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저편을 찾아서-2-(60~70년대의 영화관)
근래는 영화관에 안가본지가 몇 년 되었습니다. 아마도 몇 년전에 타이타닉을 본 것이 마지막 영화관 관람으로 생각합니다. 저희들이 어렸을 때는 지방 도시에서 영화관은 젊은 사람들의 추억과 낭만의 장소였습니다. 또 몰래 영화관 관람하다 학교의 규율부 선생님에게 잡혔을 때는 학교에서 혼이 났고 심할 때는 정학 처벌까지 받아야했으므로 영화 보기는 아슬아슬한 곡예와 같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서울서 내려오는 쇼. 유명 가수들과 코메디언들이 내려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사회자는 남철 남성남 컴비. 짝을 맞춰서 춤을 추는 모습이나 악단이 연주할 때 색소폰에 종이 뭉치를 넣어다 뺐다하는 모습이 포복절도였습니다. 쇼의 입장료는 일률적으로 100원이었고 영화는 삼류는 20원, 일류는 50원으로 기억합니다(1970년 기준). 저는 영화보러 많이 다니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영화는 도둑으로 들어가서 다 보았습니다. 또 학교에서는 문화극장이라 해서 단체 관람도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위의 극장이 우리 학교 가는 길에 있었던 시민극장 모습입니다. 이 극장에서 닥터지바고를 봤는데 길면서 왜 그리 재미없던지요. 총싸움도 하나도 안나오고 무지 길기만 했습니다. 그 당시의 재미있는 영화 기준은 (1)총싸움이 나오는가 (2)중국 영화의 경우 칼싸움을 할 때 나는가. 이 극장은 우리 학교 가는 길 중간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영화 간판을 보니 한국 영화는 신성일과 문희가 나오는 영화인 모양입니다. 영화관 앞 포스터 가판대에서 지나가는 관객이 영화의 스틸 사진을 보고 있군요. 이 장면도 등굣길에 흥미있게 보았던 그 시절 모습이 추억 속에서 아련히 떠오릅니다. 추억의 극장이었습니다. “행님아 닥터지바고 영화 재미있더나?
재미하나도 없더라.
왜?
영화가 총싸움은 하나도 안나오고 지고박고만하더라~~“
이런 대화의 내용이 그 당시 우리들의 수준이었습니다.
이 극장은 시내에 있는 극장이었습니다. 울산 시내의 극장은 위의 시민극장을 합쳐서 총 4개였습니다. 아마도 단체 관람온 여학생같습니다. 이 여학생들은 교복을 보니 학성여중생들입니다. 척 보면 알지요. 교복 상의에 넥타이같은 빨랫줄이 있는 학교는 학성여중생들입니다. 개눈에는 X밖에 안보이지요. 같은 중학생들 눈에는 중학생들만 보입니다. 그 당시 울산에는 여중학교가 2곳이었습니다. 울산여중과 학성여중. 저는 학성여중 여학생들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옥이가 학성여중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혹시나 이 안에옥이 동생이라도 찾아봅니다. 1975년도이면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옥이 여동생이 중학생 시절이었습니다.
‘행님아 저 가시나들 봐라. 무지 많다 그자! 저 애들 나중에 시집가서 얼라들 낳으면 대한민국 인구 억수로 늘어날끼다 그자? 아이고 무시버래이’
60~70년대의 한국 최고의 배우였던 문희와 신성일. 신성일은 요새말로는 멜러물, 그 당시 용어로는 ‘방바닥에서 여자안고 구부는’ 역만 나왔습니다. 문희는 대단히 이쁜 배우로서 나는 문희보고 갔었네 뿅갔었네~
보통 어느 집에 가도 문풍지의 창오지 구멍을 막으려 문희와 신성일이 찍힌 달력 쪼가리가 덧방치기로 붙여져 있어져 있었습니다.
% 책갈피에 항상 끼워져 있었던 사진입니다. 요즘의 김태희 정도 되겠지요. ‘문희야 니 시집가지말거래이~ 니 시집가면 내사 죽어 삐릴란다’
60년대 말에 개봉되었던 영화 ‘법창을 울린 옥이’. 옥이는 난폭한 아버지 밑에서 동생을 키우면서 살아갑니다. 결국 아버지의 폭력에 견디다 못하여 아버지를 존속 살해하게 되는데 정상이 참작되어 풀려난다는 실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 생각하니 또 옥이 생각나네~~ 문희의 힛트 영화는 ‘섬마을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시민극장에서 단체로 관람했던 기억이 납니다. 문희와 신영일이 주연했습니다. 섬마을에 총각 선생님이 왔는데 총각선생님은 섬마을의 건달들에게 얻어 맞는데 이 때 마을 처녀 문희의 지극 정성 간호를 받습니다. 이러다가 총각 선생님은 섬마을을 떠나는데 나무 그늘 아래 바닷가에서는 외로운 배 한척이 지나가면서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노래가 구성지게 울립니다. 김수용 감독의 흑백영화였습니다. 김수용감독은 소년 가장 윤복이의 슬픈 이야기를 영화화 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제작한 감독이었습니다.
‘섬마을 선생님’ 영화는 마스터필름이 분실되었는지 그 후 흔적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래는 남아서 아직도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따라 찾아온 섬마을 선생님 열아홉살 섬색씨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에는 가지를 마오 떠나지 마오 구름도 쫓겨가는 섬마을에 무얼하러 왔는가 총각 선생님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바닷가에 시름을 달래보는 총각 선생님 서울에는 가지를 마오 떠나지 마오
첫댓글 병우님! 해당화 아닌데요.. 섬마을 백사장에 주로사는 해당화는 가시가 많은데요.. 이녀석은 아마 문익점이 가져왔다는 목화???
제가 착각을 했습니다. 수정했습니다. 해당화 사진이 있었는데 찾을 수가 없군요. 지적 고맙습니다.
재미있는 자료와 기억력..감탄~감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