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산 범어사
01. 범어사[梵魚寺]
신라시대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돌아온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 사찰
華嚴宗 10찰(刹)의 하나이며, 일제강점기에는 31교구 본산의 하나였다. 창건에 대하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 삼국유사의 678년(문무왕 18)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빛나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하여 金井山으로 이름짓고 그곳에 사찰을 지어 梵魚寺를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梵魚寺創建事蹟》에 보면 당시 범어사의 伽藍 배치는 彌勒殿·大藏殿·毘盧殿·天主神殿·流星殿·鍾樓·講殿·식당·목욕원·鐵幢 등이 별처럼 늘어서고 360 寮舍가 양쪽 계곡에 꽉 찼으며, 사원에 딸린 토지가 360結이고 소속된 奴婢가 100여 호에 이르는 大名刹이라 하였는데, 이 많은 것이 창건 당시 한꺼번에 갖추어졌다고 믿기는 어려우며 상당 기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옛날 일본인이 침입했을 때에는 승려들이 전쟁에 직접 참여, 함께 싸우기도 했던 중요한 곳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려 10여 년을 폐허로 있다가 1602년(선조 35) 중건하였으나 또다시 화재를 당하였고, 1613년(광해군 5) 여러 고승들의 협력으로 중창하여 법당·寮殿, 불상과 十王像, 그리고 필요한 모든 집기(什器)를 갖추었다.
02. 부산 범어사 삼층석탑
(釜山 梵魚寺 三層石塔)보물 제250호
범어사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基壇 위에 3층의 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이 탑의 특징은 기단에서 찾을 수 있는데, 위·아래층 기단의 옆면을 기둥 모양으로 장식하지 않고 대신 眼象을 큼직하게 조각 한 것이다. 탑신부는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은 급격히 줄어들 고 있다. 평평하고 얇은 지붕돌은 처마가 수평을 이루며, 밑면의 받침이 4단으로 되어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꼭대기에는 露盤 위에 寶珠만 남아 있을 뿐 다른 것은 없어졌다.
통일신라 흥덕왕(826∼836) 때에 세운 탑으로, 일제시대에 크게 수리를 할 때 기단 아래부분에 돌 하나를 첨가하는 바람에 기단부가 너무 크고 높은 느낌을 준다. 밑에 둘러진 난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03. 부산 범어사 대웅전
(釜山 梵魚寺 大雄殿)보물 제434호
1993년 문화재연구소 정밀실측 중 대웅전 종도리 묵서명에서 효종 9년(1658) 상량식을 거행한 내용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대웅전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02년 당시 현감이 임시 복구하였으며 1658년 효종 9년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암막새 명문과 기단 각자, 목부재 기록 등으로 볼 때 현재 대웅전은 17세기에 중건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석가모니불상만을 모시는 일반 대웅전과는 달리 이곳 범어사 대웅전에는 미륵보살과 가라보살을 각각 석가모니의 왼쪽과 오른쪽에 함께 모시고 있다.(화엄종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은 모시는 비로전이 대웅전 좌측에 있다)
앞면·옆면 3칸 크기를 가진 건물로 맞배지붕이고 다포 양식이다. 또한 닫집에서 보이는 조각의 정교함과 섬세함은, 조선 중기 불교건축의 아름다움과 조선시대 목조공예의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04. 부산 범어사 조계문
(釜山 梵魚寺 曹溪門)보물 제1461호
범어사의 일주문으로서 이 건물을 세운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조선 광해군 6년(1614)에 묘전화상이 절내 여러 건물을 고쳐 지을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추측한다. 정조 5년(1781)에 백암선사가 현재의 건물로 보수했다. 앞면 3칸 규모이며 맞배지붕에 다포 양식이다.
기둥은 높은 돌 위에 짧은 기둥을 세운 것이 특이하며 모든 나무재료들은 단청을 하였다. 부산 범어사 조계문은 모든 법이 하나로 통한다는 법리를 담고 있어 삼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
사찰의 일주문이 가지는 기능적인 건물로서의 가치와 함께 모든 구성 부재들의 적절한 배치와 결구를 통한 구조적인 합리성 등이 시각적으로 안정된 조형 및 의장성을 돋보이게 한다. 한국전통 건축의 구조미를 잘 표현하여 우리나라 일주문 중에서 걸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05. 부산 범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釜山 梵魚寺 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526호
이 삼존좌상은 범어사 대웅전의 주불로서 改金時 복장에서 발견된 佛像記文과 佛像記因發願祝을 통하여 석가불과 미륵 보살, 제화갈라 보살의 수기삼존불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순치 18년(조선 현종 2년, 1661년) 이라는 정확한 조성 연대와 首頭 熙莊을 비롯한 寶海, 敬信, 雙黙, 雷影, 信學, 淸彦 등이 조각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수조각승 희장은 1639년 하동 쌍계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 제1378호) 을 조각한 청헌(淸憲)과 같이 활약하였고, 1646년에는 천은사 수도암 목조아미타삼존불 을 조각한 승일(勝一)과도 함께 작업을 하였다.
1950년대는 禪宗大禪師라는 칭호를 받으며 청도 대운암 불상(1654년)을 제작하였다. 이외에도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그의 작품이 확인되는데, 범어사 대웅전 불상은 그가 완숙기에 조성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전하는 자료를 통해 그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17세기 중·후반기의 대표적인 조각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례가 적당하여 당당하고 균형 잡힌 형태를 보이며, 相好는 풍만한 양감 속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우러져 자비롭고 단정 우아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법의 주름은 직선의 선묘로 간략히 처리하여 여백을 많이 남겼지만, 전체적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잘 정돈되어 있다.
무릎 아래에는 넓은 띠 모양의 주름이 좌우대칭으로 펼쳐져 부채꼴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희장 유파의 조각적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불상기문을 통하여 정확한 존상명칭은 물론, 조성시기와 조각가 그룹을 알 수 있는 불상으로서는 매우 완성도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06. 부산 범어사 등나무 군락 (釜山 梵魚寺 藤나무 群落)천연기념물 제176호
梵魚寺 앞의 계곡에 있다. 범어사는 의상대사가 절을 세운 이후 여러 고승들이 깊은 깨우침을 받았던 곳이다. 계곡의 큰 바위 틈에서 자란 약 500여 그루의 등나무가 소나무, 팽나무 등의 큰 나무를 감고 올라가 뒤덮여 있다.등나무가 무리지어 사는 계곡을 등운곡(藤雲谷)이라고도 하며, 금정산 절경의 하나로 꼽았다.
범어사 등나무 군생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것은 등나무가 무리지어 사는 것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생물학적 연구자료로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 범어사 문화유산해설사에 의하면, 등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원료로, 범어사에 부과된 紙役을 이행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림한 것이라고 한다. 관련기사 : (박종인의 땅의 역사 2020.06.23.일자 중) “왜란과 호란 이후 종이 만들던 국립 조지서는 파괴됐다. 하지만 종이 수요는 급증했다. 대동법 이후 농민들은 종이 재료인 닥종이 밭을 논으로 바꿔버렸다. 종이는, 절에서 만들게 됐다. 그 '지역(紙役)'이 하도 지독해서 지치고 쇠약해진 승려들이 다 도망가 폐사되는 절도 속속 생겨났다.(1786년 7월 24일 '비변사등록')” 1800년대 후반 양산 통도사 또한 폐사될 위기에 빠졌다. 그때 주지 덕암당이 6개월 동안 머리를 길러 평민으로 위장하고 서울로 가서 권력가 권돈인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1838년 무렵 권돈인이 경상관찰사로 와서 지역을 혁파했다. 그 '어마어마한' 혜택에 감격한 통도사는 이 두 사람 각자를 위해 공덕비를 세웠다.
07. 범어사당간지주 (梵魚寺幢竿支柱)
부산 유형문화재 제15호
산지를 이용한 특이한 가람배치로 잘 알려진 범어사는 숲 속에 수많은 비석과 유물들이 있는데, 이 당간지주도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基壇과 당간의 받침돌이 모두 사라지고 양쪽의 두 기둥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기둥 윗부분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켰던 네모난 홈을 두고 양 기둥 끝은 곡선으로 처리하였다.돌을 다듬은 흔적이 고르지 않아 둔중한 감이 있으나, 장식이나 조각이 전혀 없어 소박한 모습이다.
08. 범어사석등 (梵魚寺石燈)
부산 유형문화재 제16호
범어사 안에 있는 석등이다. 석등은 보통 금당이나 탑 앞에 두는데, 이 석등도 원래는 龍華殿 앞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에 절내의 종루와 그 자리를 바꿔놓은 것이다.
3단의 받침 위에 火舍石과 지붕돌을 올린 일반적인 형태로, 각 부재가 8각을 이루고 있다. 받침부분은 가운데기둥을 사이에 두어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아오르는 연꽃무늬를 새겨 대칭적으로 표현하였다.
화사석은 4면에 네모난 창을 두었는데 창의 가장자리마다 창문을 달았던 10개의 구멍흔적이 남아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고, 꼭대기에는 네모난 露盤 위로 寶珠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후대에 보수한 받침의 가운데 기둥이 빈약하고, 윗받침돌이 두터워서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안정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범어사삼층석탑(보물 제250호)을 세운지 3년 후인 통일신라 문무왕 18년(678)에 만들었다고 하나 양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9세기경인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09.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 (梵魚寺 捌相·獨聖·羅漢殿)부산 유형문화재 제63호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인 본 건물은 현재 범어사 대웅전 서쪽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부속 불전의 하나로, 적어도 1706년 이래로 존속했던 위치에서 변함없이 존속해 온 건물이다. 1902년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당시까지는 중앙의 天台門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팔상전과 나한전이란 별개의 건물이 서 있다가, 1905년 11월~1906년 11월까지 약 1년에 걸친 공사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따라서 서측의 팔상전 부분과 동측의 나한전 부분의 건축 형식은 변형되거나 고쳐지지 않고 1906년 중건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여 지며, 다만, 팔상전과 나한전의 노후화 된 부재의 교체와 내부 가구(架構)가 수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06년에 단장된 獨聖殿 부분은 문틀을 하나의 통재를 사용해서 반원형으로 구부려 만든 독특한 모습이고, 창방 사이의 삼각형 벽체 부분에는 通板으로 넝쿨 형상을 초각하였으며, 창호도 팔상전과 나한전이 교살창인데 비해 독성전은 화문살로 아름답게 꾸미는 등 장식수법이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다.
이처럼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은 1906년 중건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간살, 가구(架構) 와 평면, 입면 구성 등에서 1706년 이래의 건축 형식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고, 특히 하나의 건물에 세 佛殿을 모신 점, 중아에 위치한 독성전 開口部의 뛰어난 의장과 초각수법은 그 예가 극히 드문 만큼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건물로 평가된다.
※ 종이를 만들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물
* 범어사 문화재 목록
범어사에는 위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