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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이렇습니다(고전15장 1-20)
성경본문:고린도전서15: 1-20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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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복음이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복음의 핵심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요?
오늘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이 없다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여러분은 ‘부활’을 이야기할 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몇 년 전 우리 교회 권사님의 남편인 임진택 성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돌아가시기 바로 며칠 전 병원으로 제가 심방을 갔는데, ‘성도’라는 말에서 감을 잡으셨겠지만, 권사님이 평생을 기도하셨지만, 2008년 6월에 병으로 누워서야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영접하셨던 분입니다.
당시 사랑 동산을 맡았던 홍성무 목사님이 세례를 베풀고 난 후, “아프시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세요.”라고 했는데, “하나님 아버지를 계속 불러도 아픈 것이 없어지지 않아요.”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찾아갔을 때는 의식도 또렷하시고 대답도 잘하셨습니다. 제가 시편 23편을 봉독한 후 함께 아멘을 하고 기도했지요. 그리고 돌아온 지 며칠이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장례식에서 제가 이런 설교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이 세상을 떠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고통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요한복음 14장 1~4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다는 약속을 믿기에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날 설교를 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생각할 때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예수 믿고 구원받고 죽은 것이 제일 현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구원을 받고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아마도 제가 확신하건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보지 못한 것을 가장 애석하게 생각할 것입니다.부활의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 내가 희생하는 것, 세상의 중요한 것, 귀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너무도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하지만 구원의 능력을 알고, 부활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잘 압니다.
오래전 CTS에서 만든 [회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Black Mountain이라는 곳에 나이 든 분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90을 훌쩍 넘기고 100세가 넘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분들이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고 삽니다. 한국인들이 아니라 수십 년 전 한국에 선교사로 와 평생을 헌신했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인터뷰 내용 중에 참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습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한국 전쟁 이후 먹을 것이 없어서 막대기를 먹은 사람을 수술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당시 우리 아이들이 2살이 되기 전 죽는 이유가 배 속의 기생충 때문이라고,한 아이를 수술했을 때 배 안에서 1천 마리가 넘는 기생충을 발견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어떤 분은 당시 나병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치료를 하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 인터뷰에서는 1895년부터 4대가 한국의 선교사로 살면서 헌신한 이야기를 하는 가정도 보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정신없는 삶을 살았을까요?
그들에게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생명을 전하려는 열정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겨워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나라에 왔던 것입니다. 얼마나 미련한 사람들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다 좋고, 봉사하신 것도 다 좋지만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만은 좀 빼놓았으면 좋겠다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이야기에 걸려서 예수를 믿기가 어렵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십니까?이 땅의 교회는, 복음의 역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셨던 것과 행하신 수많은 이적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같이 따라다니며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 도망갔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하셨습니까?
도덕적으로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하지만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서워서 도망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빼놓으면 병 고친 이야기도, 죽은 사람을 살린 이야기도, 예수님의 그 귀한 말씀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할 때 그들은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거리로 뛰쳐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예수님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빼고 믿읍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예수님은 알지만, 부활의 능력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알지만, 성경에 대한 다양한 지식은 있지만 정작 복음의 핵심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1990년도 중반에 미국에서 있었던 영적 대각성 운동 중의 하나가 ‘Promise Keepers’라는 남자들의 회개 운동입니다. 그 당시 대형 스타디움에 모였던 남자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던 찬양이 있습니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가지려 했던 세상 일들
이젠 모두다 해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다 버리네내
안에 가장 귀한 것 주님을 앎이라
모든 것 되시며 의와 기쁨 되신 주 사랑합니다
부활의 능력 체험하면서 주의 고난에 동참하고
주의 죽으심 본을 받아서 그의 생명에 참예하네
내 안에 가장 귀한 것 주님을 앎이라
모든 것 되시며 의와 기쁨 되신 주 사랑합니다
미국에 있는 대부분 사람이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삶에서 능력과 변화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본문 1절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사도 바울의 모든 설교와 가르침 사역은 ‘복음’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의 학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3~4절의 말씀입니다.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 바울은 자신이 듣고 경험하고 믿는 것을 전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더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배워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영접하므로, 부활의 주님을 믿으므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삶은 분명하게 이전과 이후가 구분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지요.
달라진 삶!
오늘 말씀의 주제가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은 부활의 주님이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되었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은 성경대로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먼저는 게바에게와 열두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복음을 전하는 이 순간에 대다수는 살아있습니다(5~6절).
그뿐만 아니라 야고보에게도 나타나셨으며 맨 나중에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신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만일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지난 새가족 애찬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했습니다.
어떤 이는 탄천을 걷다가 70문도 전도대가 대접하는 음료수를 마시고, 누가 주느냐고 물었습니다. 절대 빚지고 못 사는 성격에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민 가운데 교회를 배회하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이 교회 옆에서 자는 모습을 보고는 교회를 찾아왔고 그날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한 시간이나 울고 간 후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새가족들의 간증과 고백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개개인을 인격적으로 만나주셨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에게 그런 고백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지금 자신의 모습이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로 그런 놀라운 사실 앞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8~9절의 말씀을 보세요.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엑트로마티’라고 하는데, ‘혐오스러운 가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보면서 멋지게 뻗어난 가지도 보고, 이런 가지는 잘라버리는 게 낫겠다고 여기는 것도 있지요. 바로 “없었으면 좋겠다고 여겨지는 자”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인큐베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40주간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칠삭둥이나 팔삭둥이는 좀 부실했습니다. 늘 위태위태합니다. 허약하고 멍청하고. 근본적으로 시원치 않은 자라는 말이지요.
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고 있을까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같은 이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모습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던 현장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직접 전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들은 말을 전할 수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당시의 사도들에 비하면 그는 정말 모자라는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런 그가 사도가 되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목회자들에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목회를 배우고 자란 목사들은 이미 반은 따 놓고 들어갑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목회가 어떤 것인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씀을 듣고 자라난 아이들에게 그 신앙의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마음의 뜨거움은 있지만, 말씀대로 서지 못하고 때때로 자신의 성질에 못 이겨 씩씩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바로 사도 바울이 그렇지요.
로마서 7장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민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로마서 7장 24절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언제부터인가, 아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잘나서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의 은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 주시지 않았다면 내가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 자가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고민하고 늘 조심합니다. 이것은 걱정과 근심 가운데 산다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민 가운데서 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도 바울은 또 자신을 가리켜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사도 바울이 가진 영향력이 언제부터인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작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은혜롭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이 교회는 참 은혜로워요!이 가정은 참 은혜로워요!
언제 이런 말이 가능할까요? 절대로 잘난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은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못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주장이 죽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에 회의를 시작했답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에 떡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려 떡을 하기로 하고 난 다음 다시 회의를 시작합니다.
무슨 떡을 할 것이냐, 인절미, 시루떡, 백설기, 절편, 그리고 이것을 결정하는데 또 몇 시간이 걸렸습니다. 자기주장을 접지 않는 한 절대 은혜롭지 않습니다.
내가 이 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내 생각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작은 자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말을 존중하며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은혜를 체험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지요?
클린턴 대통령과 힐러리가 차를 타고 가다가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기름을 넣어주는 사람이 힐러리의 옛적 친구입니다.
기름을 넣고 운전하면서 클린턴이 힐러리에게 말합니다.
“여보, 시집 잘 왔지? 저 남자랑 살았다면 지금 주유소에서 기름이나 넣는 사람의 마누라가 되었을 것이 아니요?”
그러자 힐러리가 말하지요.
“아니요, 내가 저 사람하고 결혼했다면 저 사람이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겠지요.”
그래, 서로 잘났다고 하는데 어떻게 평화와 감사와 기쁨이 존재하겠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늘 숨기고 싶은 상처가 있었다면 바로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스데반이 돌로 맞아 죽던 현장에 있었던 사실,그리고 그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던 때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가던 도중에 만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구원의 주님을 전하면서도 그의 과거는 늘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이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요.
언젠가 신문에서 “고문 경감 이근안 목사 안수받다.”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통신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간증하러 다녔고, 이제는 목사 안수를 받고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간증을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조선일보에 그가 어떤 교회에서 간증하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스스로 그 시대에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었노라고,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면서 간증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만났는지 어쨌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자신이 잘못했던 과거에 대하여 변명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과거를 껴안으시고 품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주장한다면 과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속에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자신을 변명할 때가 아니라 자신의 추함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 때 말입니다.
놀라운 일은 그렇게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고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해도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간증’이란 과거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인정하며 부끄러워하지 않는 은혜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을 가진 변화된 사람의 모습이지요.
그래서 자신이 “사도라 칭함을 받는 것이 감당치 못할 은혜”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은혜가 존재하겠습니까?
자격이 없지만 세워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감격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이 감격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있음이 은혜로 고백 되어 눈물을 흘려 보셨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해 보았습니까?
오늘 이 모든 것의 출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까?
전병욱 목사가 쓴 [자신감]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복을 받더라도 출처가 확실한 복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야 한다. 출처가 확실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금방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아는가?
고작 기도 몇 마디만 하고 나서 얻게 되면, 그것을 기도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행수나 자기의 능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허니문 베이비’로 자녀를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녀를 주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에 결혼해서 5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다가, 특별새벽기도회에 해마다 나와 간절히 기도하고 안수기도도 다섯 번 받고 난 다음에 아이가 생긴 사람이라면 이렇게 고백한다.
“이 아이는 하나님이 주신 자녀입니다!”
나는 그런 부부들의 고백을 듣고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응답을 유보하실 때가 많은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일상적인 일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느끼는 것은 복되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다 좋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무엇이든 얻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만큼 어리석은 인생이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출처가 불확실한 복은 복이 아니다. 복의 출처가 하나님인지 다른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누가 왜 주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이런 광고가 있다고 하자.
“월수입 1천만 원 보장. 숙식과 승용차 제고. 용모 단정한 20대 초반의 아가씨 구함.”
무엇을 하는 일인지 벌써 예상이 되지 않는가?
무엇 때문에 20대 초반의 여자에게 월수입 1천만 원을 보장해 주고 자동차를 주겠는가?
뻔한 일 아닌가. 이런 돈은 바라면 안 된다. 누가 주는 것인지 그 출처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실한 구원,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세상에는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 지식과 상식과 이성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시라도 빨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해야 한다.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런 멋진 글을 썼던 전병욱 목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끄러운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전병욱 목사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들렸을 때, 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쓰실 것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론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지만,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다고 너무 당당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다시 사용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쉽게 당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지금의 바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던 자신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고, 자신의 학식과 가문을 자랑하던 사람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로마에 가면 구석진 곳에 사도 바울이 순교한 장소가 있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그가 순교 당하던 장면을 그림으로 그대로 그려 놓고 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목을 도마에 대고 하늘을 보고 누었습니다. 그리고는 도끼로 내리찍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머리가 세 번 굴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샘이 솟았는데 지금도 그 샘의 흔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0절에,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의 ‘카리스’라는 말인데 ‘감격과 기쁨’이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은혜는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바로 이 부활의 능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위대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렇게 나오게 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내가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그 순간부터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지고, 그 분명한 이유로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이 당해보지 않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변절자가 되었고, 초대교회에서는 아직도 박해자라는 오명을 쓰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전15:10)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그의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나는 부정해도 은혜로 있는 나, 은혜로 살아온 나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삭 되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였고,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사역하며 무서워했으며 떨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용기를 얻고,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얻었으며 권능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옥에 갇혀 있을 때, 찬송하며 기도할 때,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으며, 그가 가는 곳에 손수건만 얹어도 낫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살아왔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2006년 5월 가정의 달에 특집으로 MBC 휴먼다큐 “사랑”이라는 코너에서 [너는 내 운명]이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만남이 방영되었습니다.
한 여대생이 졸업 후 교대에 진학하기 위해 대형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운명처럼 9살 많은 별 볼 일 없는 노총각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생선 판매 관리를 하던 노총각은 염치불구하고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나눈 지 2년, 거대한 장벽이 그들을 가로막았습니다.
여자가 간암 말기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죽음을 향해 가는 그녀를 위해 남자는 결혼식을 준비하고, 아예 신혼살림을 병실에 차립니다. 혹시 그녀가 찾을까 봐 장모님이 병실에 계셔도 차 안에서 잠을 청하며 ‘1분 대기조’처럼 삽니다.
양가 모두 남자의 앞날을 위해 결혼식을 극구 말리지만, 여인을 향한 사랑으로 남자는 결혼을 강행합니다. 하지만 이 운명 같은 사랑을 받은 여인은 안타깝게도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면 내 생이 짧다 하더라도
남들보다 더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내 생애가 자기로 인해 전혀 초라하지 않고 아름다울 수 있었다고,
당신이 아니었다면 볼품없이 사라졌을 꽃동이가
당신으로 인해 꽃이 피고 아름다워질 수 있었다고.
고마워요,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내가 되면 좋겠어요.
사랑해요.
그렇습니다.
자격 없는 나, 부족한 나를 위해 한없는 사랑으로 붙잡아 주시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에 겨워,그 놀라운 은혜 때문에 여러분은 어떤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능력 있는 삶으로 변하셨습니까?
아니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능력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부족한 나의 모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하시는 모든 분을 이 시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