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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연옥 작가 ‘화진포의 성’ 소설연재/부제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6
‘화진포의 성’ 1~26회까지
황연옥 작가 ‘화진포의 성’ 소설연재/부제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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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아동문학가이신 황연옥 권사님은 강원고성신문에 전기소설 <화진포의 성>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이어서 올려둡니다.^^
화진포의 성 [27]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27]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05월 31일(월) 20:32 [강원고성신문]
나무들이 연둣빛 이파리를 틔우고 아름다운 꽃들의 향기가 바람결에 풍기는 4월이다. 사랑을 나누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숲속에 가득하였다.
“메리언, 당신을 사랑해요. 나랑 같이 결혼해서 조선으로 가서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는 일을 하지 않겠어요?”
셔우드는 메리언에게 정중하게 프러포즈를 했다. 그녀는 미소지으며 셔우드가 꽂아주는 학생 클럽의 핀을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태도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행복했고 숲속의 생물들도 자신들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얼마 후, 그들은 약혼하였다. 약혼 소식은 빠른 속도로 대학에 퍼졌다. 친구들은 의대생이 약혼하면 힘든 의대 공부를 중단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걱정을 했다. 어떤 친구는 “주변의 의대 여학생 중에서 짝을 찾지 그랬어!” 하며 심지어 어떤 여대생의 이름까지 들먹거리며 말하기도 하였다. 그 같은 말들은 셔우드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미 메리언과 사랑에 푹 빠져 있었다. 매일 구름 속에 둥실둥실 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행복한 구름 위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지상으로 내려와야 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의 현실은 눈앞에 다가왔고 미국은 공식적으로 이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미국의 적령기의 남자들은 모두 징집 대상이었다. 셔우드는 조선에서 안식년 휴가를 받고 미국으로 오실 어머니(닥터 로제타)를 기다리며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여 의무 보충대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마운트 유니언 대학에서 의예과를 마쳤으므로 의무 보충대에 입대하면 원하는 의료분야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해 가을, 피츠버그 대학교의 의과대학에 있는 육군 의무훈련센터에 가서 신고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이곳에서 입대 병사들은 특수훈련을 받아야 했다. 의과대학 가까이에 간이 훈련소가 세워졌고 훈련장은 대학 운동장이었다.
훈련, 훈련, 또 훈련,…….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는 너무나 지쳐서 옷을 벗을 기력조차 없었다. 모든 생활 리듬이 깨지고 오직 의학 공부만 일상의 생활이었다.
조선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메리언을 인사시켰다. 어머니는 메리언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메리언은 어머니를 형부 라인 위버 목사님께 소개하여 양쪽 어른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스페인 인플루엔자’라는 유행성 독감이 발생했다. 시의 보건부에서 공동체 모임을 금지하였고 선교위원회가 계획했던 모든 모임이 취소되었다.
인플루엔자는 계속 번져 셔우드가 묵고 있는 간이건물까지도 전염되었다. 아침마다 한두 사람씩 들것에 실려 병실로 나갔다. 어떤 사람은 시체가 되어 옮겨졌다. 다음에는 누구 차례가 될지 예측할 수가 없는 공포가 가득한 상황이었다. 이곳이 전쟁터보다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 요원이 부족 하자 보건성과 필라델피아 자선기관들은 안식년 휴가로 쉬고 있는 어머니를 징용하여 환자를 치료하게 하였다. 닥터 로제타 홀은 조선에 선교사로 가서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894년)을 비롯하여 갑신정변(1984), 동학란(1894) 등 크고 작은 전쟁을 여러 번 겪었다.
아버지 닥터 홀이 전쟁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전염병으로 돌아가셔서 마음의 상처가 남아있을 텐데도 전쟁부상자를 치료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지친 기색이 없이 평화로웠다. 하나님께서 주신 의사로서의 특별한 소명과 사명이 있는 분이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셔우드도 인플루엔자에 전염되었다. 약혼녀 메리언에게 편지로 감염 사실을 알렸더니 곧바로 훈련소로 찾아왔다. 그녀는 공동생활을 하는 훈련소에서 이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동안 고심하더니 용감하게도 직접 셔우드의 상관을 찾아갔다.
“상관님, 저는 셔우드의 약혼녀입니다. 셔우드를 일반 주택으로 격리시켜 적절한 치료와 간호를 해서 완쾌되어 속히 부대로 복귀 할 수 있도록 선처해 주십시오! 그것이 본인은 물론 부대와 동료들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 요청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는데도 상관은 고심 끝에 허락하였다. 고열과 두통에 시달리던 셔우드는 용기 있고 당찬 메리언의 조치 덕분에 쉽게 회복하였다.
1918년 11월 11일, 전쟁 휴전의 낭보가 날아왔다.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셔우드는 군에서 제대하려면 더 복무해야 했다. 의료 훈련은 계속되었으나 이른 아침의 군사훈련이 없어져 공부할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 동시에 병영 밖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어머니도 징용 의사 기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셔서 당분간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는 방을 얻었다. 집주인 캐시디 부인은 어머니 친구인 울번 여사의 자매였는데 이분은 훗날 셔우드와 메리언의 조선에서 의료선교를 할 수 있도록 중대한 영향을 주신 분이다.
메리언은 마운트 유니언 대학에서 학교생활에 충실하였고 의대에 들어갈 자격을 따기 위해 여름학기에도 수강하여 대학을 빨리 마치기로 하였다. 주말에도 학비를 벌어야 하므로 자주 못 만나 편지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미래를 설계하였다.
메리언의 대학 공부가 끝날 무렵 셔우드도 군에서 명예제대를 하였다. 의과대학 진학을 위한 상담을 하였다. 아버지 닥터 홀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오마르 킬본과 그의 아들 레슬리 킬본은 토론토에 있는 대학에서 의학교육을 받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하였다. 깊이 생각하던 셔우드도 그들의 생각에 동감했다.
미국 감리교회선교회와 펜실바니아 의료선교협회에서 학비를 보조해 주기로 하였다. 이 보조금과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면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업 때문에 미국 시민권을 받기 위해서 최소한의 체류 일자를 지키지 못해 셔우드는 다시 캐나다 시민이 되었다.
셔우드가 토론토 대학에 다녔던 그 무렵, 토론토 대학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연구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닥터 프레드릭 그랜트 밴딩(Frederick Grant Banting)과 닥터 촬스 하버트 베스트(Charl Herbart Best)가 당뇨병 치료제인 인슐린을 연구하고 있었다. 셔우드가 토론토 대학으로 편입하는 것을 도와준 닥터 레슬리 킬본도 이 연구팀의 한 사람이었다. 킬본은 셔우드를 실험실로 데리고 가서 연구팀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밤을 새우며 열성적으로 연구하는 모습을 본 셔우드는 큰 감동을 받았다.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헌신적인 사명감으로 연구하는 모습은, 훗날 조선에서의 결핵 퇴치를 위한 의료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다. 그들의 훌륭한 연구 결과는 몇 년 후 세계적인 의학지에 소개되어 크게 알려졌다.
메리언은 1920년 필라델피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녀는 정말 열심이었다. 목적을 향한 의지와 열성에 경탄할 뿐이었다. 메리언이 마운트 유니언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마치자 운이 좋게도 두 사람은 아르바이트를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유명한 ‘켈로그 결핵요양소’의 실험실에 같이 고용된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얼마나 오묘하신지!……두 사람은 이곳에서 결핵에 관한 실제적인 의료경험을 접할 수 있었다. 훗날 조선에서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한 준비를 시켜주신 것이다. 두 사람은 그동안 학교 공부로 서로 떨어져 있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은 날이 많았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함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그들은 자신에게 정직하기로 하였다. 결혼 후에도 학업을 계속하기로 굳게 약속하고 1922년 6월, 메리언이 마운트 유니언 대학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는 날, 결혼하기로 하였다. 결혼하면 학업을 중단할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는 주위 어른들과 일가친척의 염려와 조언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자신들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셔우드는 결혼식 전날, 대학에서 마지막 중요한 시험을 치르고 야간열차를 두 번이나 바꿔 타고 일리언스로 출발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 부서진 화물 열차가 선로에 가로누워 진로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어쩌나?’ 셔우드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지금 메리언의 대학졸업식에 참석해야 하고 오늘 저녁은 저희가 결혼식이 있는 날입니다. 일 분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저 고장 난 열차를 치워 주십시오!”
놀랍게도 잠시 후 장애물이 치워지고 열차는 다시 달렸다.
메리언은 대학졸업식이 시작되었는데도 신랑감이 나타나지 않아 초조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보우먼 학장은 열띤 목소리로 메리언을 칭찬하였지만, 메리언은 신랑에 대한 걱정으로 학장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셔우드가 흐트러진 머리에 숨도 가누지 못한 모습으로 강당에 들어섰을 때 졸업식은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아! 메리언, 늦어 미안해요, 고장 난 화물 열차가 길을 막아서…….”
우등생으로 졸업하는 메리언은 선후배와 친구들의 축하도 뿌리치고 셔우드 품에 안겼다.
화진포의 성 [28]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28]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06월 20일(일) 20:34 [강원고성신문]
메리언의 대학 졸업식이 끝나자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결혼식장이 있는 오하이오 주 이스트 리버풀을 향해 달렸다. 먼저 와서 결혼식을 준비하던 친구들과 메리언의 가족들이 새신랑 신부를 반겼다.
메리언의 친구 필리스 크룩(Phylis Crook)이 결혼식과 손님 접대에 필요한 준비를 맡아주었다. 형부인 노리스 라인 위버 목사는 아이작 우드 목사와 함께 결혼식 주례를 섰다. 어머니, 언니, 조카들도 식당일을 도우며 축복해 주었다.
셔우드는 어머니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 섭섭했다. 어머니는 안식년 휴가를 보내고 다시 조선으로 가셨는데 축하 전보를 보내 주셨다.
“셔우드, 우리 아들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병원에 돌보아야 할 환자가 많아 결혼식에 참석 못 해 미안하고 안타깝구나.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고 늘 동행해 주시길 멀리서 엄마가 기도할게.”
문득 셔우드는 말로만 들었던 부모님의 결혼식을 생각했다. 두 분은 1892년 봄, 부모 친척이 한 사람도 없는 조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문화가 다른 하객들이 생소하게 느껴질 어설픈 최초의 서양결혼식을 준비하며 많이 힘들었을 당시 형편을 생각해보았다. 어머니가 참석하지 못해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친구들과 메리언의 가족이 베풀어준 훌륭한 결혼식과 피로연을 마친 후, 이튿날 캐나다로 떠났다. 아주 오래전에 아버지 닥터 흘이 캠핑을 했다는 ‘찰스턴 호수’로 갔다. ‘찰스턴 호수’는 두 사람에게 평생토록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기억되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인근의 작은 섬을 찾아 밀월여행을 보냈다. 그 신혼여행의 단꿈과 호수의 풍경을 못 잊어 훗날 강원도 고성, 화진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화진포의 성’을 지었는지도 모른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메리언이 의과대학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전혀 예기치 못했던 통지서 한 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성 해외선교회에서 온 통지서였다.
“메리언은 학생 신분으로 결혼했으므로 장학금 지급을 중단합니다”
큰 타격이었다. 미혼 학생만 장학금을 준다는 규칙을 위반하여 어쩔 수는 없었지만, 다른 방법을 강구할 방법을 미리 알려주었으면 이토록 황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메리언은 결혼을 숨기지도 않았고 의사가 되면 선교사가 되어 여성 해외선교회를 위해 무료로 봉사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도움의 손길을 준비해 주심을 깨닫는 일이 생겼다. 학교에서 사정을 알고 메리언에게 장학금 일부를 지급하겠다고 하였고 펜실바니아 의료선교협회에서 나머지 학비를 보조해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주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어려운 형편의 환자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의사가 되겠습니다!”
1923년 셔우드는 토론토대학교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필라델피아 스태트슨 병원(Stetson Hospital)에서 인턴 과정을 하게 되었다. 병원의 환자 대부분이 유명한 스태트슨 모자공장과 관련이 있는 분이었다.
메리언은 여자의과대학 상급반에 있었다. 어느 날, 메리언이 갑자기 졸도해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긴급전화가 왔다. 결혼했어도 학업으로 각자 기숙사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셔우드는 아내가 그토록 힘든 줄 몰랐다. 과장에게 허락을 받고 메리언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들어간 셔우드는 젊은 인턴이 메리언의 동맥을 잘라 치료하려는 것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치료 방법은 아주 신중해야 하는 위험한 방법이었다. 급히 진찰해 보니 뇌막염은 아니었다. 셔우드는 동맥을 절단하는 치료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인턴은 처음에는 기분이 상했으나 셔우드의 진단이 옳았다는 것은 나중에 알고 고맙다고 하였다. 남편으로서 메리언에게 잘해 주지 못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다행히 메리언은 회복이 잘 되었다.
행복한 시간은 힘들어도 빠르게 지나간다. 1924년 6월, 메리언은 의사 자격을 얻었다. 피츠버그의 사우스 사이드(South Side)병원에 인턴으로 임명되었다. 셔우드는 뉴욕의 롱아일랜드 홀츠빌에 있는 결핵 요양소 병원에서 결핵을 전공하고 있었다. 결핵에 권위가 있는 닥터 에드윈 콜브(Edwin colb) 밑에서 그토록 원했던 치료 방법을 세밀하게 배울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제자이며 조선의 최초 여의사였던 닥터 에스더가 폐결핵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을 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모, 편안하게 하늘나라 가셔요. 제가 꼭 폐결핵 전공의가 되어 조선에 와서 결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료해 줄 거예요!”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 철없는 시절의 다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메리언은 사우스 사이드 병원에서 닥터 휴 맥과이어를 비롯한 뛰어난 의사들 밑에서 외과 분야에서는 최고의 훈련과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셨다.
드디어 셔우드는 캐나다와 미국 의사 면허 두 개를 취득했고, 매리언은 미국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셔우드는 내과를 전공했고 메리언은 외과를 전공 했다. 이제 두 사람은 의료 선교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내과와 외과를 겸비한 좋은 의료팀을 구성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평생을 바쳐 일하기를 원했던 의료 선교사가 되기 위해 그동안의 너무도 힘들었던 길고 긴 준비 기간이 영상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셔우드와 메리언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쁨의 찬송을 불렀다. 노래를 잘 부르는 메리언이었지만 목소리는 떨렸고 두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은 감리교선교회에 가서 조선에 의료 선교사를 지원하겠다고 신청하였다. 그러나 선교회에서는 그들을 크게 실망하게 하는 통보가 왔다. 1925년의 경제불황으로 두 사람을 조선에 보낼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선교회에 재정이 부족해 휴가차 미국에 나왔던 선교사들도 현지에 보내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두 사람은 낙심이 컸다. 조선에 가지 못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의 선교사로 가는 길을 알아봐야 했다. 토론토 의과대학 시절 알게 된 닥터 월프레드 그렌펠(Wilfred Grenfell)이 생각났다. 그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래브라도(Labrador) 선교회에서도 의사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언젠가 셔우드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 부부가 조선 선교사로 가지 못하게 될 경우, 우리 선교회에 오시길 원합니다.”
셔우드는 의료 선교사 자리가 있느냐고 그렌펠에게 편지를 썼다. 곧 답장이 왔고 지금도 의사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렌펠이 제시한 직책은 봉사와 경제적인 면으로 매우 후한 조건이라 마음이 끌렸다. 조선에 가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쉬웠지만 그 자리를 수락하기로 하고 답장을 써서 보내려 하는데 뉴욕에서 보낸 한 통의 속달 편지가 도착했다.
“장래에 대하여 아무 결정도 내리지 말고 빨리 뉴욕에 와서 우리 언니 미리언 울버턴 여사를 만나세요! -비버 울버턴.”
셔우드는 그 부인들을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었지만, 그분들은 어머니의 좋은 친구들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선교회가 자금이 없어 두 사람을 조선에 보내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손을 쓴 것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친구들에게 아들 며느리가 조선에 와서 의료선교를 할 수 있는 길을 알아봐 달라고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분들은 어머니 의료사업에 아주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이다.
감리교 회원들도 아닌데 셔우드와 메리언을 만나 본 후, 재정적인 후원을 약속해 주셨다. 교파를 초월한 이 자매의 사랑으로 감리교선교회는 두 사람을 조선으로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들에게 도저히 믿기지 않은 일들이 선물처럼 계속 찾아왔다. 감격하는 두 사람 앞에 더 놀라운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진포의 성 [29]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29]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06월 29일(화) 09:59 [강원고성신문]
셔우드 홀 부부는 미리엄 울버턴 여사의 후원으로 극적으로 조선 의료선교사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마침 그때, 조선 감리교구 감독인 하버트 웰치 목사가 뉴욕을 방문하였다. 웰치 목사는 1916년에서 1928년까지 조선과 일본의 감리교구 주재감독으로 있으면서훗날 셔우드 홀이 해주에 결핵요양원을 설립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분이다.
후원자가 감독을 만나면 조선에 관해서 좀 더 상세한 정보와 선교 후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웰치 감독에게 미리엄 울버턴 여사를 소개하였다. 그들의 만남은 은혜 가운데 이루어졌고 셔우드 부부가 전문성을 갖춘 훌륭한 의사가 되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다.
모든 일들이 기적 같이 이루어졌다. 셔우드 내외를 런던의 유명한 열대 약학 학교(London Shool of Tropical Mdicine)로 보내서 6개월 동안 동양 질병에 대해서 철저한 의학 연수를 시켜준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이 끝나는 대로 황해도 해주의 ‘노튼 기념병원’으로 부임하라고 하였다.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는지. 은혜와 도움을 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금할 수 없었다. 친구와 지인들은 그들이 조선으로 갈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은 믿었다.
부모님이 의료선교사로 평생을 바친 조선에서 대를 이어 선교사가 된다는 사명감과 새로운 세계의 경험과 모험을 상상하며 두 사람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1925년 8월 25일, 드디어 런던의 열대 약학 학교로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조직적인 성격으로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메리언은 며칠 동안 싼 짐을 마지막으로 점검하였고 일일이 품목들을 기록했다.
부두에 도착하자 전송 나온 일가친척들과 친구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닥터 조지 히버 존스의 미망인과 후원자, 울버턴 부인도 있었다. 존스 부인은 1890년 미혼으로 어머니 로제타와 함께 선교의 길에 올랐고 조선에서 선교사와 결혼하신 분이다. 배웅하는 눈빛에 감동과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전송객들이 가져온 꽃들로 선실은 신방처럼 화려하게 꾸며졌다. 이 꽃과 향기로 영국 글레스고(Glasgow)까지 가는 배 안에서 두 사람은 줄곧 신혼여행 중인 부부로 알려졌다.
닻이 오르고 형형색색의 리본 묶음이 두 사람에게 던져졌다. 전송 나온 사람들이 리본의 한쪽 끈을 잡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반대쪽을 잡았다. 배가 부두를 떠나면 리본이 풀리며 항해를 시작하면 끊어지게 된다.
리본의 끈이 하나둘 끊어졌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 친구, 이웃들……그 모든 사람들과 이별을 뜻하는 것이다. 떠날 때의 아픔과 설레임은 선교사의 삶에 항상 따라다니는 친구이다.
메리언에게 이별의 슬픔은 몹시 컸다. 셔우드는 ‘어린 시절 자랐던 조선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지만 메리언은 ‘자기 집과 가족과 고향을 떠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물을 글썽이며 헤어짐을 슬퍼하던 그녀는 런던으로 공부하러 가기 전에 고향인 ‘엡위스’에 들린다는 사실로 곧 기분이 좋아졌다.
먼저 스코틀랜드에 들려 아름다운 곳을 관광한 후 고색창연한 도시 엡위스로 갔다. 이곳은 유명한 존 웨슬리가 심금을 울리는 복음 전파로 영국을 흔들어 놓았던 곳이다. 그토록 유서 깊은 도시가 메리언의 출생지이고 고향이라는 점에서 친근감이 더했다.
일가친척과 소녀 시절의 동창들에게 신랑 셔우드를 소개하며 메리언은 행복해하였다. 고향 사람들은 메리언이 의사가 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이 지방 출신의 여성은 의사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메리언은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웨슬리 기념 교회당의 아름다운 잔디밭에서 두 사람을 위한 환영회가 열렸다. 그들의 모습에서 엡위스의 이웃들이 메리언의 집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런던에 도착하여 학교 근처에 하숙집을 구했다. 학생들은 대부분 동양 각지에서 모인 의사들이었다. 런던의 열대 약학학교의 교수들은 이 분야에 뛰어난 권위자들이다. 의학전문지에 여러 논문을 기고했으며 어떤 이들은 높은 직위를 받을 정도로 학문적인 공로가 컸다. 닥터 레너드 로저스는 말라리아 치료 부분의 개척자였으며 간염 치료도 성공적인 길을 열기도 했다.
이 학교에서 닥터 셔우드와 메리언은 지구 곳곳에서 날아오는 실제적인 임상체험에 관한 의학 정보와 자료들을 접하는 소중한 행운을 누렸다.
런던항에는 각종 열대성 질병에 걸린 선원이나 선객들을 격리 수용하는 병원이 있었다. 동양 현지에 가야만 볼 수 있는 특수한 질병들을 런던에 앉아서 치료하는 임상경험을 할 수 있었고, 이 병에 걸린 환자들을 상황에 따라 기술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견학하였다. 이러한 경험과 의학지식은 훗날 조선에 와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서양에 거의 없는 동양 질병의 치료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진단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이질에 걸린 경우 가장 효과적인 치료 방법은 식이요법인데 우유가 아닌 보리죽을 먹이게 하여 조선에 돌아와 선교사의 어린 자녀의 생명을 두 명이나 구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지렁이, 개구리, 모기까지 해부하며 동양 특유의 병원체와 말라리아 원충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어느덧 런던 열대 약학 학교에서 교육받는 기간이 끝났다. 이제 조선으로 돌아가서 그동안 쌓은 의료 기술로 환자를 치료할 날만을 기다렸다. 조선으로 가기 전에 파리와 스위스 로잔에 들려 또 다른 의학 전문성을 익히기로 했다.
몇 년 전 메리언이 의과대학의 학생이었을 때 ‘퀴리 부인’이 메리언의 학교에 초청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메리언은 학생회장이라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퀴리 부인을 청중에게 소개하는 영광을 누렸다. 라듐 발견과 이것을 암 치료에 응용할 수 있게 한 공로로 세계적인 명성이 있었던 마담 퀴리는, 파리에 오게 될 일이 있으면 자신의 연구소를 찾아오라며 따뜻하게 초대해 준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퀴리부인의 연구소를 방문하기로 했다. 아쉽게도 퀴리 부인은 외출 중이었고 과학자로 자신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딸 ‘이브’를 만날 수 있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으로 의료선교의 길을 떠나는 신혼부부에게 감동을 받았다고 하며 친절하게 어머니 퀴리부인의 연구실을 보여 주었다.
퀴리부인 연구소 견학을 마치고 유명한 ‘파스퇴르연구소’도 방문하였는데 그 때 진행 중이던 광견병 연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 셔우드의 전문분야인 흉곽질환을 다루는 스위스 로잔에 있는 ‘롤리어 진료소’(Rollier Medical clinic)였다. 폐결핵으로 인한 수술 대상자들을 일광욕법으로 치료하여 놀라운 성과를 보았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있었다. 조선은 특히 폐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많아 반드시 그 곳을 들려 견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로잔으로 가는 길은 아슬아슬한 산길이었다. 롤리어 병원은 눈 덮인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알프스의 높은 지대에 있었다. 그곳은 먼지도 없고 바람도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었다. 환자들이 아래 옷만 입은 채 눈 위를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편안하게 자외선 치료를 받고 있었다.
닥터 롤리어는 친절하였고 치료 방법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환자들의 엑스레이 사진을 꺼내 놓고, 치료 전과 치료 후의 차이를 대조해 보여 주었다. 사진 속의 주인공들이 있는 병동으로 셔우드 부부를 안내하였다. 꼽추의 허리는 똑바로 펴져 있었고 내장결핵으로 부풀어 있던 복부가 정상이 된 모습들도 보았다. 그 당시는 신약들이 개발되기 전이었으므로 이 같은 치유 결과는 정말 기적같이 보였다.
이 치유방법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병원 장소이다. 먼지가 없고 자외선을 쬘 수 있는 공간이어야 했다. 환자들이 스스로 열과 맥박을 체크하고 열과 맥박 수가 높아지면 스스로 일광욕 시간을 줄인다고 했다. 이 견학 덕분에 셔우드는 조선에 돌아와 훗날 롤리어 진료소의 방법을 현지 실정에 맞게 고치고 규모를 축소하여 해주에 결핵 요양소를 만들 수 있었다.
그 밖에 견학할 곳은 인도의 봄베이에 있는 하킨스 연구소다. 이 연구소는 인도에서 발견되는 네 가지 독사의 독에 항거하는 혈청을 만드는 곳이다. 인도에서는 독사에게 물려 죽는 사람이 일 년에 수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 연구소에서 뱀으로부터 독액을 추출하는 과정과 독액이 여러 과정을 거쳐 항독혈청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되었다.
그 외의 몇 군데를 더 들려 의료 견학을 하였다. 의료선교를 위해서 경험하고 준비해야 할 소중한 일들이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탔다.
“아, 드디어 내가 태어난 고향, 조선으로 가는구나! 함께 의료선교를 할 수 있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셔우드는 청소년 시절에 떠나온 조선이 눈앞에 다가온 듯 가슴이 뛰었다.
<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