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2번째 편지 - 가을 편지
이번 주가 가을의 시작입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2023년 39번째 주부터 46번째 주까지 8주간이 가을입니다. 날짜로는 9월 25일부터 11월 19일까지입니다.
가을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예전에는 천고마비, 독서의 계절, 서정주의 시 '국화 앞에서' 등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가을을 생각하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편지>입니다.
아마도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로 시작하는 <가을 편지>라는 가요 때문일 것입니다. 편지를 가을에만 쓰겠습니까 마는 '봄 편지', '여름 편지' '겨울 편지'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데 '가을 편지'라는 표현은 가슴 아리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같은 시대 같은 문화를 공유하였다는 것은 이처럼 같은 정서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여 구글링을 하였습니다. 대략 비슷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968년 겨울 서울대학교가 있는 동숭동 막걸리집에서 시인 고은이 대중음악평론가 최경식과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1933년생 동갑내기로 당시 36세. 그 자리에 최경식의 동생, 가수 최양숙(1937년생, 당시 31세)과 최양숙의 친구 김광희가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최양숙은 1963년 데뷔한 가수로 최양숙은 서울음대 성악과, 김광희는 서울음대 작곡과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최양숙은 서울음대 출신 대중가수 1호로 불립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갔을 때, 최경식이 고은에게 시 한 편을 낭송해 달라고 하자 얼마 전 한려수도에서 쓴 시 한 편을 흥얼거리게 됩니다. 타령처럼 읊조린 시를 듣고 김광희가 즉석에서 작곡을 하였고 이를 최양숙이 불러 봅니다. 이렇게 탄생한 곡이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라는 가사가 들어 있는 <세노야>입니다. 이 노래는 훗날 양희은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칩니다.
이렇게 만난 네 사람은 가끔 동숭동 주막에서 어울렸습니다. 1971년 어느 날 최경식은 친구 고은에게 여동생 최양숙을 위해 노랫말을 써 달라고 부탁을 하고 즉석에서 고은이 화답하여 쓴 노랫말이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로 시작하는 <가을 편지>입니다. 이 가을 편지를 김광희가 서울대 후배 김민기에게 작곡을 부탁하여 노래로 세상에 빛을 봅니다. 이 노래는 당연히 최양숙이 불렀습니다."
이것이 구글링을 하여 찾아낸 명곡 <가을 편지>에 대한 탄생일화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 전체를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 노래에는 점층법이 적용된 듯합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다고 세 번 읊조립니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달라고 두 번이나 애절하게 호소합니다. 그 편지에는 무엇이 담겼을까요? <모든 것을 헤메인 마음>이 담겨있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헤메인'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문법적으로는 '헤메인'이 아니라 '헤맨'이 맞다고 합니다. '헤맨'의 동사 원형은 '헤매다'입니다. '헤매다'에는 3가지 뜻이 있다고 합니다.
1. 무엇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2.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
3. 어떠한 환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덕거리다.
시인의 복잡한 심경을 '헤메인'이라는 단어에 담고 있습니다. 헤맨이라고 하지 않고 '헤메인'이라고 한 것은 세 음절을 맞추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를 받아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간은 흘러가고 가을은 깊어만 갑니다.
시인은 깊어져 가는 가을을 기가 막히게 표현합니다.
가을 초입에는 '낙엽이 쌓이는 날'이 몇 날 며칠 계속됩니다. 그러다 가을바람이 휑하니 불면 '낙엽이 흩어진 날'을 맞습니다. 그런 날이 이어지면 가을을 더 깊어지고 '낙엽이 사라진 날'과 마주치게 됩니다.
나의 헤맨 마음을 담은 편지를 받아 주는 이는 없고, 가을은 깊어만 갑니다. 그러자 시인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시인은 자신이 아는 그 <외로운 여자>를 상상하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 외로운 여자는 갈 곳 모르고 마음을 다잡지 못한 채 <헤메인 여자>가 되어 버립니다. 시인은 그 여자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 외로운 여자, 그 헤메인 여자가 다 가버리고 나면 시인 눈에 보이는 여자는 <모르는 여자> 뿐입니다. 시인은 성도 이름도 모르는 처음 본 그 여자마저 아름답게 느끼는 경지에 다다릅니다.
세상 모두를 아름답게 보는 경지 말입니다.
지난주 헌정사상 처음인 일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세상은 하수상하고 대한민국과 우리 모두는 고은이 말한 '헤메인'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대한민국의 앞날과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까요.
낙엽이 쌓이다 흩어지고 사라져, 가을의 마지막 날 11월 19일이 되면 서로의 앙금이 녹아 시인의 말처럼 외로운 당신도, 헤메인 당신도, 모르는 당신도 아름답게 보이게 될까요?
<가을 편지>가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힘을 발휘하면 좋겠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3.9.25. 조근호 드림
<조근호의 월요편지>
첫댓글 님의 아침편지는 늘 새로운 여운을 남게 합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