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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滅門)-7
악군청과 악무수는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악무수가 백영대와 육가문이 운명의 결전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비해 악군청의 안색은 태연하기만 했다.
“걱정한다고 일이 풀리지 않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 가의 운명을 건 결전입니다.”
악군청이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태연자약(泰然自若)하자 악무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할 일은 다 했네. 아이들은 충분히 강하네. 우리는 결과만 기다리면 되네.”
“육가문 하나만 친다면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남궁가에서 무수한 정예를 보냈다고 합니다. 아무리 백영대가 강하지만...”
“믿고 기다리세.”
악군청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가주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일까? 백영대가 아무리 강하다지만 백팔동검수의 절반과 삼백명에 달하는 남궁가의 정예는 상대하기 어려울 텐데... 도대체 무슨 복안을 가지고 계신 것일까?’
악무수는 답답한 마음을 견디지 못해 뜨거운 차를 찬물 마시듯 연거푸 퍼부었다.
뚝. 뚝...
갑자기 탁자에 핏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구냐!”
악무수는 벌떡 일어났다. 악군청의 앞을 가로 막은 악무수는 검을 뽑아 들고선 집무실의 대들보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탁.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흑의인이 바닥에 착지했다. 복면인의 소매는 피에 젖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너는 누구냐?”
악무수가 싸늘한 음성으로 질문했지만 복면인은 악군청의 면전에 두 무릎을 꿇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수. 본 가의 사람이네.”
악무수는 검을 거두었다. 그러나 악군청을 보호하려는 듯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복면인 역시 악무수를 노려볼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수. 잠깐 옆으로 피해주게. 얼굴을 봐야 말을 나누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악무수가 옆으로 비켜섰지만 복면인은 침묵을 고수했다.
“말해도 괜찮네.”
“가주님!”
복면인의 입이 그제 서야 열렸다.
“무수는 자네들에 대해 알고 있네.”
“알겠습니다.”
악군청은 언제 사망할지 모른다고 생각해 악무수에게 모든 비밀을 알려주었다. 불의의 사태가 벌어지면 악무수가 처리하도록 후사를 부탁한 것이다.
“저자가 백혼의 다섯 그림자중에 한 사람입니까?”
“그렇다네.”
악군청이 고개를 끄덕이자 악무수는 긴장을 풀었다.
“주게.”
악군청은 가타부타 설명 없이 그림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림자는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악군청에게 바치며 질문했다.
“나는 오악맹을 결성한 뒤부터 척신명을 마음에 두고 있었네. 척신명은 오악맹의 맹주들 중에 가장 두려운 자로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이 안 된 유일한 인물이었지.”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그 자는 순식간에 저를 제압하더니 봉투를 주며 가주님께 전달하라고 하더군요.”
그림자는 순식간에 척신명에게 제압당한 때를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과감하면서도 인정사정없이 혹독한 살수(殺手)는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았는지 두 눈에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척신명은 천하2대 신비객의 하나인 무객 척소람이지. 대부분의 강호인은 천하2대 신비객의 무공이 십대고수에 비해 약하다고 생각해 그리 중시하지 않지만 사실은 가장 두려운 자들이라네.”
“십대고수의 무공을 본적이 없지만 그 자의 무예는 결코 못지않다고 봅니다.”
“그럴 것이야. 하지만 척신명의 가장 무서운 점은 홍매와 쌍벽을 이룰만한 자객이라는 것이네.”
“그렇다면 제 행적이 들킨 것도 이해가 가... 는... 군... 요...”
그림자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무엇이 그리 원통한지 눈을 감지도 않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잘 가게나.”
악군청은 그림자의 시체를 서글프게 바라보았다.
“자기 임무를 마치고 죽다니 과히 사나이군요. 목숨을 걸고 제할 일을 묵묵히 하다니 악씨의 한 사람으로 감동했습니다. 가주님께서 백혼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백혼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존경받아야 마땅하네. 하지만...”
악군청은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림자가 죽은 것은 봉투를 전달한 후 죽도록 척신명이 암수를 썼기 때문이다. 악군청은 척신명의 악독한 심사에 분노했다. 그러나 당사자가 없는데 화를 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기에 악군청은 그림자의 명복을 바랄뿐 다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무수. 사람들 눈을 피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게.”
“알겠습니다.”
악무수는 그림자의 시체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가자 악군청은 빈 집무실에 홀로 앉은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백혼은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야 한다.”
악군청의 독백은 그림자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내용이 아니었다. 백혼 전체를 두고 한 말이었고 금면객이라는 자신의 가면에게 밝히는 것이었다. 악군청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풀지 않고 그림자가 전해준 봉투를 개봉했다.
“어허! 과연 척신명은 뛰어난 자구나.”
악군청은 봉투 안에 들어있던 편지를 잃고는 탄식했다. 그때 그림자를 매장하고 들어온 악무수가 악군청의 탄식과 독백을 들었다.
“무슨 내용이 써져 있기에 그러십니까?”
“내가 척신명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듯이 그 역시 내 정체를 알고 있었네. 그뿐만 아니라 팽가의 멸문과 남궁가에서 발생할 일마저 알고 있더군.”
“그렇다면 큰일이 아닙니까? 팽가와 남궁가의 일을 거론한 것은 수수방관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지만 본 가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통보를 한 셈 아닙니까.”
백혼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은 산동악가에 위협이 되는 사건이다. 악무수는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척신명은 백혼이 본 가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를 얻지 못할 것이네.”
“방책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백혼이 모두 사라진다면 무슨 증거가 남겠는가.”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악무수가 놀란 표정으로 질문하자 악군청은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백혼은 모두 사라질 걸세. 아니 본 가의 미래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하겠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백혼은 본 가의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본 가를 영광을 위해 음지에서 싸웠습니다. 악가의 일원으로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악무수는 격렬하게 외쳤다.
“그렇군. 자네만이라도 알아야하는군. 내가 백영대와 육가문의 결전을 크게 걱정하지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으니 말해주겠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가 백영대와 육가문의 결전을 걱정하는 이유는 남궁가의 정예가 끼어든 때문일 걸세.”
“그렇습니다. 백영대가 비록 강하다고 하지만 백팔동검수의 절반과 300명에 달하는 남궁가의 정예는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악무수의 얼굴에 근심과 염려가 가득했다.
“백팔동검수는 산동에 없네. 그리고 남궁가에서 보낸 정예 300명도 거짓이네. 그들 모두는 남궁가에 집결해 있네.”
“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네.”
악무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악군청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안색이 바뀌었다.
“사소취대(捨小取大)! 좌조를 제물로 삼으신 겁니까?”
“하아~. 그렇다네. 나는 좌조가 팽가를 멸문한 시점에 남궁가에 백혼의 위협을 알렸네. 남궁무인은 곧바로 산동에 포진했던 세력을 모두 철수시키더군.”
“남궁가 정예 300명은 남궁무인이 그 사실을 가리기위해 술수를 쓴 것이군요.”
“맞네. 어리석은 육가문은 그 사실도 모르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악무수는 백혼을 제물로 사용한 악군청의 계획을 이성적으로는 찬성해도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산동악가의 영광을 위해서 소모품처럼 사라질 백혼이 같은 핏줄이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잔인하시군요.”
악무수는 이말을 끝으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악군청에게 힘없이 인사한 뒤 자기 거처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떤 반론도 제기하지 못하고 고작 원망 섞인 한 마디밖에 하지 못한 자신을 경멸하는지 어깨에 힘이 빠져 있었다.
“미안하네. 무수. 그러나 한 가문을 책임진 이상 잔인해져야 할 때에는 한없이 잔인해야 할 수밖에 없네. 하나 뿐이 없는 혈육에게도 말이네.”
악군청의 독백에는 슬픔과 괴로움이 깔려 있었다. 특히 마지막 대사는 깊은 의미를 가진 듯 했다. 악군청은 맥없이 걸어가는 악무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척신명이 보낸 서찰로 돌렸다. 서찰의 끝에는 천장별부를 열기 위해서 만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닷새 동안 잠도 못자고 경비를 섰던 백팔동검수 62인은 비상사태를 알리는 신호와 함께 나타난 64인의 동료와 300명의 정예들을 보며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형제들에게 달려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질문하려고 했지만 빨리 내원을 포위하라는 상급자의 명령에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내원을 포위한 뒤에 동료들에게 질문할 여유가 생겼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내원의 정원 한 가운데에서 쏟아져 나오는 투기와 살기에 압도됐기 때문이다. 석진과 십이금검수가 내뿜는 살기와 투기는 정원에 심어져 있던 수목과 꽃들마저 시들 정도로 강렬했다.
쾅.
석진이 오른발로 세차게 땅바닥을 박차자 굉음이 터져 나왔다. 강력한 진각의 여파로 석판(石版)이 산산조각 나고 땅바닥이 움푹 파였다. 역혈공의 내공과 철마각의 파괴력이 융합한 힘은 가공, 그 자체였다.
“타!”
십이금검수는 일제히 기합소리를 내며 무서운 속도로 돌격해오는 석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쾅.
유형화한 검기인 검무가 영롱하게 빛나는 열두 자루의 검과 석진의 맨발이 격돌하자 천지라도 무너뜨릴 듯한 폭음이 터졌다. 두 힘의 충돌지점에서 가공할 파괴력이 쏟아져 나왔지만 석진과 십이금검수는 한 치도 뒤로 물러나지 않고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석진은 오른 발을 축으로 삼아 강철 같은 다리로 연거푸 열두 번 발차기를 했고 십이금검수는 인정사정없이 석진의 요혈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검은 다리보다 사정거리가 길었다.
퉁.
검이 먼저 석진의 몸에 도달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석진의 몸을 꿰뚫어야 하는 검들이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하자 십이금검수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버렸다.
“그, 금강불괴!”
석진의 요혈에서 갑자기 강력한 내가탄기의 힘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커억!”
역혈공의 역혈탄기였다. 역혈탄기는 요혈에서 출발해 검을 타고 십이금검수의 손목을 비틀어버리면서 내장을 뒤흔들어버렸다. 게다가 십이금검수에게 악몽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철마각의 십이연타가 십이금검수를 향해 날아갔다.
파팡. 팡.
십이연타는 정확하게 십이금검수를 가격했다. 십이금검수 중에 일곱 노인의 신체가 폭발했다. 물 풍선이 벽에 부딪쳐 터질 때처럼 붉은 선혈과 살점들이 쏟아져 날아가고 박살난 뼈마디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동료의 참혹한 죽음을 본 다섯 노인들의 눈은 광기에 젖어 새파랗게 타올랐다.
“죽어라!”
무리한 공격으로 허점을 보인 석진을 향해 다섯 노인들이 돌진했다. 내장이 파열되고 뼈가 으스러졌는데도 움직임은 바람과 같았다.
“크윽!”
동료를 눈앞에서 잃은 분노가 다섯 노인의 잠재력을 폭발시켰는지 다섯 자루의 검은 석진의 몸을 가차 없이 관통해버렸다. 그러나 석진은 물러나지 않고 공격을 시작했다. 좌우 무릎을 연달아 사용하는 철마각의 슬격으로 두 노인의 복부를 강타한 뒤 좌측 팔꿈치로 좌측에서 공격한 노인의 두개골을 박살내버렸다.
슬격의 공격을 받은 두 노인이 복부를 움켜쥐고 허공으로 떠오른 뒤 폭발하자 석진은 우측 팔꿈치로 검으로 오른쪽 옆구리를 꿰뚫은 노인의 목을 찍고는 왼쪽 주먹으로 마지막 남은 노인의 안면을 강타했다. 석진의 주먹은 노인의 얼굴을 뚫고 들어가 뒤통수까지 관통해 버렸다. 상상조차 하기 두려울 만큼 잔혹한 결말이었다.
남궁무인은 전율스런 결전의 종말을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석진의 가공할 무공에 경악한 것이다. 그러나 눈에 가시 같던 십이금검수의 죽음과 심각한 중상을 당한 석진의 모습은 남궁무인에게 두려움을 날리기엔 충분한 쾌감을 줬다.
“모두 나와라.”
남궁무인이 정원 한가운데로 뛰어 들며 외치자 담장 뒤에 매복하고 있던 백팔동검수가 쏟아져 나왔다. 정원의 크기 때문에 정예 300명은 백팔동검수가 매복했던 장소와 담장 위에 올라섰다.
“저 놈이 우리의 혈육을 죽인 자객이다. 저 자객 놈을 막으려다 참혹하게 최후를 맞이한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바로 선대의 십이금검수다.”
“저놈을 죽여라.”
“저 죽일 놈을 찢어버리자.”
사방에서 욕설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저 악랄한 자객에게 일말의 선의도 필요 없다. 죽여라!”
“와아~.”
남궁무인이 공격하라고 명령하자 백팔동검수는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석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에게 심각한 중상을 당해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 자를 합공하는 추악한 행위를 한다는 생각은 한 점도 없었다. 오직 눈앞의 원수를 죽일 생각과 살점 하나라도 포를 뜨겠다는 살의만 가득했다.
“죽어라!”
백팔동검수들이 일제히 석진을 난도질하려는 순간.
“으아악!”
“적이다.”
“기습이다.”
담장 위에서 피의 축제를 고대하고 있던 남궁세가의 인물들이 갑자기 나타난 열세 명의 괴인들에게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괴인들이 들고 있는 열세 자루의 칼이 춤추기 시작하자 귀청을 찢어버리고 내장을 뒤흔들어버리는 귀신의 호곡성이 터져 나왔다.
캬오오~.
귀곡도를 펼치면 발생하는 귀곡호였다. 괴인들의 정체는 백혼의 좌조였다.
“무슨 일이냐?”
“으악!”
남궁무인이 고함쳤지만 귀곡호에 묻혀 버렸다. 백팔동검수들도 귀곡호의 여파로 인해 내상을 당해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그 순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미동도 하지 않던 석진이 몸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 들고 일어서더니 백팔동검수들을 향해 던졌다.
“으악!”
“크아악.”
다섯 자루의 검이 풍차처럼 회전하면서 가공할 강풍을 동반하면서 백팔동검수들을 유린했다. 순식간에 사방이 피바다로 변해버렸고 잘려진 수급들이 피를 뿌리며 땅바닥에 쏟아졌다.
“공격해라!”
한순간에 30여명이 넘는 동료를 잃은 백팔동검수들은 눈이 뒤집혔다. 그들은 일제히 석진을 향해 돌격했다. 석진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백팔동검수들을 보며 싸늘하게 웃더니 철마각을 펼쳤다.
뇌성벽력(雷聲霹靂)같은 석진의 발차기는 정원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자 이성을 잃은 백팔동검수들은 내상을 당했다는 사실도 잃어버리고 석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촛불을 향해 돌진하는 부나방과 다를 봐 없었다.
“저놈을 죽여!”
“우와아~.”
백팔동검수들이 광분할수록 석진의 눈동자는 차갑게 변해갔다. 이성을 잃고 무모하게 움직일수록 쉽게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궁무인은 내원 밖에서 벌어지는 참사와 내원 안에서 석진이 백팔동검수를 상대로 펼치는 살육을 보며 표정이 흉측하게 변했다.
“막아라! 어서 막아!”
남궁무인은 고함치다가 담장 위에서 살육을 벌이고 있는 좌조의 대원을 향해 검을 뽑아 들고 날아갔다. 표적을 향해 날아가는 남궁무인의 검은 일체 변화가 없었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헉!”
좌조 대원은 살육을 저지르는데 정신이 팔려 남궁무인의 기습을 눈치 채지 못했다가 눈앞에 검이 도달하자 신음성을 냈다.
쩡.
남궁무인의 검을 피하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피하려고 마음먹는 순간 남궁무인의 검 끝이 이마를 찍어버렸다.
“감히 본 가에 난립해 살육을 저지르다니. 본 가를 무식한 팽가 놈들과 같이 보는 것이냐.”
남궁무인은 이마에 붉은 홍점이 찍힌 시체에다 화풀이를 한 뒤 다른 좌조 대원을 향해 날아갔다. 또 하나의 표적은 담장 밖에서 일대도살을 저지르고 있는 좌조 조장이었다. 남궁무인은 전설적인 자객 홍매의 살인검초인 일점홍을 좌조 조장을 향해 펼쳤다.
채챙.
남궁무인의 검선과 좌조 조장의 도첨이 자석처럼 붙어버렸다.
“남궁가의 주인이 자기 가문의 검법을 버리고 자객의 검을 사용하다니. 웃기는 일이군.”
“흥! 일점홍은 내가 사용하는 검초의 하나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보다 너희들이 팽가를 멸망시킨 자들이냐?”
남궁무인은 하북팽가의 멸문 소식을 듣고 다음 상대가 남궁세가라고 판단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석진이 좌조와 한패라고 생각해 숨겨둔 전력을 드러내는 실수를 했지만, 좌조의 기습을 받은 뒤 어느 정도 사정을 파악한 것이다.
“정확하다. 그리고 오늘 남궁가는 팽가의 뒤를 따를 것이다.”
“크크크, 웃기는 소리군.”
남궁무인은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내원에 살고 있는 네 놈의 가족을 믿고 있다면 일찍 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무, 무슨 소리냐?”
남궁무인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가족을 피신시켜 두었다. 내원이 빈 이유는 단순하게 석진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문이 멸망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면 피신했던 가족들이 남궁세가를 재건하도록 준비를 해둔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은현산장(隱現山莊)을 구경하고 왔지.”
“이, 이 놈!”
“살아있는 것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
“으아아~.”
은현산장은 남궁무인이 가족들을 피신시킨 장소였다. 남궁무인은 가족들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미쳐버렸다. 괴성을 내며 좌조 조장을 향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곡도를 4단계까지 도달한 좌조 조장의 능력은 남궁무인이 10명이 합공해야 겨우 상대할 수 있는 경지였다.
이성을 잃고 광분한 상태로 덤벼서는 상대할 수가 없었다. 좌조 조장은 아홉 번의 수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남궁무인을 두 동강내버렸다. 남궁세가의 주인을 죽였지만 좌조 조장의 얼굴에는 특별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좌조 조장에게 있어 남궁무인은 죽여야 할 남궁가의 한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좌조 조장은 남궁가의 혈족들을 사냥하기 위해 또다시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으아악.”
“사, 살려줘~. 크악~.”
남궁세가의 대지는 피의 축제로 붉게 물들었다. 달이 지고 태양이 떠올라 아침이 왔을 때 광란의 축제는 끝이 났다. 남궁세가의 건물 곳곳은 화염에 휩싸여 불타올랐고 시체가 대지를 덮어 버렸다.
“끝인가...”
피로 목욕을 한 좌조 조장은 살육의 현장을 망연히 바라보며 힘없이 독백하며 진저리쳤다. 자시에 시작해 진시에 끝난 악몽의 밤을 떠올린 것이다.
“조장.”
“몇 명인가?”
“다섯이오.”
“그럼 나를 포함해 여덟 명이 살았군.”
좌조 조장 뒤로 살아남은 일곱 명의 대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피로 목욕을 했는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붉은 선혈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원 상처가 가득했고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사람은 세 명이나 됐다.
“정말 다행이군. 처음 남궁가를 칠 때만 해도 전원 옥쇄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만큼이나 살아남을 줄이야.”
“저 친구가 아니었다면 모두 죽었겠지.”
좌조는 일제히 시선을 석진에게 향했다. 석진은 몸에 여덟 자루나 되는 칼을 박은 채 정자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좌조 조장은 석진에게 걸어갔다. 다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네가 싸우는 것을 봤네.”
“나는 당신이 도살하는 것을 봤소.”
석진은 쌀쌀맞게 되받아쳤다. 그러나 좌조 조장은 석진의 무례한 언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역혈공과 철마각을 익혔더군. 그것도 4단계에 도달했어.”
“당신은 귀곡도를 4단계까지 익히지 않았소.”
“그렇군. 우리는 강호7대금지무공을 익힌 동일한 특징을 가졌군.”
“만심진광과 부동심결까지 익혔고 남궁가에 원한을 가진 점까지 생각하면 같은 점은 생각보다 많은 거 같소.”
“그렇군. 자네 말대로군.”
석진과 좌조 조장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으핫하하.”
“하하하.”
갑자기 두 사람은 시선을 거두고 통쾌하고 웃었다.
“자네 덕분에 동료의 피해가 줄었네. 고맙네.”
“아니오. 댁들이 남궁가의 잡졸을 처리해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소. 그러니 피장파장으로 여깁시다.”
“그런가. 그렇다면 이만 헤어져야겠네.”
“잘 가시오. 나는 피곤해 여기서 쉬었다 갈 생각이오.”
“그러시게. 우리는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는 대로 떠났겠네. 언젠가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도록 하세. 그럼 잘 있겠나.”
좌조 조장은 석진에게 포권을 하고는 뒤돌아갔다. 석진은 좌조 조장이 떠나자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맑구나. 정말 맑아. 피로 물든 지상과는 너무나 다르구나.”
석진의 독백을 뒤로 하고 좌조는 사라졌다. 죽은 형제들의 시신을 수습하고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산동의 어느 이름 없는 계곡에도 대량학살이 벌어졌다. 맑게 흘러야할 시냇물은 새빨간 붉은 피가 흐르고 푸르른 잎사귀가 무성하게 뒤덮여 있어야 계곡에 시체가 가득했다.
“잘못됐어. 이건 잘못된 일이야...”
“그런 거 같소. 조장.”
300여구에 달하는 시체들 한복판에 백혼의 우조가 망연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이 따위 놈들이 남궁가의 정예일 리가 없지. 게다가 백팔동검수라는 예슨 네놈들은 어디에 간 거야!”
“혹시 남궁가 놈들이 본 대의 움직임을 숨기려고 저 위장세력을 드러나게 한 것인가?”
우조 조장은 시체들을 노려보며 독백했다.
“아닙니다.”
“아니, 자네는!”
백혼의 다섯 그림자 중에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자 우조 조장은 의아해했다.
“저들은 남궁가에서 보낸 정예가 맞습니다.”
“남궁가의 정예가 저리 약하단 말인가? 그리고 백팔동검수는 어디로 간 건가?”
“백팔동검수는 모두 남궁세가에 갔습니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진정한 정예는 오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정예라는 이름만 달고온 얼치기들이지요.”
“그럼... 좌조가 위험해!”
우조 조장은 남궁세가로 떠난 좌조 일행이 떠올라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늦었습니다.”
“설마... 가주님께서 좌조를 버렸단 말인가? 어서 말해보게.”
우조 조장이 그림자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림자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말인가? 말 좀 해보란 말이야!”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다만 백영대가 모르게 육가문을 공격하라는 가주의 뜻을 전하는 것 뿐 입니다.”
“백영대 모르게! 흐흐흐~. 그런가. 그랬단 말인가. 갑자기 목숨을 걸고 남궁가의 정예를 기습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좌조를 팽가와 남궁가에게 보낸 것도... 모든 영광을 악비영에게 돌리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우조 조장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건 아닙니다. 오직 산동악가의 명예를 위해서입니다.”
“크크크. 좋아, 그렇다고 해두지. 본 가의 명예를 위해 명령대로 따라 주겠어.”
우조 조장은 오른 손을 번쩍 들었다. 조원들에게 모이라는 신호였다. 살아남은 우조 조원들이 집결했다. 남궁가의 무인 300명은 비록 정예는 아니었지만 수의 우세로 인해 우조 역시 피해를 당했다. 우조의 생존자는 조장을 비롯해 모두 열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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