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11.24) 말씀/ 신명기 33:29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오늘은 행복이란 주제로 은혜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행복이란 안간이면 누구나 바라고 갈구하는 삶의 명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 년을 산다한들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만들어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산이 낙원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조상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은 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함으로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큰 틀로 말하면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불행이란 하나님을 떠남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나 믿지 않으나 지금도 행복이란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지 철학적으로 인문학적으로 논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행복한 자입니까? 정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론적 원론적인 답이 아닌 행복한 조건과 실제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 1권에...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크로이소스는 '리디아'라는 나라의 왕 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테나의 유명한 현인 솔론이 찾아왔습니다. 크로이소스는 그동안 주변 약소국들을 점령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최고 권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보석과 금으로 치장하고 자신의 막대한 부를 보여주며 솔론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솔론이 이런 모습에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자,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질문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행복(幸福)하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크로이소스는 자신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솔론은 아테네 시민인 ‘텔루스’란 남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텔루스는 번영(繁榮)한 나라에 태어나 훌륭한 자식을 두었고 스스로 정직한 사람임을 증명하였으며, 조국(祖國)을 위하여 싸우다가 명예롭게 전사(戰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왕은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누가 행복한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다시 아테네 시민인 ‘클레오비스’와 ‘비토’ 형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형제애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었으며 아주 용감한 형제였습니다. 솔론이 이야기한 행복한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크로이소스는 화가 나서 “뭐라고! 그대는 내가 누리는 행복이 서민들보다 못하다고 여기는가?” 그러자 솔론은 “왕께서는 값비싼 보물과 최고의 권력(勸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끝까지 권세와 부를 누릴 수 있는지는 아무도 장담을 못합니다. 누군가 죽기 전에는 그를 행복하다 부르지 마시고, 운이 좋았다고 하소서." 14년 동안 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황금으로 보물창고를 채우던 크로이소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 키루스에게 나라를 점령당하고 불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비로서 솔론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죽어갔습니다. "오, 솔론, 솔론, 솔론" 그대의 말이 맞았소~~. 자, 그렇다면 누가 가장 행복한자 입니까? 돈, 권력, 명예, 지식은 가진 사람? 아닙니다. 밖에 있는 소유는 진정한 행복의 척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내가 행복한 자임을 알리고 싶어한다면 그는 왕이던 재벌이던 결코 행복한 자라할 수 없습니다. 진짜 행복한 자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한 자이고, 진짜 부자는 티를 내지 않아도 스스로 부자임을 느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남에게 보이고 싶은 행복은 더이상 행복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은근히 돈자랑 힘자랑 지식 자랑한다는 것은 존재가 빈약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행복 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며 솔론의 말로는 그저 남보다 조금 나은 요행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솔론이 말하는 조건처럼 잘 살아야 하고 죽어봐야 아는 행복이라면 역시 그것도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은 업적이나 조건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이며 또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 누리는 것이 진짜 행복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날 떨어져 쌓인 낙엽을 밟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밖은 씽씽 찬바람이 불어도 안에서 따듯한 차 한 잔 마시며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아니면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수필집 한 장을 넘기며 미소 짓는 마음을 갖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도 눅17:20-21에서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천국은 세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라 할 수 있는데 주님은 그 천국이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너희 안 마음 속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행복하신가요? 마음에 예수가 있다면 천국이 있는 사람이고, 천국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는 행복한 사람 아닙니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많고, 명에 권력을 쥐고 흔드는 사람, 학식적으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수석을 하고 사시를 패스하고 장관 대통령도 된 사람. 그런데 단 하나 예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껍데기만 화려하지 심령은 그 어디나 지옥입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보세요. 국가의 정상이 자신들 권력을 마음대로 흔들며 전쟁을 하지 않습니까? 수 만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안중에 없습니다. 백성이 우러러 보고, 명 코메디 배우가 되었다가 대통령이 된들 애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지옥 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면 무엇하고, 지면 무얼합니까? 예수가 없으면 전쟁에 이기던 지던 지옥입니다. 반면에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아도 단칸방에서 예수님 주로 모시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총각에 유배달을 하며 늘 말슴을 묵상하며 삶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많은 돈을 벌지 못하지만 마음에 주님 보시고 기쁨으로 감사하며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가난하나 부요한 사람입니다. 새벽에 집을 나가다 보면 어두컴컴한 시간에 일찍부터 청소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업이 어떻든 하루 일과를 주신 주님게 감사를 하고, 지구의 한 모퉁이를 께끗히 쓸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고 산다면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과거에는 교회가 숫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기쁨이요 행복으로 여겼고, 재정적으로 넉넉하고, 자녀들은 누구보다 잘 돼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을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침에 새벽 네 시부터 일어나서 큐티 말씀을 묵상고 세계 도처로 보내는 일을 하고, 건강을 위해서 500l 물을 마시고, 그 후부터 카톡 댓글이 올라오면 답글을 달고, 바닷가에 가서 맨발로 산책하면서 기도하고, 오전 시간 책을 읽고 독서모임 준비를 하고, 주일 틈틈이 주일 설교도 준비하면서 혼자의 시간을 많이 갖습니다. 그리고 말씀 고백 속에서 성장하는 지체들의 모습들을 볼 때, 또 주일 말씀을 듣고 한 번씩 받은 은혜를 소감으로 보내주시는 분들의 글을 읽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제가 집에 욕심이 있겠습니까? 좋은 자동차에 욕심을 내겠습니까? 땅에 욕심을 내겠습니까? 한가지는 있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고 나누고싶은 욕심입니다. 그래서 바리톤 색소폰에는 800만원을 투자했습니다. 앞으로 10년을 내다본 가장 큰 물질적 투자입니다. 어쨌든 저는 주 안에서 행복합니다. 누구도 부러운 사람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먹고 살아가는데 주님 모신 마음 일상의 모든 작은 일들이 다 천국인데 불행해야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모시고 사는 자가 행복한 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예수 믿으면 저절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합니다. 예수 믿어도 행복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풀어야할 방정식이 있다는 것을 알야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수많은 교회를 보십시오. 또 우리 주변에 수많은 교인들을 보십시오. 믿는다고 하지만 다 같습니까? 다 진실합니까? 다 사랑하며 살아갑니까? 다 겸손합니까? 예수 믿는다고 다 감사합니까? 다 행복하게 살아갑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저 역시도 과거에 관념적으로 “예수 믿으면 행복합니다” 수없이 말하며 살아왔지만 실제로는 근심겅적 힘들 때가 더 많았습니다.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맞지만 실제적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이 관념적 신앙. 관념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속히 관념에서 벗어나 실제로 행복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는 수적으로 그 때보다 작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20년 혼밥을 먹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행복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행복하려면 거짓과 위선의 나를 부스고, 나를 뛰어넘고 끊임없이 배우며 성장해 가야 합니다. 이런 관념, 신념, 조직시학, 전통 여기에 붙들려있으면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저 죽고 난 후에나 미래의 행복이 됩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 책을 보면 명문 웰튼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사진을 보ㅇ주면 키틴 선생이 말하지 않습니까? 가르페디엠 . 오늘을 즐겨아 오늘을 잡아라. 저들은 명예, 전통, 교리 최고, 성공을 쫓다가 결국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구더기 밥이 되었다고,,,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주 안에서 천국을 누리며 행복한 자임을 인식하고 행복한 자가되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어떻게? 누가복음 10장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지나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셨는데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38).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너무 기뻐서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고,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이일 저 일로 마음이 분주하였습니다. 똑 같이 예수님을 믿고 섬겨도 삶의 양식은 다릅니다. 두 자매중 누가 더 행복할까요? 마르다는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아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못 마땅히 여기며 예수께 나아가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지 마시고 저를 명하사 자신을 도와주게 하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 하십니다. “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한 사람은 모든 것을 맡기고 자유 속에 은혜를 누리고, 한 사람은 바쁘게 일하며 은혜를 놓쳤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일은 없습니다. 지금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자유와 참된 평화를 주시고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지만 그 행복을 잘 누리며 사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이미 우리 속에 있습니다. 지금 믿음으로 꺼내서 누려야 합니다. 없으면 계속 살속에서 믿음으로 창조해 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 믿고 버리고 포기하는 것만 많이 배웠습니다. 죄와 악함 게으름 나태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버리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회복해야할 것들을 풍족하게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이 가득 채워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면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내 모습 속에서 천국의 빛이 나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겠습니까? 행복이란 갑자기 눈에 보이고 잡혀야 행복이 아닙니다. 사업이나 어떤 꿈을 성취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 안에 이미 행복자 임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시작해야합니다. 이미 주어진 수많은 행복에 눈을 뜨고 퍼즐들을 맞추는 일을 해야합니다. 지난 번 감사절에 정미 집사님에 소감에 아버지 이야기 나왔습니다. 처음에 아버지가 다리가 아프셔서 입원했을 때는 마음을 다해서 섬길 수 있는 기회로 여겼는데 두 번째 또 허리가 아파서 입원하니 이제는 감사가 아니라 찌증이 났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너무 미안한지 정미가 안올까봐 전화를 자꾸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본인도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일반적으로는 행복은 사라지고 불행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불행을 택할 것인가 행복을 택할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이왕이면 감사로 모든 상황을 행복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골이 깊은 곳일수록 산이 높고 형세와 경치가 좋은 것처럼 어려운 현실을 잘 감당하면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가 진짜 믿는 사람의 세상과 다른 모습입니다. 무엇이던지 믿는 대로 됩니다. 믿음은 신뢰입니다. "나는 행복하고 싶어, 반드시 행복 할거야, 지금도 나는 행복해 "하고 인정하면 전화위복 행복이 내 편이 되어 나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항상 힘들어. 불행해, 왜 힘든 일만 생기지? 행복은 나와 거리가 멀어" 한다면... 행복이 이런 사람에게 머물겠습니까? 아마도 있는 것까지 데리고 나갈 것입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 만유인력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666년 여름 달이 밝은 어느 날 밤, 뉴턴은 고향 울스롭(Woolsthorpe)에 있는 과수원의 사과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사과가 하나 떨어졌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사과를 주우면서 맛있는 사과를 공짜로 먹게 되었다고 좋아하겠지만, 뉴턴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과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힘은 지구에서 일정한 거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훨씬 멀리까지 미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힘이 달까지도 미치지 않을까? 사과 아래에 받쳐주는 것이 없으니까 땅에 떨어지지만, 왜 하늘에 있는 달은 아래에 받쳐주는 것이 없는데도 땅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만유 인력은 서로 끌어 당기는 힘입니다. 좋은 것이던 좋지 않은 것이던 그 법칙은 믿는 쪽으로 기울어 지게 되어 있습니다. 당장 힘들고 불행한 일들이 있어도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선하며 나는 언제나 행복자임을 인정한다면... 행복은 내편이고 내게 달려와 영원히 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하면 있는 행복은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 역시도 마찬가지 이십니다. 믿고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숨기지 않으시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철저히 감추십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야생화에서도, 하늘 구름 속에서도,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씽씽 부는 겨울 바람 속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지만...믿지 않는 이는 온 바다를 항해하고 우주를 살펴 찾아도 그 어디에서 하나님을 발견 할 수 없습니다. 고로... 행복을 내 편으로 만들려면... 지금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행복한 자임을 믿고 인정하고 믿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말씀도 그렇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명기 33:29) 결론적으로 믿음은 끌어댕기는 법칙입니다. 누가복음에 혈루증 앓는 여인이 믿음이 손으로예수님 옷자락에 댔을띠 내게서 증력이 나갔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믿고 손을 대고 끌어댕겨야 겠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신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선하시다. 주를 모시고 사는 나는 행복한 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그렇게 산다면 정말 행복 한 일들이 따라와 달라붙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또한 행복의 복음을 실제로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먼저 행복한 삶을 살고 또한 행복을 나눠주는 자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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