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겨레의 명절, 추석을 보내고 국화 향기 그윽한 10월에 접어들었다. 추석날 아침, 사촌 동생 집에서 광주에 사는 가족들이 한데 모여 기도의 시간을 갖고 제수가 정성을 기울여 장만한 음식을 들며 가문의 화목과 우애를 다졌다. 기도회 때 읽은 성경 구절은 시편 112편,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로 이어지는 말씀을 통하여 가문의 모든 권속들이 정직과 공의, 베풂의 삶에 충실하기를 기원하였다.
아침 식사 후에 우리 내외는 교회로 향하였고 다른 가족들은 고향 선영의 성묘 길에 올랐다. 교회예배에 참석한 이들이 평소보다 많이 줄었다. 요양원에 있는 분들 을 포함하여 많은 분들이 명절 쇠러 가족 곁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명절 때마다 오후 예배는 윷놀이대회로 갈음한다. 이날도 예배당에서는 어린이로부터 노년에 이르는 교우들이 함께 어울린 윷판이 벌어졌다. 8조로 나뉘어 토너먼트로 벌어진 윷놀이 우승 조는 70~80대의 할아버지 팀이다. 상금은 1인당 1만5천원, 빳빳한 천 원짜리 열다섯 장씩을 받아든 할아버지들의 표정이 환하다.(모든 참가자에게는 5천 원부터 승수에 따라 차등을 둔 상금을 준다.)
낮에는 약간 흐리기도 하였는데 저녁에는 보름달이 환하게 대지를 비춘다. 아내와 함께 인근의 초등학교 운동장을 산책하며 달맞이를 하였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TV를 켜니 우리 공군의 블랙이글 팀이 영국의 에어쇼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받은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공군참모총장이 영국의 현지에 건너가 우수한 기량을 펼친 보라매들을 격려하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장면을 보며 가슴이 벅차고 숙연한 기분이 든다. 작년 3월에 광주 공군비행장이 가까운 포충사 인근에서 걷기 연습할 때 여러 차례 펼쳐진 에어 쇼 훈련장면을 흥미 있게 지켜보며 우리를 위한 축하비행이라고 우스개를 하였는데 그것이 블랙 이글 팀의 훈련과정이었을까.
오늘 방송에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유튜브 조회 3억을 돌파했다는 뉴스에 이어 영국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낭보가 전해진다. 지난달에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고 신지애는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 골프에서 압도적인 스코어차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또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이 일본을 앞서는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의 국운이 크게 상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희소식이 반갑다.
추석 연휴 전날에는 무등야구장을 찾아 박진감 넘치는 프로야구의 향연을 즐겼고 연휴 다음날에는 후배교수가 열정적으로 준비한 빛고을노인건강타운 공연장의 휴먼콘서트에 가볼 예정이다. 개인이나 나라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덕담이 현실로 다가서는 일련의 좋은 일들이 시월상달에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추신,
30년 전, 한국의 복싱 스타 김득구가 미국의 복싱 영웅 맨시니와의 타이틀전에서 쓰러져 의식불명에 빠진 끝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 주었는데 김득구가 숨을 거둘 때 어머니 뱃속에 있던 아들과 경기 상대가 사망한 것에 충격을 받아 링을 떠난 맨시니가 만난 사연이 아름답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비운의 복서' 김득구 아들, 맨시니 만나…
1982년 11월 13일.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호텔 특설링에서 한국의 복싱스타 김득구(1955~82)는 14회 혈전 끝에 미국의 복싱영웅, WBA 라이트급 챔피언 레이 맨시니의 펀치를 맞고 의식불명에 빠졌다. 그리고 나흘 뒤 그는 임신한 약혼녀를 놓아두고 스물일곱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배고팠던 시절, 헝그리 복서의 죽음 앞에 한국민은 자기 일처럼 슬퍼했다.
올해 김득구 사망 30주기를 맞아 비운의 복서 김득구와 불운의 복서 맨시니의 스토리가 재조명된다. 베스트셀러 작가 마크 크리걸의 ‘레이 맨시니 전기’(『The Good Son: Life of Ray ‘Boom Boom’ Mancini』)(18일 미국 출간)와 이 전기에 바탕한 동명의 다큐멘터리(감독 제시 제임스 밀러)를 통해서다. 밀러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지난 20일 워싱턴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책과 다큐멘터리의 클라이맥스는 지난해 6월 이뤄진 김득구의 약혼녀 이영미(53)씨와 아들 지완(29)씨, 그리고 맨시니(51)의 만남이다. 지난 21일 크리걸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두 가족의 상봉 과정과 그 가슴 먹먹한 순간을 들려줬다. “김득구 선수의 유족, 이영미씨와 아들 지완 씨는 그동안 언론 접촉을 극구 꺼렸습니다. 하지만 레이 맨시니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 싸웠던 복서였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책 테마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인터뷰를 허락했고요. 그런 중에 먼저 지완 씨가 맨시니를 만나보겠다고 했습니다.”
크리걸은 책 집필을 위해 지난해 한국에 장기간 체류했다. 그때 서울에서 치과의사로 활동 중인 지완 씨를 만났다.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의사로 일한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고 대견스러웠죠.” 그는 지완 씨를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한다. “뭔가 이제서야 제 인생이 이어지는 것 같아요. 생각의 끈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경기를 봤는데, 정말 30년 전에 엄마 뱃속에 있던 나를 위해 열심히 싸웠구나. 아버지가 어머니를 정말 사랑하셨구나…, 가슴 깊이 느꼈어요.” 지완 씨가 한 얘기다. 맨시니를 만나기로 결심한 지완 씨는 지난해 6월 미국으로 출발하기 앞서 아버지와 맨시니의 복싱 매치를 봤다고 한다. 처음 본, 아버지의 마지막 경기 장면이었다. 링에 쓰러져 들것에 실려가는 아버지를 본 뒤 마음이 바뀌었다. ‘맨시니가 아버지를 죽였다.’
만나지 않겠다고 맘먹었지만 밀러 감독의 다큐멘터리 제작진까지 모두 와있는데, 취소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LA행 비행기를 탔다. 6월 23일. 맨시니는 샌타모니카 집 앞에서 이리저리 걸으며 안절부절 못했다. “링에 섰을 때도, 이렇게 떨린 적이 없었는데….” 흰색 자동차가 그의 앞에 섰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순간. 파란 스포츠 재킷과 카키 바지를 입은 젊은 청년 한 명이 차에서 내렸다. 김득구 선수의 아들 지완 씨였다. 그의 어머니 이영미 씨도 함께였다.
맨시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를 만나고 싶었다네. 자네 역시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고 들었어. 그런데 막상 만나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 공기 흐름조차 멈춘 것 같은 몇 초의 순간이 흘렀다. “어머니부터 소개해 드릴게요.” 지완씨가 검은색 카디건과 블라우스를 입은 어머니 영미 씨를 가리켰다. 영미 씨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맨시니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아, 이제 제가 비로소 편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지완 씨가 말을 이었다. “맞아요. 이제 아저씨도 편하게 사실 때가 됐어요.”
그날 저녁 샌타모니카의 한 레스토랑에서 맨시니와 지완씨 모자는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난 그 사건 이후 평생을 죄책감 속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복싱에 대한 열정도 다 사라졌고요.” 맨시니의 말에 지완 씨는 “건강을 위해서도 빨리 그만두길 잘하셨다”면서 “저도 사실 고백할 게 있다”고 했다. “경기를 본 뒤 당신을 향해 증오심이 생겼었죠. 하지만 차분해진 뒤 다시 믿음이 생겼습니다. 아버지가 당신의 잘못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라는….”
그때 이영미씨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제가 아기를 가지고 있었잖아요. 저한테는 하늘이 무너져 내렸던 거였어요. 어떻게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걱정했죠. 하지만 이렇게 만나니 우리 가족, 그리고 맨시니 가족도 칠흑 같은 과거에서 비로소 해방된 것 같아요.” 밀러 감독은 김득구 사망 30주기가 되는 오는 11월 17일, 맨시니와 지완씨 모자가 다시 만난다고 말했다.
거의 30년 전인 그날, 정말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싸우던 김득구 선수를 기억합니다. 그 이후 결혼해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 왔지만, 지금 김득구 선수의 기사를 읽으면서 아내와 가족에게 내가 최선을 다했는가를 물으면서 내 자신이 많이 부끄러워집니다. 김득구 선수, 당신은 진정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남편, 아버지였습니다. 하늘나라에서나마 자랑스러워하시기 바랍니다.(중앙일보 2012. 9. 24)
* 오늘, 친지가 보름달이 넉넉하게 비춰주는 추석을 기리며 인생은 아름다워 시리즈의 주제곡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천거와 함께 네덜란드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안드레 류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를 포함한 음악 3곡을 메일로 보내왔다. 이를 첨부로 보내드리니 감상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