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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일원상의 신앙(一圓相-信仰) | |
일원상의 진리를 | 一圓相의 眞理를 |
우주 만유의 본원으로 제불 제성의 심인으로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 宇宙 萬有의 本源으로 諸佛 諸聖의 心印으로 一切 衆生의 本性으로 | 믿으며, |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로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로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로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 大小有無에 分別이 없는 자리로 生滅去來에 변함이 없는 자리로 善惡業報가 끊어진 자리로, 言語名相이 頓空한 자리로 | 믿으며, |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을 | 空寂靈知의 光明을 따라 大小有無에 分別이 나타나는 것을 善惡業報에 差別이 생겨나는 것을 言語名相이 完然하여 十方三界가 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을 | 믿으며, |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하는 것을 | 眞空 妙有의 造化는 宇宙萬有를 通하여 無始曠劫에 隱顯自在하는 것을 |
믿는 것이 |
곧 일원상의 신앙이니라 | 곧 一圓相의 信仰이니라 |
<<1부>>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
지난 시간까지 ‘일원상의 진리’를 다루었습니다. 이 진리를 아시는 분들은 ‘멀리서 찾을 것 없다’고 말씀하시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추상적인 무형의 대상에서 위력이 나온다든가, 나보다 힘이 센 대상으로부터 위력이 나오는 줄 알고, 그 대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과거에 인지가 어두웠기 때문에 성자들이 나오셔서, 신앙의 대상을 의인화 · 추상화했습니다. 또한, 믿음만 강조하거나 수행만 강조하거나, 깨달음만 강조하거나 수양만 강조하거 실천만 강조하거나 하셨지요.
대종사님께서 진리가 무엇이며, 무엇을 어떻게 신앙할 것인가, 수행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사실대로 알려주시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이제는 인지가 열렸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해도 되겠다’고 보신 것이지요.
과거의 것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여전히 진리나 신앙이 신비한 것이나 장엄한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대종사님 당대에도 그랬습니다. 원산 서대인 선진님이 산속으로 절에 가서 공부하고 오신 적이 있지요. 여러분들도, ‘수행을 제대로 하려면 식음을 전폐하고 확 몰아붙이기도 해야한다’고 생각하시기도 하시죠? 다, 모를 때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은 ‘일원상의 신앙’을 다룹니다. ‘일원상의 신앙’을 공부하시면서 여러분 마음을 대조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일원상의 신앙’ 구조]
‘일원상 신앙’은 ‘일원상의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제1절 일원상의 진리’ 내용은 ①일원의 주소, ②일원의 속성 (대/소/유무)로 나누어 진다고 앞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일원상의 진리’에서도 그러셨지만, 대종사님께서 ‘일원상의 신앙’에서도 설명을 아주 자세히 해주셨습니다.
가령, 일원의 주소에 대해 ‘우주만유의 본원’, ‘제불제성의 심인’, ‘일체중생의 본성’ 중 한 가지만 말씀하셔도 대자대비입니다. 셋이 다르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대종사님께서 세 가지로 설명하셨어요.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하려나, 저렇게 설명하면 믿으려냐’ 고민하신 것이지요.
대 자리에 대해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설명하셨습니다. 다 같은 거라서 1가지로만 설명하셔도 되는데, 4가지로 설명하지지요.
소 자리에 대해,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는 것’,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이라 설명하셨습니다. 다 같은 것이라 1가지로만 설명하셔도 되는데,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셨고요.
‘진공묘유의 조화’라고만 말씀하셔도 일원상에 대한 설명이 끝인데도, 유무 자리 설명에서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 하는 것’이라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대종사님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일원의 주소 ① 우주만유의 본원으로 믿으며]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 만유의 본원으로 믿으며, |
‘우주만유의 본원 자리’, ‘제불제성의 심인 자리’, ‘일체 중생의 본성 자리’는 일원상의 주소이고, 본래 자리, 고향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3가지는 같은 자리라고 말씀 드렸지요.
‘우주만유의 본원’에 대해 보겠습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만유의 본원’으로 믿는다 하셨습니다.
우주만유는 둘로 나누면 ‘천지만물 허공법계ㅡ 눈에 보이는 천지만물과 눈에 보이지 않는 허공법계’입니다. 넷으로 나누면, 천지/부모/동포/법률의 사은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본원’에서 ‘원’은 ‘시(처음 시)’와 같습니다. 본원이 시원이고 근원입니다.
여기서 ‘우주만유’와 ‘본원’은 둘이 아니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시작이나 근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돌고 돕니다. 바닷물은 강에서 왔고, 강은 산꼭대기 천에서 왔습니다. 그 내천은 하늘에서 내린 비에서 왔어요. 비가 된 구름은 바다에서 왔거든요.
여러분, 닭이 먼저일까요? 달걀이 먼저일까요? ‘우주만유’와 ‘우주만유 본원’이 이와 같습니다. ‘본원’이 따로 있고, ‘우주만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주만유에 들어갔더니, 우주만유와 본원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근원이면서 실재’입니다.
[전체신앙, 사은신앙]
원불교 신앙은 우주만유를 신앙하는 전체신앙입니다. 범신론이라 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대상도 신앙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대상이 없다는 신앙입니다. 전체신앙은 사은신앙입니다.
(i)천지: 예전에는 신앙의 대상이 ‘천’이었지만, 지금은 ‘지’도 부처님입니다. 이제는 똥도 부처님입니다. 똥이 엄청 중요한 거름이거든요. 호박밭에 똥을 주느냐 마느냐에 따라 호박 맛이 달라져요. 똥에 위력이 있잖아요. 똥이 부처님인 것이지요. 여러분이 죽으면 똥이 되기도 합니다.
(ii)부모: 예전에는 ‘부’만 신앙의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모’도 신앙의 대상입니다.
(iii)동포: 동포는 ‘사농공상 금수초목’입니다. 과거에는 금수초목 중에서 큰 바위나, 당산나무, 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지요. 그때의 신앙에서 신앙의 대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만 신앙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지요. 개체 신앙이었고 편협한 신앙이어서 문제였습니다. 과거 종교에서 하늘을 신앙하는 것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하늘만 신앙하는 게 문제이지요. 그 하나에서만 복과 위력이 나오는 줄 알고, 거기에만 공을 들인 것이 잘못이지요.
(iv)법률: 과거에는 입법자만 신앙했지만, 이제는 치법자도 신앙합니다.
[인과신앙]
사은신앙은 인과신앙입니다.
우주만유 전체는 인과 이치의 적용을 받습니다. 부모의 부모는 누구이고, 그 부모의 부모는 누구입니까? 원인이 끊어지지 않고 면면밀밀이 이어집니다. 그것이 인과의 이치입니다. 인과의 이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과 이치에는 육도윤회가 들어가있습니다. 사람이가 축생이 되기도 하고, 수라보를 받을 수도 있고, 지옥보를 받아 지렁이가 되기도 합니다. ‘산돼지와 포수’ 이야기(대종경 인과품 12장) 들어보셨지요? 인과의 이치로 계속 물고 물리고 돌아갑니다.
인과에 대해 깨친 사람은 함부로 물건을 쓰지도 못하고, 어떤 생명도 쉽게 죽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소승불교에서는 개미도 못 밟게 하잖아요. 물론, 대승불교에서는 업을 받더라도 더 큰일을 하면 괜찮다는 입장이지요.
인과를 확실히 신앙하는 사람은 원인 없는 결과가 없음을 압니다. 무심으로 개미에게 장난을 치니까, 개미의 생사가 왔다갔다 하게 됩니다. 그 개미는 나중에 무심으로 나에게 다시 과보를 주게됩니다. 까마귀 날자 떨어진 배에 뱀이 맞았습니다. 무심으로 지은 것을 무심으로 받습니다.
거울로 얼굴을 보세요. 보이는 얼굴 모습 그것이 그대로 우주만유의 본원입니다. 지은대로 여러분의 얼굴이 있습니다. 엄마 탓, 나라 탓을 하고 싶겠지만, 엄마 탓인 것도 나라 탓인 것도 지은대로 받는 것입니다.
한때 위세가 대단했던 사람이 감옥에 가는 경우가 있지요. 그것이 그대로 인과의 이치입니다. 인간의 법망을 피할 수는 있어도, 진리의 법망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공부 열심히 한 사람이 시험점수가 잘 나오고, 공부 안 한 사람은 점수 잘 안 나오는 것이 인과의 이치이고, 그것이 은혜입니니다.
인과신앙이야말로 은혜의 신앙입니다. 인과야말로 가장 큰 은혜이고, 절대적 은혜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신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납니다. 아무도 모르게 배추씨를 심었는데, 귀신같이 배추가 나옵니다. 이것이 우주만유의 본원입니다.
[일원의 주소 ② 제불제성의 심인으로 믿으며]
(일원상의 진리를) 제불제성의 심인으로 믿으며, |
일원상의 진리를 ‘제불제성의 심인으로 믿으며’라 하셨습니다.
우주만유의 본원을 확실히 깨쳐서, 마음을 일원상의 마음으로 쓰시는 분들이 제불제성입니다. 제불제성이 쓰는 마음에 특징이 있는데, 공/원/정의 특징입니다. 제불제성은 공/원/정ㅡ 즉, 비어서 밝고 조화로운 마음을 그대로 쓰십니다. 제불제성을 정화신불이라 합니다. 정화신불이므로 그 마음을 ‘심인’이라 표현합니다. 우주만유의 본원이 공/원/정인데, 제불제성의 마음이 공/원/정ㅡ비고 밝고 조화로운 마음 그대로 찍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불제성의 마음을 믿자는 것이지요.
[일원의 주소 ③ 일체중생의 본성으로 믿으며]
(일원상의 진리를) 일체중생의 본성으로 믿으며, |
일원상의 진리를 ‘일체중생의 본성으로 믿으며’라 하셨습니다.
일체중생은 편화신불입니다. 일체중생은 집착에 가리고, 습관과 업력에 가리고, 무명에 가려있지만, 본래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기는 부처님이되 한쪽만 부처님이라 해서 ‘편화신불’이라 부릅니다. 중생들은 교당에 왔을 때는 둥근 마음을 내다가도, 교당 나와서 누가 내 지갑을 가져가버리는 일이 생기면 화내는 마음을 내는 거지요.
사형제를 찬성하는 사람은 진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이 큰 성자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도의 아쇼카왕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한 순간 마음 돌려서 불사를 많이 하고 남방불교를 중흥시켰습니다. 죄는 죄요, 복은 복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일체중생의 본성으로 믿는다면 그 누구도 사형시킬 수 없어요. 또한, 친구가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절교할 수 없지요.
[믿으며]
마음을 알고,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신도 부처님이지만, 육신은 먹으려 하고 편하려 하고 재미만 찾고 야한 것을 찾지요. 육신이 원하는 것이 한정 없습니다. 마음에 힘이 있어서 육신을 잘 쓰면 좋을텐데, 육신의 힘이 더 강하면 육신이 하자는대로 생활하게 됩니다. 육신의 노예생활이지요.
대종사께서 ‘일원상 신앙’에서 ‘믿으며(믿는 것)’라는 표현을 11번이나 쓰셨습니다. 일원상 진리를 아직 깨치지 못한 사람은 일단은 먼저 믿으라는 뜻입니다. 안 믿어지더라도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을만한 것을 믿는 것은 신이 아닙니다. 내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믿는 것이 신입니다.
‘신’ 중에서 ‘인과에 대한 신’이 중요합니다. 인과 신앙은 진리 신앙이고, 삼세를 아우르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전체신앙입니다. 이것을 믿자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입니다.
<<2부>>
[일원상의 성격, 형태, 모양에 대한 설명 – 대/소/유무]
일원상의 주소지는 우주만유의 본원이고, 제불제성의 심인이고, 일체중생의 본성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 자리를 믿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입니다.
그 우주만유의 본원의 성격, 형태, 모양을 대/소/유무의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원상에 관한 대 자리 설명]
(일원상의 진리를)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로 믿으며,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믿으며, |
대 자리 설명은 일원상이 텅 비어서 전체가 하나인 자리라는 것입니다.
(1)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그 자리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고,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육신은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크고 작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여러분의 그 마음은 크다 할 수 있는가요, 작다 할 수 있는가요? 크다면 얼마만큼 크고, 작다면 얼마만큼 작습니까? 크다 할 수도 없고 작다 할 수도 없어서, 없다고 하자니, 분명히 듣고 있는 작용이 있는데요. 그런데 그것이 있다고 하자니,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머리에 있다거나, 가슴에 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죽은 사람 시체에도 머리나 가슴은 있지 않습니까?
이 자리는 테두리도 없고, 사이즈도 없기 때문에, 크다 할 수도 없고 작다 할 수도 없습니다. 크려면 능히 크고 작으려면 능히 작은 자리입니다. 대라 할 수 없고, 소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소에 분별이 없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없느냐 하면 보고 듣고 아는 작용이 있지요. 그렇다고 있다고 하자니, 어디에 있습니까?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습니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대종사께서는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 돌이 서서 물 소리를 듣는다)’이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듣는 이것’이라는 게 있어서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물 소리를 듣는 돌과 같습니다. ‘듣는 이것’이라는 게 있어서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중생이라 부릅니다. ‘듣는 이것’을 힌두교에서 아트만(atman)이라 부르지요. 착각입니다.
만약 ‘이것’이라는 게 있다면 생긴 바가 있을 것이고 색깔이 있을 것인데, 없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없다고 하자니, 분명히 훤히 듣는 작용이 있거든요. 돌이 물소리를 듣고 훤히 아는 것과 같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들어 듣고 아는가 했더니,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하셨습니다. 없고 없고, 없다는 것도 없습니다. 아니고 아니고, 아니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 자리가 대소유무에 분멸이 없는 자리입니다. 우주만유의 특성에는 이런 자리의 특성이 있습니다.
(2)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
이 자리는 생멸거래가 없는 자리입니다.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게, 언제 생겼습니까? 꿈도 없을 때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자리는 생긴 바도 없고 멸한 바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한 기운이 동해서 육신을 받으면, 육신 생겼다 멸했다가가 나타나며, 능히 생멸거래가 있어지지요.
(3)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
이 자리는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입니다.
참회문에 “상생 상극의 업력을 벗어나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생도 애착의 착심이고 상극도 착심이거든요. 그래서 이것을 벗어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는 본디 착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여러분이 훤히 보고 아는 이 마음, 여러분 손을 움직이게 하는 마음을 선합니까, 악합니까? 그저 작용할 뿐입니다.
안의비설신의 육근이 지은 바를 ‘업’이라 부르고, 그에 따른 결과를 ‘보’라 부릅니다. ‘지은 바’가 없습니다. 무엇이 들어서 업을 짓습니까? 작용으로는 분명 있지만, 본디 무엇이 들어서 지었다고 말할 게 없습니다.
(4)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
이 자리는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입니다.
훤히 빈 이 자리를, 무어라 이름 붙이자니, 누구는 ‘하나님’이라 부르고, 누구는 ‘불성’이라 부르고, 누구는 ‘일물’이라 부르고, 누구는 ‘일원상’이라 부를 뿐입니다. 아이들은 이름 몰라도 같이 잘 놉니다. 마음이 있으니, 이름이 굳이 필요 없지요.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나를 움직이는 주체인 내가 있는데, 이것이 부처이고 일원상이고 마음입니다. 이것이 들어 내가 죄도 짓고 복도 짓는 것인데, 이것에 죄복이 나오는 줄을 모르고 자꾸 다른 곳만 찾습니다. 수행으로 이 자리를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으므로, 대타적으로는 신앙을 해야합니다.
경허스님이 ‘염궁(念弓)’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각의 틈새를 팍 쏘아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이 막 나오는 자리, 그 일념미생전의 자리를 활로 쏘아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가장 최신의 것입니다. 이 순간이 바로 과거가 됩니다. 그래서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일원상에 대한 소 자리 설명]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며,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믿으며,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께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을 믿으며, |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지(靈智)’는 신령스럽게 안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안 나다가, 문득 떠오를 때가 있지요? 그게 영지입니다. ‘이것’이라는 것이 들어서 아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라는 게 없이 압니다. 그래서 ‘신령스럽게 안다’고 표현합니다.
공적영지는 적적성성입니다. 적적(寂寂)은 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순박하게 오롯하고 맑은 것입니다. 성성(惺惺)은 훤하게 밝은 것입니다. 적적이 따로 있고, 성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마음이 적적한 가운데, 훤하게 성성합니다. 실체가 없고 돈공하고 적적한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다시 보니 성성입니다.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며’라 하셨습니다. 대소유무에 분별이 있지요. 크고 작고, 있고 없음이 있잖아요.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믿으며’라 하셨습니다. 착한 사람은 착한 업을 지어 낙을 받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고를 받는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인과의 이치를 믿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책을 유독 싫어하는 사람이 있지요. 전생에 지은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당 오신 인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수행의 세계에서 인연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얼굴이 못난 사람들 중에 훌륭한 수행자가 나오곤 합니다. 인물이 좋으면 호사다마여서 강급하기 쉬어요. 대종사님 같은 분들이야 인물이 좋으면 그걸 활용해서 교화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러기 쉽지 않잖아요. 인물이 못나면 수행하기 좋아요. 그래서 수행자 중에는 일부러 다음 생에 인물이 못나게 태어나기를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과의 이치를 아는 사람은 은혜가 해독이고 해독이 은혜라는 것을 믿습니다. 은생어해 해생어은입니다. 이런 사람은 갑자기 공짜 돈이 생기면 기뻐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빚이 생겼다는 걸 아니까요. 오직 바라기만 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무지한 사람입니다. 사은의 엄청난 은혜를 이렇게 받고 있는데, 계속해서 더 바라고 있는 것이지요.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을 믿으며’라 하셨습니다. 이 마음이 들어서 우주선도 만듭니다. 이 마음이 들어 전쟁도 일어납니다.
[일원상에 대한 유무 자리 설명]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하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일원상의 신앙이니라 |
‘진공묘유의 조화’라 하셨습니다. 진공과 묘유가 조화를 이룹니다. 여기서, 진공이 묘유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공적이 곧 영지입니다.
‘우주만유를 통하여’라 하셨습니다. 우주를 손바닥 위 터럭처럼 가지고 놀 수 있는 게 마음입니다. 마음에는 무궁한 보물과 무궁한 묘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서 주파수가 맞아지면, 엄청난 위력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공을 들이면, 들인 만큼 이루어집니다. 기도한 만큼, 수양한 만큼, 불사한 만큼, 복지은 만큼, 닦은 만큼 그대로 받고 가져가실 것입니다. 지은대로 받는다는 게 은혜입니다.
‘무시광겁의 은현자재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은현은 음양, 인과와 같습니다. 은현에서 ‘은(숨을 은)’은 음양에서 ‘음(그늘 음)’입니다. 해가 있지만 가려져 그늘이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있는데 없는 것’이 ‘은’입니다. 이는 인과에서 ‘인’과 같습니다. 반대로, 은현에서 ‘현’은 음양에서 ‘양’이고 인과에서 ‘과’입니다.
은(隱) | 현(現) |
음(陰) | 양(陽) |
인(因) | 과(果) |
은현(隱現), 음양(陰陽), 인과(因果)는 태극모양으로 맞물려 돌아갑니다. 인은 반드시 과를 가져오고, 과는 인으로 맞물립니다. ‘인중과(因中果)’, ‘과중인(果中因)’이라 합니다.
인과를 선순환으로 바꾸는 사람은 ‘알아차리는 사람’이고 ‘강자’입니다. 누구와 언쟁이 붙었을 때도, 먼저 알아차리고 화해의 손을 내밀어서 그 과보를 풀어내는 사람이 강자입니다.
[신앙에 대하여]
신앙(信仰)은 ‘믿을 신’, ‘우러를 앙’입니다. 신앙에 대해 기본적인 설명을 드리기 위해 몇 가지 법문을 가져왔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정산종사 법어 제1부 세전(世典) 제4장 신앙(信仰) 1. 신앙에 대하여 신앙은 사람의 정신 생활에 근본이 되는 요건이니,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기로 하면 반드시 정당한 믿음을 가져서 순역고락의 모든 경계에 마음의 안온과 평화를 유지하며 근원 있는 마음의 힘으로써 큰 공부와 큰 사업을 이루는 동시에 영원한 세상에 지침을 삼을 것이니, 그러므로, 신앙에도 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그 도 있는 믿음이 계속되어야 근원 있는 신앙, 실효 있는 신앙, 영원한 신앙이 될 것이니라. |
정산종사 제1부 세전(世典) 제4장 신앙(信仰) 2. 신앙의 도 신앙의 도는 첫째 잘 가려서 믿는 것이니, 신앙의 대상에는 좁은 대상과 원만한 대상이 있고 허망한 대상과 진리에 맞는 대상이 있으며, 신앙하는 방법도 사사한 방법과 정당한 방법이 있고 미신스러운 방법과 사실다운 방법이 있음을 알아서, 그 가장 원만하고 진리에 맞는 대상과 정당하고 사실다운 방법을 가리어 믿을 것이요, 둘째는 타력신과 자력신을 아울러 나아가는 것이니, 신앙의 대상을 우러러 믿고 받들어 나아가는 것과 자기의 성품 가운데 모든 이치가 본래 갖추어져 있음을 발견하여 안으로 믿고 닦는 것을 병진할 것이요, 세째는 연원 계통을 성심으로 공경하고 믿는 것이니, 각자의 신앙의 종지를 밝혀 주신 큰 스승님과 그 법과 그 법의 계통을 성심으로 공경하고 믿는 동시에, 한 걸음 나아가 이 세상 모든 도리가 본래 다 한 이치에 근원하였음을 알아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성인들을 두루 공경하고 믿을 것이요, 네째는 신성을 일관하는 것이니, 그 믿음이 환경과 시일을 따라 물러나거나 끊어지지 않고 어떠한 어려운 경계를 당할지라도 한결 같은 신성으로 영생을 일관할 것이니라. |
정산종사 제1부 세전(世典) 제4장 신앙(信仰) 3. 신자의 도 사람이 한 종교의 신자가 되고 보면 교단에 대한 신자의 도를 지켜야 하나니, 신자는 첫째 교법의 신앙과 수행에 믿음과 정성을 다할 것이요, 둘째는 교단 행사와 교의의 이해에 정성을 다할 것이요, 세째는 교단의 법규를 잘 지키며 교단의 지도자들을 정당하게 신봉할 것이요, 네째는 힘 미치는 대로 전도와 교화에 노력할 것이요, 다섯째는 교단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정신 육신 물질로 응분의 의무를 이행할 것이니라. |
한울안 한이치에 제2편 평상심(平常心) 5.일원상에 대하여 [3.일원상 신앙하는 법]
일원상 신앙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조목으로써 신앙 방법을 해석할 수 있으니 첫째는, 재래의 개체신앙을 전체신앙으로 둘째는, 미신신앙을 사실신앙으로 셋째는, 형식신앙을 진리신앙으로 혁신한 것입니다.
이제 그 내용을 말하자면 개체 신앙이라 함은 모든 사람들이 혹은 등상불을 신앙하고 혹은 하나님을 신앙하고 혹은 어느 사람을 신앙하고 혹은 어느 물상을 신앙하고 혹은 어느 귀신을 신앙하여 각자의 신앙표본을 따라 자기의 일생 화복이 오로지 그 한곳에서만 결정되는 줄로 믿는 것인 바 전체 신앙은 먼저 세계 일원을 통찰하여 우리의 죄복 인과가 오직 한 곳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전체 한 불성으로서 처처 물물이 모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는, 죄벌을 주시는 근본임을 잘 알아서 항상 이 우주 대성(大性)으로써 마음의 귀의처를 삼는 것이요,
미신 신앙이라 함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죄복인과가 경우를 따라 직접 실현되는 당처를 알지 못하고 그 사체에는 당하든지 안 당하든지 천만사를 한갓 자기의 신앙 표본에만 의지하여 공상적 발원을 하는 것이니 예를 들면, 사람에게 관계된 일을 저 감각 없는 무정지물에게 소원 앙축한다든지 또는, 사리간에 직접 실행할 일을 저 무형한 귀신이나 또는 알 수 없는 운수에게 우연한 성공을 희망하는 것이 모두 그 유(類)인 바 사실 신앙은 모든 사물을 응접할 때에 먼저 그 죄복의 직접 관계 있는 당처를 발견하여 천지에 당한 일이면 천지를 신앙하고, 부모에 당한 일이면 부모를 신앙하고, 동포에 당한 일이면 동포를 신앙하고, 법률에 당한 일이면 법률을 신앙하여 각각 그 소당처(所當處)를 따라 실지적 원을 발하고 일을 진행하는 것이요
형식 신앙이라 함은 모든 사람들이 이치의 신명(神明)함을 알지 못하고 그 신앙이 항상 명상에 구속되어 어떠한 명호나 어떠한 물상을 의지하기 전에는 스스로 그 신앙력을 세우지 못한 것을 이름인 바 진리 신앙은 그 신앙이 한갓 명상에만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일원 가운데에 갊아있는 자연의 이치가 원래 지공지명하고 통달무애하여 세간 인과에 추호라도 가히 속이지 못할 것을 자신하는 것이니 이 여러가지 말씀은 곧 일원상의 진리를 분해적으로 비판하여 써 참되고 떳떳한 옳은 신앙을 세우게 한 것인 바 이것을 깨친 자는 가히 정당한 신앙력을 얻었다 할 것입니다. |
대산 3집 제3편 수행 96. 참부처(眞佛) 남부민 교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부처님 이후 옛날부터 예담이 하나 있는데 “진흙으로 만든 부처님[泥佛]은 물에 넣으면 다 허물어지므로 물을 못 지내고 또 나무로 만든 부처님[木佛]은 불에 넣으면 다 타버리므로 불을 못 지내고, 금과 쇠로 만든 부처님[金佛]은 용광로에 넣으면 다 녹아 버리므로 용광로를 못 지낸다. 그러므로 참 부처님은 아니다.” 하는 말이 있다. 그러면 어떤 부처님이 참 부처님인가 답해 보아라.』 『산 부처님[生佛]입니다.』 『맞다. 나는 이 예화에 하나 더 붙였다. 조불(造佛)은 부도욕(不渡慾)하고 생불은 무불도(無不渡)한다. 임시 만든 부처는 거짓부처[假佛]이므로 재물에 당하면 녹고, 명예와 색에 당하면 역시 녹아 버린다. 니불(泥佛). 목불(木佛). 금불(金佛) 그리고 중생은 거짓으로 만든 부처이므로 모두가 거짓 부처요, 조불(造佛)이다. 그러므로 재색명리를 당하면 빠져 녹아 버린다. 그러나 생불(生佛)은 건너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無不渡]. 물과 불은 물론 용광로에 가도 괜찮고 욕심 대해도 괜찮다. 이러한 생불이 되려면 선(禪)을 많이 해서 불을 끄고 적멸궁, 대적광전(寂滅宮, 大寂光殿)의 자리에 안주(安住)해야 불도 못 들어오고 물도 못 들어오고 용광로도 못 들어오고 일체욕심도 못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에 타는 불을 끄는 공부를 부지런히 하라.』 |
대산법어 적공편 50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을 아는 데에도 단계가 있나니, 비유하자면 등상불이 부처인 줄 아는 사람은 초등학생 수준이요, 삼천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부처인 줄 아는 사람은 중학생 수준이요, 저 사람도 깨치면 부처요 나도 깨치면 부처인 줄을 아는 사람은 고등학생 수준이요, 우주 만상이 다 부처의 화신임을 아는 사람은 대학생 수준이요, 나의 자성이 부처인 것을 깨친 사람은 대학원생 수준이니라. 우리가 공부할 때 밖에서만 구하지 말고 안으로 돌려 자성이 부처인 것을 깨치면 항마도 되고 출가도 되고 여래도 되나니, 자기를 업신여기거나 포기하지 말고 자성불을 깨치는 데 적공해야 하느니라.」 |
대종경 교의품 12장 한 제자 여쭙기를 [불상 숭배와 일원상 숭배의 다른 점은 어떠하옵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불상 숭배는 부처님의 인격에 국한하여 후래 제자로서 그 부처님을 추모 존숭하는 데에 뜻이 있을 뿐이나, 일원상 숭배는 그 뜻이 실로 넓고 크나니, 부처님의 인격만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는 것보다 우주 만유 전체를 다 부처님으로 모시고 신앙하여 모든 죄복과 고락의 근본을 우주 만유 전체 가운데에 구하게 되며, 또는 이를 직접 수행의 표본으로 하여 일원상과 같이 원만한 인격을 양성하자는 것이니, 그 다른 점이 대개 이러하나니라.] |
정산종사 법어 예도편 11장 또 묻기를 [우리 회상에서는 법신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고 모든 의식에 심고하는 예가 있사오나, 서가모니불이나 대종사에 대하여는 심고하는 예가 없사오니, 법신불과 인격 부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오며 신앙하는 도가 어떻게 구분되어 있나이까.]
답하시기를 [이것은 대종사께서 모든 신앙처를 통일하기 위하사 법신불 신앙법을 정하신 것이니, 법신불은 우주만유의 근본이시요 제불제성의 본성이신 바, 제불 제성께서는 또한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신 어른들이시니, 그러므로 법신불에 대하여 심고를 올리는 것이 곧 제불 제성에 대하여 심고 올리는 것이 되며, 또는 신앙하는 도에 있어서도 인격 부처님이 계시므로 법신불의 진리를 알게 되고 법신불의 진리가 있으므로 인격 부처님이 이를 천명하시게 되었으니 신앙하는 도가 둘이 아니나 구분하여 말하자면 법신불 신앙은 진리적 신앙이요 인격 부처님 신앙은 교법적 신봉이라고 할 것이니라.] |
대종경 교의품 제4장 또 여쭙기를 「일원상의 신앙은 어떻게 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를 믿어 복락을 구하나니,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 만유로서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어느 곳이든지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 사물에 응할 것이며, 천만 사물의 당처에 직접 불공하기를 힘써서 현실적으로 복락을 장만할지니, 이를 몰아 말하자면 편협한 신앙을 돌려 원만한 신앙을 만들며, 미신적 신앙을 돌려 사실적 신앙을 하게 한 것이니라.」 |
정산종사 법어 원리편 5장 말씀하시기를 『법신불이라 함은 곧 만법의 근원인 진리불을 이름이요, 보신불과 화신불은 그 진리에서 화현한 경로를 이름인 바, 화신불 가운데에는 진리 그대로 화현한 정화신불이 있고 또는 진리 그대로 받지 못한 편화신불이 있으니, 정화신불은 곧 제불 제성을 이름이요 편화신불은 곧 일체 중생을 이름인 바, 비록 지금은 중생이나 불성만은 다 같이 갊아 있으므로 편화신불이라 하나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고 바른 때에는 곧 내가 정화신불이요 삿되고 어두울 때에는 편화신불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라.』 |
대산. 처처불상 . 사사불공(處處佛像 . 事事佛供)
일체처(一切處) 일체불(一切佛)에게 보은 합덕(報恩合德)하는 산 불공법이다. 처처불상 = 견성(見性) = 정각(正覺) = 혜(慧) 사사불공 = 성불(成佛) = 정행(正行) = 복(福) 일원 즉 사은, 보은 즉 불공(一圓卽四恩 報恩卽佛供) *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 대월상제(對越上帝) * 삼대 불공법(三大佛供法) 1. 불석신명 불공 (不惜身命佛供) 2. 금욕난행 불공 (禁慾難行佛供) 3. 희사만행 불공 (喜捨萬行佛供) |
[‘믿으며’를 계속 말씀하신 이유]
아래는 전산 김주원 종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가 옮긴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일원상의 진리를 밝혀주시고 뒤에 신앙을 밝히신 것은 누가 되었던 내 법을 만난 사람은 만나는 그 순간부터 진리적 사고를 하고 진리적 신앙을 하기를 간절히 염원하셨기 때문에 생각되어집니다.
‘일원상의 신앙’에 보면 마지막에 ‘이대로 믿는 것이다.’하고 한 번만 명시해도 될 텐데, 대종사님께서는 한 조목 한 조목에 다 ‘믿으며’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믿으며’를 계속 말씀하신 것은 “설사 모르더라도 그대로 믿어라. 이것이 사실이고 절대 거짓이 아니므로 그대로 믿어라.”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장을 대할 때 진정으로 일원상의 진리로 믿는가. 믿으면 얼마나 믿는가.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만큼 믿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믿음의 강도가 강하고 깊을수록 마음이 믿음의 뿌리에서 나오므로 진리적 사고가 나오게 되고 자연히 마음이 변화하고 생활도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
대종사께서 일원상의 신앙에서 ‘믿으며’를 계속 말씀하신 것은 ‘설사 모르더라도 그대로 믿어라’는 뜻입니다. 믿지 않으면 시행착오를 많이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에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되는 것이지요.
믿는 만큼 수행하고, 수행한 만큼 받습니다. 전신(全信) 전수(全修) 전수(全收) ㅡ 전부 믿으면 전부 수행하기 때문에 전부 받습니다. 반신 반수 반수 ㅡ 반만 믿으면 반만 수행하기 때문에 반만 받습니다. 무신 무수 무수 ㅡ 믿지 않으면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받지 못합니다.
꼭 알아야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몰라도 믿고 수행하셔야 합니다. 깨닫고 수행하는 것과 믿고 수행하는 것은 똑같거든요. 신심이 있는 사람은 계문을 일단 지키지요. 신심이 없어서 계문을 안 지키는 사람은 ‘앗 뜨거워’ 곤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이 거짓말 하셨겠어요? 깨치신 분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대종사님 말씀은 단 한 가지도 틀린 바가 없습니다. 거짓이 아니니까 대종사님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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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벽한 초고를 보내주신 배성해,김지원교도님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지원, 성해, 밀운 교우님! 짱짱!
고생하셨습니다~~ 뽜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