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나는 원고지 앞에 앉으면 막막함을 느낀다. 미리 글의 줄거리를 잡아 두었어도 막상 붓을 들면 몇 줄 나가지 못하고 쩔쩔매기도 하고, 글을 완성한 후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것을 구겨버릴 때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해. 그만두어 버리자’고 몇 번씩 다짐해 보지만 돌아서면 또 원고지와 씨름을 하고 있으니, 글쓰는 일이 이미 내 생활의 일부로 단단히 굳어진 것 같다.
수필과는 거리가 먼 직업을 택한 내가 ‘수필가의 길’을 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내가 문인이라고 해서 하던 사업이 더 잘 된 것도 아니요. 나와 거래하는 사람들이 별도로 인정해 주는 일도 없었다. 더욱이 장사하듯 문학을 할 수도, 문학을 하듯 장사를 할 수도 없었으니 마치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처럼 어색해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동료로부터는 저 사람이 글을 쓴다고 악착같이 매달려 있으니 ‘일을 소홀히 할 것 아닌가’하는 의심의 눈초리도 받았고, 가족들은 짬이 나면 책상머리에 붙어 있는 내가 가장으로서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눈치다.
이렇게 매일을 함께 보내야 하는 가까운 사람들마저도 내편으로 확보하지 못한 처지고 보면, 수필가라는 호칭을 앞세우고 우쭐해 할 형편도 아닌 것 같다.
이런 심정의 나에게 ‘미래 사회에서는 수필이 문학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니 열심히 해 보라’고 위로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지금 형편으로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물론 다가올 미래의 환경이 수필문학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도 믿고 있지만, 이런저런 문인들의 모임에 참석해 보면 문학 장르 중에서 수필이 제일 말석에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수필 쓰는 일을 마지막 내 자존심을 지키듯 굳게 지켜갈 작정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어떤 분야에서 제법 성공을 거두어 인기를 얻었다 하면 쉽게 책을 발간하게 만드는 풍조가 있다. 그래서 정치인이나 사업가, 연예인이나 스포츠맨, 나아가서는 독특한 영역의 직업인들까지도 글을 쓰게 부추겨, 한 사람의 성공기록은 물론이려니와 특수 분야의 기술이나 일화까지도 수필로 둔갑시켜 버린다. 이처럼 사실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 자전적 글이나 흥미 위주로 쓰인 잡문들도 수필의 가면을 쓰고 설쳐대는 판국이니 올바른 수필은 설자리가 더욱 좁아진다.
그러나 수필이 문학으로서 높이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수필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생각이고, 그런 결과에 대해서 무관할 수 없으니 딱한 일이다. 해마다 수필가는 놀랄만한 숫자로 증가하고 그들이 발표하는 작품 수는 더욱 많아져 수필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작 문학성이 높은 작품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비판이 있는 것을 보면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필은 제가 살아온 진실한 경험과 사물에 대한 심오한 사색이나 올바른 인생관을 바탕으로 빚어내야 마땅한데도, 나는 너무 쉽게 많은 작품을 쓰고 발표해 버린 것 같다. 또 한편의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 다듬기를 계속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 버린 잘못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런 타협은 내 수필을 치열하게 조탁했다기보다는 발표 후의 반응이나 독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더 신경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몇 권의 수필집을 내면서도 책의 분량을 채우려고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원고를 억지로 꿰어 맞추었던 일이나, 원고료도 주지 않는 잡지에 이름을 올리기에 급급했던 일들이 적지 않은 후회로 남아 있다. 그뿐 아니다. 글의 소재를 보다 쉽게 찾아내느라 욕심을 부린 탓으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최신 뉴스며 내가 종사하는 산업계 주변의 얘기를 글감으로 삼았다. 그래서 소재의 진실을 파고드는 노력보다는 비판적인 견해가 앞섰고, 모두들 알고 있는 얘기를 내 것으로 만들려다 보니 자기 주장이 강한 수필이 쓰여 문학성에 있어서는 많이 뒤처지는 글이 되고 말았다.
문학이란 삶을 규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사는 것은 틀렸고, 저렇게 사는 것이 옳다’라는 윤리적 잣대로 내세우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되돌아보면 이 세상에는 좋은 일도 아름다운 일도 많은데, 유독 잘못되어 가는 일을 글로써 꼬집으려 안간힘을 썼던 날들이 민망하게 다가온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그러하듯, 내 삶 또한 비슷비슷한 일들의 반복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다듬어 나가려는 진지한 몸짓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 문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일 터인데도 이를 소홀히 한 잘못도 추가시켜야 옳을 성싶다. 또 오랜 세월을 살아서 우리들 곁에 머무는 좋은 수필들이 어떤 특정한 사건을 다루는 것보다는 평범한 일상에서 찾아낸 보석 같은 생각의 소산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좀 더 일찍 받아들였어야 했다.
나는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제대로 수필을 공부하지도 못했다. 어쩌다가 수필을 쓰게 되었고, 이 같은 빈약한 기초가 늘 나를 주눅들도록 만들었다. 이런 자격지심이 나로 하여금 문학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아야겠다는 욕심을 앞세우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짧지 않은 세월을 두고 눈에 띄는 성공을 그리며 몹시도 초조하게 달려왔으나 지금 나에게 특별히 남은 게 없다. 내가 바라던 문학적 성취는 남이 인정해 주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내 자신에게 달린 문제였었다. 만일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 내 인생의 깊이나 폭이 더욱 깊고 넓어 졌다면, 내 삶도 제법 풍성해졌을 것이고 작품의 수준도 자연히 따라 올라 오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나 완성을 향해 최선을 다할 때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고 했다. 있는 힘을 다하는 운동선수의 몸짓 하나가 뛰어난 예술 작품 못잖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진정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헌신적인 삶이 그 어떤 것보다 진한 감동을 주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리라. 이제라도 내가 살아오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쉽게 받아 들였던 작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바라보고, 그런 것들을 제대로 그려내어 독자들에게 보여 주는 작업에 더욱 힘을 모아야겠다.
농사에 마음 붙이고 살면 농군이 되듯이, 수필에 마음을 떼지 않고 사는 나도 수필가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니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