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셋째주 메시지 진정한 베데스다 예수님
요한복음 5장 강해 이부 진정한 베데스다 예수님
요한복음 5장 7-9
요절 5장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베데스다 못은 병자들에게 진정한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물이 가끔 움직이는데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만 나을 수 있었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진정한 자비의 집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자비의 집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자비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의 자비의 못은 항상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디에나 예수님은 계시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베데스다 되시는 예수님을 소유하면 병이 나을 뿐 아니라 우리가 변화됩니다. 우리가 진정한 베데스다 예수님의 자비를 소유하고 변화됨으로서 하나님의 진정한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 38년 된 병자는 불평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을 때 38년된 병자는 “예, 낫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신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자신이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통해서 이 사람의 내면과 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내면은 의존심과 절망이 있었습니다.
먼저 의존심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자신이 낫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왜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느냐고 불평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빽이 없어서 마냥 병자라고 신세한탄을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 대한 의존심으로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원망과 불평이 많습니다. 출애굽한 사람들은 모세를 의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물이 없다고 밥이 없다고 고기를 주지 않는다고 길이 험하다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이런 의존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원래 자립이란 independence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그는 절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고 절망하였습니다. 그는 해보았는데 안 된다고 절망하였습니다. 그는 38년 전에 이곳에 왔고 그동안 해마다 한 번씩 물이 움직였다고 하면 그는 38번을 실패한 것입니다. 실패를 반복하면 실패를 믿는 믿음이 생깁니다. 몸이 그 실패를 기억합니다. 그것을 실패주의라고 합니다. 그는 오래 반복된 실패로 그의 마음에는 해도 안 된다는 패배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여도 그의 몸은 두려움으로 마비되어 움직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절망은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우리 교회에서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오래 실패를 하고도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 승리하신 분들은 많습니다. .
둘째, 그는 신앙적으로 예수님에게 관심은 없었지만 예수님께 기도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없고 연못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신 것은 예수님이 그가 원하면 그를 낫게 해주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못에 소망을 두는 대신에 예수님께 소망을 두어야 했습니다. 진정한 베데스다 못이 되는 예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저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저를 고쳐주십시오.” 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치료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연못을 통해서 낫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니 예수님이 도와달라고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있다가 자신을 못에 넣어줄 수 있다면 넣어달라고 한 것 같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우리 가운데도 이와 같이 예수님을 이렇게 세상에서 성공시켜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성공하도록 도와주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주셔서 성공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38년 된 병자는 연못에 소망을 두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불평을 예수님에게 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나 기도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 앞에 나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힘들고 어려운 것을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않고 예수님에게 가서 털어놓는 것입니다. 불평과 절망이라도 예수님에게 털어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보시고 우리를 치료해주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원망 섞인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치료해주셨습니다.
시편에 보면 시인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진솔하게 예수님에게 털어놓습니다. 때로는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저주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사람들 앞에서 하면 죄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면 그것이 기도요, 믿음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털어놓다보면 나중에는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옷이 벗겨져 감옥에 갇혔습니다. 처음에는 기도했다고 나옵니다. 그는 처음에는 원망도 불평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찬미를 받으시고 쇠사슬이 벗어지게 하시고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게 하셨습니다. 나중에는 간수와 그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 쏟아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도 믿음으로 보시고 친히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의 불평과 절망 섞인 기도도 들으시고 일하셨습니다.
(2) 일어나 걸어가라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은 그 사람이 원하는 것처럼 연못에 기다렸다가 그 사람을 못에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시켜서 그를 못에 넣어주도록 돕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만 한 마디 말씀만 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첫 번째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고, 두 번째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잡지도 않으시고 말씀만으로 38년된 병자를 도우셨습니다. 말씀만을 의지하여 자립하기를 원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가 한 가장 위대한 일은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순간 예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다만 말씀이 들렸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을 곧 치료하였습니다. 신기하게 38년된 병이 곧 바로 나았습니다.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말씀은 치료의 권능이 있습니다.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습니다. 날이 선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지금 죽은 자와 방불하게 사는 자가 있습니다. 오랜 실패로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절망하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키에로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절망하는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가면 믿음이 생기고 우리는 생명을 얻고 소망이 생기고 살아납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곧 나아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냥 걸어가라고 해도 되는데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38년 동안 누웠던 자리를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원망의 자리, 절망의 자리,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리를 청산하고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감사의 삶, 소망의 삶,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날은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안식일이라도 병자를 치료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비록 안식일이라도 자리를 들고 순종하여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날 병자를 고쳤다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이 문제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안식일 날 병자를 고쳤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친 것도 안식일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도 보면 안식일 날 수종 병든자, 한 손 마른자, 18년 동안 허리 꼬부라진 자를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안식일날 고치셨을까요? 예수님은 안식일 날 그 사람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병이 있으면 안식이 없습니다. 병은 사람을 피곤하고 지치게 합니다. 우리는 건강해야 안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날 병을 치료하여 참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38년된 병자에게 진정 주신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병을 치료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꼭 병만을 치료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병을 치료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많은 병자들은 왜 다 치료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에게 예수님 자신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는 병을 치료하여 예수님을 주셨고 나머지 병자들에게는 병을 치료하지 않고 예수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병이 나았지만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취업도 해야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자녀도 낳아야 하고 자녀 교육도 시켜야 합니다. 산 넘어 산입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가 있을 때마다 찾아오셔서 그 문제를 도와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에게 예수님을 주사 예수님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게 도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항상 살아계셔서 그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주시고 그 문제를 넉넉히 극복하게 도와주십니다.
(결론) 진정한 베데스다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비를 주지 못합니다. 공간적으로 유대 땅에 있었고 시간적으로 한시적으로 예수님 당시만 병을 치료하였고 기회적으로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왔고 경쟁에서 일등만 나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자비의 집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고 항상 은혜를 주시고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병이 있을 수 있고 물질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인간관계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문제만을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문제 해결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고 예수님 자신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자비의 예수님을 소유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사랑의 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누구든지 언제 어니서나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우리의 오래된 자리를 들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항상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이신 예수님을 소유하면 어떤 고난 속에도 소망이 생깁니다.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 속에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베데스다 못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유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5장 강해 이부 진정한 베데스다 예수님
요한복음 5장 7-9
요절 5장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한복음 5장 강해 이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