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죽을까요?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다만 죽음의 원인을 기준으로 크게 나누자면 개인적 죽음과 사회적 죽음이 있을 겁니다.
이런 작업을 시작한 사람은 <자살론>으로 유명한 에밀 뒤르켐입니다.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을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하였고, 이러한 작업은 현대 사회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제시하였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회과학을 전공한다면 칼 맑스, 에밀 뒤르켐, 막스 베버의 세가지 전통은 반드시 배워야 할 정도입니다.
뒤르켐의 전통에서 가장 핵심 키워드는 바로 '연대'입니다.
근대 이전의 인간은 비록 절대 다수가 농노이긴 하였으나, 카톨릭의 품 속에서 그저 선조가 살던 그대로 단순하게 살면서 우리성(We-ness)를 형성하였습니다. 뒤르켐은 '기계적 연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 근대로 들어서며 '카노사의 굴욕'이 보여주었듯이 신의 대리인이었던 교황은 왕에게 무릎꿇었고, 신의 이름을 빌어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던 절대왕조는 서서히 상공업자들에게 압박받은 끝에 혁명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의 사람들은 분업체계속에서의 의존관계에 기반하여 우리성을 형성합니다. 이는 '유기적 연대'라고 불렸습니다.
여러가지 이야기가 더 있지만, 이 글에서 중요한 지점은 이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전환되는 세속화의 과정, 다르게 말하자면 질서의 공백기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발생하였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저 개인이 목숨을 스스로 끊은 것이 사실로 보이지만, 맥락을 들여다보면 사회에 의해 개인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이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자살이 그 유명한 '아노미적 자살'입니다.
다만, 하나 보론이 필요합니다. '아노미'라는 단어를 생각하다보면 아노미의 반대말로 '질서'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과연 어떤 상태가 '질서'일까요? 어떤 상태가 되어야 '아노미'는 끝나는 걸까요? '아노미'의 반대 상태는 영속적일까요?
저는 아노미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노미가 끝난다는 것은 우주의 엔트로피가 멈췄다는 의미랑 똑같습니다. 사회발전 혹은 이행(Transition)이 멈춰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저 덜 아노미적이냐 혹은 더 아노미적이냐라고 정도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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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서로를 너무 사랑하다 못해 한날 한시에 죽는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눈물 나올만큼 로맨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래 기사를 보시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70년간 해로하다 한날 한시에 돌아갔다면 분명히 축복해야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 계기가 기가 막힙니다. 70주년 결혼기념일 파티에서 자녀를 통해 코로나19에 감염되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사건의 잘못은 누가 져야할까요?
바이러스를 만들거나 초기 대응에 실패하여 전세계에 퍼뜨린 중국의 시진핑일까요, 방역에 실패하여 자국민을 죽게 만든 미국의 트럼프일까요, 아니면 그저 부주의하였던 자녀들 개인의 책임일까요?
이들에게 귀책사유가 100%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의 비중은 어떨까요? 당장 중국과 미국이라는 민족국가내 행정당국의 귀책사유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누구도 이 부부가 죽길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우리가 못보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이 사람이 죽길 원하지 않았다. 이 지점이 다음으로 소개해드릴 죽음과의 연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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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떠올리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요즘 어린 조카를 돌보고 있어서 그런지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안고있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부조리극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절은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칩거하는 곳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법조계에서 절간에서 공부했다는 에피소드가 심심치 않게 있을 정도니까요.
또한 기본적으로 절은 부처님의 사랑을 공부하고 실현하기 위해 수련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고기조차 안먹을 정도로 생명존중을 실현하려는 장소이죠.
하지만 이러한 절에서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어미가 자식을 2시간 동안 제 손으로 때려 죽였습니다.
이때 자식은 저항하지 않고 2시간동안 매질을 고스란히 받다가 죽었고요.
그리고 그 이유는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서 거듭하여 낙방하였는데, 어머니가 보기엔 공부하는 태도조차 좋아 보이지 않아 속상한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요? 자식이 잘되라는 마음을 품었던 죄밖에 없었던 어머니일까요.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결국 어머니는 아들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일까요?
만약 아들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공무원이 아닌 좋은 일자리가 있었다면 굳이 이렇게 살아야 혹은 죽었어야 했을까요.
물론 '이상적인 좋은 일자리'라는건 결국 TO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대통령이 될 수 없듯이요.
사실 우리나라에 '이상적인' 일자리가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중소기업은 사람 죽듯이 갈구면서 돈도 조금 준다면, 대기업은 돈은 좀 주는데 더욱 사람을 죽듯이 갈구니까요.
아니, 진짜로 사람을 일 시키다 죽여왔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삼성 반도체 신화이고 여러분들이 구매한 삼성전자입니다. 삼전의 붉은색 상승 그래프는 사실 일하다 백혈병 걸린 노동자분들의 오염된 피를 채워 올라갔던 겁니다.
그리고 대기업 위주의 산업구조속에서 절대 다수의 노동자는 하청 노동자가 될 수 밖에 없고, 하청은 다시 재하청으로 이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모두는 원청이 분담해야 할 위험을 다 떠안는 김용균씨가 되고요.
현실이 이럴진데 우리는 어머니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냉정하게 말하자면 쥐꼬리만한 월급과 갈굼에 시달리며 하청으로 일하다 사고로 죽건, 공무원 시험만 준비하다 계속 실패하여 자살을 하건 어차피 일찍 가는거 그게 그거 아닐까요?
이게 바로 우리 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너무 익숙해져서 슬픈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지만요.
우리들은 부조리극 속에 살고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 분들께 죽으라고 하지도 않았고, 죽길 원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죽게 되면 인사고과로 곤란해지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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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죽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고, 불행히도 '대안'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가지고 있지 않은 채, 지금 그나마 쥐고 있는 땟목을 쥐고 세계와 역사라는 물결위에서 떠내려가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