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묘나 남편의 묘 앞에서 삼년간 시묘 살이를 하는 것은 대부분 유교적 영향이라 하여, 조선시대 부터 생겨난 것으로
알려 졌으나, 고려사 절요의 기록에는 3년간 시묘 살이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기에, 지금으로 부터 900년에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기록이 제일 빠른 시기는 고려 명종 때 기록이지만 그전에도 있었다 생각되기에 이것은 삼국시대에 들어온
유교적 영향이 많이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절요 제12권 / 명종 광효대왕 1(明宗光孝大王一)
임인 12년(1182), 송 순희 9년ㆍ금 대정 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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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에 군기주부(軍器注簿) 장광부(張光富)가 3년 동안 시묘살이했다고 하여, 그 집 문과 마을 거리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울산 능산리에 있는 동래 정씨 정려는 조선 태종때 정려를 세우라는 것이 있기에 추정 하건데
현재 남아 있는 기록 중 경상도에서 제일 오래된 정려로 보인다.
그 기록은 아래와 같다.
조선왕조 실록---태종 15년 을미(1415) 1월 16일(을묘)
경상도와 영길도의 효자와 절부의 문려에 정문하다
효자(孝子)와 절부(節婦)의 문려(門閭)에 정문(旌門)하라고 명하였다. 경상도 도관찰사가 보고하였다.
신녕 감무(新寧監務) 유혜지(柳惠至)의 아내 정씨(鄭氏)는 임진년 겨울에 그 남편이 죽으니, 집에다 빈소를 차리고 아침저녁으로 전(奠)과 제(祭)를 지냈고, 이듬해 11월에 장사지내자 묘(墓)곁에 여묘(廬墓)살이 하는데, 계집종 둘과 세 살 난 어린 딸을 데리고 무덤을 지키면서 복제를 마쳤습니다.
정씨의 여묘의 기록은 조선 광해군 만들어진 삼강행실도에 남아 있어
동래정씨 정려가 많은 본 보기 된 것으로 보인다.
아주 잘 남아 있는 정려의 기록이다.
삼강행실도 4집에 실린 내용
정씨여묘(鄭氏廬墓)
鄭氏廬墓
鄭氏彥陽縣人 監務柳惠至妻也 惠至死廬墓三年 恭定大王朝 㫌閭
/ 1617년(광해군 9)
뎡시 언양현 사이니 감무 뉴혜지의 안해라 혜지 죽거 삼 년 녀묘니라 공뎡대왕됴애 졍녀시니라
1617년(광해군 9)-----
옛 한글 원문
정씨여묘 - 정씨가 여묘살이를 하다
정씨는 언양현(彥陽縣) 사람이니 감무(監務) 유혜지(柳惠至)의 아내다. 혜지가 죽거늘 삼 년 여묘하였다. 공정대왕조에 정려하였다.--원문 풀이
감무는 고려시대의 행정상의 사또이지만 조선에서는 현감으로 바뀐다.
현재 남아 있는 동래정씨 정려비에는 현감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에 만든 정려는 남아 있지 않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축, 중수를 한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려문 좌우에는 커다란백일홍과 소나무가 자리 잡고 있어 정려비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필자는 정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조선초기의 기록이고 경상도와 울산을 통 틀어서 최고의 기록이기에
글을 써 보았다.
울산의 문화의 불모지가 아니라 고 하려면 이러한 자료를 찾아서 알리고, 알려야 그러한 소리를 듣지 않을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정려 옆에는 시묘 살이 할 동안 주위를 호위한 靈虎塚이 있어 더욱 가치를 더하고 있고
많은 이야기를 꺼리를 낳고 있다.
탑이나 불상과 같은 종교적인 것도 좋지만 여성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정려도 관심을 가졌으면 하고,
특히 울산에서 최고의 정려라는 것에 주목에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았으면 한다...
벽라,
옥산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