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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시
[ 프랑스 남동부의 경승지(景勝地), 안시 ]
안시는 프랑스 남동부의 알프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프랑스의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이 ‘호수 도시’에 산재한 수많은 유적들은 기원전 4천 년경 신석기 시대에 이미 처음으로 인간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가 지배할 당시의 문화 역시 이 도시에 뚜렷한 흔적을 남겨놓았습니다. 안시의 형성은 기원전 50년 로마인이 세운 ‘부테’라는 활기찬 도시로 이주해 오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갈리아 족들은 티우 강변에 작은 부락을 세워 보강 작업을 서둘렀고, 그 결과 성은 강력한 요새로 보호되었습니다.
두꺼운 성벽과 풍부한 수력 자원을 활용해 안시는 마침내 이 지역의 작은 수도로, 경제적 활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13세기 제네바 백작이 안시에 정착하고, 15세기에는 사보이아 공국(1) 안에 제네바 인들의 영지를 확보하는 등 이와 같은 일련의 행보는 이 도시가 행정과 사법 분야에서 상당히 중요한 입지를 갖도록 했습니다. 캘빈의 종교개혁 이후 제네바의 카톨릭 세력이 옮겨오면서 도시의 지위는 더욱 격상되었고, 16~17세기를 거치는 동안 안시는 ‘사보이아의 로마’로 자리 잡았습니다.
대 사상가 장 자크 루소(1712~1778)가 안시에 체류할 당시의 행적들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는 동시에 이곳을 문학의 명소로 만들어줍니다. 루소는 여러 작품에서 이 전원도시의 은밀하고 매력적인 추억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안시에서의 루소의 행적은 아래에서 다룹니다.
안시는 알프스 산맥에서 내려오는 깨끗한 물로 만들어진 안시 호수를 끼고 있으며 아름다운 올드 타운이 있는 유수의 관광도시입니다. 백조가 노니는 안시 호수는 빙하 녹은 물이라 엄청나게 맑습니다.
* 안시 지도
봄, 여름에는 형형색색의 꽃이 핀 운하를 따라 구시가지에서 바라보는 알프스 산의 아름다운 광경이 곧바로 안시 호수의 투명한 물에 원곡으로 반사됩니다. 안시에서는 매년 천혜의 관광 자원을 활용해 ‘호수 축제’를 개최합니다.
해마다 주제를 달리하여 한 번 찾은 방문객을 다시 오게 만드는 마케팅 능력을 돋보이는 행사입니다. 1950년에 꽃을 시작으로 샹송, 낭만의 밤, 격언, 영화, 괴물과 전설, 국경 없는 여행, 기사들의 시절, 음악과 삶, 낭만주의, 유럽, 프랑스 혁명, 여성, 서커스 등 다양한 테마로 갖가지 프로그램을 선보여 왔습니다.
영화, 샹송, 음악 같은 대중적인 주제는 여러 번 다루어졌고 해를 거듭할수록 역사와 프랑스의 정체성에 관한 테마가 심도 있게 표현됩니다. 더불어 화려한 불꽃놀이도 축제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호수가 아름다운 안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연중 도시와 자연의 느낌이 변화하는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안시는 샤모니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리는 도시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시에서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신석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안 사보이아 인들이 일구어놓은 삶의 흔적을 나름대로의 감각과 생각으로 음미하면서 여유를 갖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프랑스산 생수 '에비앙'은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 젊은 장 자크 루소와 바랑스 부인과 사랑이 꽃피운 안시 ]
인류에게 " 자연으로 돌아가라!" 라고 외쳤던 장 자크 루소는 영원한 행자(行者)였습니다. 인생의 전반은 스스로 방랑했고 후반은 쫓기어 유랑했던 낭자(浪子)였습니다. 루소는 걷고 있지 않으면 도대체 생각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추었습니다.
그는 그의 자서전인 <고백록>에서 "정신을 움직이려면 육체를 움직이고 있어야 했다"라고 썼습니다. 또 "나는 혼자 여행을 하며 걷던 때만큼 생각이 잘 되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때는 없었다"라고도 했습니다.
그 긴 도보 여행의 길은 곧 <고백록>의 길이기도 합니다. <고백록>을 길잡이로 하여 루소의 길을 찾아나서 보면 현대의 기차나 자동차로도 다 따라가기가 숨 가쁠 정도입니다.
루소는 제네바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의 탄생은 나의 불행 중의 최초의 것이었다”고 <고백록>에서 말한 그의 생가는 구시가지의 구석진 언덕길인 그랑 뤼 40번지. 건물 전면을 완전히 새로 고쳐 옛 모습이 아닙니다. 루소의 아버지가 시계공(時計工) 일을 하던 이 집의 맨 아래층에는 <오 뷰 카농>이라는 골동품상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제네바 시는 루소의 생가 대신 제네바 대학 도서관 안의 한 방을 루소 기념실로 차렸고, 이 도서관에는 루소의 많은 원고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레만 호(湖)의 물이 론 강(江)이 되어 흘러가는 초입, 제네바의 중심가를 연결하는 베르그 교(橋) 가의 조그마한 강중도(江中島)는 루소도(島)라 불리웁니다. 여기에 <제네바의 시민 루소>라고 쓰인 동상이 서 있어 넓은 호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고향 제네바는 루소에게 야속한 땅이었습니다.
* 레만 호수가의 루소의 동상
<에밀>과 <사회계약론>이 나오자 제네바 정부는 이 책들을 발매금지 처분했고 이에 루소는 제네바 시민권을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루소는 “나의 조국은 내게 이방(異邦)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운 추억으로 조국에 대한 애착을 지속할 것이요, 조국이 나를 모욕한 것을 제하고는 조국의 일을 한 가지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내내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은 오히려 제네바 쪽이어서, 그 제네바가 이제 와서 루소를 <시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루소는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 때 아버지와도 헤어진 후 보세의 한 목사에게 맡겨집니다. 보세는 제네바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프랑스령의 마을입니다.
* 안시, 바랑스 부인과의 만남
루소는 그 후 시계 조각의 견습공 노릇을 하다가 16세 때인 1728년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바랑스 부인을 안시에서 만납니다.
* 바랑스 부인
안시는 알프스 연봉이 병풍을 친 프랑스 남동부의 아름다운 호반(湖畔) 도시입니다. 산 좋고 물 맑아 일년 내내 휴양객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 안시의 장 자크 루소 가(街) 10번지는 바랑스 부인의 집이 있던 자리입니다. 현재 경찰서가 들어 있는 옛 주교관(主敎館) 건물의 뒤편, 바셀 운하변에 섰던 바랑스 부인의 집은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오른편의 시냇물, 왼편의 돌담, 교회로 빠지는 좁은 길”의 골격은 살아 남은 채, 운하를 따라 난 길 이름이 바랑스 로(路)입니다. 루소는 이 길에서 바랑스 부인을 초대면했습니다. 바랑스 부인은 눈매가 부드럽고 살갗이 눈부시고 목덜미가 매력적인 28세의 미인이었습니다.
* 바랑스 로
“나는 도착했다. 바랑스 부인을 만났다. 이 시기가 내 성격을 결정했다”고 그는 <고백록>에서 감격적으로 썼습니다. 그 운명의 순간을 영원히 붙박아 놓기 위해 그 자리에는 루소의 석상(石像)을 모신 기념 분수대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루소의 절필(絶筆)이 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마지막 장(章)은 “오늘은 성지주일(聖枝主日)로 내가 바랑스 부인을 만난 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다”라는 말로 시작되어 미완성으로 끝납니다. 루소는 목숨 끝나는 날까지 이 길가를 잊지 못했던 것입니다.
* 루소와 바랑스 부인이 동거하던 레 샤르메트의 집
루소는 토리노에 가서 바랑스 부인의 권유로 신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안시로 돌아온 후, 다시 스위스 일대와 파리 등지로 1,500km의 도보여행을 한 끝에 1731년, 샹베리에서 바랑스 부인과 재회를 하게 됩니다.
안시 남쪽의 사보아 주(州) 수도인 샹베리에는 두 사람이 동거하며, <감옥>이라 부르던 집이 생 레제 광장 뒤쪽 좁은 골목 끝에 남아 있습니다. 브와뉴 가(街) 13C번지. <고백록> 제5편에서 루소가 “전망이라고는 가로막힌 벽뿐, 길이라고는 막다른 골목뿐, 공기도 통하지 않고 햇빛도 안 들고...”라고 쓴 것은 한 자 고칠 것이 없습니다.
집의 위층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은 침침하고 벽은 프랑스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로 레프뢰(나병환자의 살갗처럼 더덕더덕함)합니다. 루소는 이 어두운 집에서 바랑스 부인의 사랑을 고백 받아 이 12년 연상의 여인의 애인이 됩니다.
두 사람은 이 집에서의 답답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1735년 샹베리에서 2km 덜어진 레 샤르메트의 집을 얻어 나갑니다. 루소가 “여기서 나의 생애에 있어서의 짧은 행복이 시작되었다”고 <고백록> 제6권에서 말한 곳이 이 곳입니다. 레 샤르메트의 집은 1905년 샹베리 시(市)가 사들여 루소 기념관이 되었습니다.
* 루소와 바랑스 부인, 루소는 가발을 써서 늙어 보인다
루소가 “샹베리에서 아주 가깝기는 하나 천리나 떨어져 있는 것처럼 조용하고 외딴 곳”이라더니, 그 후로 2백년이 훨씬 지난 격세(隔世)에도 그 격지감(隔地感)은 조금도 잃어지지 않았습니다. 집 건너편은 그때 있던 밤나무 숲이요, 옆은 아직도 과수원입니다. 다만 뒤쪽의 당시 포도원은 초지(草地)가 되고 집 앞의 나무문은 철책 문으로 바뀌었습니다.
루소가 라틴 시(詩)를 암송하면서 가꾸던 화단이 단정합니다. 그 옆에 보랏빛 조그만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습니다. 루소와 바랑스 부인이 이 집으로 이사 오는 도중 길가에서 발견했던 빙카 꽃입니다. 루소는 그 30년 뒤 이 꽃을 딴 데서 보고 레 샤르메트 시절의 기억을 되살렸다고 <고백록>에서 쓰고 있습니다.
샹베리 시(市)에서는 이 빙카 꽃을 일부러 이 마당에 심었고 레 샤르메트로 오는 길가에도 씨를 뿌렸습니다. 해마다 루소의 추억을 꽃피우기 위해서입니다.
레 샤르메트의 집은 루소의 자기 교육의 교실이었습니다. 자연 속의 독학자(獨學者)였던 루소는 여기서 문학, 철학, 과학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읽었고 바랑스 부인으로부터는 사회인으로서의 예의범절을 배웠습니다.
* 루소의 산책길
집안의 가구는 당시의 것이 거의 없습니다. 2층에 있는 루소의 침실에서 아침마다 정원에서 바랑스 부인이 일어났나 하고 바라보던 창문, 그 바랑스 부인의 침실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면 멀리 니볼레 산 밑에 샹베리 시가가 보입니다. 루소 때 인구가 6천이던 샹베리는 지금 6만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집에 살 때 루소의 일과 중의 하나는 아침 일찍 산보하는 일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해뜨기 전에 일어나 근처의 과수원을 지나서 매우 아름다운 길로 올라간다. 이 길은 포도밭 위에 있으며 등성이를 따라 샹베리까지 뻗어있다.”(<고백록> 제6편).
이 산보로가 집 뒤쪽 언덕 위에 여전하여 <장 자크의 길>이라고 불리웁니다. 산보에서 돌아오는 루소를 만날 것 같은, 루소 밖에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을 것 같은 고적한 오솔길입니다. 루소가 건강 때문에 매일 물 마시러 가던 샘물은 이 산보로 밑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자리도 없습니다.
뒷날 루소를 찾아 레 샤르메트를 방문한 사람 가운데는 시인 라마르틴(2)이 있었고 여류작가 조르주 상드(3)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매년 9천명의 <고백록> 독자들이 이 시골로 몰려 와 <장 자크의 길>을 한 번씩 거닙니다.
* 장 자크의 길
루소는 레 샤르메트에 살던 때인 1737년 신병치료를 위하여 남 프랑스의 몽펠리에로 여행을 합니다. 몽펠리에의 루소가 머물던 집의 거리는 현재 이름이 장 자트 루소 가(街)입니다. 루소가 몽펠리에에서 돌아왔을 때, 레 샤르메트의 집에는 다른 젊은 사내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루소는 1739년 레 샤르메트를 떠납니다.
그 15년 후인 1754년 루소는 샹베리에 다시 들려 바랑스 부인을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부인은 이미 늙어 있었습니다. 바랑스 부인이 죽자 6년 후인 1768년 루소는 부인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바랑스 부인은 샹베리에서 2km 떨어진 레만 묘지에 묻혔습니다.
레 샤르메트를 떠나 바랑스 부인과 헤어졌던 루소는 1742년 파리로 올라옵니다. 10여 년간의 파리 생활 동안 그는 호텔의 하녀 테레즈와 사귀어 5명의 아이를 낳아 고아원에 기탁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서민들의 경우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루소가 도시 생활을 피해 에피네 부인이 제공한 <에르미타즈>로 거처를 옮긴 것은 43세 때인 1756년이었습니다. 루소는 8개월 만에 에피네 부인과의 불화로 몽모랑시의 <몽 루이>로 다시 이사를 합니다. 이 집이 1952년 이래 루소 기념관이 되어 있고 이 안에 루소 연구센터가 들어 있습니다.
몽모랑시는 파리에서 21km. 시청 앞쪽 네거리에 선 루소의 석상(石像)은 1907년에 만든 것입니다. <고백록> 제10권에는 "나는 몽 루이의 집에 들자 테라스를 꾸몄다. 이미 두 줄의 싱싱한 보리수가 그늘을 지우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두 그루를 더 심어 녹색의 서재를 만들었다. 돌 탁자와 돌 걸상도 갖다 놓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루소가 직접 심은 그 보리수나무며 나무 그늘의 돌 탁자와 돌 의자가 아직 그 자리에 있어 <고백록>의 한줄 한 줄이 손에 만져집니다. 정원 왼쪽 구석에 "바람과 눈에 시달리며 불도 없이 오직 가슴 속 정열에 의지하여" 루소가 글을 쓰던 별채의 정자도 <고백록>대로 안녕하여 반갑습니다.
루소가 이 집에서 지낼 때 쓴 <에밀>과 <사회계약론>은 그를 이곳에 더 있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루소에게 체포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프랑스 땅을 도망쳐 나온 루소는 스위스에서 베르동, 모티에를 거쳐 비엔 호(湖) 가운데의 섬, 생 피에르 도(島)로 갑니다.
생 피에르 도(島), 루소가 뒷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내가 살던 모든 장소들 가운데서 비엔 호의 생 피에르 섬만큼 나를 행복하게 해준 곳이 없었다"고 말한 섬입니다.
* 루소가 거처하던 파리의 집
섬 끝의 루소가 살던 집은 대궐같이 커다랗습니다. 루소 때는 수세관(收稅官)의 집이던 것이 1813년 이래 호텔이 되어 내려옵니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루소는 "지필(紙筆)이나 책 나부랭이 대신 나는 방을 꽃과 건초로 가득 채워놓았다. 당시 나는 식물학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루소는 그가 "극락 같은 생활을 했다"고 말한 이 지복(至福)의 섬을 한 달 남짓 만에 떠나야 했습니다. 스위스 정부에서 퇴거령을 내린 것입니다. <고백록>은 루소가 이 섬을 떠나는 데서 끝납니다.
생 피에르 섬은 이미 루소 생전 때부터 루소 찬미자들의 순례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죽은 이듬해 괴테가 찾아왔고, 그 후로 휠더를린(4), 알렉상드르 뒤마, 발자크(5) 등이 뒤따라 방문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의 정비(正妃) 조세핀과 계비(繼妃) 마리 루이즈도 루소 경배의 행렬에 끼여 있었습니다.
루소는 생 피에르 섬을 나온 후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프랑스로 돌아와 또 방랑을 합니다. 그 가운데 그가 영국에서 오자마자 일년 가량 변명(變名)을 하고 숨었던 트리 샤토의 성관(城館)은 파리에서 서북쪽으로 70여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마을 한가운데에 들어선 이 성관에서 루소는 <고백록> 제1부의 마지막인 제6권을 썼습니다.
루소가 파리에서 마지막 살던 곳은 지금의 장 자크 루소 가(街) 52번지. 옛 중앙도매시장 자리인데 알 부근의 한 식당건물 벽에 기념판이 걸려 있습니다.
루소는 파리에서 50km 북쪽인 에르므농빌에서 죽었습니다. 장 자크 루소 공원이라 불리는 넓은 숲을 빠져나가면 에르므농빌 마을이 나서고 여기 루소에 심취하여 그를 간청해 모셔왔던 지라르댕 후작의 성관이 있습니다.
루소는 여기서 자연과 재회했습니다. 매일 숲을 산보하며 <고백록>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썼습니다. 숲 가운데에 <몽상의 단(壇)>에 새겨진 <몽상에게>라는 글씨는 루소가 낙서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루소는 에르므농빌에 온 지 한 달 남짓 만에 갑자기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운명한 성관 별채의 건물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루소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산보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침을 먹은 뒤 기분이 언짢다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더니 앉은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곁에 있던 아내 테레즈가 일으켜 세웠으나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장 자크 루소 공원의 숲 가운데에는 호수가 있고 그 호수 한쪽 기슭에 <포플러 섬>이라 불리우는, 키 큰 포플러나무들로 빙 둘러싸인 조그만 섬이 있습니다. 루소가 뱃놀이를 하며 쉬기도 하고 지라르댕 후작이 음악회를 열기도 한 곳입니다. 루소가 죽자 이튿날 밤 자정 유해는 이 섬으로 옮겨져 매장되었습니다. 농부들이 배 위에서 비추는 횃불에 온 호수가 훤한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 생 피에르 섬과 루소의 묘소
루소의 이 무덤에는 그 후 벤자민 프랭클린(6)이 찾아오고 로베스피에르(7)가 찾아오고 나폴레옹이 찾아왔습니다. 나폴레옹은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한 것을 상기하여 "프랑스의 안녕을 위해서 이 사람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루소의 무덤 앞에서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그 무덤이 지금은 텅 비어 있습니다. 섬에 남은 것은 <자연과 진실의 인간이 여기 누웠다>고 쓰인 석관뿐입니다. 프랑스 정부가 루소를 위인으로 예우한다고 1794년 유해를 파리의 팡테옹으로 옮겨가 버린 것입니다.
루소는 팡테옹의 컴컴한 지하실에 갇혔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던 루소의 분한 실자연(失自然)인 것입니다.
* 팡테옹의 루소 관
[ 장 자크 루소와 <고백록> ]
장 자크 루소(1712~1778년)의 <고백록>은 자전문학(自傳文學)의 원전입니다. 그는 이 자서전에서 자신을 대담하게 표출시킴으로써 그 자아의 해방으로 그를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가 되게 했습니다.
<고백록>은 루소가 자부한 대로 인간연구의 고전이 되었고, 이런 것은 전무후무하리라던 루소의 예상과는 달리 뒷날 많은 모방자들의 고백문학을 낳게 했습니다.
<고백록>은 루소의 탄생에서부터 1765년 그가 스위스 땅을 떠나던 53세 때까지의 기록입니다. 2부로 나뉘어 각 부마다 6권씩 도합 12권으로 되어 있고 청년시절까지의 제1부는 밝고 희망적인데 반해, 제2부는 박해에 쫓겨 어둡고 침울합니다. 루소의 가장 고달픈 망명시대인 1764~1770년 사이에 쓰여져 사후(死後)에 출판되었습니다.
(1) 사보이아 공국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위치했던 공국이었다. 프랑스 왕국의 부르봉 왕조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간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해 영토를 넓혔다. 나중에 샤르데냐 왕국이 되었다.
(2) 시인 라마르틴
프랑스 마콩의 명문 출신. 리옹과 베리의 중학교에서 가톨릭 교육을 받고 1811년 이탈리아를 여행, 1814년 군무에 복무하고 1815년 제대하였다. 1816년에 연상의 유부녀 샤를 부인과 사랑에 빠졌으나, 부인은 얼마 후 병사하였다. 사랑을 잃은 절망에서 써낸 <명상시집>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서정시를 다시 부활시켰다. 그는 천성적인 서정 시인으로서, 정감의 흐름을 그 자신의 진지한 감동을 가지고 아름다운 음악적인 문체로 평이하게 표현하였다.
(3) 조르주 상드
프랑스의 여류소설가. 노앙의 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이곳에서 그녀는 시골을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런 애정과 이해는 그녀의 작품 대부분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1817년에 파리에 있는 수녀원으로 보내졌는데, 이곳에서 신비주의에 열광했다.
뒤드방 남작과 결혼하여 몇 년 동안은 행복하게 지냈으나 곧 이혼하고 두 아이를 데리고 파리로 나와 문학에 뜻을 두었다.파리에서 시인 뮈세, 쇼팽 등 많은 남성들과의 연애로 세평에 올랐다가 곧 개인주의적인 낭만주의로부터 공상적 사회주의 위치로 전환하여 걸작 <콩쉬엘로〉등을 썼다.
(4) 휠덜린
독일의 시인. 잃어버린 황금시대에 대한 한탄하고 암흑시대에 신의 재림을 믿으며 신들의 재림을 노래한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디오티마> 등의 걸작이 있다.
(5) 발자크
19세기 전반기 프랑스의 소설가로 사실주의의 선구자였다. 나폴레옹 숭배자였다. 작중인물의 재등장 수법을 썼다. 대표작은 <인간희극>, <외제니 그랑데>,<절대의 탐구>,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농민> 등이 있다.
(6) 벤자민 프랭클린
미국의 정치가, 외교관, 과학자, 저술가, 신문사 경영자, 교육문화 활동, 자연과학분야에서 전기유기체설을 제창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과, 정치, 외교 분야에서도 대활약을 하였다. 그는 평생을 통하여 자유를 사랑하고 과학을 존중하였으며 공리주의에 투철한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일컬어진다.
(7) 로베스피에르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의 변호사, 혁명가, 정치가이자, 프랑스 혁명 시기 자코뱅파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를 주도한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현대 프랑스 공화국의 표어인 "자유, 평등, 박애"도 이 사람의 작품이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중에서도 급진파에 해당하는 인물로 앙시앵 레짐의 모든 유산을 청산하려는 급진적 개혁을 추진했으며, 혁명을 반대하는 반동 세력에 대한 탄압 뿐만 아니라 혁명 세력 중에서도 혁명성이 의심되는 인물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무자비한 숙청을 가하는 "공포정치"를 주도했다. 때문에 혁명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능하고 깨끗하고 청렴한 정치가였다.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부패할 수 없는 자'. 그의 폭압적 정치에 반발하던 반대파들도 이 점 만큼은 인정했다. 하지만 보통 이러한 자들이 그렇듯 "자신은 사리사욕이 없으므로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옳다"는 독선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로베스피에르는 정권을 잃었고 자기 목숨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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