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낙동강 줄기를 가운데 두고 높고 낮은 건물들로 번화한 시가지의 건너편, 푸른 물과 숲에 싸여 의연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고색 짙은 누각이 눈에 띈다. 바쁜 일상 속 낙동강변의 도로를 달리다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추면 어김없이 눈에 들어오는 영호루. 안동사람들에게조차 가까이 있지만 좀처럼 가 볼 기회를 얻지 못하는 공간인 듯하다.
[영호루 누마루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시가지의 전경] [영호루와 낙동강 그리고 안동 시가지의 모습] 영호루는 고려시대에 경상도 안동부의 남쪽 낙동강 가에 세워진 정자로 원래는 현재의 위치에서 낙동강 건너편에 있었다.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정자로 불리는 영호루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고려시대 장군 김방경金方慶이 1274년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호루에서 지은 시가 남아 있는데, 시의 내용에 소년 시절에도 영호루에 왔던 적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어 고려 중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영호루 전경] [‘영호루중건기념비’가 세워진 영호루 올라가는 길]
영호루의 현판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무를 때 자주 찾았던 영호루를 잊지 못해 친히 누각의 이름을 써서 내린 것으로 현재 걸려 있는 것은 원본을 복각한 것이다. 공민왕은 피난 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남문 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자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밑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고, 활쏘기도 하였다고 한다.
[공민왕이 친필로 남긴 영호루 현판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글로 쓴 영호루 현판]
영호루의 옛 모습은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그림 첩 속에서 만날 수 있다. 1503년 경상감사로 재직하던 화산 권주權柱가 안동에 들렀을 때 주민들로부터 선물 받은 것으로 영호루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일대의 경관이 묘사되어 있다.
[영호루와 낙동강 일대의 그림이 담긴 「남향자첩南鄕子帖」, 소장_한국국학진흥원(기탁: 안동권씨 병곡종택) ]
그림에는 강 가운데 누대가 있어 이미 두 사람이 마주앉아 풍광을 즐기며, 왼쪽 편으로 방문하는 사람을 마중하는 듯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현재의 영호루와는 위치나 주변의 경관이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지금의 영호루가 바라보고 있는 태화소공원 쪽에 ‘영호루유허비’를 세워 옛 터임을 짐작하게 한다.
영호루는 낙동가의 아름다운 풍경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누각으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우탁, 정몽주, 정도전, 권근, 김종직, 이현보, 이황, 주세붕 등 당대 저명한 인사들이 영호루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시를 남겼고, 50여 개의 시판으로 새겨져 지금의 영호루 내부에 빼곡히 걸려 있다.
[영호루 내부에 걸린 묵객들이 남긴 시판들]
이처럼 낙동강의 아름다운 물길 위에 자리한 화려한 단청의 영호루는 당대의 선비들에게 풍류를 즐기고 만남을 위한 소중한 공간이었던 것 같다. 이에 큰 비로 영호루가 떠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매원 김광계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일기에 아쉬움을 담아냈다.
[김광계의 일상을 담은 매원일기, 소장_한국국학진흥원(기탁: 광산김씨 설월당종택)]
1605년 7월 중순이 되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점점 더 기세가 거세지더니 결국 큰 수해를 입히고 말았다. ...(중략)... 특히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안동의 여강서원廬江書院과 아름다운 영호루映湖樓도 떠내려갔다고 한다. 영호루는 진주 촉석루矗石樓, 밀양 영남루嶺南樓와 서로 우열을 다툴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아주 오래전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영호루는 1547년에도 큰 비가 내려 떠내려간 적이 있는데, 5년 후인 1552년 부사 안한준安漢俊이 복원하여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그 아름다운 경치를 즐겼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물에 휩쓸려 사라진 것이다. 영호루 앞 나루에서 배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던 기억과 그 아름다운 풍광이 떠올라 무척 아쉬웠다. 죽기 전에라도 다시 영호루가 세워지는 걸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영호루의 뒷모습 1, 2]
이 밖에도 세월의 풍파에 여러 차례의 중건과 복원이 이루어진 영호루는 1820년 안동부사 김학순이 누각을 다시 중수하고 ‘낙동상류洛東上流 영좌명루嶺左名樓’라는 글씨를 써서 편액하였는데, 지금까지 전해져 누각의 웅장함과 명성을 더한다.
[영호루 내부에 걸려 있는 ‘낙동상류영좌명루’ 편액]
여말선초의 학자 하륜은 ‘누樓 하나가 폐하고 흥하는 것으로써 한 고을의 슬픔과 기쁨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영호루는 처음 세워진 이후 자연재해로 인해 수차례 유실과 훼손을 반복하였으나 그때마다 복원과 중수를 거치며 지금까지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안동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겪어오며 화려함 뒤에 아픔과 상처를 담고 있는 영호루. 그 옛날 선비들이 찬사했던 것처럼 낮에 보는 모습도 밤에 빛나는 모습도 여전히 모두 아름답다.
[오랜 세월을 간직한 아름다운 영호루]
[영호루의 야경]
한편,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서는 2020년 7월 7일에 개최한 경북문화관광 콘텐츠 활용전시 ‘영남선비들의 누정’의 전시기간을 2021년 8월 29일까지 연장하여 개최된다. 안동을 비롯한 경북지역의 누정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관련 유물이 전시되고 있어, 옛 선비들이 누렸던 누정문화를 심도 있게 감상할 수 있다.
1) ‘아름다운 영호루가 수해로 떠내려가다’_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http://story.ugyo.net) |
안동의 낙동강 줄기를 가운데 두고 높고 낮은 건물들로 번화한 시가지의 건너편, 푸른 물과 숲에 싸여 의연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고색 짙은 누각이 눈에 띈다. 바쁜 일상 속 낙동강변의 도로를 달리다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추면 어김없이 눈에 들어오는 영호루. 안동사람들에게조차 가까이 있지만 좀처럼 가 볼 기회를 얻지 못하는 공간인 듯하다.
[영호루 누마루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시가지의 전경] [영호루와 낙동강 그리고 안동 시가지의 모습] 영호루는 고려시대에 경상도 안동부의 남쪽 낙동강 가에 세워진 정자로 원래는 현재의 위치에서 낙동강 건너편에 있었다.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정자로 불리는 영호루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고려시대 장군 김방경金方慶이 1274년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호루에서 지은 시가 남아 있는데, 시의 내용에 소년 시절에도 영호루에 왔던 적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어 고려 중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영호루 전경] [‘영호루중건기념비’가 세워진 영호루 올라가는 길]
영호루의 현판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무를 때 자주 찾았던 영호루를 잊지 못해 친히 누각의 이름을 써서 내린 것으로 현재 걸려 있는 것은 원본을 복각한 것이다. 공민왕은 피난 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남문 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자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밑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고, 활쏘기도 하였다고 한다.
[공민왕이 친필로 남긴 영호루 현판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글로 쓴 영호루 현판]
영호루의 옛 모습은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그림 첩 속에서 만날 수 있다. 1503년 경상감사로 재직하던 화산 권주權柱가 안동에 들렀을 때 주민들로부터 선물 받은 것으로 영호루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일대의 경관이 묘사되어 있다.
[영호루와 낙동강 일대의 그림이 담긴 「남향자첩南鄕子帖」, 소장_한국국학진흥원(기탁: 안동권씨 병곡종택) ]
그림에는 강 가운데 누대가 있어 이미 두 사람이 마주앉아 풍광을 즐기며, 왼쪽 편으로 방문하는 사람을 마중하는 듯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현재의 영호루와는 위치나 주변의 경관이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지금의 영호루가 바라보고 있는 태화소공원 쪽에 ‘영호루유허비’를 세워 옛 터임을 짐작하게 한다.
영호루는 낙동가의 아름다운 풍경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누각으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우탁, 정몽주, 정도전, 권근, 김종직, 이현보, 이황, 주세붕 등 당대 저명한 인사들이 영호루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시를 남겼고, 50여 개의 시판으로 새겨져 지금의 영호루 내부에 빼곡히 걸려 있다.
[영호루 내부에 걸린 묵객들이 남긴 시판들]
이처럼 낙동강의 아름다운 물길 위에 자리한 화려한 단청의 영호루는 당대의 선비들에게 풍류를 즐기고 만남을 위한 소중한 공간이었던 것 같다. 이에 큰 비로 영호루가 떠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매원 김광계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일기에 아쉬움을 담아냈다.
[김광계의 일상을 담은 매원일기, 소장_한국국학진흥원(기탁: 광산김씨 설월당종택)]
1605년 7월 중순이 되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점점 더 기세가 거세지더니 결국 큰 수해를 입히고 말았다. ...(중략)... 특히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안동의 여강서원廬江書院과 아름다운 영호루映湖樓도 떠내려갔다고 한다. 영호루는 진주 촉석루矗石樓, 밀양 영남루嶺南樓와 서로 우열을 다툴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아주 오래전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영호루는 1547년에도 큰 비가 내려 떠내려간 적이 있는데, 5년 후인 1552년 부사 안한준安漢俊이 복원하여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그 아름다운 경치를 즐겼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물에 휩쓸려 사라진 것이다. 영호루 앞 나루에서 배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던 기억과 그 아름다운 풍광이 떠올라 무척 아쉬웠다. 죽기 전에라도 다시 영호루가 세워지는 걸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영호루의 뒷모습 1, 2]
이 밖에도 세월의 풍파에 여러 차례의 중건과 복원이 이루어진 영호루는 1820년 안동부사 김학순이 누각을 다시 중수하고 ‘낙동상류洛東上流 영좌명루嶺左名樓’라는 글씨를 써서 편액하였는데, 지금까지 전해져 누각의 웅장함과 명성을 더한다.
[영호루 내부에 걸려 있는 ‘낙동상류영좌명루’ 편액]
여말선초의 학자 하륜은 ‘누樓 하나가 폐하고 흥하는 것으로써 한 고을의 슬픔과 기쁨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영호루는 처음 세워진 이후 자연재해로 인해 수차례 유실과 훼손을 반복하였으나 그때마다 복원과 중수를 거치며 지금까지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안동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겪어오며 화려함 뒤에 아픔과 상처를 담고 있는 영호루. 그 옛날 선비들이 찬사했던 것처럼 낮에 보는 모습도 밤에 빛나는 모습도 여전히 모두 아름답다.
[오랜 세월을 간직한 아름다운 영호루]
[영호루의 야경]
한편,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서는 2020년 7월 7일에 개최한 경북문화관광 콘텐츠 활용전시 ‘영남선비들의 누정’의 전시기간을 2021년 8월 29일까지 연장하여 개최된다. 안동을 비롯한 경북지역의 누정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관련 유물이 전시되고 있어, 옛 선비들이 누렸던 누정문화를 심도 있게 감상할 수 있다.
1) ‘아름다운 영호루가 수해로 떠내려가다’_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http://story.ugy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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