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여성의 역할 ( 이승만정부/미군/기업/정치/동참한 여자들 누구일까?)
한국전쟁과 여성의 역할
영어 자료
한국번역자료
무엇보다 미군과 유엔군과 관련된 성범죄, 즉 강간, 성매매 등 사회문제가 증가했다. 지금까 지 미군부대에서 자행된 성범죄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사회가 겪은 첫 번째 경험은 아니다. 미 군정 시기 한국사회는 이미 미군과 관련된 성폭행, 위안부 증가, 성병 확산 등 성문제를 겪어왔다. 이에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함과 동시에 한국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외출할 경우 여학생은 학교 허가 없이는 혼자 나가지 말라”고 권고했다 (부산일보, 1950년 8월 11일) 또는 “밤에는 여자는 될 수 있으면 혼자 나가지 말 것” (부산일보, 1950년 8월 12일)이라고 강경하게 말해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다.
6. 한국전쟁 당시 군인들의 고통을 위로하는 용어는 위안 (위안), 위문 (위문) 위무 (진정)였다. 이 용어들은 뉘앙 스가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위문은 금전이나 서신 등 물품과 노역을 통해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 해 위안 (위안)과 위무 (위무)는 성욕을 포함한 오락과 오락을 의미한다(이임하 2004a:109).
군대 게시물. 직접적인 성관계를 위한 위안소 외에도 댄스홀은 춤과 음악, 성욕 등의 유흥을 동시 에 제공했다. 장교들은 주로 댄스홀을 사용했습니다. 정부 공식 기록에 따르면 1951년 7월 부 산에서는 5개의 댄스홀이 영업을 했다고 한다(내무부 공안국, 1951). 또한, 서울, 인천 등에도 댄스홀을 운영하였다
또한 성매매 장소인 위안소와 무도회장 설치 및 운영에 이승만 대통령과 그 일군들을 비롯한 상급 관료들이 관여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유엔군 위안부 방법 (대비지, 대통령 비서실 방 향) 문서에는 댄스홀(위안소)의 설립 및 운영 목적이 다음과 같이 명확히 나와 있다.
'대통령의 원본 승인'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사무국이 대통령의 서면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 이는 이 문서7에는 댄스홀(위안소)의 설립 목적과 운영상의 문제점이 드러나 있다.8 이 문서에 따 르면 댄스홀(위안소) 건립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일부 내각장관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 문서의 사본 은 국무총리,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 해군참모총장, 공안국장에게 송부되 었다. . 또한 무용의 창설 및 관리와 관련하여 도지사, 시장, 경찰의 협력을 기록한 문서로 보아 무 용장(위안소)의 관리에 지방공무원이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홀(위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