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쏟아진 후라 적잖이 부담스런 길이었다. 게다가 전날 접촉 사고를 당한 터라 다른 날보다 운전하기가 많이 두려웠다. 하지만 아이들과의 약속을 깰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름밤의 꿈> 관극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민영기라는 멋진 배우를 한번 더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물론 가장 컸을 것이다.
다행히 야간근무를 막 끝내고 놀러 온 제자가 보조운전사로 동행하게 되었다.(사실은 제자가 운전을 거의 다 했다^^)
출발이 순조롭지 않았다. 12시 15분까지 학교 앞으로 모여야 할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큰 비가 와서 아이들이 집에서 허락을 받지 못한 모양이다. 즉시 희자에게 전화를 했다. 며칠 전, 광양 공연 따라가지 못하게 됐다고 울었던 아이다^^ 마침 통화가 되었다. 약속시간이 되어 도착한 아이는 희자와 유리. 오늘은 아주 단촐하게 네 식구다. 초행길이라 차가 어느 정도 밀릴지, 시내에서 공연장까지 교통 상황은 어떨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무조건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잔뜩 넣고 출발!!
길은 생각과는 달리 전혀 밀리지 않았다. 날씨는 계속 흐리다가 비를 뿌리다가를 되풀이하더니 현풍에서부터는 햇볕이 쨍쨍 났다. 다행이다. 공연하는 사람들에겐 비 오는 것보다 날씨 맑은 것이 나을 테니...
지방공연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목적은 늘 관극과 여행, 두 가지다. 비 갠 하늘의 뭉게구름, 구름 사이의 옅은 하늘빛, 그리고 그 사이에 우뚝 선 화왕산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쫓기듯 열심히 산 일주일의 마지막, 꿈같은 휴식^^*(나의 휴식은 늘 이런 식이지만...^^) 더구나 옛 제자와 참 오랜만에 함께 하는 장거리 여행이라 더 좋았다. 옛날에 이 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참 열심히 대구며 부산이며 데리고 다녔었는데, 어느새 이 아이는 스물 넷의 장정이 되었다. 오늘 같이 피곤한 날 옆에서 운전을 하며 든든히 날 지켜 줄 정도로.
공연장에 도착한 것은 3시 10분경. 세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수현이를 기다렸다가 데리고 올 걸. 광양길에 대한 정보가 없어 무작정 서둘러야 하는 상황에서 연락도 끊긴 아이를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는데.... 35분쯤 기다려 줘도 될 걸 그랬다. 아무튼 시간이 많이 남아 광양시내 구경을 나섰다. 밥도 먹기로 하고... 한참 헤맸지만 우리가 찾는 "번화가"는 없었다. 식당이라곤 온통 횟집과 고깃집, 보신탕·보양탕집뿐. 이곳 사람들은 몸에 좋은 음식만 먹는 것 같다면서 아이들이 웃었다. 한 시간 반만에 겨우 반점을 하나 찾았다. 음식맛이 엉망이었다 . 하지만, 이보다 슬픈 것은 기대했던 파란 바다가 없다는 것이었다 ㅜㅜ
다시 공연장.
사천만큼 아름다운 공연장은 아니었지만 로비가 넓고 시원해서 쉬기에 딱 좋았다. 간간이 공연장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무대 위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두근두근... 오늘은 달팀 공연이다!!
드디어 낮공연이 끝났다. 아주 참하게 생긴 세원이와 인형같이 예쁜 선영이를 만났다. 이번 광양행의 모든 것을 도와준 천사들이다^^ 표를 받고, 함께 분장실 입구로 갔다. 민영기나이찬은 많이 지치고 더워 보였지만 "영기오빠를 사랑하는 소녀들"을 참 자상하게 챙겨 주었다. 분장실 바깥은 너무 더워서 같이 사진을 찍기조차 미안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얼굴에 두꺼운 분장을 하고 햇볕을 쬐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기 때문에... 땀 나서 분장 번질까 염려도 되고... 그래서 얼른 로비로 돌아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새도 없이 바삐 떠나는 세원이, 선영이와 작별하고, 드디어 줄 서기 시작^^! 우리 아이들은 장하게도 B열 맨앞자리를 차지했다. 롬&줄 공연 때 생각이 났다. 폭주 끝에 겨우 3분전에 도착해 은주씨의 도움으로 맨 앞자리에서 보았던 거창 공연, 정말 많이 고생했지만 덕분에 수많은 상주여고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작년 여름의 대구 공연... 앞자리에 앉으면 항상 공연에 대한 이런저런 추억이 떠올라 설렌다. 이렇게 앞자리에 앉아서 무대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겠느냐고 제법 전문가다운^^ 걱정을 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맨 앞자리에서 배우들의 표정 연기를 보는 것도 참 재미있을 거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배우"가 아주 빛나는 작품이라고^^*
공연 직전.
우리 줄 뒷자리의 젊은 여인네들은 참 심하게 떠들며 연신 핸드폰을 열었다. 공연 전에 핸드폰을 꺼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피피거리기만 했다. 안내하는 분들은 디카는 철저히 압수하면서 핸드폰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했다. 자제시켜달라고 얘기를 했는데도 알아서 끌 것이라며 그냥 가 버렸다. 물론 사람들은 전혀 알아서 폰을 끄지 않고 공연내내 떠들었다. 관객 홍보 전단지 좀 만들어 올 걸...(직업병이다~ㅋ)
드디어 공연 시작.
우선 가장 놀라운 것은 서울 공연보다 많이 다듬어졌다는 것이다. 서울 공연보다 지방 공연이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모자랐던 걸 자주 보아 온 터라 이 일은 참 성의있게 느껴졌다. 한 동안 계속 실망했던 서울예술단에게 다시 희망을 걸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군더더기로 느껴졌던 것들이 좀 정리된 느낌. 광대들 이야기도 오늘은 덜 부각된 듯하다. 희자는 그것이 많이 섭섭하다고 했지만(광대들이 덜 귀엽고 덜 재미있어서^^)
여름밤의 꿈인지 견우직녀 이야기인지 분간이 가지 않던 스토리 전개도 조금 정리된 듯하다. 대사 한두 개 살짝 고치거나 노래 한두 개 뺐을 뿐인데도 받아들여지는 느낌은 자뭇 다르다. 연극이나 뮤지컬의 매력^^
서울 공연에선 가창력이 썩 뛰어나지 못했던 몇 배우들의 노래가 오늘은 가창력이 뛰어난 배우들의 노래에 살짝 묻힌 듯한 느낌^^ 더 나았다^^ 듣기 불편하지 않아서. 허미아의 노래는 서울에서보다 조금 더 안정되어 보인다. 처음엔 이 작품의 음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어느덧 여기에 익숙해져서인지 오늘은 들을 만했다. 음악도 사람처럼 자꾸 만나다 보면 그만이 가진 매력을 조금씩 발견하게 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얼마전 별팀의 사천공연에선 보이지 않았던 주연배우들간의 앙상블이 드디어 오늘은 살아난 것 같다. 네 명의 젊은이들은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동화같은, 만화같은 이야기 속 주인공에 걸맞게 말이다. 나이찬과 드미루는 잘 연습된 배우라기보다는 원래부터 그런 성격을 가진, 귀여운 젊은이들인 듯했다. 사랑을 찾아 산으로 도피하는 허미아와 나이찬은 철없는 응석받이이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 로미오와 똑같은 표정을 짓는 나이찬.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좋았다. 롬&줄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작품의 전반부는 마치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랑스럽고 후반부는 세익스피어의 비극을 잘 살린 것 같아 좋았기 때문이다. 철없는 연인 로미오, 철없는 연인 라이샌더.... 어쩌면 세익스피어가 그린 이 두 젊은이는 동일한 모델이었지 않을까?^^ 철없고, 응석받이고, 약하고, 뭐 크게 내세울 것도 없지만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소년. 나이찬은 그랬다.
"두 마디만 한다. 너 사랑해. 너 죽을래?" "시골스럽게 왜이래?" "넌 아버님을 가져, 난 미아의 모든 것을 가질게" 이런 대사들로 나이찬은 관객을 사로잡았다.(내뒤에 있는 여인네들은 이 장면에서 귀엽다며 심하게 떠들어댔다ㅜㅜ)
즐거웠다. 이 철없는 젊은이들을 따라다니다 덩달아 유쾌해지는 기분^^*
몇 번 본 작품인 데다 맨 앞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오늘은 작품 전체보다 배우들의 특징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전과는 다른 맛이 느껴졌다. 역시 "여름밤의 꿈"은 뭐니뭐니해도 배우가 가장 빛나는 작품이다. 버들마마 고미경씨도 아주 멋졌다. 독특한 노래, 몸을 꼬는 독특한 제스춰... 신비롭진 않았지만 인간적인 정욕과 쓸쓸함, 교태, 귀여움... 등이 느껴졌다. 마치, 신성보다 인간성을 더 많이 가진 그리스의 신들처럼 말이다.
물론,이런 요정들의 모습과 견우직녀 이야기의 짜맞춤은 오늘도 별로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견우직녀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2부의 후반부는 오늘도 역시 지루하다. 광대들의 연기는 너무나 익살스럽고 맛깔나지만, 이 작품의 후반부는 오늘도 영 따로 노는 느낌이다. 놀이마당으로 확실히 푼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주지도 못하는, 부자연스런 짜맞춤이다. 극단 여행자의 <한여름밤의 꿈>에서 보여주는 신명과 재미, 숨 돌릴 틈 없는 앙상블과 몸짓표현의 아름다움... 이런 것들을 <여름밤의 꿈>에서 기대한다면 너무 욕심이 많은 걸까?
가끔 나오는 썰렁한 유머는 차라리 없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미아, ~ 미아 되지 마" 이런 류의 대사 말이다.
하지만
처음보다 더 나은 공연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초청 공연인데도, 지방 공연인데도 그냥 대충 하지 않고 더 연구하고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좋았다.(몇 극단의 지방 공연에서 너무 성의 없는 공연에 크게 항의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커튼콜 때 진심으로 박수칠 수 있었다. 배우들의 웃음에 진심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공연장을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한밤중에 운전을 하면서도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끝이 좋으면 모두 좋다... 이것도 세익스피어의 작품 중 하나지, 아마?....
그리고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배우를, 비록 심하게 떠들긴 했지만 다른 관객들이 광분하며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것이 한없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