 예전에 끝나있었다. 그는 하이알드의 말에 맞장구쳐 화를 내기보다는 조금 더 진보적인 질문을 꺼내었다.
"겁쟁이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렇다는 거야. 하이알드, 너 정말로 위원회에 이빨을 드러낸다고 뭐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내 대답은 이거군. 아피스트로님께 폐가 되니까 그만둬라……라고. 이제 피에르도는 임시 단장 직에서 물러났어. 이 이후에 생기는 성기사단의 모든 불화는 아피스트로님의 책임이니까."
"…………!!"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아피스트로라는 이름에는 하이알드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어쨌건 아피스트로가 그렇게 된 것에는 하이알드의 책임도 있었으니까. 피에르도의 입버릇처럼 '그를 지키지 못한 건 성기사들 모두의 책임'이었으니까.
유우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하이알드와 라켄을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알드는 그 모습에 비위가 뒤틀릴 뿐이었다. 라켄이나 유우나, 그리고 이곳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또 하나의 대대장이나 모두 모른다. 지금의 아피스트로가 어떤 상태인지. 아피스트로의 현재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자신과 피에르도가 지금 얼마나 절망적인 기분을 맛보고 있는지 이들은 모른다.
"너희들은 몰라…… 지금의 아피스트로님의 어떤 모습인지…… 이 6년 간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아피스트로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런 한가한 소리들이나 지껄여대는 거다……"
하이알드의 말에 유우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하이알드의 한 마디는 순식간에 세 사람의 분위기를 바닥까지 가라앉히고 말았다. 아마 세 사람 모두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 정도는 모두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었다.
결국 침울해진 분위기에 한동안 몸을 맡기고 있던 유우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꾸어 보려고 때마침 생각이 난 것이 있다는 듯 라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아피스트로님을 만나 뵈러 갔는데 못 만나 뵈었군. 라켄도 못 만나 뵈었던 거야?"
"아직도 신관들이 면회를 허락해 주지 않는 건가?"
사실 라켄도 단련의 홀로 오기 전에 기사의 관으로 귀환한 아피스트로가 쉬고 있는 방을 방문했었다. 그러나 고위 신관들이 아피스트로의 상태를 봐주고 있다며 지금은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말만을 듣고 별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물론 라켄도 아피스트로의 상태가 가볍지 않다는 것은 예측할 수 있었다. 이제껏 라켄은 아피스트로와 조우하기 위해 성기사단의 회의 장소인 '용맹의 홀'에서 성기사들 전원과 한참을 대기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기다리던 아피스트로는 오지 않고 피에르도가 와, 다른 성기사들 모두에게 아피스트로가 지금 신관들에 의해 건강 진단을 받고 있다고만 알려주었을 뿐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던 라켄은 그저 유우의 분위기를 바꾸려는 말에 호응해줄 생각으로 질문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유우의 대답은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고 말았다.
"아니, 대귀족님들께서 아피스트로님의 방을 방문하셔서 말이야."
유우는 '대귀족'이라는 단어에 특별히 힘을 주어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랬기에 비꼬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어 상당히 재미있는 말이 되었지만, 유우는 센스가 느껴지는 자신의 말에 만족해 할만한 기분은 생기지 않았다. 자신의 두 눈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하이알드의 모습이 비춰지기 시작하자 다른 생각은 일절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제 서야 유우는 자신의 한 말에 '아차! 실수'라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건 라켄의 책망 어린 눈빛을 받았을 때 더더욱 확신되는 사실이었다. 그와 동시였다. 유우가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하이알드는 유우와 라켄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도록 이를 갈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증오에 가득 찬 한마디였다.
"자문 위원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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