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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윤리는 ‘바른 예의를 갖추고 거짓말과 거짓행위를 하지 않고 사리분별하며 공사구별을 잘 하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이다’라고 평가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정말 올바른 인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평가받으려면 그렇게 예의범절, 윤리도덕, 공사구별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다운 인생을 살아가려면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고 내적인 부분부터 제대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20세기 초 공산주의가 발생하고 공산화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국가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할 때 런던의 유명한 하이드 공원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공산주의 선전가가 남루한 청년을 지적하면서 “우리 공산주의는 저 사람에게 새 옷을 입혀주고 풍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한 사람이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저 남루한 옷 속에 변화된 새 인간을 넣어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학에 기초한 이념, 윤리, 경제, 문화 등은 조직을 변화시키고 외적인 모습을 변화시키겠지만 인간의 근본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인간의 변화를 통해 참 인간성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내적 변화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인간적 신앙을 통해 뭔가 해보려고 했던 사람들이 실패한 신앙을 경험하며 결국 파멸의 길로 빠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속 대제사장들과 백성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스스로 자기 방식의 문제해결을 시도했고 그런 문제해결 방식으로 말미암아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반복해서 경고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인간적 신앙 열심으로 살아갈 때 잘못된 신앙에 빠지고 결국 물거품만 남는 신앙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들의 잘못된 선택이 결국은 그들의 삶을 실패자로 만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이제 우리는 인간적 신앙노력이 아닌 참 신앙적인 결단으로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 복된 신앙인의 삶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적 신앙해결책으로 인한 실패자, 첫째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입니다.
마태복음 27장 1, 2절을 보시겠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이 본문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의논하고 결국 유대 총독 빌라도 앞에 예수님을 데려가 심문을 받도록 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새벽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로이’는 이른 아침, 즉 성경에 쓰인 또 다른 단어 ‘미명’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유대인의 모든 공식적인 모임은 해가 뜬 후 시작해 해가 지면 폐회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아직 해가 뜨기도 전 새벽시간에 총독 빌라도까지 동원해서 일사천리로 하루만에 재판과 집행을 진행하려는 의도는 정말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다음날이 안식일이었기에 단 하루남은 시간에 재판과 집행을 다 끝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관례상 사형판결이후 심리를 거쳐 하루의 시간이 경과해야 한다는 통념마저도 외면하며 일사천리로 재판과 집행을 진행하려고 하려고 신속히 행동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은 법적으로 어떤 죄인이라도 정죄하거나 처벌할 권한이 없기에 총독의 권력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의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 최종적인 사형판결과 사형집행은 오직 로마 총독만이 할 수 있었기에 신속히 로마총독을 찾아가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너무나 신속하게 너무나 일사천리로 재판과 집행을 시행하려는 의도속에 이들의 다급함이 느껴집니다. 이들은 ‘예수님만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그 계획대로 행하면 그들이 원하는 일이 이뤄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신속하게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대제사장, 백성의 장로들은 절대 하나님의 뜻이 뭔지도 모르면서 자기의 신앙적 신념, 자신의 신앙적 열정과 그들이 생각하는 신앙생활의 방식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잘못되었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판단한대로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단정짓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신앙생활이 옳고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누가복음 10장 40~42절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을 찾아 오셨을 때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청소하고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며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잘 대접해 드리는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혼자 이 일을 감당할 시간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가만히 앉아서 예수님과 이야기하며 예수님과의 교제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근황에 대해 얘기하며 예수님에게 자신의 힘든 것을 알려 드리고 예수님과 함께 시간보내는 것이 좋았던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던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리아와 그만 이야기 나누시고 마리아에게 저를 좀 도와주라고 이야기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이런 요청은 예수님의 책망으로 돌아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 기준으로 “이것이 더 예수님을 잘 섬기는 일이다”라고 판단하지 않습니까? 내 기준으로 나는 신앙생활 잘 하는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신앙생활하지라고 판단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하는 일 중 누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사람들 대부분은 ‘마리아’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마리아’나 ‘마르다’나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행위는 다 잘하고 있습니다. 그럼 마르다가 책망받은 이유는 뭔가요?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은 제대로 하고 마리아는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마르다가 스스로 열심히 준비하며 기쁜 마음으로 천천히 그 일을 했다면 책망받을 일이 없었는데 마리아와 비교하며 마리아와 자신이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잘못된 신앙으로 빠진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만약 마리아가 예수님께 “예수님, 지금 중요한 일은 예수님과 대화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한데 마르다 언니는 식사준비와 청소하는 일등 집안일에 너무 분주해요. 언니에게 여기 와서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해주세요.”라고 요청했다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을까요? 저는 만약 마리아가 그렇게 요청했다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도 책망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본문에 보듯이 예수님께서 마르다가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셨든지 마르다의 그 일에 대해 책망하신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염려와 근심, 걱정, 분주한 마음과 비교하는 행위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 서로 잘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결국 자신의 기준으로 ‘이것이 더 좋은 일이다’. ‘내가 바른 신앙이다’라고 판단하며 동생 마리아를 잘못된 신앙인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대제사장과 장로들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종교적 열정으로 자신의 신앙방식을 고집했습니다. 이런 신앙이 왜 위험할까요? 이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이익을 앞세웠습니다. 이들은 종교지도자, 유대사회지도자로서 하나님 말씀을 지킬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씀을 곡해하며 세상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신앙이라고 포장하며 자신의 권력에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을 이용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자기 방식대로 말씀을 왜곡하며 말씀을 이용해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지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신념으로 말씀을 곡해하며 내 이익을 위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며 내 기준에 좋은 말씀, 내 기준에 부담이 되지 않는 말씀만 좋아하지 않습니까? 말씀으로 나 자신을 비춰보는 것이 아니라 부담되는 말씀은 배제하고 내 이익이 되는 말씀만 받아들이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내 자신을 내려놓고 내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고 제대로 이해하고 말씀대로 살아가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적 신앙해결책으로 인한 실패자, 둘째로 가룟 유다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5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오늘 본문을 보면 가룟 유다가 배신을 후회하며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는 듯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스스로 뉘우쳐”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뉘우쳤다’라는 말은 ‘회개했다’라는 뜻이 아니냐?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뉘우쳐’라고 번역된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메타멜레데이스’입니다. 이 단어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며 괴로워하며 후회하는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정작 성경에서 ‘회개’라는 번역으로 표현하는 헬라어 단어는 ‘메타노이아’인데 이 ‘메타노니아’는 뉘우칠 뿐만 아니라 다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메타멜레데이스’와 ‘메타노이아’의 차이처럼 가룟 유다는 마음에 ‘후회의 감정만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의 동요만을 일으키는 ‘뉘우침’이나 ‘후회의 감정’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다운 회개가 아닙니다. 그가 참다운 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후회’ 이후 그가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 했던 행동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는 철저히 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의 죄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고 죄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자살을 택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유다를 예수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희생된 존재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유다의 배신만 예언되었지 유다의 죽음까지 결정된 것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우리는 모두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를 자책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가룟유다도 의롭게 살기 위한 자신의 노력과 괴리된 죄로 인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난 소망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며 자신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7장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재판받는 상황을 직면하고 나서야 죄책감을 느끼며 예수님을 팔아넘긴 댓가로 받은 은 삼 십을 돌려주기 위해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그 돈을 받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돌려줘야 자신의 죄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 집 뜰 안쪽에 던져 넣습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죄가 갚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도 마음이 편치 않고 죄책감이 자신을 억누르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목매어 죽는 선택을 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죄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죄책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입니다. 많은 경우 죄책감이 생겼을 때 아름다운 음악을 듣든지 산책하는 등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죄책감을 없애려 합니다. 스스로의 방식으로 죄에 대한 책임을 다 갚은 것처럼 위장하며 이제 스스로 죄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포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룟 유다의 죄해결 방식처럼 우리가 우리의 죄를 갚으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의를 강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죄에 대한 빚을 갚았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의인이 된 것처럼 말하며 위장된 평화, 외장된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자살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통해 사람들은 종종 그런 결단에 대해 박수쳐 주며 그래 그래도 양심은 있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행위가 그들의 죄를 용서받게 만드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제가 볼 때는 그들이 그런 행위를 하게 된 이유가 자존심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지었는데 그런 죄인으로 살아가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이 두렵고 죄인이기에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에게 굽신거리며 굴복하기 싫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가룟 유다도 자존심으로 살아왔던 인생, 자존심을 내려놓기 싫어서 목숨을 버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예수님의 아래에서 예수님께 용서를 빌고 예수님을 위해 이제 자신은 죽고 예수님을 살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 싫어서 자살을 택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참된 회개’란 ‘죄에 대하여 심각한 아픔을 느끼는 것과 함께 죄를 짓게 한 그 죄의 본류에서 떠나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죄의 본류에 그대로 남아있는 채 적당히 회개하는 흉내만 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적당히 포장하여 알리고는 자기는 여전히 죄의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위장된 회개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요한일서 1장 9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성경적 회개는 ‘내가 어떻게 죄를 해결하지?’라고 생각하고 판단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가 하나님께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했지만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내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죄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죄를 떠나려는 간절함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진짜 죄를 미워하고 죄를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 있느냐입니다. 그 간절함이 없다면 이것은 마치 장례식장에 가서 우는 시늉만 하고 진정 슬픈 마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적당히 뉘우침이나 후회 정도로 넘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죄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고쳐주실 것입니다. 진정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에 대하여 마음 속 깊은 통증을 느끼며 정말 슬픈 눈물을 흘리며 진정한 회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적 신앙해결책으로 인한 실패자, 셋째는 유대 백성들입니다.
마태복음 27장 2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오늘 본문의 주제에 맞춰 말씀을 살펴볼 때 꼭 들어가야 할 중요한 신앙문제 해결의 실패자로 유대 백성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신앙적 신념과 가치관이 확고하여 성경 말씀보다 그들이 가진 성경지식이 우선이었고 성경말씀의 본질보다 적극적 종교생활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지닌 전통적 신앙에 큰 영향을 받아 말씀의 의미보다 종교적 행위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여러 행동과 여러 활동적 모습을 통해 신앙을 보여 주고 그것이 자신의 신앙수준임을 나타냈습니다. 그런 신앙은 성경의 참 의미를 깨달으려는 여지를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행동중심, 활동위주의 신앙으로 살았던 유대교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색깔과 맞지 않은 메시아를 거부하고 죽였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살인자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선동할 때 거의 모든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라고 외쳤습니다. 이들은 돈, 명예, 권력, 세속적 종교가치관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21장 8, 9절을 보시겠습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할 때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이 일은 오늘 예수님의 재판이 있던 날로부터 불과 며칠 전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이 기대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하며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로마를 무너뜨릴 통치자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치적 메시아이시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원과 천국, 사랑과 용서를 선포하시며 온 인류가 하나된 하나님 백성되기를 외쳤고 이 내용은 유대인들이 원하는 내용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영적 메시아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자기 방식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기대, 자신의 욕망을 더 먼저 내세웁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제사장들이 선동하자 무작정 무자비한 살인자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하며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칩니다. 이들은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감정과 분위기에 휩쓸려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세상적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움직이며 진리를 외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실망하고 불평하지 않습니까? 감정적인 신앙방식, 뭔가 어떤 느낌을 중요시한 신앙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의도하는 대로 뭔가 되어야 하나님의 역사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내 기대와 달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고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히 이뤄지고 항상 옳은 것이다라고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 사람들의 죄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의를 내세우며 나름 자신의 신앙적 판단, 자신의 신앙적 행위가 옳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율법적 신앙생활과 전통에 매인 자기 방식의 신앙으로 살다가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의 신앙 방식대로 살며 죄를 지었고 결국 죄책감으로 인해 절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잘못된 판단을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잘못된 신앙기준에 오염되어 살면서 결국 참된 구원을 놓쳤고 메시아를 버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혹 지금 내 방식의 신앙생활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내 욕심, 내 계획, 내 기대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지 않거나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특히 오늘 본문에서 가룟 유다의 회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회개는 참 회개가 아니라 뉘우침, 후회라는 수준에서 멈췄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주님 앞에 그 죄를 고백한 후에 이제 그 죄를 떠나 주님 말씀대로 살게 해 줄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고 또 구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신실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참 회개입니다. 참 회개가 있어야 죄사함을 얻고 천국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완전한 회개를 얻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방식은 완전하고 하나님의 방식은 절대 선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 구원을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 앞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방법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의의 길로 선한 길로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문제, 저와 여러분은 생활의 문제, 저와 여러분은 앞 일에 대한 모든 문제까지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해결함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