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조선】<농담 무용(無用), 성서조선 第 72 號 (1935年 1月)>
농담 무용(無用)
성서조선 第 72 號 (1935年 1月)
어떤 교우 한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농담을 받지 않는다. “예수 믿는 사람도 농담하느냐”며 안색을 똑바로 하고 항의한다. 이러한 책망을 받은 지 십수 년이 지난 이제야 비로소 둔감한 나도 납득되는 바가 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면 글자 그대로 죽은 것이지, 죽은 척 한 것이 아니다. 또 3일 만에 부활하고 승천하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실을 연극처럼 여기는 인간은 그가 아무리 학식이 넓고 신앙이 돈독한 기독신자라 할 지라도 우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호흡하는 사람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범죄한 자는 영원히 멸망한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 지식이다. 이는 사실이다. 결코 어리석은 사람을 선도하거나 약자를 강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방편이 아니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에 참여한다고 하나 이는 조건부의 일이다.
그 조건의 뜻은 잊어 먹고 그저 마음대로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다. 유치원 어린이가 동요를 부르듯이 죄는 범하여도 회개하면 그 다음은 천당에 간다고 노래한다. 이런 곡조에 맞춰 손뼉을 치며 행세하려는 시적(詩的) 신도가 횡행하는 것은 웬일인가.
기독교는 시도 아니요, 극도 아니요, 오직 글자 그대로의 사실이다. 그래서 적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기독교 지식은 죽은 후에 천당에 간다는 데 있지 않다. 그 보다는 우선 범죄의 결과는 영원한 멸망이라는 데 있다.
솔직히 말하면 천당에 가고 못 가는 것은 전혀 알 수 없는 세계다. 율법의 한 점, 한 획이라도 범한 자는 용서할 수 없는 심판에 처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기독교 상식의 초보이다. 따라서 반석 같은 확신이다.
갚을 것을 약속하고 빌린 금품은 실로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갚아야 하는 것이 세상의 참된 근본 원리이다. 빚을 지고서 갚지 않고 행세하는 사람은 가장 작은 이득(?)을 얻기는 했지만 사실은 가장 큰 자원을 상실한 것이다.
그저 그런 삶에 안도하는 자와 실전적 인생을 사는 자는 다 같이 50 평생을 살았다 하여도 그 마지막 모습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법이다. 유희를 하는가, 전쟁을 하는가. 여기가 인생의 분기점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한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우리는 기도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형제를 멸시하고, 또한 함부로 제멋대로 버릇없이 구는 무리들은 물러갈 지어다.
남자가 쉽게 화를 낼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화를 냈으면 유야무야 중에 천박한 ‘사랑’으로 돌아서서도 절대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처신해야 하는 기독교도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사람이라면 한번 끊었다고 선언한 것은 웬만해서는 다시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나의 죄가 용서 받으려면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가 필요한 까닭을 알 수 있다. “천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나의 형제니라” 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스도는 농담을 안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