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국어시간이나 문학시간에 졸지않았으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신라향가인 '처용가'.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處容郞 望海寺) 편에 등장하는데, 그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구절은 바로 이 구절일 겁니다
처용의 아내는 너무나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그녀를 흠모하였다. 그래서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중에 처용의 집으로 가서 몰래 그 여자와 잤다. 처용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곧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다가 물러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서라벌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은 정말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자신의 부인이 귀족이나 왕족에 의해 겁탈당하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못한 남편의 이야기라는 해석도 있기는 합니다(고등학교 문학시간에 처음 듣고는 좀 충격이긴 했죠).
처용이 헌강왕 재위시절이야기니 바로 뒤가 진성여왕(정강왕은 1년만에 죽음)인데, 이 즈음가면 신라의 말기적 현상을 나타내는 사료들이 곳곳에 - 물론 프로파간다일 가능성도 있으나 -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런일이 발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뭐 사실 신라하대만 그랬던 것도 아니니까요(현대에도 가끔 일어나는 걸 보면....)
근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여성들의 납치, 강간 혹은 원치않는 임신관련 이야기가 이 시대 유명인물들의 '탄생설화'에도 있다는 겁니다.
“옛날 어떤 부자가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살았는데, 딸 하나가 있었으니 자태와 용모가 매우 단정하였다. 그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제 침실에 와서 함께 자곤 합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서 그 자의 옷에 꽂아두어라.’라고 하였고, 딸은 그렇게 하였다. 날이 밝자 북쪽 담장 아래에서 실을 찾았는데,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그 후에 임신을 하여 남자 아이를 낳았다......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
삼국유사에 있는 견훤의 탄생설화 중 하나입니다. 고려가 통일을 해서 용이 지렁이가 된건지는 차치하고 중요한 건 이야기의 내용상 견훤어머니가 모르는 남자가 밤에와서 잤는데 임신을 했고 그 때 태어난 아이가 바로 견훤이었다는 거죠.
이 이야기때문에 나중에는 견훤이 결정적으로 패한 고창전투에서 강에 소금을 뿌려 견훤이 패했다는 전설까지 내려올 정도....
......삼태사가 견훤을 물리칠 묘안을 고민하던 중 해결책을 찾아 결국 견훤을 이기게 되었다. 삼태사가 하는 말이 “지렁이는 물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힘을 더 쓰게 되지. 힘이 빠지면 물속으로 들어가서 힘을 내서 나오고, 또 힘만 빠지면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단 말이지. 몇 번 싸워 보니 그것을 알게 되었단 말이지. 그래서 또 싸우는데 견훤이 또 물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하여 이번에는 사람을 시켜서 간장과 소금을 몽땅 모아서 물에 쏟아 부었어. 지렁이는 소금이 닿으면 몸이 녹거든. 견훤은 지렁이가 화한 사람이니 소금이 몸에 닿자 그만 힘이 사라져 버렸지. 그래서 이긴 거야” 하였다. 후에 나라에서는 안동 전투에 참여한 김씨·권씨·장씨에게 벼슬을 주었다. 그 벼슬 이름이 바로 삼태사이다.
-將軍甄萱-三太師 『안동시사』
우리가 소금물 잘 풀어뒀습니다 견훤은 곧 질거에요
하 놔 진짜. 패한 것도 서러운데, 내가 지렁이라니
근데 견훤은 패한 인물이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렇다면 이 사람은 왜....
신라시대에 최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찍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이 순탄치 못하더니 이번에 문창령이란 벼슬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근심이 가득했다. 그의 아내가 걱정을 하며 물었다. "벼슬을 제수 받은 것은 경사인데 어찌하여 근심이 많으십니까?"
최충이 말했다. "벼슬을 받아 기쁘기는 하지만 문창에는 이상한 일이 있어 그곳 사또로 가는 사람은 귀신에게 아내를 빼앗긴다는 말이 있소."그러자 아내도 함께 근심하였다. 그런데 최충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귀신이 나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황당무계한 말인 것 같았다. 그래서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부인의 손에 색실을 매어두었다가 그 실을 따라가면 부인이 간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문창읍에 도착했다. 그곳의 노인들에게 물으니 과연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충은 시비에게 내당을 엄히 지키게 하고 자기의 꾀대로 색실을 부인에게 묶어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공사를 보고 있는데 오시쯤 되자 갑자기 먹구름이 사방에서 몰아치고 뇌성이 땅을 무너뜨리는 듯하더니 내당을 지키는 시비들도 놀라서 정신을 잃고 마루에 쓰러졌다. 잠시 후에 바람이 그치고 구름도 걷히어 시비들이 일어나 살펴보니 방문은 닫혀 있는데 사또 부인이 간 데가 없었다. 최충이 실을 따라가 보았더니 뒷산에 있는 바위틈으로 들어가 있었다. 하인의 말을 들으니 한밤중이 되면 그 바위가 스스로 열린다고 하였다. 최충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과연 바위틈이 열리자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바위 안은 대낮같이 밝았다. 넓고 비옥하여 갖가지 꽃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졌을 뿐 사람의 자취는 없었다. 다만 이상한 짐승과 기이한 새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한 채의 큰집이 있었다. 방안이 웅장하고 화려한데 그 안을 들여다보니 누런 금돼지가 최충의 아내 곁에 누워 무릎을 베고 있고 그 앞에는 십수명의 미녀들이 늘어서서 풍악을 울리고 있었다. 아마도 지난날 잡혀갔던 사또의 아내들인 듯했다.
최충의 아내가 남편이 온 것을 눈치채고 금돼지에게 물었다. "제가 인간세계에서 들으니 선경지인께서는 사슴 가죽을 보면 죽는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하옵니까?""사슴 가죽을 씹어서 머리 뒤편에 붙이면 병이 들어 죽게 되오."금돼지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부인이 생각해보니, 전부터 지니고 있던 약주머니의 끈이 바로 사슴 가죽이었다. 그래서 돼지의 말대로 했더니 과연 돼지는 죽고 충의 부인과 다른 부인들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충의 부인이 금돼지에게 끌려갔을 때가 임신 4개월이어서 돌아온 지 6개월만에 아들을 낳았다....
최고운전(崔孤雲傳)
근데 소설 내용 비슷한 거 일본애니에서도 본 기억이....
최고운(최치원)전은 조선시대 소설로 당연히 신라때부터 내려오는 설화는 아닐 겁니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버전이 다른 지방에도 또 있습니다.
전북 군산에서 내려오는 내초도 금돈시굴전설(內草島金豚始窟傳說)이 바로 그것인데, 이번에는 어머니가 납치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인 최충이 금돼지에게 납치되어서 금돼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것이 바로 최치원이라는 겁니다.
우리집안을 개족보로 만들어도 유분수지 -_-;; 아빠랑 엄마랑 다 가져다 붙이냐!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유명인물들의 탄생설화가 부모를 미화하여 유명인사들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려는 것임을 본다면, 저 최치원과 견훤의 탄생설화는 원치 않는 임신이나 부모의 납치가 끼어있다는 점에서 참 특이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기사 강릉(명주)태수인 순정공(純貞公)부인인 수로부인이 용왕에게 납치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풀려난다는 해가사(海歌詞)도 전해져 내려오는 걸 보면 (근데 순정공이 성덕왕때 인물인 김순정(金順貞)이라면 진골귀족조차 지방에가면 부인이 납치당했다는 거 ㅎㄷㄷ), 사람들의 이미지 속에 신라하대는 일반사람들은 물론이고 수령이나 귀족까지 납치가 일어났다는 이미지가 강했다는 의미겠죠.
첫댓글 금돼지가 최충을 임신시켰다고....?
이거 완전 겐고로 만화 그거..
앜ㅋㅋㅋ 당연히 임신 및 출산은 금돼지가 ㅋㅋㅋ 최충은 강제로 임신시키도록 강요(?)받은거 ㅎㅎ
@배달민족 아..겐고로가 아니라 히토미였네요ㅋㅋㅋ
@G-VIRUS 근데 남자가 납치되어서 원치 않게 아들을 봤다는 설화는 보통 없는데 특이하긴 합니다 ㅎ
@배달민족 납치 수준까진 아녀도 그리스 신화에는 비슷한게 꽤나 나오죠. 미소년을 발견해 냅다 덥쳐버려 그의 아기를 낳는, 아프로디테라던지... 아프로디테라던지... 아프로디테라던지 말이죠ㅋㅋㅋㅋ
@bamdori 그래도 죽이는 아르테미스 보다는 살려서 데려가는 아프로디테가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ㅋㅋㅋ
@배달민족 아르테미스는 본인이 죽였다기보단, 오빠란 놈이 극강의 시스콘 기질이 있는지라ㅋㅋㅋ
그나저나 생각해보면 한창 그곳에 눈뜰(?) 나이에 무려 미의 여신이 덮쳐버리면 “낫다” 수준이 아니라 감사합니다 이긴 하겠네요ㅋㅋㅋ
@bamdori 참고로 그 시스콘기질(?) 반영한 게임이 바로 1989년에 나온 페리오스(Phelios)죠 ㅋㅋㅋㅋ 근데 아르테미스가 잡혀서 아폴론이 구하러 간다니 ㅎㅎ 뭔가 상상이 안가네요 ㅋㅋㅋ
설화들이 재밌네요 납치 설화들을 보니 신라하대에 혼란하고 치안공백 상황을 보여주는건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