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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의 꿈, 점인가, 계시인가?
코카콜라 빈 깡통은 그대로 있으면 그냥 깡통이다. 서 있건 누워 있건 깡통 이상의 그 무엇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깡통을 똑바로 세운 뒤 한쪽으로 넘어뜨리며 그 기운 모양이나 방향으로 앞날의 길흉화복을 점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용케도 이내 '깡통점'의 도구로 둔갑하고 만다.
꿈도 마찬가지다. 꿈으로 점을 치면 좁쌀점이나 반지점, 사주점과 다를 데 없는 '꿈점'이 생길 수 있다. 물론 깡통이나 좁쌀, 반지가 점이 아닌 것처럼 꿈 자체는 점이 아니다. 문제는 해몽이다. 해몽 과정에서 꿈은 점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고 개인의 전인치유나 의미있는 '사적 계시'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오히려 기독교인들에게는 꿈이 더 위험하고 교묘한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자기꿈을 무턱대고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꿈에 대한 이해가 모자란 가운데 자신의 꿈을 일정한 기준 없이 함부로 하나님의 뜻에 대입시켜 해석해버리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꿈 때문에 빚어지는 갖가지 크고 작은 사건들은 대부분 이 범주에 든다고 볼 수 있다.
교회 가르는 꿈, 연애꿈, '뒤숭숭한' 꿈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한 여 집사가 어느 날 여인의 허벅지를 베개삼아 누워 있는 어떤 남자 꿈을 꾸었다. 가만히 보니 그 남자는 자기 교회 담임목사였다. 평소 담임목사를 별로 안 좋게 보던 그 집사는 좋은 빌미를 잡았다고 여겨 소문을 퍼뜨렸다. "우리 교회 목사가 음란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꿈으로 보여주셨다"고 했던 것. 이 소문이 크게 번져 결국 그 교회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정신분석의 잣대로 올바르게 보면, 은연중 목사를 성적 대상으로 여겨오던 그 여 집사의 은밀하게 숨겨진 내면의 욕망과 잠재의식이 드러난 꿈에 불과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은 조금씩 형태만 달리해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청년층에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유형은 이른바 '연애꿈'이다. '꿈이나 기도중 환상에 나타난 자매 또는 형제'라는 배경만으로 교제나 결혼을 강요하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다. "자매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내게 점지해주셨다"는 식으로 다짜고짜 꿈만 믿고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식이다. 다행히 별 무리 없이 성사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로 상처를 받아 교회를 옮기는 경우도 있고 심하면 아예 신앙을 떠나버리는 불상사도 생긴다.
장년층에서는 주로 자녀교육·가정 문제, 건강·직장·진로 문제 등에 꿈이 남용되기도 한다. '뒤숭숭한 꿈자리'가 하루 내내 께름칙한가 하면, 큰 수술을 받기 전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지를 꿈으로 계시받거나, 이사를 며칟날, 어디로 갈 것인지도 꿈에 암시받는다는 사례도 수집됐다.
믿음이 좋은 이들도 큰 일을 앞두고 마침 꿈이 불길할 때 불안해하고, 강한 자기 소원 성취에 집착해 있을 때 꿈을 통해 무언가 실마리나 확답을 미리 얻으려는 심리를 품게 되기도 한다. 일상 가운데서도 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젯밤 무슨 꿈을 꾸었더라?"는 말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러나 진로 문제를 놓고 기도하다가 꿈이나 환상을 받아 실제로 가정과 직장을 내팽개치고 파탄에 이르는 경우는 이보다 좀더 심각한 케이스에 속한다.
30대 중반의 K집사는 자그만 문방구를 운영하며 착실하게 살아가던 모범 가장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기도원에서 기도하다가 꾼 꿈을 놓고 기도원장에게 상담을 받은 뒤, 갑자기 생업을 버리고 군소 신학교에 들어가는 뜻밖의 진로를 밟게 됐다. 순전히 '목사가 되라는 소명을 주시는 꿈'이라는 기도원장의 해몽 한 가닥이 그 동기의 전부였다. 행복하던 가정에 싸움과 불화가 끊이지 않게 된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지금도 신학교에는 K집사처럼 꿈이나 환상을 통해 극적으로 소명을 받았다고 믿고 진로를 바꾼 이들이 더러 있다. 물론 개중에는 진짜도 있다. 그러나 질서없이 무리하게 진로를 택한 나머지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자기 욕심으로 소명을 이루려다가 결국 실패하고 마는 사례들도 드물지 않다.
이는 단지 신학교의 경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도와 말씀, 환경을 통한 '충분한 기다림' 없이 자기 꿈이나 야망에 따른 진로 선택이나 사업 확장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고 있는 사례들은 가까이서 찾아도 많다. 하나님 안에서 그분이 주신 동기로 하는 일인 줄 오해하면서, 상급이 되지 않는 일에 하나님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케이스다.
크리스천에게 꿈은 점과 같이 당장의 일을 결정하거나 그 일과 관련된 특정 미래를 예지하는 데 쓰이는 도구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같은 다양한 사례들은 교회 안에 아직도 점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온 동양의 전통적인 꿈 해몽식 사고들이 만연해 있음을 드러내준다.
사주점보다 해몽점이 더 신통?
"꿈 해몽만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보통 점보러 왔다가 꿈 이야기를 하게 되면 들어주곤 합니다. 기독교, 불교, 무종교인들이 비슷한 비율로 찾습니다. 종교인들은 잠재의식이 강해 꿈을 많이 꾸는 것 같아요. 기독교인이면서 바람을 피웠거나 죄를 지었을 때 꿈에 예수님이나 목사가 나타나 꾸지람당한 꿈을 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울 당산동의 한 철학관 주인이 하는 말이다. 기독교인은 영적으로 예민하고 죄의식도 남달라 꿈도 잘 꾸는 것 같다고 덧붙인다. 외국에서 민속학까지 전공한 경력을 가진 그는 꿈을 "과거혼과 현재혼, 미래혼과의 조우"라고 정의한다. 사람은 각기 삼혼을 가지고 있는데, 잠을 잘 때 본래의 자기 혼이 상황에 따라 그 세 가지의 혼들을 만나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꿈이라는, 다소 '꿈같이 아련한' 해석이다.
다분히 불교의 윤회사상를 배경으로 깔고 있는 이같은 정의는 공교롭게도 서양의 프로이드나 융 식 개념으로 다시 짜맞춰질 수 있다. 즉 과거혼은 어릴 적 상처나 욕구가 잠재의식에 억압되어 있다가 드러나는 꿈의 경우, 현재혼은 잡다한 일상의 기억이 단순히 그대로 재현되는 경우, 그리고 미래혼은 잠재의식이 본래의 직관과 후천적인 경험 축적을 기초로 복합기능을 발휘, 앞일에 대해 예지의 지혜를 전해주는 경우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종교 구분 없이 꿈은 현재 개개인의 실상을 잘 반영하기 때문에 해몽만 제대로 하면 더 생생히 잘 들어맞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 생년월일시에 속해 고정된 공통분모가 많은 사주점과도 좀 다르지요. 물론 사주 자체에 이미 그 사람의 일생의 심리 구조나 변화의 윤곽이 다 들어 있어 해몽 이전에 운명부터 먼저 따집니다. 그러나 어쨌든 심리 상태를 그때 그때 반영하는 꿈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재수를 불러오거나 화를 당하기도 한다고 봅니다."
이같이 꿈 해몽을 철저히 앞날의 길흉화복에 맞춰 해석하는 점복의 틀은 교회 안에서도 암암리에 널리 퍼져 있다. 아예 돼지꿈이나 용꿈을 좋은 꿈으로 분류하고 신뢰하는 이들도 있다. 나이가 조금씩 든 여자 교인들 가운데 이런 이들이 많은데, "꿈보다 해몽"이란 속담을 속습 그대로 신봉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사주점이나 수상, 관상의 뼈대처럼 꿈의 유형을 만들어 퍼뜨린다. "어떤 꿈은 어떻다"거나 "그런 꿈은 좋은 꿈, 개꿈, 나쁜 꿈" 하며 꿈을 '감정'해내는 식인데, 가정제단을 통해 이런 유의 해몽법이나 태몽 풀이가 나돌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돼지나 용은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동물들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꿈 해몽법에서도 돼지가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꿈은 아니라고 본다. 그 돼지가 꿈 속에서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에 따라 길흉 여부가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꿈에 대한 동서양의 이론들을 다각도로 이해하고 기독교 세계관적인 해석의 안목까지 갖춘 지도자들이 거의 없어 꿈에 관한 한 세속과 교회가 뒤섞인 혼돈 상태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꿈은 영의 활동, 모든 것을 미리 안다"
"꿈에 나타나는 상징 해석이야말로 고도의 '문학'입니다. 꿈도 창조세계의 한 부분이므로 의식 세계 속의 사물들이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등장하지요. 문화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추 해석이 가능한 상징의 기본 구조는 대체로 비슷합니다."
40여 년 동안 오로지 꿈 연구에만 진력, 국내에서도 나온 꿈 해몽서들의 '원전'이 되는 책들을 많이 펴낸 한건덕 씨. 그는 직업적인 점쟁이는 아니다. '해몽요결'이나 정신분석학 등 동서양의 꿈 이론들을 섭렵한 바탕에다 광범위한 실제 사례들과 자신의 경험들로 입증된 자료들을 정리, 꿈의 보편적인 상징 원리 탐구를 필생의 업으로 삼고 저술에만 전념해오고 있다.
그는 "의지의 갈등이 심하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 나타나는 도망가고 쫓기는 꿈 말고는 대개가 좋은 꿈"이라고 말하는데, 그가 규명한 상징체계들로 흔히 꾸는 꿈들 가운데 몇 가지만 '풀어보면' 이렇다.
먼저 공중을 날으는 꿈은 일을 신속히 처리하게 되고, 자유나 승급, 과시, 전시 등이 국가나 사회적인 기반에서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옷을 입은 채 헤엄치면 자기의 직권, 의지, 습관 등을 고집한 채 어떤 일에 관여한다. 흐느껴 울면 소원이 성취되어 기쁜 일이 생긴다. 성관계를 맺는 꿈은 어떤 일에 대한 계약이나 탐구, 연구와 관련이 있다. 꿈 속에 나타나는 조상 또는 고인은 실존이 아니라 집안식구, 직장인, 아는 사람 등의 동일시이고 어떤 일거리의 상징물일 수도 있다. 꿈에 예수님을 보면 학자나 기관장, 기타 위대한 사람이나 책 등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
"꿈은 영이 활동한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 영은 곧 진리"라고 보는 그는 기독교인은 아니나 꿈의 상징원리로 성경을 연구해온 지도 꽤 오래됐다고 한다. "창세기를 포함해 성경은 선지자가 꿈을 통해 계시받은 메시지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모두 꿈의 상징 원리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독특한 주장이다.
일반 꿈의 모든 상징 원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그 방법이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는 것. 죽음을 부활이나 거듭남으로, 해(하나님)와 달(교회)을 국가적 단체와 부수적 단체로, 용이나 뱀을 마귀나 악의 세력으로 보는 것 등을 비슷한 해석 체계의 예로 든다.
그러나 "무언가 생각하고 해결하려 할 때 꿈이 생긴다. 잠재의식에서는 이미 모든 일을 알고 해결하고 있다. 바로 그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이 영이며, 어떤 면에서는 신의 경지를 가진다"는 그의 관점은 오히려 명상이나 마인드콘트롤을 강조하는 뉴에이지의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계의 뉴에이지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마인드콘트롤과 같이 이전에는 그리 크게 영적인 의미가 없어보이던 것들도 앞으로는 경계해야 한다. 이 시대의 문화는 이제 세속 인본주의에서 더 나아가 노골적으로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꿈을 '잠재의식이 판단, 예지한 것'으로 일관되이 정의하고 그에 따라 이론을 정립해가는 한 씨는 자신의 꿈으로 이미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의 부상을 예견했다고 한다. 또한 앞으로 우리나라의 통일은 중국의 결정적인 역할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예언'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다미선교회가 꿈으로 물의를 빚은 것은 순전히 물이나 구름 등 꿈 속의 여러 상징들을 해석 원리를 무시한 채 문자 그대로 잘못 본 탓"이라고 나름대로 진단한다.
그에 따르면, 기억하지 못할 뿐 매일 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없고, 어떤 꿈이든 의미 없는 꿈은 없으며, 모든 꿈은 어떤 형태로든 예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해석하지 않고 무관심하게 흘려버리기 때문에 개꿈이 될 뿐, 해석하든 않든 모든 사람은 꿈대로 살아간다는 것. 그러나 꿈의 종류나 내용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로 달라 유형화하기에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40여 년 꿈 연구의 성과치고는 상당히 '동양 점'에 가까운 결론을 얻어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서점을 통해 시중에 나도는 꿈 해몽서들의 대부분이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들이 대충 어떤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될 만하다.
꿈 연구에 대한 한 씨의 노력은 어느 정도 꿈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자료로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꿈의 신비'를 '예시'라는 하나의 틀에만 억지로 들어 맞추려다가 결국 마지막 단추를 끼울 구멍마저 스스로 꿰매버리고 만 것 같다. 자칫 '이현령 비현령'이기 쉬운 꿈 해석과 적용은 채집된 경험들의 통계만 아닌 어떤 분명한 기본전제나 가치관의 문제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셈이다.
"꿈에 집착하면 나약해진다"
꿈을 정의하고 그 유형을 분석, 비판하며 올바로 적용하기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특히 기독교 안에서는 꿈을 강조하는 것 자체마저도 긍·부정의 견해가 각기 엇갈린 상태로 팽팽히 맞서 있다. 이처럼 민감한 주제에 대해 좀더 균형잡힌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는 양측의 의견들을 직접 듣고 비교해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책이나 인터뷰를 통해 심리 전문가들과 신학자, 목사, 평신도들이 내놓은 의견들을 한데 모아 요점만 종합해본다. 먼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이들의 반대 의견들을 간추려본다.
"꿈은 우리 존재의 일부이나 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매일 흔하게 경험하는 대상이면서도 그 실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다. 그나마 의미있는 꿈은 몇 안 되고 대개가 의식의 '푸닥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항상 부분적인 것을 강조하다가 근원을 놓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아예 부분적인 것을 언급하지 않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꿈 역시 공론화할 경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우려가 있다."
"말씀이 꿈 해석의 보조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크리스천의 꿈은 따로 해몽이 필요없다. 꿈을 어떻게 해석하든 스스로 '노우(No)' 하면 영향을 안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 '상담'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물질주의 가치가 중시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무언가 눈에 보여야 믿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꿈을 중시할 때의 위험도 마찬가지다. 계시는 이미 완성됐고 꿈의 긍정적 기능 역시 신비주의의 '미망'에 빠질 위험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다."
"꿈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때에 맞게 주시는 것을 다만 받는 것이다. 특별히 초신자나 사명자에게는 삶의 과정에서 의미있게 이루어질 꿈을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가 어떤 특정한 꿈을 달라고 하거나 미래를 보여달라고 하면 즉각 사탄이 틈탈 것이다. 하나님께서 섭리로 사람에게는 제한해놓으신 미래 일을 알고자 하는 것이 '선악과'이자 원죄였다. 그것이 또한 점이다. 사탄은 지금도 그와 같은 유혹을 꿈을 통해 시도해올 수 있다."
꿈의 기독교적 수용을 놓고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는 이들도 이같은 반대 의견들의 취지와 중요성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거기서 좀더 나아가 꿈을 '일반계시'의 차원에서 먼저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폭넓게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잠은 죽음과 같이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 성인 군자나 부자도 잠에 들기 위해서는 모두 자신의 겉옷을 벗어야 한다. 그리고 잠든 중의 꿈 속에서 자신의 무의식의 상처를 숨길 수 있는 성자도 없다. 꿈은 치유의 도구로서 가장 보편적인 특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우리가 잠든 사이에 인치듯 교훈하신다고 말씀하신다(욥 33:15-16). 하나님은 꿈에 우리의 잠재의식을 통해 어떤 뜻을 주시는데, 해석은 우리 나름의 몫으로 남겨두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꿈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 점술 체계와는 다르다. 꿈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이 미래의 운명을 만들어간다는 이치와 가장 가까운 진리를 반영한다."
"일 중심의 사람에게 꿈이 많다. 이들에게는 관계 중심으로 꿈을 해석해주고 그런 삶을 살도록 꿈을 '역이용'할 수 있다."
"마지막 때라는 말들이 요즘은 더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요엘은 말세에는 늙은이들이 꿈을 꾸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볼 것이라고 예언한다(욜 2:28). 마지막 때일수록 '역동적 계시'는 더 활발해질 것으로 본다. 거기에는 물론 꿈도 포함된다."
이처럼 뚜렷이 상반되는 입장을 조심스레 피해가면서도 균형잡힌 '중도 노선'을 견지하려는 이들도 있다. 꿈의 진정한 기독교적 의미와 가치를 현실감 있게 제시하는 이들의 견해도 참고삼아둘 만하다.
"자신이 처한 스트레스나 갈등 상황을 파악하고 치유의 실마리를 잡아 삶과 꿈을 일치시켜나가는 데 꿈의 상징원리를 활용하는 것은 유익하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는 심리적 갈등 요인을 제거하고 무의식에까지 말씀으로 무장시켜나가는 것이 신앙 성숙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꿈에 집착하거나 매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의지가 나약한 비현실적인 사람을 만든다."
"어떤 꿈을 뉴에이지 사상의 틀에 넣으면 그 꿈은 뉴에이지가 되고 동양적인 해몽의 틀에 넣으면 그런 꿈이 된다. 교회가 꿈을 올바로 활용하려면 신학·신앙의 성숙과 함께 기독교적인 해석의 틀도 마련해나가야 한다. 동양적인 꿈 해몽이나 프로이드식의 틀을 어느 정도 참조할 수는 있지만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충분히 다시 소화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
"꿈을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 뜻에 맞춰 해석해선 안 된다. 꿈 해석은 반드시 정신분석가나 목회 상담자와 같은 전문가나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는 게 좋다. 성경의 어느 한 구절만 갖고 확대 해석하면서 이단이 나오듯, 꿈 역시 종합적인 안목 없이 특정한 꿈 하나만 갖고 이러쿵저러쿵하며 집착하면 잘못되기 쉽다."
"꿈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은 '어떤 꿈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지혜 문제다. '어떤 꿈은 어떻다'는 식의 유형화된 꿈 해석은 의미가 없고 또 위험하다. 꿈을 인격적인 관계의 측면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말씀 중심의 기독교 정신과 실천에 연결시켜야 한다. 이것이 적어도 크리스천들에게 모든 꿈은 곧 '비전'이어야 한다는 말의 참된 의미다."
꿈, 신앙 점검의 '바로미터' 되기도 해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베스트셀러인 '기도'의 저자 리차드 포스터는 영성 훈련의 한 방법으로 '꿈 기록'을 권한다. 자신의 꿈을 거울삼아 한 달 정도만 기록해보면 현재 자신의 영적 상태와 삶의 모양새를 점검해볼 수 있다는 것. 실제로 평범한 크리스천들 가운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길 소원하는 이들은 꿈을 통해 더 깊은 자신의 실체와 죄를 깨닫고 온전한 치유의 단계를 밟아나가기도 한다.
40대 중반인 S집사는 전형적인 크리스천의 세 가지 단계, 즉 구원의 확신과 전도·봉사, 성화의 과정에서 각각의 고비마다 꿈을 통해 큰 도전과 격려를 받은 경험이 있다. 이 집사는 "많은 꿈들이 대개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이내 잊혀지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선명해지는 '큰 꿈'들이 있더라"며 그 꿈들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해줬다.
"8년 전 예수님을 영접한 뒤 2-3년쯤 되어 한창 첫사랑에 뜨거워 있던 때다. 일제시대 순사 옷을 입은 듯한 경찰들이 많은 사람들을 낭떠러지로 내몰아 사형시키는 꿈을 꾸었다. 나도 그 많은 사형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깊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중에도 두렵지 않고 평안했다. 땅에 닿아서는 상처 하나 없이 사뿐히 내려섰다.
그 아래에는 책상 같은 것을 앞에 둔 재판관들이 앉아 있는데, 그들이 하는 말이 '여기서의 재판 규칙은 떨어져서도 죽지 않은 사람은 살려주는 것'이라며 나더러 '당신은 살았으니 석방'이라고 선고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무슨 영화의 주인공처럼 당당하고도 울리는 극적인 목소리로 'I am a christian!'(왜인지는 모르나 영어였다)이라고 말하고는 유유히 내 갈 길을 걸어나가면서 꿈을 깼다."
이 꿈을 그녀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전도에 힘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꾸준히 실천에 옮겨나갔다. 그후 1년쯤 지나 가난한 달동네에 유명 탤런트들이 거지 차림을 하고 전도하러 온 모습을 또 다른 꿈에서 본다. 여기서 그녀는 크리스천의 섬김과 낮아짐에 대한 인상깊은 교훈을 얻었다.
그러다가 아주 최근에 세 번째 꿈을 꾸게 된다. 기쁨으로만 이어질 것 같던 신앙생활이 어느덧 율법주의로 떨어지곤 하는 사이클이 반복되던 어느 날이다. 꿈 속에서 그녀는 미끈 미끈하고 시커먼 오물 같은 것을 입 밖으로 연신 토해내고 있었다. 물컹물컹한 것이 무척 징그럽고 더러웠다. 이 꿈을 꾸고 난 뒤에 그녀는 심하게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뒤에야 성경의 마가복음 말씀이 떠오르면서 그 꿈의 의미가 자연히 깨달아졌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막 7:18-23).
이 꿈을 꾸기 전에 그녀는 심한 영적 침체에 빠져 있었다. 예수님을 만난 뒤 몇 년 동안은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모습을 지니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자기 의로 인한 노력처럼 느껴지자 이내 불안한 마음이 닥쳐왔다.
바로 그때 이 꿈을 꾸고 그녀는 자신에게는 그 무엇도 선한 것이라곤 없음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발견하고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끊임없이 나아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순간마다 새 힘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자유함'의 비밀을 터득한다. 이것이 그녀가 최근 꿈을 통해 거둬들이게 된 가장 큰 수확이자 '실체'가 분명한 은혜였다.
무시돼온 꿈, '사면복권' 가능할까?
크리스천이 꾸는 꿈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꿈에 꼭 해석이나 정답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다만 말씀과 교회 공동체의 도움 가운데서 적절히 제어되고 때로 건전하게 활용된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이 꿈을 점의 도구로 오용하거나 '경계 대상'으로만 여기는 데서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 성숙되고 진리가 확고히 서 있는 한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 그 진리의 빛의 조명에서 제외되는 음지는 줄어들수록 좋기 때문이다.
원래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꿈을 권위있는 계시 수단의 하나로 인정하고 또 그들 스스로도 의미있는 꿈을 많이 꾸었던 것으로 전해져온다. 이들 가운데는 저스틴, 이레니우스, 클레멘트, 어거스틴 등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제롬의 꿈 이야기는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성경보다 세상의 지혜를 담은 사상서들에 더 깊이 빠져 있던 청년 제롬은 어느 날 심판석에서 채찍 맞는 꿈을 꾸었는데, 깨어난 뒤에도 등에 시퍼렇고 무서운 채찍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뒤 크게 뉘우친 그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성경만을 연구하여 후에 라틴어역 불가타 성경을 세상에 펴내게 된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전통은 중세로 접어들며 차츰 사그라져가다가 아퀴나스의 이상주의 신학으로 호된 철퇴를 맞는다. "대다수의 꿈이 미신"이란 오명을 이론상으로도 꼼짝없이 공인받게 된 것. 더구나 꿈은 그 당시에도 복술자나 마술사들이 '메시지'를 받을 때 주로 이용되던 매개체의 하나였다. 교회로선 꿈에 대해 되도록 입 다물고 있는 게 위험 부담이 적고 안전했다.
'오직 말씀'을 부르짖으며 그 이전까지의 모든 비성경적 전통주의와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왜곡된 신비주의의 우상들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종교개혁기에도 꿈은 여전히 '정당하게' 조명받지는 못하고 후대로 넘어간다. 그나마 꿈이 교회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20세기를 전후해 프로이드와 융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세속 사회에서 먼저 꿈의 비밀이 학문적으로 적극 탐구되면서 그 도전과 자극에 뒤늦게 교회가 반응하며 뒤따라 나선 셈이다. 본래부터 성경과 교회 공동체 안에 꿈의 재료와 경험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교회가 무언가 이렇달 만한 해답을 찾아두어야 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동안 구미에서는 과학주의·합리주의의 거센 도전에도 불구하고 꿈에 대한 기독교적 연구가 꾸준히 진행돼왔다. 그러나 국내에는 아직 성경적 관점으로 쓰여진 꿈에 대한 서적조차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기껏해야 번역서가 전부이며 그것도 몇 권 되지 않는다.
이제 한국교회도 좋든 싫든 꿈에 대한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정리해두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현재 이를 위한 몇 가지 기초작업들이 제안되고 있다. 신학교에서부터 정신분석이나 심리 상담 과목을 좀더 폭넓게 강화하고, 현장 목회자들은 애정어린 관심으로 평신도들의 꿈 이해를 도와 신앙 성숙의 자원으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도록 상식과 감별력을 갖춰나가야 한다.
교회 안에서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꿈 사례들을 수집, 분석해보는 실험도 누군가 지금쯤은 시도해봄직하다. 기독교적인 꿈 해석의 틀을 만들기 위해 전문가들이 나와 성경의 개념이나 시각으로 꿈의 상징들을 간추려둘 필요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끝까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한 가지 있다. 꿈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어떻든 교회 안에 '복음의 투명성'이 그만큼 흐려져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꿈을 복음적으로 정리하고 이해하기 위해 관심을 갖는 목적은 오직 말씀을 말씀되게 하고, 그 능력을 삶 속에서 올바로 세우고 선포하려는 데 있다. 만일 이 기준이 분명치 않다면, 꿈은 온갖 미신이 성행하는 이 시대에 또 다른 세속주의의 한 복병으로 교회 안에 '당당히' 숨어 들어오게 될 것이다.
-안환균, '르뽀, 기독문화가 위태롭다'(규장)에서
첫댓글 꿈..무조건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로 여기는것은 정말 문제인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