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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방감등운산공원 기념비 제막식 및 추모음악회
선친을 모신 방감등운산공원 표석 세워
풍천임씨 4대부터 11대까지 모신 묘역
여러 지인들 기념비 제막식 축하
운산공원 묘, 달항아리로 승화된 작품
조상관이 우주관이 된 묘역성역 신격화
출향 인으로서 사업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임충열 안산시새마을회장(제이에스산업 대표)이 고향 영암 시종면 만수리가 내려다보이는 방감등 선산인 ‘풍천임씨서하부원군사정공파헌공시종중(豊川任氏西河府院君司正公派獻公始終宗中)’ 묘역 '방감등운산공원' 표석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영암 시종면 만수리 669-7번지에 1500평정도 조성된 풍천임씨 사정공파 선산에서 가진 제막식은 ‘풍천임씨 사정공파 방감등운산공원에 문화를 입히다’ 주제로 선친을 초모하는 행사를 선보였다. 또한 방감등운산공원 기념비 제막식 행사에 찾아준 모든 분들에게 ‘문화향유 희망 페스티벌’ 에 참여한 영암 시종 만수리 방감등운산공원을 기념하는 음식과 타올을 제공했다.
묘역이 하나의 문화와 역사가 있는 쉼터, 조상묘역 산책 중 만나는 열린 ‘문화쉼터공간’ 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모델로서의 묘역을 공원으로 꾸미자 영암 시종은 ‘선조를 찾아서 함께 감성 한 스픈,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과 힐링공간’ 으로서 또 하나의 관광지로서의 관심거리가 됐다.
방감등운산공원은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선대조를 모시는 묘역이다. 4대부터 11대까지 모신 풍천임씨 사정공파의 성역이다. 종중회는 풍천임씨 사정공파의 ’혼(魂)과 맥(脈), 그리고 기억(記憶)’ 이라는 주제로 기념비 제막식을 진행했다. 선대조의 삶의 세계를 조명하고, 문중과 가문의 사상과 정신의 명맥을 잇는 모습을 기리고 빛내는 행사이다.
이번 기념비 제막식에는 풍천임씨 사정공파의 혼과 맥을 끊임없이 기리고 올바르게 그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조성된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종중회가 재구성한 사상, 활동, 행적 등의 선대조의 삶과 역사적인 발자취, 그리고 덕망, 인품, 애향 등을 재조명해보는 자리를 마련했고, 지인 및 초청가수와 밴드단이 추모의 마음을 담아 각각 금소연 가수와 제(祭)를 무대에 올렸다.
영암 시종 만수리 방감등에 조성된 풍천임씨 사정공파 운산공원은 선대조의 혼과 맥을 계승하는 한국성씨사의 큰 흐름이기도하다.
방감등운산공원은 20년 전부터 영암 시종 만수리 선산에서 조상을 모시고 기리는 묘역조성에 심혈을 기해왔다. ‘혼과 맥, 그리고 기억’ 이라는 주제로,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세상에 나오다’ 라는 부제로 하여 차근차근 준비를 해왔다. 그러면서 조성을 꾸준히 해왔다. 그러면서 풍천임씨 사정공파 가문이라는 선대조의 사상과 정신의 원류와 상징체계를 연구하여 문중의 뿌리인 풍천임씨 사정공파 씨족을 연구, 복원, 재현하는 등 예술적,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 낸 전방위 숭배사상자로 인정받아왔다.
이번 ‘맥(脈, 혼과 물질 그리고 흔적)’ 은 올해 첫 번째 행사로 ‘풍천임씨 사정공파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를 묻었다. 서구의 문화적 이데올리기 속에서 우리 전통 문화의 본질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이번 행사는 선대조, 후세손 혈족영역의 풍천임씨 사정공파를 조명했다.
전통 문화의 미적(美的) 본질을 계승하고 동시대의 확장 방법을 통해 다양한 조상 세계를 선보이며, 독보적인 행보를 하는 선대조의 묘를 조성하고 기념하는 방감등운산공원 제막식을 선보였다. 종중회는 독자적인 전통적, 예술적, 문화적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후손들은 각각 예술, 문화를 매개로 ‘전통문화의 혼과 물질, 그리고 흔적’ 을 현대적인 감각과 균형으로 표현하여 다양한 묘역조성을 내놓았다.
방감등운산공원에 조성된 선대조의 묘는 봉분이 ‘달항아리’ 처럼 자리 잡았다. 흙과 불, 물, 공기 그리고 후손들의 시간이 오롯이 담겨있는 달항아리 같은 봉분(封墳)에서는 단단하지만 부드럽고 절제된 여운이 만들어낸 미학(美學)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여백이 돋보이는 묘역은 모든 제막식을 기획하고 진행한 29세손인 임충열 추진위원장을 비롯해 종중회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 화사하고 은은한 묘 형태는 몽환적(夢幻的)인 분위기로 임충열 추진위원장 및 종중회의 작품으로 탄생된 달항아리(봉분)가 어우러져 차분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
방감등운산공원 묘들은 가장 한국적 조형미를 꽃 피웠던 조선후기 ‘백자 달항아리(白瓷壺)’ 가 묘역 작업의 모티브이다. 마치 하나의 정면처럼 저 광대무변에 띄워 다의적 해설의 맛을 열어놓아 장자의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새 붕(鵬)이로 변하여 남쪽바다 천지(天池)로 날아간다는 기막힌 스토리와 오버랩 된다. 붕이 남쪽바다로 움직여서 가면 파도가 3천 리(里)나 된다.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서 위로 9만 리나 올라서 여섯 달을 가서는 멈춘다.
임충열 추진위원장은 방감등운사공원 조성 기획에 대해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의 달항아리 몽중호(夢中壺. 꿈속의 항아리)는 마음이다” 라고 했다. “궁극적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마음에 의해서이듯 그 통로이자 과정의 결정체인 그 마음의 그림을 대변하는 것과 같으리라” 했다.
“방감등운산공원에 설치되어있는 봉분의 생동의 달항아리와 여백미가 선사하는 ‘염원(念願)의 공간’ 은 심도의 조형세계를 담보해내며 일루전현상학의 공간감을 불어넣는다. 유.불.도교 등 복합적우주관과 검박한 품격의 맥을 이어온 미의식이 내재된 몽중호는 혼의 기운이 흐르는 ‘한국인의 존재론적 정체성’ 을 아우른다” 면서 “동시에 천인합일우주관의 정취를 품은 한국전통 조상숭배문화의 새로운 시각문화를 제시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라고 강조했다.
일체 화사첨족(花蛇添足)을 배제한 담백한 여백위로 생의 비애감을 껴안은 천엽(千葉) 꽃잎이 천진스럽게 바람에 드러눕는다. 매화는 과연 천하의 큰 구경거리이다. 그 꽃은 정월 그믐,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이나 집안 뜰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절편하게 깔려 있는 듯, 또는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있는 듯하다.
임충열 추진위원장은 “이번 제막식 행사는 우리 전통을 동시대적으로 풀어낸 선대조님들을 소개하는 기념비 제막식으로 ‘현재의 우리에게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며 “방감등운산공원 구조는 이번 제막식을 시작으로 풍부한 문화 콘텐츠를 공유하며 향후 더욱 흥미롭고 다양한 기획을 이어갈 예정이다” 라고 전했다.
더 나은 일상으로 공간복지, 전남 영암 시종면 300년 전부터 이어진 숭배문화 묘역, 누구나 한번 가보고 싶었던 성지 방감등운산공원이 주목되고 있다. 풍천임씨 사정공파 29세손인 임충열 제이에이씨 대표의 조상들이 사들여 문화공간으로 개조, 묘역 원형을 보존한 고즈넉한 공간서 숭조(崇祖)사상을 새겨보고 선대조의 삶을 되돌아보는 묘역을 감상하며 힐링을 하는 여유의 산책 중 쉬어가는 편안한 쉼터로 방감등운산공원은 만남이 있는 장소의 ‘후소(逅所)’ 이다.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종중회는 “선친들이 묻혀있는 방감등운산공원을 ‘성지(聖地)’ 로 규정하며, 후일 이 신성한 장소를 방문한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묻힌 분들의 업적과 인품 등을 영원히 기억할 것” 이라고 밝혔다. 종중회 관계자는 “성지 발언은 단지 신격화시키려는 의도가 아닌 조상에 대한 예의(禮義), 경의(敬意), 존경(尊敬), 숭경(崇敬), 숭중(崇重), 숭상(崇尙), 경모(敬慕), 존앙(尊仰), 공경(恭敬), 경애(敬愛)를 표하는 신앙(信仰)하는 일” 이라고 강조했다.
묘역을 성지로서의 공원화(公園化)함으로서 풍천임씨 사정공파 선산과 지역 사회의 동행은 풍천임씨는 좋은 이미지를 쌓고, 추후 지역 홍보와 매출 상승까지 이어지는 효과를 불러오고, 지역 사회에서는 상생 발전이라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와 앞으로도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의 지역 상생 노력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날 행사추진을 한 임충열 추진위원장(제이에스산업 대표)를 비롯해 종중회 임윤석 회장, 임용균 총무, 임동빈 감사 등 종중회원, 그리고 우승희 영암군수, 박종대 영암군의회의장, 정운갑 부의장, 강찬원 전 의장, 최공수 시종면장, 박성표 월출산농협조합장, 윤평한 문예체육행사추진위원장, 강호남 시종면이장단장, 최원길 노인회장, 김점수 남해신사제례 보존위원장, 김승록 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 및 사회단체장과 마을주민 등의 자리했으며, 또한 서울에서 내려온 박염심 재경 시종면향우회 재무처장, 김봉호 부회장, 박정순 전 여성회장 등 향우 15명, 안산에서 내려온 고태영 협의회장, 한숙희 안산시새마을회 사무국장, 이해숙 안산시청 새마을과장 및 각동 회장 등 55명명이 참석하는, 300여명의 추모객으로 성황을 이뤘다.
또한 박준영 전 전라남도지사. 김재철 전 전라남도부지사, 이호경 경기도 새마을회장 외 40여명이 축하화환을 보냈다.
식은 김성근 전문 MC 사회로 식전공연 및 6인조밴드 음악연주를 시작으로 제막식 행사 분위기를 조성한 후 1부 내빈소개, 공로패 전달식, 개회선언, 경과보고 및 약력소개, 종중인사말, 내빈축사, 비문 및 비명 낭독, 기념비 제막식 및 기념촬영, 2부 오찬, 3부 추모음악회(초대가수 공연), 노래자랑 순으로 진행됐다.
내 외빈 소개와 공로패를 전달한 후 개회선언을 했다. 개회사는 종중회 임용균 총무가 했다. 임 총무는 “방감등운산공원 기념비 제막식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경과보고 및 약력소개가 있었다. 약력소개는 한숙희 안산시새마을회 사무국장이 했다. 이어 인사말, 축사를 마치고 비문 및 비명 낭독이 있었으며, 이어서 기념식 제막식 및 기념촬영이 있었다. 그런 후 초대가수의 공연과 축하객들의 노래자랑이 있었다.
이번 공원 기념비 표석 건립의 취지는 선조의 위대한 행적(行蹟)과 학덕(學德)을 알리며, 공원 표석 건립을 통해 조상의 행적과 덕행(德行)을 추모하고, 숭덕(崇德)을 기리면서 그 돈독한 행실을 후손들이 이어받아 성실하게 살아가는 목표가 되게 하기위한 것이다.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문중 방감등운산공원 표석은 29대인 임충열 회장이 짓고, 서체는 풍천임씨 사정공파 29대 손인 임충열 추진원장인 쓰고, 영암 신북 유진석재가 부각해 후손 임충열 대표가 세웠으며, 모든 행사는 준비도 임충열 후손이 기획하고 진행했다.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문중 선산의 맨 위에는 임충열 회장의 선친인 풍산임씨 백파(伯派)에서 계보를 이어온 사정공파 4대 5대 선친과 아래로 6대, 7대, 8대, 9대, 10대, 11대가 모셔져있으며, 부모 묘아래 직계 후손들의 묘역 터를 만들어났다. 아래에 풍천임씨 사정공파 문중 숭덕비가 있으며, 그 아래에 영암시종문중 풍천임씨 사정공파 숭덕비와 추모비가 나란히 서있다. 입구에는 ‘방감등운산공원’ 이라는 표석을 세웠다.
방감등운산공원은 ‘사당도(祠堂圖)’ 와 마찬가지로 제사 때 쓰기 위해 사당을 그린 그림의 ‘감모여재도(感募如在圖)’ 형태를 취했다. 감모여재란 조상을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마치 조상이 살아있는 것처럼 모신다는 의미이다. 감모여재도, 사당도도라 불리는 독특한 건축물 그림이다.
제사를 지낼 때 걸어 놓아 사당인듯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림이다. 돌아가신 조상님이 앞에 계시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려는 제례의식의 핵심인 감모여재도는 사당도에 어울리는 제목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상류층의 유교문화에서 탄생시킨 그림이 사당도라고 할 수 있다. 사당도는 위패 앞에는 좌.우 촛불이 켜져 있는 촛대가 있고, 상위에는 포도, 참외, 석류, 감귤, 수박 등이 그려져 있다. 가문을 위해 자손의 번창과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씨앗이 많거나 넝쿨이 뻗는 종류의 제물을 그린 것이 특징이다. 아래에는 향합과 향로를 그렸으며, 양옆으로는 모란꽃이 장식된 화병이 있다.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을 그린 것도 조상신께 공경하는 궁극적인 의미와 당사자들의 바람이 잘 드러나 있다.
사당도은 팔작지붕의 청기와가 우람하고, 제삿날이라 분합문을 날개처럼 들어 올리고 신주, 촛대, 화병, 잔탁, 고일 그릇 등 화사한 색채로 정연하게 좌우 대칭을 맞춰 제례의식의 엄숙함을 그린 사당도, 이런 사당도의 의미가 풍겨난 방감등운산공원이 ‘감모여재도’ 라 할 수 있다.
시대부나 평민이나 구분 없이 우리 민족은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 사상을 삶의 원천으로 삼았다. 특히 효(孝)는 삶의 근본이 되어 부모님과 조상님을 모시는 아름다운 설화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방감등운산공원은 실제적인 묘지조성이지만, 사당도 같은 ‘감모여재도를 펼쳐놓은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방감등운산공원은 누구든지 와서 내용을 볼 수 있도록 개방형으로 만들며, 다음 세대들을 위해 한글 비문으로 제작하였다. 조상을 모시는 선산이 묘라는 느낌이 아닌 하나의 ‘공원’ 이라는 성역의 묘지조성 공원으로서 이 공원에 아무 때나 찾아 쉼과 여유, 그리고 조상의 숭덕과 업을 기리고 숭상하라는 목적으로 개방형의 묘지공원을 조성했다.
공원 표석 방감등은 선산이 있는 지명이 ‘방감등’ 이어서 방감등이라고 했고, 운산은 임충열 추진위원장의 호이다. 방감등의 방감은 ‘모 방(方), 달 감(甘)’ 자로 방감하다의 어근, '향기롭고 달콤하다‘ 라는 뜻이다. 등은 고개(嶝)의 ‘능선’ 을 말한다. 방감등은 ‘향기롭고 달콤한 고개’ 를 의미하며, 이것은 만수리 내에 있는 많은 수의 향기롭고 달콤한 능선에 핀 계화(桂花)꽃 나무에 기인한다.
방감등은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하는 지형의 경관으로 유명하다. 능선이 병풍처럼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해 시종의 가장 인기 있는 곳이자 그 지역의 명소이다. 운산은 임충열 회장의 호(號)로서 구름 운(雲), 뫼 산(山)으로 ‘상서로운 기운의 구름이 몰려든다’ 는 뜻이다. 방감등은 ‘향기롭고 달콤한 고개’ 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어쩜 모 방(方), 즐길 감(酣)의 ‘기운이나 흥이 한창 무르익어 있다’ 라는 뜻으로도 의미를 두기도 한다. 이번 영암 시종 풍천임씨 선산 공원조성에 대한 표석 제막식, ‘방감등운산공원 페스티벌’ 은 세상에서 가장 향기롭고 달콤한 무르익은 축제가 됐다.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종갓집의 장손인 문중을 대표한 임충열 추진위원장(제이에스산업 대표)은 제막식 추진에 대해 “사정공파 선대조님의 선산 묘역 방감등운산공원 제막식을 축하기 위해 풍천임씨 사정공파 종중회 임윤석 회장님과 각 지역 종중회 회원님들, 여러 지역 종친회, 화수회 회장님과 우승희 영암군수님, 박종대 영암군의회의장님, 신성철 전남도의회 의원, 박성표 월출산농협조합장 및 최원길 노인회장 등 여러 사회단체장과 마을 이장 등 마을주민과 안산시새마을협위회 고태영 협의회장, 안산시새마을회 한숙희 사무국장, 이해숙 안산시청 새마을 과장과 각동 회장님과 박봉호, 박정순 친구 등 참석하신 여러 분들이 너무 감사하다” 며 “공원 표석 제막식 건립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과 특히 거액의 기금을 협찬해주신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29대 손의 삼형제 등에 감사하고, 공원 표석을 세우는데, 한 사람도 이유 없이 협조해주셔서 고맙다” 고 말했다.
임윤석 종중회장은 인사말에서 “풍천임씨 사정공파 영암 시종에 선산을 두어 대대손손 조상들을 모시고 덕(德)을 기리고 예(禮)를 숭상해왔으나, 오늘날 같은 묘지 조성과는 못 미치는 열약한 환경이었다. 그러던 것을 우리 후손들이 나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선친들의 묘를 한 곳으로 이장하여 선산을 새롭게 단장하고 공을 들여 ‘방감등운산공원’ 이라는 명칭으로 묘역성역화의 성지(聖地)를 갖추게 된 것이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우리 후손들이 이렇게 선조에 대한 사랑과 숭배를 하는 정신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하고 자랑스럽고 자긍심을 갖게 된다” 고 말했다.
임 종중회장은 “우리 민족은 인간의 중요한 네 가지 예법, 즉 관혼상제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전승하여 고유의 전통의례로 발전시켜왔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만이 보존하고 있는 정신문화유산이다. 특히 효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조상 숭배의 추모 행사를 가장 중요한 의례로 생각하였다.”
“외래 문물이 들어오면서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인 전통예법과 미풍양속은 구시대의 낡은 유물로 취급되고 사라져가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현대화되었다 해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우리만의 아름다운 풍속은 살리고 지켜가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해야 할 것이다.”
“숭조사상(崇祖思想)은 조상을 추모하고 공경해야 한다는 의식적 개념이다. 조상에 대한 숭조사상은 존경심을 바탕으로 보본사은(報本謝恩)의 윤리적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나의 어버이를 낳아 기르신 조부모, 조부모를 낳아 기르신 증조부모, 이렇게 이어진 조상 전체를 추원경모(追遠敬慕)하는 것은, 나를 직접 낳아 길러준 어버이에 대한 효심의 연장이자 은혜의 갚음이라고 할 것이다.”
“조상의 몸은 비록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영혼은 남아 있다고 생각하여 신주(神主)를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올린다. 돌아가신 날을 기일(忌日)이라 하고 기제(忌祭)를 차려 애도의 정을 표한다. 명절에 절사(節祀: 차례茶禮)를 지내는 것도 조상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다. 또 옛날에는 철이 바뀔 때마다 햇곡식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사당에 천신(薦新)하며 조상을 존숭하였다.”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제한된 능력에 비해 욕구는 무한하기 때문에 갈등과 어려움에 봉착할 때는 그 해결을 전지전능한 초월자인 신(神)에게 간청한다. 그런데 유가(儒家)에서는 인간의 바람을 조상신에게 의뢰한다. 이른 아침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사당에 들러 신주를 배알하는 것은 일정한 성소(聖所)에 나아가 행해지는 다른 종교의 예배의식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숭배의 대상이 조상신이라는 점만 특이할 뿐이다. <예기>에서 공자는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는다.” “제사에는 기원(祈願)이 있고 보답(報答)이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숭조사상에는 추원경모(追遠敬慕)와 기복적(祈福的) 신앙(信仰)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상고시대 순(舜)임금이 종묘(宗廟)를 두어 조상을 숭배하자 대효(大孝)로 일컬어졌고, 무왕·주공은 조상의 뜻을 잘 받들고 조상의 업적을 훌륭히 이었다 하여 달효(達孝)로 불렸다.”
“이렇게 확립된 조상숭배 숭조(崇祖)의 전통은 이후 개인적·사회적 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위로는 제왕에서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덕목으로 널리 호응을 받았다.”
“왕은 종묘를 세워 선왕을 흠모하고 그 유업을 기렸으며, 사대부는 가묘(家廟: 사당祠堂)를 세워 선조를 경모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별채의 사당을 세우기 어려우면 장자손의 집에 방 1칸을 사당으로 사용하던지 혹은 벽장에 감실의 벽감(壁龕)을 만들어 신주를 모시고 조상에 대한 보본사은(報本私恩)을 더욱 깊이 새기면서 친족 간의 화목이라는 좋은 습속(習俗. 습관이 된 풍속)을 다져나갔다. 우리나라에서 숭조사상은 유교가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정례(正禮)로 채택하여 종가마다 사당을 짓고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등 체계적인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주자가례에 의하면 사당은 정침(正寢: 안채의 중심 몸채의 방)의 동북쪽에 설치하고 큰일이 있으면 나아가 조상에게 아뢴다. 만약 재난을 당하면 무엇보다 신주와 유품을 옮기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였다. 이렇게 조상을 상징하는 신주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성시하였다. 이것이 바로 일상생활에서 숭조사상의 실천인 것이다. 그리고 사당을 중심으로 구성단위가 대가족 제도가 됨에 따라 종가 우위(優位)의 풍조가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고조를 중심으로 한 당내(堂內)의 결속과 불천위를 중심으로 한 문중 내의 결속을 바탕으로 선조의 문집을 간행하고 가풍을 유지·계승함으로써 구성원의 소속감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개인주의가 만연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숭조사상은 새로운 화해를 모색하는 이념적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조상의 묘를 조성하고 관리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하고 지극한 효심을 보여준 일이다” 라고 방감등운산공원 조성을 치하했다.
또한 박종대 영암군의회의장은 축사에서 “풍천임씨 사정공파 선대조의 선산 공원 표석 건립을 축하하고, 타 문중의 본보기가 될 정도로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문중이 되고 있어 자랑스럽고 각 지역 문중의 발전이 풍천임씨 사정공파 전체 문중의 발전이 되길 기원한다” 고 말했다.
이어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종중회가 이렇게 훌륭한 전통 있고 뼈대 있는 섬김이 정신을 갖춘 집안인줄 몰랐다” 며 “오늘 여기 방감등운산공원에 와보니 정말 놀라울 정도로 선산을 잘 조성해나 감탄을 했다. 조상을 모신다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이런 정신이구나, 효심이 없으면 이렇게 하진 못했을 텐데,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종중회의 숭조사상, 정신에 찬사를 보낸다” 고 했다.
또한 정운갑 영암군의회 부의장은 축사에서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선친들이 평생의 가시발길을 걸어오시면서 오직 국가와 민족, 그리고 정든 고향 시종의 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해 오신 제이에스산업 대표이자 임충열 추진위원장님 선친들의 큰 사랑과 덕행과 노고에 깊은 감명을 느낀다” 며 기념비 제막식을 축하했다.
또한 신승철 전라남도의회 의원은 축사에서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시종문중의 후손인 임충열 추진위원장은 일찍이 청운의 꿈을 가지고 온갖 역경을 다 겪어 내시면서 항상 겸손과 올바른 기업관과 국가관을 가지시고 희생과 봉사정신으로 오직 외길을 걸어오신 기업인으로 알고 있다” 면서 방감등운산공원 표석(기념비) 제막식을 빛내줬다.
이밖에도 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양문석 의원 등이 축전으로 축하메시지를 전했다.
풍천임씨 사정공파 입향조 사정공 선산 추모비문은 다음과 같다.
『통장대부 영암 사정공 종친은 풍천임씨 사정공파 시조는 임계생(任繼生)이다. 풍천임씨 시조 임온(任溫)의 10세손으로 고조께서는 6세손 어사공(御使公) 주(澍)이시다.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장자(長子)는 자송(子松) 서하부원군(西河府院君)이시며, 백파(伯派)라고 한다.
차자(次子)는 자순(字順) 전서공(典書公)으로 중파(仲派)라고 하는데, 백파(伯派)인 서하부원군(西河府院君)께서 증조가 되시며, 세 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경유(景儒), 덕유(德儒), 덕수(德壽)이시다.
경유의 후손으로는 세조(世祖) 때에 숭록대부(崇錄大夫)를 지내신 경유의 고손(高孫) 임사홍(任士洪)의 부친 원준(元濬)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광정대부(匡靖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시고 문간공(文簡公)의 시호(諡號)를 받으신 덕유(德儒)께서 조부가 되시며, 조부께서는 구(球), 관(琯), 소(昭)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태조(太祖) 때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참지(參知) 문하부사(門下府使)를 지내신 구(球)에서 부친이 되신다.
조부 이상의 선친 묘소는 지금의 북한 땅 풍천(豊川)에 모셔있어 후손들이 확인할 수 없고 부친의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중면 상수동리(上水同里) 지금의 합수리에 모셔있고, 매년 음력 10월 1일 세일사(歲一祀. 음력 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 무덤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부친이신 참지문하부사공(參知門下府司公) 선조께서는 세 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선생(善生), 계생(繼生), 복생(復生)이며, 차자(次子)이신 계생(繼生)께서 사정공(司正公) 선조(先祖)이시다.
묘소가 경기도 양주군 북면 진답리 지금의 은천면 선암리 아래 신촌리 이곡중현(利谷中峴) 자좌(子坐)였던 것은 구보(舊譜)에는 실묘(失墓)로 부재(不載)이였는데, 묘하(墓下)에 사는 고노(古老)의 말을 듣고 경신(庚申年. 1920년)에 15세손 수준(守準)과 여러 종친들이 계묘(啓墓), 득지석(得誌石)하여 개봉축하고 매년 음력 10월 15일 세일사를 지내오다가 을축년(乙丑年. 1985년) 10월 20일에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산 174번지로 이묘(移墓)하여 표석(표석)을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 1일 연천에서 부친 문하부사공의 세일사를 지내고 오후에는 장수면 오가리에서 세일사를 지내왔다.
양력 9월 첫째 일요일 오가리와 철원군 양지리 묘소 벌초를 하고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오가리에서 사정공(司正公) 선조(先祖)부터 15세까지 세일사를 지낸다.
사정공(司正公)께서는 한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한손(漢孫)이시고,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셨으며, 자헌대부공(資憲大夫公)께서는 아드님 한분을 두셨는데, 걸(傑)이시며 감찰(監察)의 관직에 계셨다.
감찰공(監察公)께서는 2남 2녀를 두셨는데 장자(長子)는 요재(堯載)이신데, 찰방(察訪)의 관직에 계셨으며 후손(後孫)은 주로 포천군(抱川郡) 철원군(鐵原郡)에 거주하고 있다.
차자(次子)는 순재(舜載)이고 진사(進士)이며, 아드님 한분을 두셨는데, 통덕랑(通德郞. 조선시대 정5품 동반 문관에게 주던 품계)을 지내신 만영(晩英)이시며, 후손(後孫)은 전남(全南) 영암군(靈岩郡) 시종면(始終面)과 도포면(都浦面)으로 이주(移住)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장녀(長女)는 제주인(濟州人) 고계적(高繼跡)에게 출가하였고 차녀(次女)는 안동인(安東人) 김언심(金彦深)에게 출가를 하였다.
장자(長子)이신 요재(堯載) 찰방공(察訪公)께서는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장자는 연종(延宗)이시며, 참봉(參奉)을 지내셨으며, 충국(忠國), 충달(忠達), 충성(忠成) 세분의 아드님을 두셨고, 차자(次子)이신 계종(季宗) 훈련원(訓鍊院) 주부(主簿)를 지내셨으며, 충정(忠貞), 충렬(忠烈) 두 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예전에는 연종(延宗)의 후손은 음지(陰地) 마을파(派) 계종(季宗)의 후손(後孫)은 양지(陽地) 마을파(派)라고도 하였다.
파조이신 12세 사정공께서는 1573년(선조 6) 출생하시어 1638년 65세에 돌아가기까지 종6품인 선교랑(宣敎郞)이란 벼슬을 역임하셨고, 정3품인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是正)에 증직되신 분이다. 포승읍 만호리 원기에 안장되셨다가 포승공단 개발로 수용되어 현재는 용인시 동림리 대사헌공묘역에 모셔져 있다.
풍천임씨 사정공파(司正公派)는 ‘백파(伯派)’ 의 분파조이다. 사정공은 교수, 삼재, 집의, 상기, 생원, 상지를 역임한 전남 무안 몽탄 정지리에서 형제를 데리고 영암 시종면 봉소리에 입향하였다. (중략) 종친들의 지극 정성에 감동하여 감히 명(銘)하는 바이다. 』
『선조께서 이 고을에 정착하신 이래로/천지의 자애로움 받으셨도다/덕업 닦으시고 은혜 베푸심이 많아/훌륭한 공적 대를 이어 더욱 빛나네/감마(減磨)가 양양한 큰 물 만났으니/오랜 세월에 기개가 더하리라/숭모하는 마음 모아 추모비를 세워/시종공의 고매하심을 온전하게 함이도다.』
이렇게 쓰인 비문을 세운 선산에 ‘방감등운산공원’ 이라는 표석(表石)을 세운 제막식 행사가 열린 것이다.
방감등운산공원 표지석 뒷면에는 ‘공원을 꿈꾸면서’
『月出山 산자락 곳곳에 모셔져있던 선조들을 이곳 方甘嶝(방감등)에 모셨나이다. 4.5대는 이곳에 6, 7, 8, 9, 10, 11대를 모셔옴으로써 매년 봄, 가을 2회 걸쳐 모시는 시제를 년 1회(봄 제사)로 줄여 선조들이 지켜온 선산을 공원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이는 후손들에게 좀 더 편리한 관리를 공원으로 조성하여 길이길이 빛내고자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또한 공원조성 목적에 대한 글 외에 추모시도 적어났다.
愛鳳村(애봉촌)-풍천 임성구
靈山은 月出하고
큰 강 여울턱
떨어진 이곳에 지으셨네
애봉촌을 오가는
자손 보살피노라
드물게 또는 여럿이 오가는
길섶에 방감등 밝히고
길손 눈 여겨 보며~~~
자손인 가고
자손인 가고...
라는 추모시를 지어 새겨났다.
비문전체 총 정리는 풍산임씨 사정공파 29대 손인 ‘운산 임충열’ 추진위원장이 했다.
임충열 추진위원장은 “내 고향 시종은 조상 전래의 영감이 서린 터전이요. 부모님으로부터 나의 삶이 이어져온 생명의 원천지였다” 며 “500여 년간 이어 살아오다가 이제는 마을도 시대적 상황으로 선조대대로 내려오던 향리가 엣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상전벽해가 되어 농촌개량과 산업화 등으로 많이 변해버려 옛 모습은 그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 시종마을은 언제나 그립고 아름다운 곳이며,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반겨주는 마음의 보금자리였다” 고 회상했다.
임 추진위원장은 “송덕비 뒷면에 새겨진 반가운 이름들이 정답게 느껴지고 우리 문중을 한눈에 보는 것 같아 시종에 함께 살았던 아름답던 추억이 생각난다” 며 “고향을 그리워하며 친족 간에 화목을 돈독히 하고 화합하여 문중의 무궁한 발전을 바란다” 고 말했다.
임 추진위원장은 “시종은 대대로 부호(富豪)와 학자 많은 인물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으로서 풍천임씨 143,881명 중 사정공 후예 2000천여 명은 선조님의 훌륭하신 숭조상문(崇祖尙文)의 정신을 이어받아 효제충신(孝悌忠信.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 사이의 우애)의 덕행을 계승하고 애향심과 뿌리의 근본을 찾는 참된 정신으로 고향을 자주 찾아보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고 말했다.
축사를 마치고 이어 비문낭독(공원을 꿈꾸며, 애봉촌)이 있었으며 이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영암 시종 풍천임임씨서하부원군사정공파헌공시종중(豊川任氏西河府院君司正公派獻公始終宗中) 방감등운산공원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제막식은 임충열 추진위원님께서는 선친과 조상을 사모하고 숭덕 하는 효와 예의 마음을 담아 새긴 숭덕비 기념비 제막식을 고향인 시종에서 하오니 효와 예의 마음과 성심의 한마음 한뜻을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라는 제막식 안내를 하고서 제막식 행사를 거행했다.
기념비 제막식에 종중회 회원, 군의회의장.부의장, 기관장, 노인회장 등 사회단체장, 지인 등이 함께 표석을 덮은 천을 끌어당겼다.
임충열 추진위원장은 “추억에 찾아가보는 그리운 내 고향이 있어서 행복하다. 추석의 황금연휴가 시작되자 그래서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례행사처럼 다가오는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에 추석을 맞이하여 나의 정든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언제나 그랬듯이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은 여전하게 가볍고 행복하기만하다. 나는 3남 1녀 중 장남으로서 늘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하게 만들고 언제나 궂은일에도 앞장서서 솔선수범을 해서 그런지 동생들도 형의 말에 잘 따라주면서 형제간의 우애도 남다르다” 라고 했다.
임 추진위원장은 “이번 추석에도 흩어져있는 동생 가족들과 한 자리에 모여서 추석의 푸짐한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님에게 제례를 올리면서 늘 조상님이 잘 돌보아준 덕분에 우리들은 건강하게 또한 각자 맡은바 일에 충실하면서 잘 먹고 잘살고 있는 것도 나의 유일한 조상님이 돌봐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면서 “늘 추석과 설 명절에는 정성껏 손수 마련한 음식으로 추석을 맞아하는 즐거운 시간이 행복하다. 차례를 지내고 인근에 있는 선친과 할아버지 및 선조님들에게 성묘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고향에서 보내는 것이 그래도 나에게는 유일한 행복의 시간이라고 자부한다” 고 했다.
그동안 선친을 비롯해 조상들이 세상을 떠난 다음 묘 조성에 신경을 써 묘비석을 세우고 했지만, ‘방감등운산공원’ 이라는 이름의 표석은 이제 서야 세우게 됐었다.
생전에 선친 및 조상께서는 언제나 나라를 지키고, 평화를 지키고, 역사를 바로세우고, 국운이 융성하도록 운동을 활동하다 온갖 것 고생하다가 작고하였다. 자손들은 선친과 조상들에게 그동안 제대로 된 기리는 것에 대한 공원조성을 해놓고도 이를 세상에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선산의 묘역성역을 알리는 표석을 세워주지 못함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려 죄송한 마음을 이제라도 다행히 예(禮)를 들어 조상의 명예와 영예나 업적을 존중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제막식을 거행했다. 조상을 같이하는 한 겨레붙이의 문중인 종중회는 방감등운산공원 조성의 조상숭배행위에 대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영광입니다(It is honor to here today)” 라고 했다.
“지난 28일(토) 전남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에 위치한 선친과 조상을 묘신 선산에 묘비명을 세우는 제막식이 이제야 큰 아들인 저는 아버님 묘역에 비석을 준비하고 비문을 직접 지어서 좋은 서체를 영암 신북 영암석재 류춘근 대표께서 받아 직접 부각한 것을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고향 선산에서 비(방감등운산공원 표석) 제막식 행사를 거행하게 된 것이 자랑스럽게 생각된다” 는 임충열 추진위원장의 효심이 지극정성이다.
풍천임씨 사정공파 29대 손인 임충열 추진위원장은 기념사에서 “무릇 자식이 부모와 선친의 뜻을 이어 받는 것도 당연 하지만, 어떻게 묘비를 정성껏 준비하는 것은 부모와 선친의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 받도록 후손으로서 해야 할 도리하고 생각한다” 고 고인을 추모하고 공원조성에 예를 표했다.
그러면서 “공원을 조성하고 표석을 준비하면서 많은 걸 느꼈다” 며 “잘 다듬어진 묘소도 여러 곳을 들려 보았고, 비문도 많이 읽어 보았다” 고 하면서 “그러나 저는 많은 곳을 들러 보면서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비문은 한글로 써서 누구나 읽어 알기 쉽게 하고, 비석은 검소하고 품위 있게 다듬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고 말했다.
이어 “서체는 광개토대왕비의 웅혼하고 단정한 고체를 바탕으로 했고, 부각은 손으로 직접 갈아 새겨서 서체의 느낌이 변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부탁하여 완성했다” 고 밝혔다.
임 추진위원장은 “묘역인 방감등운산공원은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성지(聖地)이다. 이 성지는 최종 목적지가 아닌 새로운 출발점이며, 우리 사회와 시대가 요구하는 조상을 숭배하는 역할과 책임을 숙고(熟考)하고, 후손들과의 우애를 돈독히 하는 공원” 이라고 이같이 밝혔다.
28일 이날 전 가족과 관계자 및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족 대표로 안산시새마을회 한숙희 사무국장이 비문 및 비명을 낭독했다. 또한 감사의 말씀과 아울러 “공이 지역을 사랑하고 불의에 항거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거둔 삶은 대를 이어 우리가 본받아야할 인생의 좌표이다” 라는 말 한마디로 제막식을 마쳤다.
예로부터 조상을 받드는 제례가 철저히 행해지고 있던 것을 가족과 씨족 단위로 선조를 숭배하는 제례의식이 정성껏 지켜져 왔기에 씨족 부족국가에서 행해지는 조상을 숭배하는 관습이나 의례는 고대 여러 민족에서 존재해왔듯이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자손들도 조상승배는 효도사상과 결부돼 유교를 발전시켜왔고, 그 영향을 받아 효(孝)를 근본으로 해 조상을 숭배하는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아내려왔다.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후손들도 우리의 전통적 사상은 자손으로서 선조에게 후손의 도리를 다해 정성을 바쳐온 의식이다. 그래서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 가옥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신성하게 모셔져 왔듯이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종중회도 조상들을 모신 선산인 방감등운산공원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특히 조선왕조 500년간 유교사상을 바탕에 둔 조상숭배 정신은 사회 기강을 바로잡는 수단으로써 치국(治國)의 근본이념이기도 했다. 그러듯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종중회도 그러한 정신을 갖고 후손은 선대 봉사를 하는 것을 철칙으로 여겨왔다. 방감등운산공원은 선대에 봉사를 하고하는 정신에 기인한 일이다.
승조전신의 근본은 ‘효(孝)’ 다.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라 했다. 유교사상에 근본을 뒀던 우리 사회에선 조상을 공경하는 숭조정신과 그 은덕에 보답하려는 보본사상(報本思想)이 투철했다. 그런 보본사상이 깊은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후손들이다.
방감등운산공원에 모신 선친의 묘(墓)는, 그 봉분(封墳)이 어쩜 ‘우주의 실체’ 가 아닌가한다. 등근 우주처럼 구(球)를 이루며, 그 구들은 마치 별자리를 본 듯 ‘성하(星河. 은하)’ 처럼 반짝인다. 성하를 이룬 봉분들은 기(氣)에서 기(氣)를 이어주는 것이면서 맥(脈)에서 맥(脈)을 이어주는 일이기도하다. 선대들끼리 서로 이음하며 선대는 후대와의 이음을 한, 봉분들이 조화를 이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되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지구는 산(山)과 들(野)과 강(江)과 바다(海)로 이룬다고 한다. 산은 봉우리와 봉우리, 능선과 능선으로 위용과 기운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그 산에 대한 예찬과 신처럼 모시듯이 방감등운산공원에 있는 선대조의 봉분들은 산의 위용과 기운, 아름다움을 보는 듯하다.
또한 봉분이 ‘달항아리’ 처럼 보인다. 순수미가 돋보인 여백미의 결정체인 달항이리처럼 풍천임씨 사정공파 묘역에는 봉분을 닮은 달항아리를 놓은 것 같다. 묘는 하나의 품격 있는 작품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역시 조상의 실체를 ‘우주관(宇宙觀)’ 으로 끌어낸 신격화(神格化)를 이룬 방감등운산공원이다.
이런 봉분을 하고 있는 방감등운산공원 묘역은 선대조의 ‘숭조숭모(崇祖崇慕)’ 유훈 중 하나인 조상 묘소와 선산의 자연환경을 지키는데, 누구보다 무거운 책무가 있는 영암 시종 퐁천임씨 사정공파 후손들이다. 지하에 잠들어 계신 선대조의 묘소와 선산을 관리하는 풍천임씨 사정공(司正公) 산하 각 소(小) 종중들이 조상 묘소와 선산의 자연환경을 지키는데, 시종 소재 문중 중 330여 년 전부터 내려온 유일한 3세7효(三世七孝. 3대에 걸쳐서 7명의 효자 배출) 가문 선대 조상님들의 생전에 남긴 글의 유문(遺文)과 죽은 사람이 생전에 남긴 훈계의 유훈(遺訓)을 지키고자 방감등운산공원을 조성한 이유다.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 후손들은 숭조돈종(崇祖惇宗), 숭조(崇祖)는 조상을 숭상함을 뜻하며, 돈종(惇宗)은 일가끼리 의리를 도타이 함을 가리킨다. 즉, ‘부모를 존중하고 자식들끼리는 우애 있게 잘 지낸다’ 라는 뜻으로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소망이다. ‘풍천임씨서하부원군사정공파헌공시종종회(豊川任氏西河府院君司正公派獻公始終宗會)’ 선산에서 ‘방감등운산공원(方甘嶝雲山公園)’ 이라는 기념비 제막식은 후손의 도리를 다하는 일이다.
임 추진위원장은 “종중회 회원은 영암 시종 풍천임씨 사정공파의 기둥이고, 역사가 된다는 점을 명심하면서 종중(宗中)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그 길을 보람차게 걸어가길 바란다” 고 당부했다.
맡길 임(任)을 쓰는 임씨는 풍천임씨(豊川任氏)와 장흥임씨(長興任氏)가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그 위에도 곡성, 과천, 아선, 회덕, 진주, 함풍 등이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임씨는 5만3000여 가구에 총 17만2000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중 풍천임씨는 2015년 143,881명이며, 장흥임씨가 2만5000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이 통계는 1985년 국세조사 때보다 인구가 줄어든 것으로 되어있어 통계상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구조사 할 때 조사원들이 임(林)씨와 임(任)씨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생긴 착오로 판단된다.
그중 풍천임씨는 중국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 사람인 '임온(任溫)' 을 시조로 한다. 장흥임씨의 시조는 임호(任灝)로 중국 송(宋)나라 사람으로 고려 정종 때 귀화하여 전안현(定安縣. 지금의 장흥군 관산읍)의 당동리에 정착하였기에 장흥임씨라고 정했다고 한다. 다름 이름으로 관산임씨라고도 한다.
맡길 임(任)을 쓰는 풍천임씨 등은 적은 인구수(현재 본관 인구 순위에서 풍천임씨 82위)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170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할 정도로 명문집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연산군 때 일어난 갑자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임사홍(任士洪) 등의 사건으로 인해 부침도 많았던 집안이다.
풍천임씨(豊川任氏)는 풍천임씨의 본관이 경북지방의 낙동강변에 있는 풍천면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한다. 풍천임씨의 본관은 황해도 지방의 풍천(豊川)을 의미한다. 풍천임씨의 시조 임온(任溫)은 중국 소흥부 자계현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고려 충렬왕 때 그의 5대손인 임주(任澍가 제국대장 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살았기에 황해도 풍천에 사적(賜籍)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즉 풍천임씨의 옛날 보첩(報帖)에는 시조 임온에서 5세에 걸쳐 중국에서 살았고, 6세손인 임주에 이르러 고려에 들어왔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후 황해도 풍천 남쪽 박달산 아래 도곡리에서 발견된 임주의 조부 임도(任徒)와 부 임천유(任天裕)의 비(碑)와 지석(誌石)이 발견됨으로써 중국거주설이 부정되었다.
또한 제국대장 공주를 따라 고려에 돌아왔다는 설에 대해서도 충렬왕 당시에는 제국대장 공주라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충령와이 연경(지금의 북경)에 불모로 있다가 원나라 세조의 딸인 홀도로공주(忽都魯公主)와 결혼하고, 부왕이었던 원종(元宗)이 서거함으로써 귀국하게 되었다는 기록만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풍천임씨 대종회 측에서는 중국 도래설에 대해 확증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어찌됐든 풍천임씨가 한 가문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임온의 5대손인 임주에서부터라는 것은 대체로 일치한다. 즉, 임주는 고려 충령왕을 섬기여 일찍이 경상도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하고 감문위대 장군(종4품)으로 벼슬을 마쳤다. 그리고 임주의 아들 대에서 삼사판사(三司判事) 임자순(任子順)이 나와 두 파로 나뉜다. 임자송은 백파(伯派)의 시조가 되고, 임자순은 중파(仲派)의 시조가 되었다. 또 두 파는 다른 이름으로 백파는 ‘부원군파(府院君派)’ 와 중파는 ‘전서공파(典書公派)’ 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 파에서 조선조에서 고르게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상신 1명에 호당 6명, 청백리 2명이 배출되고, 공신 1명, 장신 3명이 배출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조에서 임천유(상호군), 임자송(찬성사), 임자손(개성유수), 임덕유(공조판서) 등이 있으며, 조선조에서는 임원준(우참찬), 임사홍(도승지), 임희재(서예가), 임응규(유정, 사명대사), 임유겸(공조판서), 임추(호조참판), 임권(좌참찬), 임열(한성판윤), 임호신(형조판서), 임성고(형조판서), 임백경(우의정) 등이 있다.
또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481명인데, 그중 문과급제자가 148명, 무과 24명, 사마시 308명, 역과 1명이다.
풍천임씨는 2015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현재 인구는 총 143,881명이다.
영암 시종으로 입향한 풍천임씨는 지금으로부터 3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30년 전에 풍산임씨 사정공파 6대 할아버지께서 시종으로 이거해와 터를 잡고 영암 시종임씨로 파를 이뤄 손을 이어오고 있다.
월출산 산자락 곳곳에 모셔져있던 선조들을 이곳 방감등(方甘嶝)에 모셔 풍천임씨 사정공파 4대부터 11대까지 임씨 선산에 모신 조상들을 기리는 묘역이 바로 시종 만수리에 위치한 방감등에 조성된 ‘운산공원(雲山公園)’ 이다.
풍천임씨 29세손인 임충열 추진위원장은 “조상을 기리는 방감등운산공원을 조성해놓아 이제야 조상들의 은덕(恩德)과 공덕(功德)을 제대로 기리는 것 같아, 예(禮)와 애(愛)을 다한 것 같아 조상에 대한 숭상(崇尙)은 묘역 조성, 즉 묘를 잘 꾸미고 그 앞에 비를 세우고, 입구에 방감들운산공원이라는 표석을 세우니 도리를 다한 것 같아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고 말했다.
방감등운산공원은 일반 묘역조성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어쩜 왕릉보다 더 성역화 된 묘역조성으로 보인다. 방감등운산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수년간에 걸쳐 묘역조성에 심혈을 기해왔다. 묘역의 잔디는 물론, 비(碑), 나무식재와 운산관(雲山館) 등 여러 부분에 대한 자금투자, 시간투자를 해오는 등 공(功)을 들어왔다. 결과 영암 시종에 선조들의 혼(魂)이 담겨있는 성역(聖域)의 풍천임씨사정공파(豊川任氏司正公派) 묘역, 공원형 성역묘역(聖域墓域) ‘방감등운산공원’ 이 탄생된 것이다.
묘역공원 조성은 ‘조상숭배문화’ 에서 기인(基因)했다. 혈맥의 뿌리라는 흔적을 남기고자 묘를 조성하고, 그 묘역을 숭배(崇拜)했다. 맥(脈)은 숭배(崇拜)로, 숭배는 숭덕(崇德)으로, 숭덕은 예의(禮義)로, 예의는 덕행(德行)으로 진화된 과정을 낳고, 맥을 이어가겠다는 전통문화계승을 실천하는 일과 조상숭배사상을 따르는 일이다. 맥은 인간의 ‘예(禮)와 효(孝)’ 란 정신세계를 갖추는 일이다. “영암 시종 방감등운산공원에 한반도의 혈맥(血脈), 풍천임씨 사정공파의 맥(脈)이 흐르고 있습니다” 라고 종중회는 말해 된다. 맥을 이어간다는 것은 조상을 사랑하고 예를 갖춰 지키고 덕을 쌓는 ‘숭덕(崇德)’ 한다는 것이다.
이번 기념비 제막식 추모음악회는 김성근 전문 MC 사회로 제로원 6인조 밴드 연주와 노적봉 사랑, 뱃고동소리, 에헤라가보자, 사랑의 로터리 노래를 부른 금소연 가수 외 초청가수가 출연해 공원 제막식 행사를 뜻 깊고 유익하고 즐거움이 묻어나게 했으며, 묘역이 축제의 장으로 선보일 수 있다 라는 것을 보여준 묘역을 주민들이 즐겨 찾는 방감등운산공원 묘역을 다기능 복합문회공간으로 활성화하는, 문화와 치유를 체험하는 ‘열린 문화 공간’ 임을 인식하게 했다. 공원묘역은 공원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지만, 계속 도시 밖으로 밀려나고 회피한다는 공간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음악회 같은 행사를 통해 공원묘역을 도시 속, 삶의 공간이자 중요한 문화공간의 하나로 끌어들여 주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고자한다.
한편 방감등운산공원을 조성하면서 남다른 관심으로 오늘에 있기까지 공을 세운 김성호(내동리) 철쭉농원 대표가 공로패를 받았다. 수여는 종중회 회장이신 임윤석 회장이 했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