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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만난 名문장] 좋은 점을 보세요
“어떤 사람의 나쁜 점을 보면 좋은 점이 안 보여요.
하지만 좋은 점을 보면 나쁜 점도 같이 보여요.”
―이성복 ‘무한화서( 無限花序 )’ 중
호두알은 까먹으면 끝이다. 이런 호두알 까먹기처럼 살 수는 없어서,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를 갈망하게 됐다. 책을 통해 제자가 됐다고 자처하며 이성복 시인에게 만남을 청했다. 책 밖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싶은 절실함이 시인에게 가닿았나 보다. 구파발에 있는 작은 우동집에서 우리는 면을 나눠 먹었다. 그리고 공원을 산책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에서 들었던 목소리, 시와 삶에 대한 명언을 잃을세라 나는 두려웠다. 돌아오자마자 기록하려는데, 아뿔싸, 벌써 아득하다. 그립다. 이럴 때 책을 펼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어떤 사람의 나쁜 점을 보면 좋은 점이 안 보여요. 하지만 좋은 점을 보면 나쁜 점도 같이 보여요. 작은 것을 보면 그 뒤의 큰 것이 안 보여요. 하지만 큰 것을 보면 그 안의 작은 것도 같이 보여요. 모든 게 선택의 문제예요. 우리가 사는 삶은 우리 자신의 선택의 결과예요.”
머리맡에 두고 읽는 시론집 ‘무한화서’의 문장은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세속의 상투어와 거리가 있다. 더 크고 정밀하게, 더 온화하고 날카롭게 세상을 대하는 수련의 차원에서 솟은 말이다.
글을 책으로 만드는 출판인으로서,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원고의 장점을 먼저 보고, 그 장점을 가릴 단점을 덜어내는 게 업무다. 단점을 보기 시작하면 내 발에 걸려 넘어지는 꼴이다. 그 선택의 기준과 감각을 터득하기 위해 세상의 책을 읽는다. 책의 지혜는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순간에 드러나기도 한다. 지혜의 불꽃이 점화되고 연소되면서 스스로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고 믿는다. 시인의 목소리는 아득해져도 책의 문장은 갈수록 선명하다. 역시 좋은 점이 보인다.
◆「무한화서」- 이성복(문학과 지성사. 2015)
내 작품을 쓰면서 다른 작품을 읽으면 방해가 된다기보다 배우는 게 많다. 특히, 이 잠언집은 더욱 그러하다. 이 글도 참 어렵다. 짧게 쓴 글이라 더 어렵다. 그래서 한 번에 많이 읽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지만, 중간중간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이 책은 2002년에서 2015년까지 대학원 시 창작 강좌 수업 내용을 아포리즘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자서: 자기가 쓴 책에 쓴 서문)
― <무한화서>, 자서
책의 차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언어, 대상, 시, 시작, 삶. 그러니까 꼭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어도 뭔가를 쓰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도움이 아주 많이 될 것이다. 언어 편에서 제목을 지은 이유가 나온다.
'화서(花序)'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가리켜요. 순우리말로 '꽃차례'라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有限花序)'는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밖으로 피는 것이고(원심성·遠心性), 성장에는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無限花序)'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것이에요(구심성·求心性). 구체에서 추장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1. 유한꽃차례[有限花序]는 위에서 밑으로, 혹은 중앙에서 가장자리로 피는 꽃으로 이루어진 꽃차례이다. ⓵ 단정(單頂)꽃차례: 꽃자루에 꽃이 하나씩 핀다. 목련이 이 꽃차례이다. ⓶ 취산(聚繖)꽃차례: 꽃대에서 작은꽃자루가 자라나며 꽃은 작은꽃자루에서 핀다. 총상꽃차례와 비슷하나 취산꽃차례는 유한꽃차례이고 총상꽃차례는 무한꽃차례이다. 대표적인 나무로 층층나무가 있다. ⓷ 배상(杯狀)꽃차례: 꽃턱 안에 암꽃과 수꽃이 함께 핀다.
2. 무한꽃차례[無限花序]는 밑에서 위로, 혹은 가장자리에서 중앙으로 피는 꽃으로 이루어진 꽃차례이다. ⓵ 원추(圓錐)꽃차례: 총상꽃차례 여럿이 모여 하나의 꽃차례를 이룬 것이다. ⓶ 미상(尾狀)꽃차례: 꽃대가 밑으로 처졌으며 꽃은 양쪽에 핀다. 대표적인 나무로 버드나무가 있다. ⓷ 작은이삭꽃차례: 소수화서(小穗花序)라고도 한다 작은이삭같은 꽃들이 모여 꽃 하나를 이룬다. ⓸ 이삭꽃차례: 수상화서(穗狀花序)라고도 한다. 꽃대 끝에 달려서 꽃들이 이삭처럼 핀다. ⓹ 총상(總狀)꽃차례: 길게 자란 꽃대 양옆으로 작은꽃자루가 계속 나는 형태를 띈다. 대표적인 나무로 아까시나무가 있다. ⓺ 산방(繖房)꽃차례: 꽃대에서 작은꽃자루가 나며 꽃자루 끝에 꽃이 핀다. 밑에 있는 꽃자루가 가장 길며 위로 올라갈 수록 꽃자루가 작아지는데, 꽃들은 비슷한 높이에 있다. 유채가 이런 꽃차례를 이룬다. ⓻ 산형(傘形)꽃차례: 꽃대 끝에서 작은꽃자루들이 우산 꼴을 이루며 자라면서 그 끝에 꽃이 핀 것이다. 생강나무 꽃이 이런 꽃차례를 이룬다. ⓼ 두상(頭狀)꽃차례: 꽃대 끝에 작은꽃자루가 없는 꽃들이 모여 꽃 한개처럼 보이게 핀 것이다. 해바라기, 엉겅퀴 꽃이 이런 꽃차례를 이룬다.(Daum 사전)
―<무한화서>, 이성복, 11쪽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하는 글을 보면 정말 시는 아무나 쓰는 게 아니구나 싶다가도 나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오락가락한다. 짧은 글들은 시의 의미를 아주 깊숙하게 전달한다.
하려는 이야기는 일관성이 있다. 시를 쓰려고 하지 마라. 시가 너에게 오게 하라. 넌 잠깐 담는 수단에 불과하다. 쉽게 써라. 절제해라. 다 알지만 쉽지 않다.
권투선수 얼굴이 일그러지는 장면, 슬로우비디오로 본 적 있으시지요. 그런 느낌이 최고예요. 혹은 방망이에 맞은 야구공이 순간적으로 찌그러드는 모습.... 자신이 쓴 글에 그런 느낌이 살아난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요.
―<무한화서>, 이성복, 36쪽
정말. 그렇게 쓸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나는 계속 죽은 글만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도 있다.
'햇빛이 빛난다' 이건 사구예요. '햇빛이 울고 있다' 이러면 활구에 가까워요. 활구에는 언제나 말의 각이 있어요. 행과 행 사이에도 각을 세울 수 있어요. '햇빛이 울고 있다. 어디에서 본 얼굴이다.'
―<무한화서>, 이성복, 43쪽
○내게 필요한 말들.
상황을 단순하게 제시하고, 상황 자체가 얘기하도록 하세요. 상황이 스스로를 배반하는 지점까지 나아가게 하세요. 내가 그렇게 만들지 말로, 상황에게 그 일을 맡기세요. 상황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무한화서>, 이성복, 48쪽
글쓰기는 디테일에서 스케일로, 비루한 것에서 거룩한 것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 반대로 하면 웅변이나 선언문이 되기 십상이지요.
―<무한화서>, 이성복, 58쪽
대상의 모습을 다 그리려 하지 말고, 중요 부분만 포인트로 잡아내세요. 멀리 있는 대상을 줌렌즈로 끌어와 순간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하세요.
―<무한화서>, 이성복, 59쪽
아무리 비현실적인 것이라도 비현실적인 바탕을 만들어주면 현실적이 돼요.
―<무한화서>, 이성복, 66쪽
우리는 어차피 다 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 사실을 자꾸 상기시켜, 어쩌든지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어쩌든지 불편하게 만드는 게 시예요.
―<무한화서>, 이성복, 82쪽
시적 외양은 다 갖춰졌는데 와 닿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말의 꼬임이 없다. ○너무 복잡해서 흐름이 안 보인다. ○ 안 깎은 연필 글씨처럼 표현이 뭉툭하다. ○말의 드리블이 느리거나 서툴다. ○ 빌려 입은 옷처럼 멋 부린 느낌이다. ○세부가 없이 너무 담방하다. ○빤한 말장난을 하고 있다. ○ 처음부터 하려는 얘기가 다 보인다. ○ 머릿속에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 ○억지로 짜맞춘 느낌이다. ○이 시를 왜 썼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무한화서>, 이성복, 92쪽
문학은 무언가 만들어서 얻게 되는 게 아니고, 버려서 얻어지는 거예요.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 버린 다음이 문학이에요. '얻으려 하면 잃을 것이고, 잃으려 하면 얻을 것이다'라는 말은 문학에도 해당돼요.
―<무한화서>, 이성복, 104쪽
다 보고 나서도 한 번 더 봐야 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남의 말을 들을 때는 말과 말 사이 침묵도 같이 들어야 해요. 이것이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한 발 더 나가야 해요. 빛이 사라져도 사라졌다는 그 느낌은 남아 있잖아요.
―<무한화서>, 이성복, 107쪽
글쓰기가 놀이이고 모험일 때만, 무의식과 강박관념과 트라우마가 개입해요.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멋지고 치밀하게 묘사한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세수 안 하고 화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무한화서>, 이성복, 118쪽
할 때마다 잘 안 되고,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게 이 일이에요. 성공하려 하지 마세요. 본래 이 일은 실패하게 되어 있어요. 그냥 하세요. 다만 쉽게 가려 하거나 개똥철학 하지 마세요. 그건 남들 시켜 조상 제사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평생 내 집 마련 못 해요.
―<무한화서>, 이성복, 126쪽
필요 없는 것을 줄여가는 게 글쓰기예요. 쓰고 나서, 아깝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제일 먼저 쳐내야 해요. 대개는 너무 튀니까요.
―<무한화서>, 이성복, 132쪽
자기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중요해요.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가봐야 알아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면, 비로소 고요하게 돼요. 그와는 달리, 뭔가 깨달았다는 생각이 들면 자기에게 속는 거예요.
―<무한화서>, 이성복, 133쪽
내가 세상을 업는 게 아니라, 세상에 내가 업히는 거예요. 나를 찌르지 않고는 남을 찌를 수 없어요. 남들에게서 내가 비난하는 것은 내 안에 다 있어요. 그걸 잊어버리면 자기한테 속는 거예요. 그래도 많이 힘들 때는, 내가 처음에 왜 시를 쓰려 했는지 생각해보세요.
―<무한화서>, 이성복, 145쪽
함부로 하고, 제멋대로 하는 건 아름다움과 정반대예요. 아름다움이 윤리와 떨어질 수 없는 건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에요. '씨발놈' 하고 싶은데, 한번 꿀꺽 삼키고 참을 수 있는 것. 글 쓰는 사람은 자기 글로 인해 불편함을 겪어야 해요.
―<무한화서>, 이성복, 155쪽
삶과 글은 일치해요. 바르게 써야 바르게 살 수 있어요. 평생 할 일은 이 공부밖에 없어요. 공부할수록 괴로움은 커지지만, 공부 안 한다면 내 다리인지 남의 다리인지 구분할 수 없어요. 젠 체 안 하고 남 무시 안 하려면 계속 공부해야 해요. 늘 문제되는 것은 재주와 능력이 아니라, 태도와 방향이에요.
―<무한화서>, 이성복, 167쪽
○다음 글은 절묘한 비유였다! 웃음 속에 깨달음.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딱 멈출 때 힘이 생겨요. 선악이 아니라 성숙과 미성숙이 있을 뿐이라 하지만, 결국 자기 통제력의 문제겠지요. 죽을 때 누구나 속옷을 더럽히는 건 괄약근이 풀어지기 때문이라 해요. 예술 또한 괄약근의 문제가 아닐까 해요.
―<무한화서>, 이성복, 179쪽
○그리고 마지막.
우리는 망망대해의 물거품 하나에도 못 미쳐요. 문학이란 건 허망한 존재가 자기 허망함을 알고 딴짓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에요. 비참하게 깨져도 한심하게 무너지지는 않겠다는 것. 모든 것이 허망하다 해도, 허망하지 않은 게 꼭 하나 있어요. 일체가 허망하다고 말하는 이것! 이 공부를 오래 해야 독하게 버려져요.
―<무한화서>, 이성복, 182쪽
✵이성복 시인은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했다. 1977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시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남해 금산』『그 여름의 끝』『호랑가시나무의 기억』『아, 입이 없는 것들』『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산문집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등과 시선집 『정든 유곽에서』, 잠언집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산문집 『꽃핀 나무의 괴로움』, 문학앨범 『사랑으로 가는 먼 길』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계명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내가 만난 名문장, ‘좋은 점을 보세요’(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동아일보, 2025년 08월 04일(월)〉, 《Daum, Naver(인터넷 교보문고)》/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