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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랑도(海浪島)의 수우(水牛:물소)와 조선(朝鮮) (제2편)
(제 2 편)
○ 물소(水牛)가 있었다는 해랑도(海浪島)는 어디에 있었던 섬(島)인지를 우선 알아야 될 것 같다.
(5)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成宗 296卷, 25年(1494 甲寅 / 명 홍치(弘 治) 7年) 11月 11日(丙申) : 《義禁府啓:金自松等,潛渡海,入海浪島,捕水牛,載皮肉而來,罪律該斬不待時.命議之. :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 김자송(金自松) 등이 몰래 바다를 건너 해랑도(海浪島)에 들어가 물소(水牛)를 잡아 가죽과 고기를 싣고서 온 죄는, 율(律)이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합니다하니, 명하여 이를 의논하도록 하였다. (중략).》고 하였으니, 바다를 건너, 해랑도(海浪島)에 가서 물소(水牛)를 잡아왔다는 이이기다.
➤ 위 기록(記錄)으로 보면 : 「몰래 바다를 건너(潛 渡 海)가서, 해랑도(海浪島)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어떤 바다인지는 모르되, 일단 바다(海)를 건넜다고 하였으니, 바다 가운데(海中)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물소(水牛)는 바닷물 속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육지(陸地)동물(動物)이다.
또 당시(當時)에는 이곳(海浪島)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禁止)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天地門) 해랑도(海浪島) : 《近世海濵漁採者有海浪船艘尋常出没至不可數.中略. : 근세에 바닷가에서 고기잡이하는 해랑선(海浪船)이 예사로 출몰하여 그 수를 알 수 없다. 중략(中略). 盖海浪島名也.在中國東北海中. : 해랑(海浪)은 섬 이름이다. 중국의 동북해(東北海) 가운데에 있다. 明末鄭芝龍軰結連島賊為聲勢其子成功及孫經入海我國亦以為憂毎有浮說騷動至發扵賊招其真與偽雖不可知經之㨿海島則有之. : 명나라 말기에 정지룡(鄭芝龍)의 무리들이 섬에 있는 도둑과 연결하여 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그의 아들인 성공(成功)과 손자인 경(經)이 바다에 들어가자 우리나라에서까지 이를 걱정하게 되었으며 뜬소문으로 소동이 있을 적마다 반란자의 문초 가운데에서까지 말이 나왔다.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정경(鄭經)이 바다 섬을 점령한 것만은 사실이다. 今之海浪船安知非餘種耶. : 지금의 해랑선이라는 것은 그들의 후손이 아님을 어떻게 알겠는가? 燕山六年下海人至海浪島見島内居人多本國逃移生長漸加滋蔓奏請中朝遣李坫田霖趙元紀䓁搜括遼東人六十四名差人送去本國人四十八名刷還竒.中略. : 연산군 6년에 바다에 나갔던 사람이 해랑도에 다다랐는데, 섬 안에 거주하는 사람은 대개 우리나라에서 도망쳐서 들어간 자들로 자손들이 불어서 차츰 번성해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중조(中朝)에 보고하고 이점(李玷)ㆍ전림(田霖)ㆍ조원기(趙元紀) 등을 보내어 요동(遼東) 사람 64명을 색출하여 사람을 시켜 돌려보내고, 우리나라 사람 48명도 데려왔다. 중략(中略).》라고 하였다.
➊〈盖海浪島名也.在中國東北海中. : 해랑(海浪)은 섬 이름이다. 중국의 동북해(東北海) 가운데에 있다.〉고 하였는데,
중국(中國)을 오늘날의 중국(中國) 땅으로 볼 때 : 동북해(東北海)는 현(現) 하북성(河北省) 남(南)쪽의 발해(渤海) 일 뿐이다. 이곳에 “해랑도(海浪島)”라는 섬(島)은 있을 수 없다. 조선(朝鮮)의 서해(西海)바다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➋ 또 명(明) 말(末)의 해적(海賊) 정지룡(鄭之龍)은, 장강(長江)유역에 있었으며, 이들은 왜(倭)와 결탁(結託)하여 해안(海岸) 가까운 곳과 장강(長江)유역 및 복건(福建), 절강(浙江), 양광(兩廣)지역을 휩쓸고 다녔다.〈정지룡(鄭之龍)의 후손(後孫)들이 섬(島)을 점령(占領)하여 살았다는 섬(島)은, 대만(臺灣)을 일컫는다.〉
➌ 위 글을 보면 : 이곳 “해랑도(海浪島)”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요동인(遼東人)”이란 말은 곧 요동(遼東)지방 가까운 곳 바다 또는 강(江) 가운데 있는 섬(島)이란 얘기가 된다.
현재(現在)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 말하는 요동(遼東)지방은 : 요수(遼水)의 동(東)쪽 지방을 칭하는 것이고, 그 남(南)쪽만이 바다(海)이며, 그 바다 가운데 있는 “섬(島)” 이 “해랑도(海浪島)”일 수 있으나, “물소(水牛)”가 바닷물 속에서는 살 수 없다. 때문에 “바다 속의 조그만 섬(島)”이란 말은 해당되지 않으며, 육지(陸地)속의 “호수나 늪지대에 있는 섬(島)”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 섬(島)은 큰 면적(面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해랑도(海浪島)는 조그만 섬이라고 하였다.
(7) 고봉집(高峯集) / 논사록 상권/ 기사년(1569, 선조2) 1월 16일 :《面況聖王不賞邊功.竊又聞之.我祖宗朝命田霖討海浪島.盡討而歸來.命於開城府賜一等樂以慰之.其賞賜則不過鞍具馬一匹而已. : 또한 듣건대 우리 조종 조(祖宗 朝)에서도 전림(田霖)에게 해랑도(海浪島)의 토벌을 명하여 모두 토벌하고 돌아오자 개성부(開城府)에 명하여 일등악(一等樂)을 하사하여 위로하게 하였을 뿐, 상으로 하사한 물품은 안구마(鞍具馬) 1필(匹)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하였다.
※ 전림(田霖)【고전번역원 注】: 〈?~1509.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전주 판관, 첨지중추부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등을 지냈다. 1500년 해랑도초무사(海浪島招撫使), 1504년 좌상대장(左廂大將)을 거쳐,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그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청백리로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해랑도(海浪島)는 상국(上國)의 땅이었으나, 그 통치력(統治力)이 제대로 미치지 않아, 조선(朝鮮)에서 군대(軍隊)를 출정(出征)하여 이곳을 토벌(討伐)했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 해랑도(海浪島)는 : 중조(中朝)의 경계(境界)안에 있었던 섬(島)이었지만, 조그만 섬이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 바람에, 이곳으로 스며든 백성(百姓)들이, 수적(水賊)이 되어, 양호(兩湖)지방에서 중조(中朝)로 올라가는 조운(漕運)을 어지럽히니, 지방(地方)정부가 나서서 이들을 퇴치(退治)하니, 중조(中朝)에서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라면 수긍(首肯)할 수 있게 된다.
(8) 허백정집(虛白亭集)四.雜著.題海浪島圖 :《海浪島邈在西海中.爲逋逃淵藪者久.國家欲遣兵搜討.以地近上國界.未敢擅發.乃具由奏請.皇帝勅曰可.上命同知中樞臣田霖爲招撫使.司導寺正臣李坫爲副.其從事有六.曰判官成順仝,僉正鄭克仁,經歷金世鈞,李宗仁,正郞郭宗藩,修撰趙元紀.皆文武才也.衛將二.曰許瑊,柳湄.部將五.曰林昱,金許孫,趙允琛,姜以溫,朴桓。軍官三十.皆武人之選也.兵卒二百.舟子及指路者又若干.摠七百餘人.弘治庚申五月戊寅.發龍川.》라고 하였는데,
➤ 해랑도(海浪島)는 : <海 浪 島 邈 在 西 海 中 : 해랑도(海浪島)는 아득히 먼(邈) 서해(西海)바다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또 이 땅 가까이 상국(上國)과 경계를 하고 있다(以地近上國界)고 하였다.
해랑도(海浪島)는 아득히 먼 서해(西海)바다에 있다고 한 곳이 발해(渤海)일까? 발해(勃海)를 서해(西海)바다고 한 예(例)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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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호사설 제10권 / 인사문(人事門) 비예외적(備預外敵) :《所謂海浪島不過一小島.朝廷曾遣李坫田霖䓁討之得我國及中土被虜男婦而還雖無可考文跡其為害扵我可想若使. : 소위 해랑도(海浪島)란 한 소도(小島)에 불과하다. 조정에서 일찍이 이점(李坫)과 전림(田霖) 등을 파견하여 토벌한 뒤에 포로였던 우리나라와 중토(中土)의 남녀를 찾아왔으니, 여기에 대한 문적(文蹟)은 상고할 수 없으나, 이들이 우리에게 해로운 존재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中國紀綱觧紐島夷逞欲刼奪我两湖之漕我將坐而待亾而已. : 만약 중국의 기강(紀綱)이 해이해져 도이(島夷)가 제멋대로 욕심을 부려 우리 양호(兩湖)의 조운(漕運)을 겁탈해 간다면, 우리나라는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게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 양호(兩湖)지방(地方) :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지방을 칭하는 말이다. 이곳은 동정호(洞庭湖)의 남쪽지대와 그 서(西)·서북(西北)쪽 지방을 일컫는다.
양호(兩湖) : 양(兩)이란, 두 또는 둘 또는 짝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양호(兩湖)지방(地方)이란 큰 호수(湖水)를 중심(中心)으로 「호수(湖水)의 서쪽지방과 호수(湖水)의 남쪽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를 일컫는 것이다. 반도지방(半島地方)은 이러한 지세(地勢)를 가진 곳이 없다. 「양호(兩湖)지방이란, 동정호(洞庭湖)를 기준(基準), 서쪽의 충청도(忠淸道)와 남쪽의 전라도(全羅道)지방을 말하는데, 곧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호남(湖南)지방(地方)이란 : 동정호(洞庭湖)의 남(南)쪽 지방을 말하며, 넓게는 장강(長江)이남(以南)의 대부분(大部分)지방을, 좁게는 호남성(胡南省)지방을 말하는데, 호남 성(胡南省)은 동서(東西) 9백리, 남북(南北) 천리(千里)정도이다.
서북(西北)은 사천성(四川省), 동쪽은 강서성(江西省), 남쪽은 광동(廣東)과 광서(廣西), 서쪽은 귀주성(貴州省), 북쪽은 호북성(胡北省)이다. 호남(湖南), 호북(湖北)지방을 생각하면 이해(理解)하기 쉽다.
※ 兩湖討捕使(양호토포사) :《조선(朝鮮) 고종(高宗) 31년에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鎭壓)하기 위(爲)하여 둔 입시 벼슬인데, 전라병사(全羅兵使) 홍계훈이 임명(任命)되었다.》고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설명(說明)한다.
그러나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지방은 반도(半島)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그것은 『반도(半島) 땅엔 둘레가 800-900 리나 되는 동정호(洞庭湖)가 없기 때문이다.』 반도(半島) 땅에서 “양호(兩湖)”지방이라고 한다면, 「조작(造作)된 것이다」는 점을 분명(分明)하게 말할 수 있다.
➤ 위 글에서 말하는 양호(兩湖)의 조운(漕運)이란 말은, 곧 장강(長江)의 조운(漕運)을 말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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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성종(成宗) 24년 계축(1493) 1월 12일(무인) : 《(右議政許琮)琮又啓曰:海浪島在上國之境,而吾民潛往來捕水牛,立重法痛禁何如?上曰:然. : 허종(許琮)이 또 아뢰기를 : 해랑도(海浪島)는 상국(上國)의 지경에 있는데, 우리나라 백성들이 몰래 왕래하면서 물소(水牛)를 잡아오니, 중한 법을 세워서 엄하게 금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하였다.》고 하였다.
(11) 성종(成宗) 25년 갑인(1494) 11월 11일(병신) :《丙申,義禁府啓:金自松等,潛渡海,入海浪島,捕水牛,載皮肉而來,罪律該斬不待時.命議之. : 병신(丙申),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 김자송(金自松)등이 몰래 바다를 건너, 해랑도(海浪島)에 들어가, 물소(水牛))를 잡아, 가죽과 고기를 싣고서 온 것의, 죄는 율(律)이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합니다. 하니, 명하여 이를 의논하도록 하였다. 尹弼商,李克培,盧思愼,韓致亨,鄭文烱,柳輊議:前此金飛羅等減死.今自松之罪,與彼無異,請減死.傳曰:可. : 윤필상(尹弼商)ㆍ이극배(李克培)ㆍ노사신(盧思愼)ㆍ한치형(韓致亨)ㆍ정문형(鄭文炯)ㆍ유지(柳輊)가 의논하기를 : 이 앞서 김비라(金飛羅) 등을 감사(減死)하였는데, 지금 김자송의 죄는 그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청컨대 감사(減死)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12) 연산군 4년 무오(1498) 4월 21일(병술) :《承政院啓: 前此累咨遼東,請刷還我民逃居海浪島者,遼東不答.中略. : 승정원(承政院)이 아뢰기를, “전번에 여러 번 요동(遼東)에 공문을 보내어, 해랑도(海浪島)에 도망가서 사는 우리 백성을 쇄환(刷還)해 달라고 청했는데 요동에서 답하지 않습니다. 今以高正南招辭觀之,海浪島不干上國地界. : 지금 고정남의 초사(招辭)를 보면 해랑도(海浪島)는 상국(上國)의 경계에 들어있지 않다 고 합니다.》고 하였다.
(13) 연산군 4년 무오(1498) 12월 11일(임인) :《壬寅.管押使李蓀到遼東馳啓: 一,都司葉廣舍人李浩言:金州衛東南海中,有海浪島,方百里. : 관압사(管押使) 이손(李蓀)이 요동(遼東)에 이르러 치계(馳啓)하기를 : 첫째, 도사(都司) 섭광(葉廣), 사인(舍人) 이호(李浩)의 말에 의하면 : 금주위(金州衛) 동남(東南) 해중에 해랑도(海浪島)란 섬이 있는데, 사방 1백 리나 된다고 합니다. 於此逃賦人不記數,潛入此島.又懿路縣馬軍,東寧衛土人郭成得罪,率妻子往此島,誘引沿海之民,歲漸繁滋,人家五十餘戶.郭成自稱摠兵官,麾下人或稱指揮,千戶,百戶,摠旗. : 그곳에는 부역(賦役)을 도피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이 섬으로 잠입하였을 뿐더러 의로현(懿路縣) 마군(馬軍)ㆍ동령위(東寧衛) 토인(土人) 곽성(郭成)이 죄를 얻고, 처자를 데리고 이 섬에 들어와, 연해의 백성을 유인하니, 해마다 점점 번식하여 인가가 50여 호에 달했다 합니다. 그러자 곽성은 자칭 총병관이라 하고 휘하 사람은 혹 지휘(持揮)ㆍ천호(千戶)ㆍ백호(百戶)ㆍ총기(摠旗)라고 칭한다 하옵니다. 一,遼陽館夫庾英云:金州,盖州二衛東南海中,有七十二島,而海浪島最大,周回三百餘里. : 둘째, 요양 관부(遼養館夫) 유영(庾英)이 이르기를, 금주(金州)ㆍ개주(蓋州) 이위(二衛)의 동ㆍ남해 중에 72개의 섬이 있는데, 해랑도(海浪島)가 가장 커서 주위가 3백 여 리나 됩니다. 關外二十五衛民人,或强盜,或殺人,或犯綱常重罪,數多潛入,幾至千數. : 관(關) 밖의 25위(衛)에는 인민이, 혹 강도(强盜), 혹 살인 혹 강상을 범한 중죄인이, 수없이 잠입하여 거의 1천 호에 달한다 합니다. 不事農業,或賣獐鹿,海羊皮,魚肉,或搶奪沿海居民財産,以爲生業.且高麗人亦數數往來興販,因此以資生. : 농업을 일삼지 않고 혹은 노루ㆍ사슴ㆍ해양피(海羊皮) 어육(魚肉)을 팔고 혹은 연해 주민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을 생업을 삼으며, 또 고려인(高麗人)도 역시 자주 왕래하여 흥판(興販)을 하므로, 이로 인하여 자생(資生)하고 있다 하옵니다.》하였다.
(14) 중종(中宗) 21년 병술(1526) 11월 16일(을미) : 《捕盜將尹熙平,元彭祖等啓曰:以朴具謙所告,搜三島,【阿次島,甫老音島,末叱島,乃江華地也.】捕捉七十六人,囚禁于開城府耳. : 포도장(捕盜將) 윤희평(尹熙平)과 원팽조(元彭祖) 등이 아뢰기를 : 박구겸(朴具謙)이 고발했기 때문에, 3도(島)【아차도(阿次島)ㆍ보로음도(甫老音島)ㆍ말질도(末叱島)인데 강화(江華)땅이다.】를 수색해서 76인을 체포, 개성부(開城府)에 수감했습니다. 進告日,具謙以爲:三島居人,如大生蛤,非我國所産等物,多數採來,必往來于海浪島之間,以爲水賊.中略. : 고발하던 날 (박)구겸이 : 3도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대생합(大生蛤)등의 물품을 많이 채취(採取)해 온 것을 보면 틀림없이 해랑도(海浪島) 사이를 왕래하면서 수적(水賊)노릇을 한 것 같다했습니다. 중략(中略).》
(15) 해랑도(海浪島) / 왕조실록(王朝實錄) 주석(註釋)편에 의하면 : 평안도(平安 道) 선천(宣川) 서쪽 장록도(獐鹿島) 등을 지나 3∼4일을 가서 해랑도(海浪島)에 도착하였다 했고, 또 해랑도(海浪島)는 상국(上國)의 경계에 있다 했으며, 그곳에는 물소(水牛)가 생산된다고 하였으니, 제주도(濟州島) 서남(西南)쪽에 있는 섬인 듯하다. 《성종 23년 임자(1492) 8월 4일(임인)ㆍ24年 正月 戊寅》
(16) 순암문집 제7권/ 서(書) : 이정조(李廷藻) 가환(家煥) 에게 편지를 보내다. :《을유(乙酉) : 고려 때에 서희(徐熙)와 박의중(朴宜中)이 잘 대답하지 않았더라면 북쪽 지역을 모두 잃었을 것입니다. 옛날로 말하자면 기자(箕子)의 강토는 지금 요동(遼東)의 전 지역과 요서(遼西)의 의주(義州) 및 광녕(廣寧) 이동(以東)이 모두 조선의 강토에 속하였으니, 중국의 사서(史書)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제가 편찬한 ‘동사지리고(東史地理考)’ 가운데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도(海島)로 말하자면 숙종(肅宗) 계유년(1693, 숙종 19)에 안용복(安龍福)이 없었다면 울릉도(鬱陵島)가 필시 왜인(倭人)들에게 점거(占據)당했을 것입니다. 서해(西海)에 해랑도(海浪島)가 있는데 이 역시 분명하니, 자세히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그밖에 큰 섬이나 무인도(無人島)도 많다고 하니, 자세히 탐색(探索)하여 기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7) 지봉유설(芝峯類說) : 《이에 이점(李坫)ㆍ전림(田霖)을 파견하여 해랑도(海浪島) 도망 민을 수색했는데, 요동 사람이 남녀 모두 64명이고, 본국 사람이 남녀 모두 48명이었다. 관원을 보내어 중국에 주문(奏聞)하였다. 해랑도는 본국과 가까워 중국사람 및 우리나라 사람이 도망해 들어가서 점점 불어나자 연산 조 때 ‘전림’을 보내어 수색하였다. 요즘은 해적이 출몰하여 양서에서 호남에 이르기까지 노략질하니, 그 해를 입지 않는 달이 없었다. 조정에서 백령도(白翎島)ㆍ안흥(安興)ㆍ마량(馬梁)에 진(鎭)을 설치하고 대비하니, 그 화가 조금 잠잠해졌지만 후일의 걱정이 염려스럽다.》
(18) 중종 17년 임오(1522,가정 1) / 5월28일 (계유) 쇄환되는 제주 사람들을 억제할 것에 대해 대신에게 문의하다.
[주D-001] 해랑도(海浪島) : 만주(滿洲) 봉황현(鳳凰縣) 대고산(大孤山)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 대록도(大鹿島) 및 소록도(小鹿島).
➤ 위의 글 (10)에서 (18)까지를 보면 :
➊ 해랑도(海浪島)는, 조선(朝鮮)의 서(西)쪽 변경(邊境) 가까이에 있었는데, 이곳에 물소(水牛)가 많았다고 하며, 우리나라(朝鮮)에서 산출(産出)되지 않는 대생합(大生蛤)도 산출(産出)되는 곳이라고 했다.
대생합(大生蛤)이 대합조개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대합조개는, 반도(半島)의 서해(西海)에서 많이 산출(産出)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서 말하는 대생합(大生蛤)이란 「아국(我國 : 우리나라)에서 산출(産出)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➋ 서해(西海)에 해랑도(海浪島)가 있다. 또는 강화도(江華島)와 해랑도(海浪島) 사이를 왕래(往來)한다.
➌ 해랑도(海浪島)는, 요동(遼東)관할(管轄)이며, 금주위(錦州衛) 동남(東南) 해중(海中)에 있으며, 사방(四方) 1백리정도에 이른다. 또는 금주(金州)ㆍ개주(蓋州) 2위(二衛)의 동(東)ㆍ남해(南海) 중에 72개의 섬이 있는데, 해랑도(海浪島)가 가장 커서 주위가 3백 여리나 된다.
➍ 평안도(平安道) 선천(宣川) 서쪽 장록도(獐鹿島) 등을 지나 3∼4일을 가서 해랑도(海浪島)에 도착하였다 했고, 또 해랑도(海浪島)는 상국(上國)의 경계에 있다 했으며, 그곳에는 물소(水牛)가 생산된다고 하였으니, 제주도(濟州島) 서남(西南)쪽에 있는 섬인 듯하다.
➤ 위의 것들을 대략적으로 요약(要約)해 보면 :
➎ 조선(朝鮮)의 서(西)쪽 바다 가운데 있다. 현대(現代)의 역사해설(歷史解說) 곧 주석(註釋)에서는 : 제주도(濟州島) 서남(西南)쪽에 있는 섬(島)인 듯하다.
위의 지도(地圖)를 보면서 :
반도(半島) 땅에서 서(西)쪽 바다(海)란, 중국(中國)과 반도(半島)사이의 바다를 말한다. 이곳의 해중(海中)의 섬(島)에서 물소(水牛)가 많이 산다는 곳은 없다.
제주도(濟州島) 서남(西南)쪽 바다(海)에 있는 것 같다는 말은, 곧 대만(臺灣)을 일컫는 다고 보면, 이곳엔 물소(水牛)가 있었다고 하며, 오늘날에도 물소(水牛)가 살고 있다.
그러나 이곳 대만(臺灣)이 조선(朝鮮)과 인접국(隣接國)과의 가까이에 있다고 한다면 곧 당시(當時)의 조선(朝鮮)은 대륙(大陸) 본토(本土)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당시(當時)에 조선(朝鮮)의 여러 도(道)에 물소(水牛)가 가축(家畜)처럼 길러졌다는 것은, 상식적(常識的)인 일이 된다. 왜냐하면 장강(長江)이남에는 물소(水牛)가 많기 때문이다.
➏ 요동(遼東)의 서쪽 바다요, 요서(遼西) 금주위(錦州衛) 동남(東南) 바다 가운데에 있다. 금주(金州)ㆍ개주(蓋州) 2위(二衛)의 동(東)ㆍ남해(南海) 중에 72개의 섬이 있는데, 해랑도(海浪島)가 가장 커서 주위가 3백 여리나 된다고 하였는데…
위의 지도를 보면서 :
금주위(錦州衛)는 요서(遼西)지방이며, 이곳의 동남(東南)쪽은 요동반도(遼東半島)이고, 남(南)쪽이 바다이며,
개주(蓋州)의 동(東)쪽이나 남(南)쪽은 요동반도(遼東半島)이며, 서(西)쪽이 요동만(遼東灣)으로 바다(海)이다. 따라서 위에서 말하는 금주(錦州), 금주(金州)【금주(金州) : 남(南).동(東).서(西) 모두 바다이다.】, 개주(蓋州)는 현재(現在)의 요녕성(遼寧省)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 이곳 바다에 물소(水牛)가 있다는 사실(事實)은 검증(檢證)된 바 없으며, 1백리 또는 3백리나 되는 섬(島) 또한 없다는 사실(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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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2월 5일 壬戌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 등을 바치다 :
《按撫使金麟雨還自于山島,獻土産大竹,水牛皮,生苧,綿子,檢樸木等物,,且率居人三名以來.其島戶凡十五口,男女幷八十六.麟雨之往還也,再逢颶風,僅得其生. :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土産物)인 대죽(大竹)·수우피(水牛皮)·생저(生苧)·면자(綿子)·검박목(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戶]는 15구(口)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올 때에, 두 번이나 태풍(颱風)을 만나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고 하였다.
우산도(于山島)의 토산물(土産物)인 수우피(水牛皮) : 수우피(水牛皮)는 말 그대로 물소(水牛) 가죽(皮)을 말하는 것이다. 물소가죽을 얻으려면 당연히 물소(水牛)가 있어야 함은 초등학생(初等學生)도 다 알 수 있는 문제(問題)다.
그렇다면 우산도(于山島)는 어디에 있는 섬일까 : 울릉도(鬱陵島) 또는 독도(獨島)를 말한다고 하는데, 명백(明白)하게 확인(確認)된 설명(說明)이 아니다.
우산도(于山島)는 울릉도(鬱陵島)냐? 독도(獨島)냐?
➤ 반도(半島) 땅에, 반만년(半萬年)의 조선왕조(朝鮮王朝)가 흥성(興盛)했었다고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하면서도, 그 땅에 있는 지명(地名)하나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은, 도대체 누굴 위한 역사관(歷史觀)이며, 언제까지 횡설수설(橫說竪說)로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할 건가?
울릉도(鬱陵島) 또는 독도(獨島)에 물소(水牛)가 살고 있어, 토산품(土産品)으로 물소가죽(水牛皮)을 중조(中朝)에 납공(納貢)했다? 이게 누굴 위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문제(問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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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랑도(海浪島)〉는 어디에 있었던 섬(島)일까?
ⓐ 첫째 조건(條件)으로 보면 : 해중(海中) 곧 바다 가운데라는 말은 제외(除外)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물소(水牛)는 바닷물 속에서 사는 동물(動物)이 아니고, 늪 또는 강(江)등에서 사는 동물(動物)이기 때문이며, 섬(島)에서 살 수는 있으나, 기후(氣候)가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오는 환경(環境)을 가지고 있는 곳이어야 한다.
ⓑ 둘째는, 자연환경(自然環境)과 기후(氣候)등으로 보면 : 물소(水牛)의 분포(分布)지역(地域)을 보면 : 〈풀이 무성한 정글을 흐르는 커다란 강(江) 근처나 늪지이며, 인도, 네팔, 미얀마, 인도차이나, 말레이시아, 필리핀, 중국, 대만등지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추위를 타는 동물(動物)이란 뜻이다.
○ 이러한 곳(땅)은, 옛 신라(新羅)의 땅 일부(一部)였으며, 고려(高麗)의 땅이었으며, 이후(以後) 조선(朝鮮)의 땅이기도 했던 곳이다.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존재(存在)할 수 없는, 가공(架空)의 봉건왕조(封建王朝)다. 곧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로부터 중토(中土)와 열도(列島)까지를 아울렀던 조선(朝鮮)을 지우기 위해, 사가(史家)들이 만들어 놓은 모조품(模造品)일 뿐이다.〉
이러한 것들을 간파(看破)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우리의 역사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일 것 같다.
2018년 03월 17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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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8.03.19 19:22
첫댓글 안녕하세요. <샤이닝닝>님!
우선 "우리나라 역사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신 것"에 감사 말씀 드립니다.
지금 조선사에 관한 많은 주장과 가설들이 특히 재야쪽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수천년 전이나 수백년 전의 역사적 사실은 우리가 직접 체험하지 못한 일들이므로, 역사기록이나 유물유적등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그림이나 삽화, 고지도라는 것등은 사실 믿기 어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서세동점시기에 특히 조선을 해체한 자들이 무주공산이 된 조선강토 이곳 저곳에 과거 조선왕조의 밑에 있던 작은 제후국들을 마치 천자국인 냥 만들어 버려, 이러한 것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역사 이야깁니다. 진실과 다른 이야기죠.
특히 역사기록이란 것들을 살펴보면, 조선천자의 통치력이 미치는 곳으로 한정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현재 미국의 영향력은 마치 전 세계를 움직이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해서 모두가 미국의 영토라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북미(北美)대륙이 조선(朝鮮)이다라는 말은 고고학적으로, 서지적으로 고증된 것이 단 하나도 없다고 보며, 다만 그곳 토착민들은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베링해를 거쳐 그곳 대륙으로 이주하여 살던 동양계 인간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곳이 조선영토다라고 하는 주장은 큰 오류(誤謬)라고 봅니다. 대륙조선은의 영토는 중앙아세아로부터 대륙과 반도와 열도까지로 봅니다.
예를 들면 투바공화국의 섬 요새(당노산맥이 있고, 옛 당노오량해가 살던 곳)를 누가 건설했는가에서 : 발해 또는 고구려가 축조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러한 예로 보면 조선천자의 영토를 가늠해 볼 수 있다고 보며, 조선천자의 교화가 미쳤다고 해서, 풍습과 발전된 문명이 전달됐다고 해서, 의탁하거나 또는 복속되었다고 해서 이 모두가 조선영토란 말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하와이섬은 본토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당시의 일반인들이 물고기를 잡는 해랑선을 타고 다니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관심과 성원에 감사를 드리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신다면 만족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