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암(曠菴)이벽(李蘗)덕조(德操),
이칭 - 덕조(德操), 광암(曠菴)
분야 - 조선시대사
시대 - 조선
성격 - 학자, 종교인
성별 - 남
출생일 - 1754년(영조 30)
사망일 - 1785년(정조 9)
본관 - 경주(慶州)
정의
조선후기 『성교요지』를 저술한 학자. 종교인.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 세례명은 세자요한. 세거지인 경기도 포천 출신. 무반으로 이름 높은 가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부만(李溥萬)이다. 정약현(丁若鉉)의 처남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k03Nwjmh6s
이벽 성조님의 유해 발굴을 지켜 보는 참관자들의 표정들
(앞에 앉으신 김 남수 주교님과 바로 뒤에 길 홍균 신부님)
사진촬영은 전부 양방수 촬영한 것이다.
記錄 映畵를 製作하는 梁芳秀 美州放送人 協會 總務局長이 그때 當時에 證言者다. 右側이 梁芳秀.
1979년 己未年(기미년) 6월 24일 세자요한 축일날, 이벽 성조님의 천묘식 날은 비가 왔다. 雨中에도 비를 맞아가며 역사를 남기는 일에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싶었으나, 기록 시간은 제한을 두어 난처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지금 같아서는 DVD로 시간 제한 없이 많은 자료를 남길수가 있지만 그 당시는 영화 촬영과 녹음에만 의존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영화 필림 현상도 일본 동양현상소나 미국의 kodak 현상소에 의존해야만 했다. 우중에도 노기남 대주교님께서도 참석해 주셨고, 변 기영 신부님 옆에 김 남수 주교님께서 화관예절을 하시고, 그 옆에 서서 우산을 바치고 촬영하는 筆者의 사진은 누가 촬영을 해 주었는지 밝히지 못했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 학자의 일원이었으며,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승훈(李承薰)·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등과 깊은 교우 관계를 맺었다. 무반으로 출세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소원을 뿌리쳤으며, 문신으로도 진출하지 않은 채 포의서생(布衣書生)으로 생애를 마쳤다.
이른 시기부터 조선 후기 주자학의 모순과 당시의 유교적 지도 이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아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사신들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西學書)를 열독하였다.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과 중국의 실학자 서광계(徐光啓)·이지조(李之藻) 등이 저술한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들은 천주교의 교리·신심·철학·전례와 아울러 서구의 과학·천문·지리 등의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벽은 이러한 서적들을 치밀히 연구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철신·정약전(丁若銓) 등 기호 지방의 남인 학자들이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실학적인 인식을 깊이 하고 새로운 윤리관을 모색하려는 목적으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다.
이 때 이벽이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 학자들에게 전하여, 후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 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784년 이승훈의 부친이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게 되었을 때, 이승훈을 함께 보내 세례를 받아올 것을 부탁하고 그 절차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오자, 다시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벽은 서울 수표교(水標橋)에 집을 마련해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교분이 두터운 양반 학자와 인척들 및 중인 계층의 인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천주교를 전교하였다.
이 때 세례받은 사람들이 권철신·권일신·정약전·정약종·정약용·이윤하(李潤夏) 등 남인 양반 학자들과 중인 김범우(金範禹) 등이었다.
그 뒤 천주교의 의식이나 전교를 위해 교단조직과 교직자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껴, 다른 신자들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교단 조직인 이른바 ‘가성직자계급(假聖職者階級)’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교단 조직은 자발적으로 수용된 한국 천주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벽은 이 교단 조직의 지도자로서 집에서 포교(布敎)·강학(講學)·독서·사법(師法) 등의 천주교 전례의식(典禮儀式)을 주도했으며, 새로 입교한 남인 학자들은 모두 이벽의 제자로 칭하였다.
1785년 봄에는 장례원 앞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사대부·중인 수십 명이 모인 가운데 ‘설법교회(說法敎誨)’하는 모임을 매우 엄격하게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 모임은 그 해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세상에 드러나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며, 성균관 유생들의 척사 운동으로 일단 해산되었다. 그 뒤 천주교 신앙에 대한 아버지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아, 당시 사회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효정신(孝精神)의 윤리관과 새로운 진리로 체득한 천주교 사상 중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심각한 갈등 속에서 고뇌하다가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
이벽의 말년의 신앙에 대해 달레(Dallet, C. C.)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배교로 단정하였다. 그러나 효를 절대적인 이념으로 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그렇게 단순히 처리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성교요지(聖敎要旨)』가 유일한 이벽의 저작으로 전한다. 전반부의 내용은 신구약성서를 중심으로 한 한시로, 기독교성서의 이해와 복음정신의 사회화인 구세관(救世觀)을 표현하였다. 후반부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사회정의론(社會正義論)이라 할 수 있는 정도관(正道觀)을 서술한 것으로서, 저자의 성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의 자발적인 천주교 수용이 성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벽은 기독교사상과 동양유학사상이 결합된 윤리와 규범을 제시했으며, 그것은 후일 한국 천주교가 유례없는 대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참고문헌
『조선후기 유학과 천주교의 대립』(Donald Baker 저,김세윤 역,일조각,1997)
『광암이벽의 서학사상』(김옥희,가톨릭출판사,1979)
Histoire de ㅣ‘Eglise de Coree(C. H. Dallet,Tome Ⅰ,1874)
관련항목
이벽 [李檗] (1754∼1786).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인 이벽은 경주 이(李)씨 부만(溥萬)의 둘째 아들로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덕조(德操), 혹은 벽(蘗)이라고도 하며, 호는 광암(曠菴), 세례명은 세자 요한이다. 건장한 신체에 무술에도 능했으며, 경서(經書)에 전통하고 언변도 좋아 물 흐르듯 했다고 한다. 아버지 부만은 이벽이 무관으로 출세하길 바랐으나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벽(僻)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1년) 권철신(權哲身) · 정약전(丁若銓) 등과 함께 강학에 참가하여 하늘, 세상, 인성(人性)에 대해 토론하였고 옛 성현들의 윤리서(倫理書) 등을 함께 검토함과 아울러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한역판(漢譯版) 철학, 수학, 종교서적 등을 공부하였다. 이벽은 이 때 초보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천주교 교리 연구에 전념하였다. 1783년 정약전 · 약종 형제들과 함께 하느님의 존재와 그 유일성, 천지창조, 영혼의 신령성(神靈性)과 불면성, 후세에서의 상선벌악(賞善罰惡) 등의 철학적 논제(論題)에 대해 토론하였다. 초보적인 지식 속에서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던 이벽은 1783년 겨울 이승훈이 북경사절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훈에게 찾아가 천주교에 대해 소개하고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도 받아서 돌아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구해 오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북경에서 그라몽(Grammont, 梁東材)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은 이승훈이 1784년 천주실의, 기하원본과 같은 서학서적, 상본, 망원경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이것을 받아든 이벽은 외딴 집을 세내어 천주교 교리연구와 묵상에 몰두하였다.
이를 통해 이벽은 종교의 진리에 대해 더욱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고, 중국과 조선의 미신에 대해 철저히 반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칠성사와 연중기도, 성인의 행적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도 연구하였다. 이벽은 드디어 1784년 음력 9월경 수표교(水標橋)에 있던 자기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복음의 전파에 나섰다.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종교(金宗敎), 김범우(金範禹), 지황(池璜) 등의 중인계급과 마현의 정약전 · 약용 형제,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 등의 양반계층에도 복음을 전파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유림(儒林)은 천주교 교리가 국가의 지도이념인 성리학적 윤리체제를 송두리째 파괴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중 이가환(李家煥)은 “서교(西敎)가 비록 명설(明說)이긴 하지만 정학(正學)은 아니다”고 하면서 이벽을 토론으로써 설득하려 했으나 이벽의 정치한 논리와 장하(長河) 같은 웅변에 오히려 설득당했다 한다. 이기양(李基讓)도 이벽과 토론했으나 이벽이 세상의 기원, 우주의 질서, 하느님의 섭리, 영혼의 본성, 후세의 상벌과 조화에 대해 설명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로부터 1년 후인 1785년 중인 김범우가 형조에 잡혀가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단양(丹陽)으로 귀양가는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화로 평소 천주교에 대해 못 마땅하게 생각하던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태학생(太學生) 정숙(鄭淑)은 천주교 신자들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통문(通文)을 돌려 천주교인들과는 완전히 절교하라고 권고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기 집안에 불행을 가지고 올지도 모를 이 종교를 버리게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썼다. 이벽의 아버지도 이벽을 배교시키기 위해 나섰다. 그는 성질이 급한 사람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벽의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배교만을 강요하였다. 이벽이 말을 듣지 않자 그는 목을 매어 자살하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이벽은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을 써서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고 그 후로는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그는 자신의 배교적(背敎的) 행위에 대하여 무서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다가 1786년 33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교회사적으로 보아 이 벽은 조선 천주교 창설의 선구자로 위치 지을 수 있다. 물론 이벽 이전에도 천주교에 접한 사람은 많았다. 조선 후기 사회적인 모순이 누적되면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불과한 주자학에 대해 심한 반발을 느낀 많은 학자들이 서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성호 이익(李瀷)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학자들은 서학의 과학기술을 유용한 학문으로 받아들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만은 이단시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학을 학문으로써 뿐만이 아니라 종교로서 받아들인 이벽, 이승훈, 정약전 · 약종 형제, 권철신 · 일신 형제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 천주교 창설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사람이 이벽이다. 그는 1777년 이래 주어사, 천진암에서 있었던 수사학(洙泗學)적 분위기의 강학을 그리스도교 진리 탐구와 실천적인 분위기로 바꿨고, 이승훈에게 천주교를 소개하여 중국에 가 영세를 받게 함으로써 1784년 많은 조선인 신자 공동체를 이룩하게 하였다. 한국 천주교가 이 해를 천주교 창설의 원년으로 삼아 기념하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이벽의 선구자적 역할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달리 짧았던 생애와 박해로 인한 유작(遺作)의 부족으로 이벽의 사상을 자세하게 알기가 어렵다. 이벽의 작품으로 주장되는 것은 ≪만천유고≫(蔓川遺稿) 속에 수록되어 있는 <천주 공경가>(天主恭敬歌), <성교요지>(聖敎要旨)에 불과하나, 이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와 사료 비판이 계속 요청되고 있다. 이와 아울러 정약용의 ≪중용강의≫(中庸講義) 세주(細註)에 언급된 단편적인 사실들을 통하여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벽의 서학사상도 다른 남인신서파(南人信西派)와 같이 전통적인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경서(經書)에도 박학다식했던 이벽은 주자학을 선유(先儒)들의 사상에 비춰 비판하면서 진유사상(眞儒思想)인 수사학적인 사상체계에 도달하였고,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補儒論)을 흡수하여 그의 그리스도교 사상이 싹틀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보유론은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에서 주장한 것으로 중국의 근세사상계에 큰 파문을 던진 것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 남인신서파의 복고주의적인 사상체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벽은 ≪천주실의≫와 함께 ≪칠극≫(七克), ≪영언여작≫(靈言蠡勺),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을 접하면서 신의 존재, 원죄, 영혼불멸, 사후(死後)의 세계, 서양의 신학에 대한 이해 등의 사상 폭을 넓히고 깊게 하였다. 이로써 이벽은 유교사상과 천주교 사상을 접맥시켜 한국의 천주교가 꽃필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인물로 기록될 수 있게 된다. 이벽의 사상체계와 지식은 정약용에게 전달, 수용되었다.
[참고문헌] 홍이섭, 이벽-한국 근세사상상의 그 위치, 사회과학연구회, 사회과학, 3권, 한국교회사연구논문선집 I에 재수록, 1960 / 홍이섭, 서학사상상의 이벽, 한국사의 방법, 탐구당, 1968 / 샤를르 달레 原著,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분도출판사, 1979 / 김옥희,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가톨릭출판사, 1979 /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李檗] 이벽(호는 曠菴)은 한국 교회 창설의 선구자로 1754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777년 권철신, 정약전 등과 함께 천진암(天眞菴)에서 강학(講學)의 분위기를 그리스도의 진리 탐구 쪽으로 바꾸었다. 그는 강학에 참가하여, 하늘, 세상, 인생 문제를 연구하고, 윤리서, 종교 서적을 공부하였다.
그 후 1783년에는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함께 하느님에 대한 철학적 논제에 대하여 토론하기 시작하였고, 이승훈으로 하여금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였으며, 이듬해(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자 본격적으로 교리 연구에 들어갔다.
그해 이벽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최창현, 최인길, 김범우 등의 중인 계급들과 복음 전파에 나섰다. 그러나 유림들은 교리가 국가의 지도 이념인 성리학적인 윤리 체계를 파괴한다고 반기를 들었다.
결국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김범우가 형조에 끌려가 배교를 강요당하였고, 이벽의 부친 이부만도 이벽에게 배교를 강요하였으며, 아들이 말을 듣지 않자 자살을 시도하였다. 이에 이벽은 하는 수 없이 신앙을 감추었고, 1786년 33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교와 천주교 사상을 접목시켜 조선 천주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 ‘이벽 생가’ 성지로 만든다.
유교 사상이 뿌리깊게 자리 잡았던 조선(정조 8년)후기, 천주교회 창립주역이였던 광암(曠菴) 이벽의 출생지였던 생가였던 포천시 화현면 일원에 천주교 성지가 조성 된다.
유교 사상이 뿌리깊게 자리 잡았던 조선(정조 8년)후기, 천주교회창립 주역이였던 광암(曠菴) 이벽의 출생지였던 생가였던 포천시 화현면 일원에 천주교 성지가 조성 된다.
지금으로 부터 230여년 전이였던 1784년 당시 실학자이자 한국 천주교가 유일하게 자생할 수 있었던 토대를 만들었던 광암 이벽은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543-1번지에서 부친 이부만씨의 자녀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광암 이벽은 조선시대였던 1779년 당시 천진암에서 열린 강학회에 참여, 실학과 서학 위주의 학문 모임을 갖으면서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신앙인으로 변화되는 일대 계기를 만든 주역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이벽은 조선후기 당시 서울 수표교 자신의 집을 거점으로 교리를 연구하는 등 이에 따른 천주교 전파를 해 왔으며, 1784년 당시 이승훈을 통해 이벽, 권일신, 정약용 등이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음으로서 한국 천주교 창시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사진은 대한민국 천주교창시자 광암 이벽 선생. (사진제공=포천시청)
광암이벽 조감도. (사진제공=포천시청)
경주 이씨인 광암 이벽은 1754년 포천 화현에서 출생한 후, 유교사상으로 닫혀 있던 조선 후기 당시, 자생적 천주교 신앙을 싹틔웠으나, 을사추조적발 사건으로 시작된 당시 시대의 탄압과 엄중한 이씨 집안의 문중 반대속에서 효와 교리에 대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벽은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1785년 서울 명례방(현재 명동성당) 김범우씨 집에서 예배 중, 형조에 의해 가택 감금돼 32세(정조9년 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광암 이벽 선생의 출생지가 확인된 것은 지난 1978년 11월, 경기도 광주면 목리 나무골 이준희 가택에서 경주이씨 족보가 발견되면서 포천 화현리에서 출생된 것을 오기선 신부와 박희봉 신부, 류홍렬 박사, 이원호 교수 등이 확인할 수 있었으며, 1979년 4월 10일 화현면 화현3리 산 289번지에서 이벽 선생의 묘 발굴과 함께 지석을 확인됐다.
이에 포천시는 이벽 선생의 생가터 주변을 천주교 성지로 조성하기 위해 지난 2009년 12월 4일 대진대학교에서 이벽 선생 학술심포지엄 개최 등 유적지 정비사업조성에 따른 기본설계와 실시계획를 통해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포천시는 이러한 이벽 선생의 생가인 화현면 화현3리 542-22번지 일대를 천주교 성지로 조성하기 위해 매입한 8336㎡의 부지와 춘천교구 소유부지 7402㎡ 등 연면적 2만1287㎡의 부지에 사업비 50억 원(도비 33억 원, 시비 17억 원)을 들여 한옥형태의 생가터(25.2㎡), 기념관(82㎡), 묘역 정비, 화장실(48.96㎡), 야외공연장 및 편의시설 등 건축 연면적 350,50㎡를 오는 12월 말 준공 목표로 현재 약 55%의 공정률을 보이고 잇다.
한편 포천시 관계자는 “이 지역이 천주교 성지로 조성을 마무리 하게 되면, 전국 천주교 주요 성지 29곳 중, 한곳이 될 것”이라고 밝힌 가운데 “현재 약 530여만 명의 천주교 신자들 중, 년 간 20만여 명 이상의 신자들이 이곳을 방문할 것으로 예상돼 향후 지역경제 활성화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기대했다.
계속 이어집니다.
|
첫댓글 이승철 ~ 일 2020-08-23 오전 2:26
처음 듣는 인물입니다.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세상
2011.07.11 11:50 신고
1980년대 초에 한참 젊으신 연세에 천진암 행사에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시기 위하여 부철주야 봉사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열정과 역사 의식을 갖고 계심을 보고 지금 사료를 보니 대단하신 정열이 아니면 이렇게 기록으로 남길 수 없음을 느낄진데 ... 참으로 주님께서 훌륭하신 신부님을 당신 일꾼으로 선택하심과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일꾼을 뽑으신 섭리에 감탄할 뿐입니다. 먼 (훗)날 소중한 역사의 자료들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수고하셨구요 (~)(~)(~)
아름다운 세상
2011.07.11 11:50 신고
1980년대 초에 한참 젊으신 연세에 천진암 행사에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시기 위하여 부철주야 봉사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열정과 역사 의식을 갖고 계심을 보고 지금 사료를 보니 대단하신 정열이 아니면 이렇게 기록으로 남길 수 없음을 느낄진데 ... 참으로 주님께서 훌륭하신 신부님을 당신 일꾼으로 선택하심과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일꾼을 뽑으신 섭리에 감탄할 뿐입니다. 먼 (훗)날 소중한 역사의 자료들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수고하셨구요 (~)(~)(~)
bangyang
2015.11.27 02:52
배경준(다두)씨 참 ~오랜만에 여기서 보게 되니 새삼 감회가 깊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소원 성취 하시길 기원합니다. 연락이 안되어 여기에서 라도 소식 전합니다. 배다두씨야 말로 부산 적기 성당에서 독일 신부님이신 하 안토니오 몬시뇰님의 인정을 받아 양아들로 활동하시면서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 하시다가 1980년대에 직장따라 서울 한남동으로 이주후 이태원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시고 殺身成仁(살신성인)으로 교회에서 봉사 하시던 모습이 눈에 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