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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
“한 손에는 붓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든 영웅호걸형 선비.
붓으로는 문명 개혁의 고전을 만들었고, 칼로는 썩은 왕조를 도려냈다.”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본관은 봉화(奉化)다. 봉화(奉化) 정씨(鄭氏)는 본래 향리 가문이었으나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鄭云敬·1305∼66) 대에 와서 과거에 급제해 양반 가문으로 발돋움했다. 운경은 형부상서까지 지낸 청렴결백한 관료였다.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기록이 부실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1396년(태조 5) 명나라가 정도전을 압송해 보내라고 했을 때 나이가 55세가 되어 갈 수 없다고 한 것을 보아 1342년(충혜왕 복위 3)에 태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그의 출생지도 개경의 삼각산(三角山)과 단양(丹陽)의 삼봉이라는 설이 있을 뿐 정확한 장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독서를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운경이 경학의 대가인 이 곡(李穀)과 친했기 때문에 이 곡의 아들 이 색(李穡)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 훌륭한 학자들과도 사귈 수 있었다.
정도전은 1360년(공민왕 9)에 성균시(成均試), 1362년(공민왕 1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에 은거했으며 이듬해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잇따라 숨을 거둬 영주(榮州)에서 3년간 여묘(廬墓:상제가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 생활을 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신돈이 제거된 후 성균박사에 기용됐으나 1374년(공민왕 24)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다시 정치적 파란을 겪는다. 그 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친명파에 속했다. 1375년(우왕 1) 원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이인임(李仁任)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내가 사신의 목을 베어 오거나 체포해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나주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9년간 귀양가게 되었다. 정도전이 정치적 회생의 기회를 잡은 것은 1383년(우왕 9) 함주(咸州)에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다. 혁명을 하기 위해 이성계의 군사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이것이 조선 왕조 탄생의 전주곡이었다.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후원을 받아 혁명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작업에 더욱 가속이 붙었다.
이성계는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 왕씨가 아닌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진짜 왕씨를 왕으로 옹립함)을 내세워 우왕과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그리고 토지개혁을 실시해 구귀족의 생활 기반을 빼앗아 신귀족에게 주었으며, 1392년(공양왕 4) 7월에는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 왕조를 건국했다.
개혁 위해 스승 이 색 제거
조선 왕조가 개창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만들어 발표했고 목은(牧隱) 이 색(李穡) 등 반대파를 제거했다. 이후 이성계의 뜻에 따라 강비(康妃)의 아들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삼았다. 또한 의흥삼군부 절제사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按撫使)로 함길도를 행정구역으로 편입했다. 이와 함께 ‘문덕곡’(文德曲) 등 6개의 악사(樂詞)를 지어 이성계의 왕업을 찬양했다. 이른바 정도전이 조선 왕조의 설계자로 부상한 것이다.
정도전은 한양 천도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경복궁 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다. 정도전은 풍수(風水)를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무학(無學) 대사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했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정도전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 ‘태조실록’ 정도전 졸기(卒記)에 의하면 외할아버지인 우 연(禹延)의 장인은 김 전이라는 중이었는데 수이(樹伊)라는 종의 아내와 사통해 딸 하나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딸이 우 연에게 시집가 딸 하나를 낳았고, 그 딸이 정도전의 부친 운경(鄭云敬)과 혼인했다는 것이다. 즉,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천인의 딸이므로 정도전은 천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은 신빙성이 의심된다. ‘태조실록’이 태종의 측근인 하 륜(河崙)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실록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해도 당시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고려 시대에는 적서(嫡庶)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1398년(태조 7) 8월26일 방원(芳遠)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에 희생되어 숨을 거뒀다. 송현(松峴; 지금의 한국일보사 근처) 남 은(南誾)의 첩집에서 방원의 기습을 받은 것이다.
정도전의 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방석(芳碩)을 세자로 추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복형(異腹兄)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은 태조의 뜻이었고, 방번(芳蕃) 대신 방석을 추천한 것은 배극렴(裵克廉)이었다. 그런데도 방원은 배극렴에게 세자 책봉의 잘못을 물은 적이 없다. 정도전은 태조의 명을 안 된다고 간하지 않고 따른 죄밖에 없다.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 내내 신원되지 못했다. 그러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1865년(고종 2) 그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고종은 1870년(고종 7) 문헌(文憲)이라는 시호와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을 내려주었다. 그후 1872년(고종 9) 그의 후손들과 죽산부사 이헌경(李憲璟)의 노력으로 양성현 산하리(山下里)에 3칸짜리 사당 문헌사(文憲祠)가 세워졌다. 이 사당은 1919년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경부고속도로 안성휴게소 부근)로 옮겨졌다.
그러나 자손들은 태종 때 신원되었다. 정도전의 아들 진(津)은 1416년(태종 16) 복권돼 형조판서까지 지냈고 영(泳)의 손자 문형(文炯)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해 세조 때 우의정까지 지냈다. 진(津)의 아들 래(來)는 용인 현령을 지내다 폐서인(廢庶人)되자 평택으로 내려가 은거했다. 평택에는 그 자손들이 지금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정도전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족보에는 경기도 광주(廣州) 사리현(士里峴)에 있다고 했으나 김정호의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 과천현조에는 과천 동쪽 18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1989년 한양대 박물관 팀이 양재역 근처 외교안보연구원 뒤편 우면산(牛眠山) 기슭에서 조선 초기 무덤을 발굴했는데 몸통이 없고 머리만 있는 인골을 발견했다. 그러나 지석(誌石)이 없어 그것이 정도전의 무덤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후손들은 지금의 경기도 진위면 은산리에 가무덤을 써 놓았다.
[삼봉 정도전] 정도전의 발자취를 찾아서
글 임지은 월간중앙 기자 (ucla79@joongang.co.kr)
경복궁과 4대문, 서울도심의 구석구석
삼봉의 魂 깃들지 않은 곳 없어
조선의 실질적 설계자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그럼에도 삼봉은 조선 500년 동안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기껏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흥선대원군이 그의 업적을 기려 문헌공(文憲公)이라는 시호를 내렸을 뿐이다. 이방원(태종)에게 살해된 후 467년 만의 복권이었다. 그제서야 후손들은 문헌사라는 사당을 지을 수 있었다.
겨울 햇살이 눈 덮인 세상을 녹이던 아침,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자리한 그의 사당을 찾아 경부고속도로를 달렸다. 1시간 남짓 달렸을까. 안성 휴게소 조금 못 미쳐 오른쪽으로 작은 농촌마을, 은산리가 눈에 든다.
‘왕자의 난’ 때 삼봉의 아들 셋 중 유일하게 살아 남은 정 진(鄭津)의 아들 정 래(鄭來)의 후손인 봉화(奉化) 정씨(鄭氏) 용인공파 22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패하지 않았다면 그의 후손들의 집성촌은 그가 설계하고 꿈꾸었던 서울 어디쯤에 위치해 있지 않았을까?
비록 조선 역사에서 외면당했지만 그 500년의 씨앗을 잉태한 것이 삼봉의 30년 공업이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는 조선의 기본 이념을 비롯해 법·정치·경제·군사·문물 제도의 기초를 닦았고, 경복궁과 서울 도심 설계, 4대문 4소문과 동네 이름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니 말이다.
마을 앞 노인정에서 삼봉의 18대손 정종봉 씨가 취재진을 반긴다. 사당 관리를 맡은 그는 “미리 연락하고 오지 않으면 꽉 잠긴 솟을대문 너머로 기와 지붕만 만나고 갈 수밖에 없다”며 너스레를 떤다. 비탈진 골목길을 50m쯤 오르니 여느 사당과 비슷한 모습의 ‘문헌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끼익끽-.’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린 문을 통과하자 정면으로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선비로서도 으뜸이요, 공적에서도 으뜸’이라는 뜻이다. 삼봉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삼봉집’(三峰集) 목판본을 소장한 목판고 두 채만 감싼 모습이 단출하다. 마당에 발자국이 움푹움푹 마구잡이로 패 있는 것으로 보아 추운 겨울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어제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다녀갔어요. 또 얼마 전부터 도올 선생의 강의가 있고부터 찾는 사람들이 훨-씬 늘었어요. 엊그제는 도올 선생도 다녀갔고요. 허허….”
선조에 대한 폭발적 관심 때문인지 종봉 씨는 고무된 표정이다.
사당 안에 걸려 있는 삼봉의 영정에서 ‘왜 이제서야 왔느냐’는 표정이 읽힌다. 작고 처진 눈, 뭉툭한 콧망울, 턱선을 감싼 은빛 수염은 영락없이 ‘인자한 할아버지’다. 일찍이 한영우 서울대 교수는 “한 손에는 붓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든 영웅호걸형 선비로서 붓으로는 문명 개혁의 고전을 만들었고, 칼로는 썩은 왕조를 도려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단호하고 매서운 기운이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음은 우리나라 역사인물 초상화가 죄다 비슷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리라.
솟을대문 바로 옆으로는 ‘삼봉집’ 목판고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의 모태가 된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억불숭유의 이념을 제시한 ‘불씨잡변’(佛氏雜辯:19편) 등의 이론서와 시·수필 등이 담긴 ‘삼봉집’. 그의 생전에 처음 간행됐다 그후 계속 증보돼 정조 때(1791) 완벽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조선경국전)
‘역성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급진적 민본주의 사상으로 난세를 돌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연 삼봉의 이상과 자취가 그대로 담겨 있다. 현재 문헌사내 목판고에 있는 삼봉집 목판본은 이 때 만들어진 것으로, 14권 258판 중 236판이 소장돼 있다.
“구한말 어지러운 시기에 누군가에 의해 대구 용연사(龍淵寺)에 보관됐던 것을 조부께서 마차에 싣고 이곳으로 옮겨왔어요. 판각고가 지어지기 전에 마루 밑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목판들을 글쎄 동네 아이들이 뭔지도 모르고 가져다 썰매를 만들어 놀았어. 많이 잃어버렸지. 그 중 일부는 서울 인사동에서 찾았어요.”
봉화 정씨 종친회장이자 종손인 정병무 씨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목판본의 보존 상태가 좋지 못해 복원해야 하는데 복원비가 장당 400만원 정도여서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목판고는 벌레 하나 먹은 데 없이 깨끗하다. 사당 앞 공터에는 삼봉기념관 설립 준비가 한창이다. 10억여 원의 국비가 투입돼 오는 8월말 준공된다고 한다. 가족까지 몰살당한 삼봉의 유물이 얼마나 될지 걱정이 앞선다.
“벌써 관련 유물 116점을 확보했습니다. 국보급인 친필도 찾았어요. 나도 놀랐어요. 선조의 유물이 과연 존재할까 했는데 꽤 많더라고요. 북한 가학루·부벽루에는 시문이 걸려 있고 안동 영호루, 공주 금강루, 또 전라도 장성 백양사 쌍계루에 걸려 있는 교류기…. 전국 각지에 상당히 많아요.”
병무 씨의 포부만큼이나 짜임새 있는 전시관이 세워지기를 내심 기대해 본다.
눈 덮인 사당을 뒤로 하고 5분 거리 남짓 떨어진 곳, 삼봉의 종가를 찾았다. 병무 씨의 어머니가 사는 집이다. 아담한 양옥집으로,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잘 지은 한옥이었으나 1960년 누전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다 타 버렸다고 한다. 그러니 정도전의 종가라는 느낌은 전혀 없다. ‘3년 안에 종가답게 한번 지어볼 예정’이라며 정씨는 의욕을 보인다. 선조와 관련한 역사적 오류들을 바로잡고, 그를 기리기 위해 동분서주해 온 병무 씨는 ‘후손으로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잃어 버린 선조의 묘를 찾는 일’이라고 말을 이었다.
“1398년 ‘이방원의 난’ 때 선조께서 돌아가시고 개국공신 7인이 한꺼번에 죽었잖아요? 그 때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죽었는데 장남만 살아남았어요. 태조가 안변 석왕사라는 절에 피병을 갈 때 삼봉의 큰아들이 따라갔거든요. 그래서 목숨은 건졌지요. 전라도 수군으로 쫓겨갔다 태종(이방원) 7년 나주 목사가 됐어요.”
― 그러니까 이방원은 자기 손으로 죽인 삼봉의 자식을 목사로 앉힌 셈이네요?
“참 아이로니컬하죠? 그 아들이 삼봉의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한 끝에 목 부분만 찾았대요. 서울 서초동 우면산에 묘를 잘 썼는데 잃어버렸어요.”
병무 씨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봉화 정씨 문중의 수난사를 읊었다.
“나주 목사 하신 분의 증손자가 영의정을 지냈는데, 그 부인이 성종 임금의 옹주였어요. 그러니 연산군난에 싸그리 다 죽음을 당했지요. 그 때 우리 일가가 화천·양구·간성·울진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산 속으로 도망다녔어요. 그렇게 숨어 살다 보니 묘마저 잃어 버렸죠.”
병무 씨의 목소리가 자못 격앙된다. 현재 사당 근처에는 가묘가 있다. 1988년 우면산에서 발굴한 시신을 모신 묘로 삼봉의 시신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결정적 물증이 되는 지석과 묘표석을 도굴당해 아직 정식으로 묘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대신 종가 뒤로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1년에 다섯 번 제사지낸다고 한다. 제단은 산 가장 높은 곳에 움푹 팬 구릉 안에 내려앉아 있다. 누가 봐도 명당이라고 탐하는 자리라고 한다. 꿩까지 울어 대니 운 좋은 예감이 배가된다.
우지지는 종달새 소리와 무섭게 짖는 개소리를 뒤로 하고 경기도 양평 사나사(舍那寺)로 향했다. 양평읍을 지나 설악쪽 국도로 달리다 보면 오른편으로 사나사 초입인 옥천면 용천리가 나타난다.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10리쯤 들어가면 용문산을 등진 사나사를 만난다. 신라 경명왕 때 대경대사가 창건했고, 고려 공민왕 16년 보우선사(普愚禪師·1301~ 82)가 중수했다고 전하는 이 절에 삼봉이 지은 비문이 있다. 고려말 태고(太古) 보우선사의 석종비다.
삼봉은 고려 말엽에 이르러 사회를 어지럽게 만든 일부 승려들의 퇴폐적 행태를 지적하고 불교의 비현실적이고 모순된 교리를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성리학의 우월성을 논증한 ‘불씨잡변’을 저술해 조선을 유교입국(儒敎立國)으로 변환시키는 토대를 확립했다. 그리도 불교 말살을 외쳤던 그가 여말 명승의 비문을 썼다는 사실이 궁금함을 자아낸다.
태고 보우는 고려 말기의 승려로, 왕사로 16년, 국사로 12년간 봉직하면서 왕조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을 비판하며 개혁을 부르짖었다. 공민왕이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물었을 때 그는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일변하고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라’고 진언했다고 한다.
‘왕기(王氣)를 관찰하니 개성에 있지 않다. 남쪽 한양으로 옮겨 앞의 세 가지를 실행하면 자연히 교화는 천하에 빛나고 은혜는 만 중생에게 입혀지며 또한 36국이 조공하리라’고 했던 보우선사와 삼봉. 짐작하건대 그들은 ‘개혁’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통하는 부분이 많았으리라.
보우선사가 열반한 우왕 12년(1386) 세워진 탑비는 사나사(舍那寺) 경내 함씨각(咸氏閣)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자연암반으로 된 지대석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양 옆에 장방형 기둥이 비를 보강하고 있다. 그 위에는 밑이 둥근 반구형(半球形) 옥개석(屋蓋石)이 비신(碑身)을 보호하고 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를 조금 간략화시킨 모양이다. 마모되고 파손된 비문의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초입부에 새겨진 ‘…鄭道傳’이라는 글자만은 완연히 남아 삼봉의 흔적을 담고 있다. 용문산은 6 ·25 때 제6사단의 격전지. 중공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치렀던 곳이고 보면 유탄 자국도 그 때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단양팔경의 제7경인 도담삼봉. 정도전의 호 역시 삼봉이다. 단양 사람들은 정도전이 도담삼봉의 지명에서 따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믿는다. 푸른 강물 가운데 우뚝 선 기암괴석이 모두 남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있고, 가운데 봉우리가 가장 높다. 큰 봉우리 허리쯤에는 절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정자가 단아하게 서 있다. 삼봉은 이곳 중앙봉에 정자를 짓고 이따금 찾아와 풍월을 읊었다고 한다.
“나 저기 저 정자에서 쉬고 있을 테니 기생 좀 넉넉히 불러와 봐-.”
눈발 서리는 우중충한 아침, 단체 관광객들이 고요한 적막을 깨뜨린다. 세월이 변해 남녀가 평등한 시대가 왔다고 하지만, 이 남정네들의 정신은 조선 시대를 뱅뱅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선 땅에 유교 이념을 뿌리내리게 한 정도전, 그의 기운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를 기리기 위해 단양시는 삼봉의 동상을 도담삼봉에 세웠다. 길이 1.3m가 채 안 되는 왜소한 동상은 선명하지 않은 주홍빛을 풍기며 앉아 있다. 그것도 아주 어색하게. 동상을 보고 있자니 ‘SBS 맛집 방영’ ‘그곳에 가고 싶다 촬영 장소’ ‘국물 맛이 끝내줘요’ 등… 식당가에 빼곡하게 내걸린 현수막이 눈에 꽉 들어찬다. ‘그곳에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는 굳은 결심이 드는 순간이다. 도담삼봉에서 빠져나와 신단양을 에굽어 흐르는 남한강변을 따라가면 근린공원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는 이 지역 유림들이 세운 삼봉의 숭덕비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든다.
이렇게 단양에서는 정도전을 모시는 작업이 활발하다. 예상 밖으로 삼봉의 후손들은 이러한 일들을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기는 눈치다. 뒷얘기는 이렇다.
삼봉의 아버지 정운경이 과거를 보러 길을 떠나면서 단양을 지났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황급히 원두막으로 피했는데 어두컴컴한 원두막 안에 우씨 집안의 계집종이 자고 있었다. 어찌하다 보니 정운경은 계집종을 건드렸고, 그 처녀는 아들을 낳았다. 그렇게 길에서 얻었다 하여 ‘도전’(道傳)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정도전이 ‘상놈’의 자식이라니…. 정씨 집안에서는 펄쩍 뛸 일이다.
“삼봉의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인데….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요. 여자가 없어 그랬겠습니까. 고려 ‘해동명신록’에 나오는 5인 중 한 명이에요. 오죽했으면 호가 염의(廉義)겠어요? 불의와 절대 타협을 안 했어요.”
종손 병무 씨의 항변이다. 삼봉이 죽은 후 편찬된 ‘태조실록’에 전하는 이야기이니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어쨌거나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단양(丹陽) 우씨(禹氏)와 봉화 정씨, 두 집안 간의 갈등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삼봉의 자취를 따라 전국을 돌고 돌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삼봉의 혼이 가장 많이 깃들인 곳은 서울이다. 600년 전 한양이 도읍으로 첫 걸음마를 할 때 비록 작은 땅이라도 내 땅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토지공개념’ 정신에 따라 재상부터 평민까지 모든 한양 사람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 줬기 때문이다.
당시 한양의 도시계획을 지휘한 인물이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1394년 한양에 머무르며 궁성 지을 터를 정하고, 종묘·사직·궁궐·관청·시장·도로 등의 설계도를 만들었다. 또 경복궁과 새 궁궐 안에 있는 모든 부속 건물의 이름을 붙인 것도 정도전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현재는 서울 종로구청 정문 옆에 ‘정도전 집터’라고 쓰인 작은 비석과 한국통신에서 종로구청을 지나 공평동까지 이어지는 ‘삼봉길’만이 그의 자취를 남기고 있다. 600년간 ‘역적’으로 낙인찍혀 사료창고 속에 처박혀 있던 정도전의 진실이 밝혀진 지금도 우리는 그에게 너무 각박하다.
‘나라는 백성이 근본이고, 백성은 먹는 것이 하늘’이라는 철저한 민본 노선에 입각한 그의 정치는 그의 죽음과 함께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삼봉 정도전] 정도전의 개혁 사상
“백성 위하는 것이 바로 개혁”
류창규 남부대 교육행정대학원 교수
총재 중심 통치 체제와 토지 균등 재분배로 이상국가 건설 추구
조선 건국의 주역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사회를 유지하는 근본을 백성으로 보았다. 민본사상은 정도전이 추진한 개혁안의 근간이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의 기본 정책을 규정한 법전인 ‘조선경국전’과 정치 조직 연구 서적인 ‘경제문감’에서 백성이 국가의 근본임을 밝히고 있다.
유교의 통치 이념 중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정도전이 민본을 강조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민본주의가 주목받는 것은 백성들의 생활을 체험해 얻은 결과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정도전은 오랜 야인생활과 유배 기간에 백성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통치는 백성을 받드는 행위이며, 백성의 뜻을 얻는 것이 통치권의 정당성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정도전은 민본을 내세우면서 자신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은 민본에 의한 것이고, 이는 곧 하늘의 뜻임을 주장했다. 이 같은 정도전의 민본과 혁명의 논리는 우왕 대의 파행적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정도전의 통치체제론의 핵심은 군주와 신하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한 군신 관계 구도다. 그 가운데서도 재상(宰相)의 권한과 지위에 대한 설정은 정도전이 세운 개혁 구도와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정도전은 왕, 즉 군주는 천명(天命)의 대행자이지만, 재상은 국정 전반에 걸쳐 책임을 지는 통치의 최고 실권자로 규정했다. 따라서 재상은 천명을 받들고 백성을 위해 국정을 책임지는 입장이며, 그 자리에 합당한 인물이 군주에 의해 선택돼 임명됨으로써 민본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정도전은 ‘재상중심체제’를 주장하면서도 한 발 더 나아가 ‘총재중심체제’를 가장 이상적인 재상의 형태라고 보았다. 관료를 이끌어 가는 총재가 통치의 정점에서 국정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도전의 통치체제에 관한 개혁 방향은 총재 중심의 통치체제였다.
총재 중심의 통치체제론은 고려말 일부 재상에 의해 권력이 사유화되고 민심을 떠받들지 못한 사회에 대한 대안이었다. 백성을 위하고 관료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는 총재가 국정을 이끌어 감으로써 자신이 바라는 이상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성계를 정점으로 새로운 정치 구도를 설정한 것과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 자신이 재상으로서 관료 제도를 정비하고 군 지휘권을 통합해 일원화하고자 한 것 등은 바로 총재 중심의 통치체제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토지 제도 개편 통한 경제 개혁 추진
정도전은 경제 개혁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이성계 세력은 ‘위화도 회군’ 이후 정국을 장악하면서 토지제도 개편을 단행했다. 일반 백성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생계 유지였으며, 이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토지제도의 개편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말 경제는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파탄에 빠져 있었다. 관료들의 불법 사전(私田) 확대로 농민들은 많은 세금을 내야 했으며, 심지어 토지의 소유권마저 빼앗기기도 했다. 이에 정도전은 과전법을 도입해 경제 개혁에 나섰다. 과전법은 토지의 국유화(國有化)에서 출발한다. 세금을 누가 걷느냐에 따라 사전과 공전으로 구분했다.
공전은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의 토지로, 이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국가에 세금을 냈다. 사전을 경작하는 농민들은 개인이나 관아에 세금을 냈다. 과전법이 도입되기 전에는 병작반수제라고 하여 농민들이 토지 소유주에게 50%의 세금을 냈다. 그렇지만 과전법이 실시된 후에는 농민들의 세금 부담이 10%로 줄어들었다.
정도전은 과전법을 도입하면서 모든 토지를 몰수해 국가에 귀속시켜 공전(公田)을 만들고, 모든 백성들에게 인구수를 따져 토지를 분배해 주자고 주장했다. 이 같은 토지 개혁을 통해 국가의 수입도 늘리고 백성들도 과중한 세금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정도전의 토지제도에 대한 개혁 방안은 관료나 지주에게는 존립 기반을 뒤흔드는 것이었고, 일반 농민에게는 이상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정도전은 민본을 앞세운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도전의 토지 개혁은 이성계 지지 세력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과전법의 시행으로 불법적인 사전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정도전이 추구했던 토지 분배와는 거리가 있었다. 정도전은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들의 생계를 안정시키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자 했다. 세금 수취 개선, 민생 안정을 위한 각종 제도 등에는 정도전의 이러한 생각이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정도전은 새로운 사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도전은 무엇보다 일반 농민의 생활 안정에 바탕을 둔 사회 질서 확립을 제시했다. 농업을 강조하고 공업과 상업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나아가도록 노력했다.
특히 놀고 먹는 사람들을 간민(姦民)이라고 부르는 등 일하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도전은 백성의 근본이 되는 농민층이 확실하게 안정돼야 사회가 안정되고 질서가 바로선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선비(士)와 관리에 대해서도 엄격한 자질과 능력을 요구했다. 선비는 도덕과 학문을 갖춰야 하며 관리가 되어 직분에 맞는 교화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정도전이 추구한 개혁은 급진적인 면도 있었지만 구체적인 방안들은 백성들의 안정과 국가의 부강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도전의 개혁안은 조선 건국의 명분을 제공했으며, 조선 통치의 지표로 작용했다.
■ 도올 김용옥 선생이 본 정도전
세계 정치사에 내놓을 만한 혁명가이자 프로 정치인
책상 앞에 ‘삼봉집’을 펼쳐 놓고 있으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비록 중원(中原)의 문자를 빌리고 있다고는 하나 , 그것은 분명 공(孔)·맹(孟)의 담설이 아니요, 이 땅에서 살아 움직이고 스러져간 나의 뿌리의 생생한 숨결을 엿듣게 하는 조선의 언설이기 때문이다. 그 언설을 통해 우리는 이 땅 조선의 혁명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이룩되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삼봉집’은 ‘혁명의 책’(革命之書)이다. 어쩌면 삼봉은 우리 조선의 역사에서 세계 정치사에 치립(峙立)할 수 있는 인물로 내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혁명아(revolutionary)요, 프로페셔널 폴리티션(professional politician)일지도 모른다. 혁명이란 명(命)을 갈아치우는(革) 것이다.
정치를 이념과 권력의 끊임없는 교섭의 역사라고 한다면 삼봉은 ‘명’을 ‘혁’할 수 있는 이념의 설계를 완성했고, 그 설계를 구체적 현실로 실천할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좌절한 몽상가가 아니라 치열한 현실의 승부사였으며 역사의 승리자였다.
삼봉은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맹자의 귀민주의(貴民主義) 이념을 표방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가능성을 무한히 개방함으로써 민의 절대적 가치를 신봉했지만, 민의 주(主)됨을 보장하는 자치(自治)의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입헌주의라는 측면에서 삼봉은 매우 구체적으로 왕권을 제약하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확보했다. 단지 재상(宰相)을 선출하는 과정을 보다 개방적으로 제도화했더라면 아마도 그것은 당대의 세계사에서 가장 선진된 형태의 입헌군주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념적 확신이 없는 제도적 개혁은 반드시 실패한다. 삼봉은 결코 실패한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조선 왕조를 개창한 성공한 정치가요, 사상가였다. 레닌이 마르크시즘에 대한 확고한 자기류의 해석을 완성함으로써 볼셰비키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삼봉은 우선 주자학에 촉발받아 이념적 혁명의 틀을 완성함으로써 조선 왕조 개창이라는 눈부신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 도올 김용옥의 ‘삼봉 정도전의 건국 철학’ 에서 발췌
첫댓글 역사자료 감사합니다.새해복많이 받으십시요 익창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