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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외출
이 문 열
1
다소는 상쾌한 기분과 가벼운 몸으로 깨어나도 좋을 일요일의 늦잠이었지만, 형섭 씨는 몸도 마음도 그러하지 못한 채 눈을 떴다. 무슨 끔찍한 꿈이라도 꾼 것일까. 베갯잇이 함빡 젖어 있고, 또 그는 그대로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사지가 나른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자세한 내용은 통 떠오르질 않았다
바깥은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는 무거운 머리를 털어 버리려는 듯 길게 기지개를 켠 후,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그 창가의 전망을 일요일 아침의 느슨한 기분으로 음미하는 것은 그의 오래된 은밀한 도락(道樂)이었다.
그러나 커튼을 걷던 그는 묘하게 당황한 기분으로 손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디. 그를 맞은 것은 언제나처럼 낯익은 북악이 아니고 쇠창살이 쭈뼛쭈뼛 솟아오른 새 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예 해치웠군.”
그의 묘한 당황은 일종의 낙담으로, 그리고 이어 원망스러운 눈길로 변하여 넓지 않은 앞뜰을 일주(―週)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야 할 아내는 그곳에 없었다.
새집으로 옮겨 와서 두 번째 도둑이 들었을 때부터 아내는 담을 높이자고 그에게 성화를 부려 왔었다. 사실 외관상으로도 제법 멋을 부려 지은 집채에 비해 야트막한 블록 담은 ― 비록 그것이 그저 ‘모범적’이지만 그의 스무 해 가까운 공무원 생활과 요령 있는 림꾼으로 이름 붙은 아내가 마련할 수 있는 최대치였기는 하지만 ― 썩 어울리는 것이 못 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에서든 담을 높이자는 아내의 제안에 대해서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다지 집어 갈 값진 물건이 없다는 것이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채 허리에도 오지 않는 싸리 울타리로 담을 삼아 유년과 소년 시절을 보낸 그의 생리에 높고 삼엄한 담은 맞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래서 중년을 넘어서면 경제적인 이유로밖에 남편을 위협할 수없는 평범한 여자답게 아내가, “끼닛거리는 없어도 도둑이 집어 갈 물건은 있어요.” 하며 그를 윽박지르면 그는 어떤 재치 있는 도둑처럼 가볍게 그녀에게 응수하곤 했다.
“높은 담과 튼튼한 빗장이 우리를 유혹한다.”
이런 그를 어이없어하면서도 한동안 아내는 그럭저럭 참아 주었다.
새집을 들어 아직은 여유가 없는 가계부나, 벌어질 대공사의 번잡함이 그녀에게 마음에도 없는 인내를 강요하였던 셈이다.
그러나 세 번째로 도둑이 들자 아내는 서둘러 공사를 시작하고 말았다. 잃어버린 것은 그저 몇 벌 집기(什器)와 그의 거의 낡아 가는 평상복(乎常服) 정도였지만, 그것들이야말로 그녀의 영혼보다 더 소중한 것들인 만큼, 더 이상 그녀를 만류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 낮 동안은 완전히 집을 비워야 하는 그가 미처 느끼지 못한 이 며칠 사이에 담 증축은 완성되고 말았다.
그는 창턱에 걸터앉아 마치 하룻밤 새에 땅에서 솟아올라, 그래서 전연 새롭기만 하다는 느낌으로, 그 담을 찬찬히 살폈다. 과연 견고하고, 실용성 있어 뵈는 담이었다. 한 길은 훨씬 넘지 싶게 쌓고도 그 위에 날카로운 끝을 지닌 철책을 세우고 가시 철망까지 둘렀다.
그는 우선 감탄했다. 과연 이만하면 나는 새도 넘을 수 없으리라. 하물며 좀도둑쯤이야…….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점점 답답해 오고, 또 그것이 어떤 우울과도 흡사한 기분으로 변해가는 것은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이 탓일까. ― 그는 담배를 한 개비 뽑아 천천히 불을 붙였다.
그때 저편에서 아직 페인트도 채 마르지 않은 철문을 열고 서슬이 시퍼런 아내가 들어왔다. 그 뒤를 셋째 욱(旭)이 놈이 끌려오며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
“여보, 얘 좀 혼내 줘요.”
“도대체 무슨 일로 이 야단이오?”
그만의 은밀한 도락을 잃은 불만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되어 나왔다.
“글쎄, 아유, 이 옷 좀 봐요. 아침부터 되잖은 애들과 어울려 이 꼴이라니까요.”
“난 또 뭐라구 좀 가만 두구료. 왜 애들 노는 데까지 참견이오? 애들은 원래가 그래야 탈 없이 잘 크는 법이오.”
“저런 답답한 양반, 모르면 차라리 국으로 가만있어요. 그래 당신은 애가 대폿집 과부의 아들이나 야채 장수의 딸들과 어울려 진흙탕을 뒹굴며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떠들어 대도 좋다는 거예요?”
“여보,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는 법이 아니오. 대ᅟᅩᆺㅍ집 과부건, 야채장수건 그게 어디 사람 탓이오? 애들을 그런 식으로 길러서는 못 써요.”
무슨 끔찍한 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아내의 표정에 막연히 우울하던 형섭 씨의 기분은 구체적인 불쾌함으로 변하여 그를 정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내는 아랑곳없이 계속 또 다른 위협으로 그의 대답을 궁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럼 당신은 그러다가 유괴범이 애를 데려가서 돈을 내라고 협박하거나 소매치기, 앵벌이를 시켜도 좋단 말예요?”
형섭 씨는 문득 대답하기 귀찮아졌다. 아침부터 아내와의 실속 없는 말다툼으로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싫어 싫어, 그래도 재미있는걸…….”
욱이란 놈은 그런 아버지에게 연신 구원을 청하는 눈길을 보내며 앙탈을 계속했다.
“당신 정말…… 애를 좀 호되게 야단이라도 치질 않고 ― 안 되겠어.”
아내는 마침내 그의 조력을 단념한 듯 매질이라도 할 작정으로 욱이란 놈을 부엌으로 끌고 갔다.
“공부라도 좀 하면 좋지 않니? 그림책도 동화책도 사 주지 않던? 거리 귀신이 불러내기라도 하니?”
아내가 연방 욱이 놈을 꾸짖으며 사라져 간 부엌에서 이제는 울먹이는 것으로 기세가 누그러진 욱이 놈의, 그러나 끈질긴 항의는 계속 들렸다.
“숙제도 엊저녁에 다했고, 동화책도, 그림책도 벌써 몇 번이나 읽었는걸…….”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먼 미래에서 들려오는 어떤 것이 있어 그의 가슴을 찡 하게 하였다.
“……내겐 유년이 없어. 그것의 정수인 추억, 그 자유분방함과 홀랑 벗은 친구도…… 대신 아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거짓말 모음이나 부정확한 임화(臨畵) 나부랭이가 널려 있는 공부방과 흔해 빠진 화초분으로 걸음마저 조심해 걷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좁은 뜰에 감금된 기억, 그리고 항상 옷에 싸여 있어 햇볕이 모자라는 소위 교양 있는 가정의, 부모의 취미에만 충실한 박제(剝製) 친구가 있을 뿐이야. 자라서 만나 봐야 별반 나눌 얘기도 없고 그래서 어색한 눈웃음으로 지나쳐 갈 정도의. 모두 당신들의 알량한 애정과 배려 덕택이야…….”
그러자 갑자기 잊었던 간밤의 꿈이 어렴풋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욱이 놈이었다. 어디인가 거대한 감옥 같은 데 갇혀 ― 애절하게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 욱이를 구하려는 애타는 노력이 지난밤 그의 베갯잇을 땀으로 적시고, 이 아침의 그를 나른하게 만든 듯했다.
늦은 조반 후에 형섭 씨는 집을 나섰다. 대개 그렇게 나서는 일요일의 볕 밝은 아침은 유달리 화창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러나 좌석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그에게는 그렇지 못하였다. 기원(棋院)으로 나가서 하루를 보낼 참이었던 그는 다시 아내의 성화에 부대끼어 마음 내키지 않는 외출을 하게 된 탓이었다.
컬러텔레비전 구입(購入) 때문이었다. 썰렁한 아침 밥상머리에서 아내가 처음 그 일을 들고 나왔을 때 형섭 씨는 대뜸 단호한 반대를 표명했었다. 텔레비전에 관한 한 ― 어쩌다 다방 같은 데서 잠깐씩 보게 된 것이지만 ― 삼류 코미디언의 저속한 익살이나, 눈에 거슬리는 복장으로도 부족하여 천한 몸짓까지 곁들이는 가수들, 그리고 그들의 싫증나는 왜색조(倭色調)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 재즈 속의 기성(奇聲)과 잡다한 선전 광고밖에 기억할 수 없는 그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흑백(黑白)을 사 둔 것도 두고두고 후회해 온 터인데 한술 더 떠 컬러텔레비전이라니. 아직 방영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요사스러운 색(色)이 부릴 작태를 눈앞에 보는 듯하였다.
이에 대해서 아내는 기묘한 반론(反論)으로 나왔다. 현대란 시대 자체가 전시 효과의 시대이며, 특히 그런 이 시대, 이 시점에 있어서 당분간 컬러텔레비전 안테나란 모든 면에서의 상류를 뜻하게 되리라는 것, 동창들의 방문을 받을 때에도 그렇지만, 식모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도 컬러텔레비전은 꼭 필요하게 되리라는 것, 등등을 늘어놓아 마침내는 형섭 씨를 귀찮게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마지막으로 형섭 씨는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도리어 아내를 역습해 보았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아내의 간지(奸智) 는 준비되어 있었다. 종로에서 크게 텔레비전 대리점을 내고 있는 그의 동향인을 상기시키며, 월부로 하되 횟수를 통상의 두세 배로 늘리면 크게 부담되지 않으리라고 우겼다
형섭 씨는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결코 꼴사나울 만큼 내주장(內主張)에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나 생활에 관한 한 항상 아내가 옳았다는 것은 그의 스무 해 결혼 생활에서 종종 체험한 바였다.
발길은 무거웠다. 그리고 주택가를 지나는 동안에는 갖가지 형태의 담들이 그날따라 유난히도 형섭 씨의 주의를 끌고 또 그런 그의 마음에 원인 모를 우울을 더해 갔다. 봉건 영주의 성채(城砦)를 연상케 하는 오만하리만큼 높고 당당한 것, 침입자에 대한 적의를 미학적으로 나타내려는 듯 타일을 박고 쇠창살에 산뜻한 페인트까지 칠해 놓은 것, 스스로의 악의를 변명하려는 듯, 그래서 소심한 경계만을 표현하고 있다는 듯 낮은 담에 어린애 이빨만큼이나 듬성듬성 깨진 병 조각을 꽂아 놓은 것 등 ― 인간들은 자기의 불신과 적의를 나타내는 데도 참으로 다양한 방법을 고안하고 있었다. 특히 방금도 성가(聖歌)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교회당의 높은 담은, 언젠가 속리산 법주사의 대불(大佛) 에서 피뢰침을 발견했을 때처럼 그를 가벼운 곤혹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게 벗어나 일단 차에 오르자 잔뜩 흐린 형섭씨의 마음은 다시 새로운 방향에서 불어오는 미풍으로 점차 개기시작했다. 즉 컬러텔레비전 건(件)만 제하면 지금 자기는 실로 여러 해 만에 한때 자기의 가장 가까웠던 옛 친구를 찾아간다는 것, 그는 동향인인 동시에 소학교와 중학교 두 곳에서 동창의 인연으로 만났으며, 또 따로 사적으로는 형섭 씨가 그 친구의 모든 것에 정통한 것처럼, 그 친구도 형섭 씨의 모든 것에 정통하여 一 심지어는 형섭 씨의 엉덩이에 난 검은 사마귀나, 지금은 긴 머리칼에 감추어진 커다란 흉터까지 알고 있을 정도인, 싸릿담을 격한 앞뒷집 막내 사이였다는 점 등이 이미 사십 줄에 접어든 그 나이답지 않게 그를 흥분시키고 들큰한 기대에 젖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버스가 시내 중심부로 접어들면서부터 형섭 씨는 엉뚱한 일정까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텔레비전 문제는 대충으로 하고, 오늘은 녀석과 가까운 교외라도 나가 허심히 옛얘기나 나누며 술이나 한잔 마셔야지. 그리고…… 아마도 아침나절 욱이 놈에게 느꼈던 어떤 감정이 그의 의식 내부에서 은밀히 작용하고 있는 탓이었지만, 그는 그런 자기의 계획이 얼마나 갑작스럽고 또 자칫 엉뚱하기까지 한 감정의 비약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형섭 씨의 기우(杞憂)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마침 점포에 나와 있었다. 요즘 같은 불황 중에서도 그 친구는 꽤 경기가 있어 보였다. 두셋 되는 판매원들이 모두 고객들에게 잡혀 있었고 그 친구도 형섭 씨가 들어가던 순간에 한 고객과 막 거래를 끝낸 참이었다.
“여, 동가리(토막) 오랜만일세.”
그는 형섭 씨를 발견한 그 자리에서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인사부터 먼저 보내왔다. 동가리란 어릴 때 키가 좀 작았던 형섭 씨의 별명이었다. 그런 친구에 대해 형섭 씨도 이상한 감격을 느끼며 대답했다.
“싹불이, 자네도 그간 잘 있었나?”
그러나 형섭 씨의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게 높고 떨리는 것이었다. 가까이 있던 판매원과 고객이 일시에 그런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잘도 기억 해 주는군. 하여튼 반가워, 오랜만일세.”
다시 날아온 친구의 목소리와 이어 다가온 두툼한 손길이 하마터면 어색할 뻔한 형섭 씨를 구해 주었다.
“그래 제수씨나 조카 놈들은 모두 잘 있는가?”
그 친구는 악수가 끝난 손을 들어 자연스럽게 형섭 씨의 어깨를 쳤다. 다시 이상한 감격이 형섭 씨의 목소리에 무리한 대사를 강요했다.
“예끼, 이 불출한 사람 여전 망발(妄發)은 그대로군. 자네 형수는 물론 조카님들도 건재하시다네. 나야말로 묻겠지만, 그래 제수씨 산란율 여전하고, 조카 놈들 성장률도 양호한가?”
이번에는 형섭 씨 자신에게도 어색했다. 그러나 친구는 개의치 않고 형섭 씨를 가까운 고객용 소파로 안내했다.
“나이를 먹으니 자꾸 우리 사이가 소원해지네. 그런데 자네 오늘은 웬일인가?”
의례적인 몇 마디 얘기가 더 계속된 후에 이윽고 그 친구는 중년다운 지긋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일견 평범하고 알맞게 가라앉은 것이였지만 은밀히 무언가 탐색하는 듯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형섭 씨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기의 계획을 털어놓게 만들어 준 친구의 화술에만 감사했다.
“마침 일요일이고 하기에 자네와 옛얘기나 하며 술이나 한잔 나눌까 해서…….”
여기까지는 좋았다. 자기의 생각에만 취해 있는 형섭 씨는 일순 친구의 얼굴을 스쳐 간 가벼운 실망의 표정을 놓쳐 버린 채 여전히 그의 호의적인 웃음만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허엇 그 좋지, 그리고 또?”
“그다음엔 어디 교외선이라도 타고 가까운 곳으로 가세. 초가집도 볼 수 있고 냇물도 모래사장도 있는 그런 곳이라면 더 좋지.”
“거긴 또 왜? 흠, 그러나 좋지. 가서는?”
친구의 웃음은 이제 얼떨떨한 기분과 합쳐서 묘한 것으로 변해있었다.
“목욕이라도 하고 ― 그리고 나는 자네의 싹불알을 잡아당기겠어. 씨름도 해야지, 자네를 모래사장에 메다꽂겠어…….”
그제야 형섭 씨도 친구의 표정이 변한 것을 알아채고 말을 멈추었다. 처음 얼떨떨한 기분은 이내 구체적인 의아와 당혹으로 변해서, 이 평범한 상인의 얼굴을 아주 망쳐 놓았던 까닭이다.
“자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나?”
“아니, 나는 이렇게 건강하다네. 그저…… 그런데 자네 ― 그리고 그뿐인가?”
그 친구는 마지막 탐색을 시도하고 있지만 사실은 끝나 있었다. 그의 상혼은 크게 심기가 상해 있었다.
“또 있겠지. 만약…… 자네가 간다면…….”
형섭 씨는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오랫동안 섬세한 인간의 감정적인 일에 무관하게 살아온 그 친구는 망연히 그런 형섭 씨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는 가까이 있는 판매원에게 마치 잊고 있었던 대단한 일처럼, 무뚝뚝한 지시를 내렸다.
“그 손님은 잠시 기다리게 하고, 내 자리에 가서 담배나 좀 가져와.”
그러자 형섭 씨는 마지막 노력으로 실패한 대화를 만회하려고 화제를 바꾸었다.
“저런 자네, 그런 사소한 일로 고객을 기다리게 하면 되나?”
“염려 말게.”
노련한 상인은 심드렁히, 그러나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종전의 복잡했던 그의 표정은 그 방면에 대한 자신으로, 어느새 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만약에 내 10년 경력이 헛되지 않다면, 저 사람은.”
그는 눈짓으로 점포를 나서는 그 고객의 성난 듯한 뒷모습을 가리켰다.
“너댓 해 뒤쯤에나 다시 오게 되거나 아니면 다시 오지 않을 사람일세. 틀림없어. 적어도 그런 분별없이는 자기 자산이라고는 한 푼도 없이 출발한 내가 오늘에 이르지는 못했을 거네. 저 사람은 컬러텔레비전을 제일착으로 갖기에는 너무 지적이면서도 가난해 보여. 체중부터 평균치 미달이었지…….”
잠시 막연한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그와 형섭 씨 사이에는 투명하긴 하지만 무언가 깨고 들 수 없는 막이 형성되어 갔다.
“그런데 사실은 아내가 말이야, 우리도 칼라텔레비전을 하나 들이자고 성화거든.”
마침내 사태는 형섭 씨로 하여금 별로 마음에도 없는 그 일을 꺼내게 만들었다. 한번 형성된 막은 점점 굳어가 ―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가장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던 그 친구가 순간순간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멀어져 가는 것이 안타깝게 여겨진 탓이었다.
그러나 그 말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형섭 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서의 그 사람 좋아 뵈는 웃음이 다시 친구의 얼굴에 만발하였다.
“예끼, 이 사람. 그런 일을 가지고 여지껏 능청을 떨었군. 나는 또 자네가 어찌 됐나 했지. 그래, 몇 인치 정도를 원하던가?”
“그런데 조건이 있어. 자네네도 월부 있지?”
“암, 있다마다. 세상이 온통 월부로 돌아가는 판에 우리라고 그 유용한 제도를 안 둘 리가 있나? 참 인간들은 편리한 걸 생각해 냈지. 그래, 부인은 몇 인치를 원하던가?”
“그 횟수를 통상의 두세 배로 늘릴 수 있나? 계약금도 시원찮을 거야.”
거기서 다시 친구의 사람 좋아 뵈는 웃음은 약간 시들어졌다.
“나야 뭐, 그저 대리점에 지나지 않지만 ㅡ 한번 해 보지. 그래, 도대체 몇 인치를 원하던가?”
그 친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몇 인치짜리인가였다. 그다음이 가격 문제였고 그다음이 지불 관계였으며, 그렇게 상가의 정연한 순서대로 상당한 이익이 줄어든 상인과 살 마음이 별로 없는 고객 사이의 불만스러운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
나올 때 친구는 다시 처음처럼 허물없이 되어 형섭 씨의 어깨를 쳤다.
“우리 좀 자주 만나세. 자꾸 멀어지는 것 같아 서글퍼지네.”
짐짓 숙연해진 데마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형섭 씨야말로 크게 심기가 상해 있었다. 친구의 그 말도 대금을 자주 치러 달라는 독촉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응, 그러지.”
쉬워 대답이었지, 내심으로는 가능하면 그 친구를 자주 만나지 않으리란 작정이었다.
옛 친구와 헤어진 형섭 씨는 다시 처음 아내에게 밀려 집을 나설 때와 같은 우울에 빠졌다. 조금 전 그 친구의 점포에서 느낀 막연한 불쾌감이 그대로 착잡히 가라앉은 우울이었다.
거리는 잡다한 사람들로 넘쳐흘렀다. 그는 그들에 떼밀리며 한동안 집 없는 사람처럼 걸었다. 어디로 갈까. 어느새 그의 집은 그대로 돌아가기는 정녕 싫은 곳이 되어 있었다. 대신 그 친구를 목표로 세웠던 그러나 턱 없이 망쳐져 버린 마음속의 일정만이 고집스레 그를 사로잡고 있을 뿐이었다.
돌연스럽기는 하지만, 그런 형섭 씨의 감정 상태는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일종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젊은 날의 이상들이 하나씩 둘씩 사소한 일상 속으로 사라져 마침내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게 되었을 때부터 그는 그것들과 맞바꾸어진 자신의 조그마한 세계에 칩거하기 시작했다. 어떤 정부 기관의 중요하지 않은 계장 자리, 그곳에 비치된 책상이나 서류철처럼 그저 당연하기만 한 동료들과 부하 직원들, 그들과의 거의 수식어가 필요 없는 대화와 업무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 인간관계,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밉지도 곱지도 않은 아내와 어느새 셋이나 되는 아이들, 10년 넘게 공들여서야 마련한 대지 마흔 평 남짓의 집 한 채와 이제 겨우 급할 때면 택시 정도는 마음 놓고 탈 수 있는 생활. 그래도 아내는 좀 비싼 것을 사들이려면 여전히 월부를 이용해야 하고…… 이것이 그의 조그만 세계였다.
어쩌다 생기는 공휴일도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무슨 정성에서인지 아내가 기를 쓰고 사들이는, 그러나 하루만 물을 주지 않아도 이내 시들어 버리는 값싼 화초분을 가꾸거나, 미처 읽지 못한 일주일치 신문을 뒤적이거나 점심을 집에서 먹기에 편리할 정도의 가까운 기원에서 이제는 더 늘지도 않는 바둑으로 소일하거나 기껏해야 1년에 몇 번 정도인 영화 구경과 이따금씩 나서 보는 낚시질이 있지만, 그 어느 때도 양편에 갈라선 아내와 아이들로 하여 그는 여전히 그 조그만 세계의 한가운데에 있을 뿐이었다.
지금 형섭 씨에게는 그런 세계가 갑자기 왜소하고 싫증나는 것으로 느껴졌다. 거기에 대한 자신의 집착마저 어리석은 몰두로 여겨졌다. 그 얼마나 끔찍한 불문(不間)과 타성이 나를 사로잡아 왔던가. 그는 문득 개탄하고 싶은 마음마저 일었다. 대신 그것들이 자기를 사로잡기 전의 자유롭고 아름답던 날들이 불현듯 그리운 것으로 떠올랐다.
그날의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그와 한잔 술을 마시고 싶다. 가능하면 통음(痛飮)에 젖을 일이다. 그리고 그와 허심하게 옛얘기를 나누고 싶다. 이제 슬프지도 그립지도 않은 지난 사랑이나 허망히 사라져 버린 젊은 날의 꿈 그 어느 날의 바닷가에서 그렇게 감탄하며 바라보았던 장려한 낙일(落曰)의 기억도 좋다. 무엇이든 자유롭고 아름답던 그날에 속한 것이면, 적어도 이 왜소한 일상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일찍이 소중하게 지녔던 모든 것을 잃고, 평범한 생의 한가운데서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는 중년의 고독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확실히 이상한 날이었다. 어떤 숙명과도 흡사한 힘이 그런 형섭 씨의 희망을 가는 곳마다 가로막고 있었다. 여느 사람도 우울에 빠지기 쉬운 일요일의 황혼이 왔을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혼자서 낯선 골목을 터덜거리는 신세였다. 낮 동안의 헛수고에 지친 몸과 이상한 종류의 외로움으로 그는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세 곳 옛 친구의 집을 들렀다가 헛되이 돌아오는 길이었다.
첫 번째는 그가 한 가난한 이상주의자 시절에 만난 다른 또 하나의 이상주의자로서, 지금은 어떤 대학에서 서양사를 강의하고 있는 친구였다. 그러나 형섭 씨는 도서관의 장서 냄새가 나는 그 친구의 서재에서 솔직한 축출을 당하고 말았다.
“미안해, 나는 몹시 바쁘다네. 적어도 모레까지는 이걸 출판사에 넘겨야 돼…….”
색인표를 만들고 있는 두 여학생 사이에서 자기 저서의 마지막 교정에 몰두해 있던 부교수님은 그렇게 말했다. 사면 벽을 장식하고 있는 두툼한 전문 서적과 어지럽게 쌓여 있는 각종의 원고 더미들마저도 냉담과 적의로 형섭 씨의 침입을 거부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두 번째는 더 지독했다.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누른 후에야 인터폰을 통해 들려온 것은 주인의 부재를 알리는 가정부 소녀의 쌀쌀한 목소리뿐이었다.
그래서, 반드시 천박한 시기나 선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는, 그저 씁쓸한 기분으로 그 동네를 벗어나던 형섭 씨는 우연히도 그곳 버스 정류장에서 세 번째와 만나게 되었다. 반갑지 않을 친구도 아니었다. 특별히 강렬한 추억은 없지만, 고등학교와 군대에 걸친 친구로 최근까지도 안부 전화 정도는 주고받던 사이였다. 두 아이와 부인을 동반하고 어디 유원지라도 다녀오는 모양이었는데, 그 친구는 대뜸 형섭 씨를 자기 집으로 끌었다. 찾아라도 갈 판에 청해 주니 더욱 반가웠다.
하지만 약간 술기운이 있는 그 친구에게 끌리어 평범한 중등 교사의 전셋집으로 들어간 형섭 씨는 오 분도 채 못 돼 다시 한 번 자신의 부주의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만나기 전의 그들은 얼마나 유쾌한 웃음으로 함께 보낸 하루의 기억을 나누고 있었던가. 두 아이를 가운데 놓고 갈라선 부부는 얼마나 어울리는 것이었으며, 거기에 붙어 서게 된 자신의 모습은 얼마나 어색했던가. 그리고 피곤한 나들이에서 돌아온 주부에게 조촐하고 단란하기 만한 저녁상으로는 대접할 수 없는 남편의 옛 친구란 얼마나 귀찮은 존재인가 ― 그 모든 것에 형섭 씨는 부주의했다.
응보는 곧 왔다. 턱없이 호인이기만 한 그 친구가 굉장한 저녁상에 곁들여 맥주까지를 주문하자 처음부터 달갑잖은 표정이던 그의 아내는 명백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비록 우회적 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바로 침입자에게 보내는 완강한 적의였다. 그리고 늦게서야 그런 아내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건성으로 재촉만을 되풀이하는 그 친구도 이미 찾던 사람은 아니었다. 형섭 씨는 서둘러 일어났다. 교묘한 변명으로 그 친구의 곤란한 입장을 해결해 준 것은 그래도 한줌 남은 형섭 씨의 우정이었다.
형섭 씨는 눈에 띄는 대로 부근의 허술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원인 모를 허탈감과 슬픔이 그를 녹초로 만들어 이제는 몸과 마음 모두 한 발짝도 더 내디딜 상태가 못 되었다.
빈속으로 마시는 술은 쉽게 올랐다. 형섭 씨는 그 쓸쓸한 방문이 계속되는 동안 점심마저 거른 채였다.
술집 한편에는 그 말고도 한패의 젊은 술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휴가 나온 사병으로 보이는 젊은이 하나와 대학생이나 재수생으로 여겨지는 젊은이 셋이었다. 무슨 액기를 하고 있는지 하나는 가끔씩 탁자를 쾅쾅 쳐 댔고, 하나는 줄곧 울상이었다. 얘기를 하고 있는 쪽도 몹시 격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목소리는 높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형섭 씨의 눈에는 무엇인가 흥겨운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떠들고 있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좋은 시절 유쾌한 젊음 ― 형섭 씨는 문득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졌다. 쉽게 풀려 오는 몸과는 달리 술기운으로 과장된 그의 감정이 그들에게 엉뚱한 기대를 걸게 만든 것이었다. 저 젊은이들이라면 우울한 이 하루를 보상해 줄지도 모른다. 따뜻한 영혼의 교류와 함께 잃어버린 과거에로의 통로를 발견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형섭 씨가 그들과의 접근을 시도하자마자 그런 기대는 터무니없는 오산이었음이 드러났다. 모처럼의 용기를 내어 그들의 자리에 끼어들었을 때 갑자기 중단되던 대화와 어색한 침묵, 이미 거슴츠레해진 눈가에 새롭게 살아나던 불신과 적의. 그것들은 그날의 어떤 경우보다 더 단단한 막으로 그의 틈입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제야 자기 나름의 생각에서 깨어난 형섭 씨는 묘한 당황으로 술 한 순배가 돌기 바쁘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것이었다. 형섭 씨는 문득 깨달았다. 그들의 배후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그날의 여러 친구들에게서도 막연히 느낀 바 있는, 형체는 없지만 명백한 담이었다. 사업, 학문, 소시민적 생활의 기뽐, 또 무엇, 무엇…….
거기서 문득 형섭 씨는 자신의 담을 생각해 보았다. 초라하였지만 그에게도 있었다. 그 하루 그가 그렇게도 열렬히 벗어나 보고자 했던 자신의 일상이었다. 결국 인간들은 모두가 담이라는 각자의 껍데기를 지닌 한 마리의 달팽이에 불과하였다……. 그 달팽이가 자웅동체라는 중학교 생물 시간의 지식이 문득 어떤 회화적인 상징성을 띤 채 떠올랐다. 그때 그런 그의 귀에 젊은이들이 나지막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치 뭐야?”
“좀 이상한데…….”
그는 이제 현저히 낮아진 목소리로 얘기를 주고받는 그들을 살펴보았다. 좀 전의 선망 대신 그들도 역시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으리라는 위안이 자신을 향한 그 불쾌한 추측의 말을 쉽사리 잊게 해 주었다. 아직은 우연한 의지의 일치만으로도 엷은 공통의 껍질 안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언제든 때가 오면 너희들도 제각기의 딱딱한 껍질 속으로 머리를 움츠리고 들어앉게 되리라.
어느새 두 병 가까운 소주가 비고 시간은 아흡 시에 가까웠다. 집 나온 달팽이는 돌아가야 할 때였다.
몸은 형편없이 취해 있었다. 빈속으로 마신 탓이겠지만, 넓고 바른 아스팔트 길이 고향 논둑길처럼 뵈는가 하면, 택시를 잡는 동안도 길바닥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이나 오르락내리락했다. 정신 상태는 그보다 훨씬 더했다.
“당신 집에도 담이 있소?”
그것은 택시에 오른 형섭 씨가 행선지 다음으로 운전사를 향해 꺼낸 말이었다.
“담이야 훌륭하죠. 비록 셋방이지만.”
취한 손님에게 익숙한 듯 젊은 운전사는 가볍게 받았다. 그러나 그게 탈이었다. 그 무심한 응수가 그만 형섭 씨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한 갈래의 악의를 자극해 버린 것이었다.
하루 종일 차기를 거부한 인간들에 대해 그때껏 축적돼 온 악의였다.
“ㅎᅟᅮᆯ륭하다고? 그럼 높고 튼튼하고 ㅡ 거기다가 철책을 얹고, 가시 철망까지 두르고 ㅡ 또 날카로운 유리까지 박아 둔 거겠군. 그렇소?”
“네, 대개 그 비슷한 것이죠.”
운전사는 여전히 가볍게 받아넘기며 앞쪽의 신호등에만 정신을 쓰고 있었다.
“그래, 그게 훌륭하다고? 도대체 당신은 그 담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소? 내 참, 한심해서…… 그 담이란 것은 ㅡ 그 담이란 말이요, 이봐요…….”
마침내 형셥 씨의 악의는 엉뚱한 상대를 향헤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그 운전사는 그날 아침 집을 나온 후로 처음 만나게 된 호젓한 말 상대란 점에서 그의 얘기는 훨씬 더 열심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오래는 못 갈 운명이었다. 실수를 재빨리 알아차린 운전사가 짐짓 거세게 그를 나무랐다.
“손님, 제발 입 좀 다물지 못하겠어요? 나는 방금 신호 위반에 걸릴 뻔했단 딸이오. 정 그러시려면 내리쇼.”
그래도 그 운전사는 일진이 좋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형섭 씨의 새로운 희생이 정말 우연히도 합승해 왔기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에 술꾼으로 명성을 드날리던 독창이었다. 마지막 본 것도 10년이 가까웠지만 특징 있는 얼굴 때문에 형편없이 취한 눈에도 단박 알아볼 수 있었다.
“야, 이 촛병아.”
형섭 씨는 언뜻 기억나는 대로 학교 시절의 별명을 불렀다. 어지간히 취해 있는 것 같은 상대도 대뜸 그를 알아보았다.
“윽, 딸깍발이군, 오랜만이야.”
“너도 어지간히 악운이 드센 놈이구나. 아직도 마시고 있다니…… 나는 지금쯤 네놈이 위가 벌집처럼 되어 지옥에나 처박힌 줄 알았지.”
사실 학생 시절에는 그들의 별명이 보여 주고 있듯이 둘 사이는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는 거의 무례에 가까운 형섭 씨의 그런 말에 개의하지 않았다. 형섭 씨는 계속했다.
“그래, 넌 뭐야?”
“나? 아, 그저 건달이지.”
“건달이라고?”
“그렇다니까. 사십이 되도록 지긋한 직장 하나 없고, 처자도 없는…….”
“그것 좋군, 좋아. 그런데 네놈두 담이 있어?”
“담? 그러구 보니 그것도 없군. 제집도 지니지 못한 주제에 담인들 있을라구”
“이 기사 양반은 셋집이라도 담은 훌륭하다고 자랑했는데?”
“하여튼 담은 없어. 나 역시 셋집이지만.”
“정말이야?”
“그야 와 보면 알 거 아냐? 헌데 왜 그러지?”
“정말 네 집 담은 없는 거다.”
“틀림없다니깐…….”
“좋아, 그럼 오늘 밤은 네놈 집에서 한잔 더 걸치기로 결정했다. 어때?”
취한 탓이겠지만, 형섭 씨는 의외의 행운에 기뻐하는 어린애처럼 앞뒤 없이 결정했다. 그는 이제야말로 그의 낭비된 하루가 보상받게 되리라는 기대에 빠졌다. 다행히도 상대방은 그런 형섭 씨의 독단적인 결정을 별로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자기의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 형섭 씨가 느닷없이 그의 시들어 가는 볼에 입술을 갖다 댔을 때도 동창은 그저 호탕한 웃음으로 그런 형섭 씨의 진실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얼마 후에 택시는 형섭 씨의 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새 아파트 앞에 멈추었다.
“팔리지 않는 글쟁이의 셋집이야. 어때? 담이 있는가 잘 살펴보게.”
현관을 들어서면서 동창이 다시 한 번 호탕하게 웃었다. 형섭 씨도 만족하게 웃었다.
그러나 대개 그러하듯 세상일이란 한번 비뚤어지면 그대로 끝장올 보기 마련이어서 그날의 형섭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은 스스로를 팔리지 않는 글쟁이라고 낮추어 말했지만, 개성 있는 시와 날카로운 비평을 겸하고 있는 그 동창은 그런대로 문단의 일각을 차지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그에게도 사사(師事) 혹은 후배란 이름으로 드나드는 젊은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날따라 그들 중 두 명이 형섭 씨와 전후하여 그 동창을 방문해 왔다.
그들이 지니고 온 마른안주나 진짜 양주병은 고마운 것이었다. 그 방문 자체도 우선은 별 상관이 없었다. 다만 그 뒤가 나빴다. 한 차례 술이 돈 후 형섭 씨가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 어느새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시작하여 결국은 그의 하루를 망쳐 놓고 말았다 소위 문학적인 토론이었다.
“이 몇 해 시를 공부해 오는 사이에 저는 이상한 종류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차마 끔찍한 소리지만, 우리들 종족의 몰락이 막연한 조짐으로서가 아니라 자명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그것입니다. 더욱 분명히 말하면 우리들은 언어의 바벨탑을 쌓아 온 것이며, 이제 너무 높게 올라오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현대 시단의 여러 흐름은 이제 단순한 다양성을 넘어 방언화(方言化)해 가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과 주위의 극소수에만 통하는 상형문자의 창도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저 옛 바벨탑 말기의 징후지요. 본시 언어는 만인의 것이었고 우리는 그 토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발돋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축탑(築塔)은 순조로워 지난 세기 말까지만 해도 다소의 방언은 생겼지만 우리들의 작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금세기에 이르러 갑작스러운 언어의 분화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상형문자가 무책임하게 창도되고 그것의 난해성에 기인된 혼란은 점차 격심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우리들의 발전과 번성의 표지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명백한 몰락의 징후에 불과합니다. 이제 문제는 시가 단순히 범속한 대중과 작별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 우리들 상호 간의 언어조차 단절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동일한 시가 이쪽 그룹에선 놀랄 만큼 비범한 것으로 손꼽히는데 저쪽 그룹에게는 전혀 논의의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단정되는 것이 그 한 예입니다. 만약 이대로 간다면 이윽고 우리들은 스스로가 자기 시의 유일한 독자가 되거나, 동일한 상형문자 내지 방언을 쓰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시를 바꾸어 보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들 종족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언어를 과도하게 남용한 대가로 무너져 내리는 우리의 바벨탑과 더불어 오는…….”
창백한 얼굴에 쏘는 듯한 눈매를 지닌 젊은이가 무슨 준비해 온 학과라도 외듯 쏟아 놓은 말이었다. 처음 형섭 씨는 어떻게든 그들의 대화에 끼어 보기 위해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말이야말로 형섭 씨에게는 거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상형문자였다. 그러한 상형문자가 통용되던 도시를 그는 이미 오래전에 언뜻 지나쳤을 뿐이었다. 기억에 있다면, 자신도 한때 젊은 날에 선망의 눈길로 바라본 적 이 있다는 정도일까.
별수 없이 형섭 씨는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이들은 곧 돌아가리라. 그러면 이 친구와 호젓한 분위기에 남아 오늘 도처에서 나를 가로막던 담들에 대해 얘기하리라. 인간들은 얼마나 왜소한 달팽이들인가, 그리고 그로 인해 얼마나 더 외로워지고 슬퍼지게 되는가도.
그러나 그들은 기다리는 형섭 씨는 아랑곳없이 대화에만 열중했다. 특히 조금 전의 그 젊은이는 이제 대화라기보다는 그대로 도도한 열변이 되어 새로운 상형문자를 그들 원래의 상형문자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 사람의 동행도 틈틈이 그를 지지하고 보충하는 열성을 보였다. 취해 있던 동창도 어느새 정색이 되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느새 새로운 막이 다시 형섭 씨만을 남겨 놓고 그들 셋의 주위를 둘러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상형문자를 마치 천국이나 약속하는 무슨 부적처럼 내걸고, 그것으로 다수의 민중들과 자기들을 구별하는 표지로 삼고 있습니다. 진부라는 상투어로 평범하나 정당한 관찰과 이해를 간단히 경멸하며 과장이나 왜곡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직한 심성을 치기(稚氣)나 미숙이라고 단정합니다. 도대체 그들은 그 대단한 권리를 어디서 얻었단 말입니까…….”
분위기는 점점 열기를 더해 갔다. 젊은이들의 볼은 마신 술의 취기 이상으로 붉었고 듣고만 있던 동창도 이따금씩 젊은이들의 말을 되받았다. 무료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형섭 씨뿐이었다. 몇 번인가 점점 견고해지는 언어의 막을 헤치고 들려다 헛되이 퉁겨 나고 만 그는 이제 그들이 제 풀에 지쳐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동창까지 정식으로 끼어든 그들이 대화는 끝이 없었다.
“……물론 어제오늘에 제기된 문제가 아니고, 또 자네의 편견이나 획일주의에는 반대지만, 확실히 일리는 있는 이야기야. 자네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사람도 더러는 있겠지. 그러나 전부는 아냐. 또 새로운 기법의 시도나 상징의 창출이 항상 분열의 고의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편견이지. 자네는 지나친 것을 걱정하지만 나는 그 반대야. 그래, 인류의 정신과 언어가 정확히 우리 세기에서 그 발전을 멈추리라는 확신은 어디서 온 것인가? 자네의 모든 우려는 그럴 경우에만 정당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아직 도상에 있고 정신과 언어는 끊임없이 발전해 갈 것이라고 보는 내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지금의 언어는 너무 불충분하고 애매해,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와 표현 양식이 필요하단 말일세. 하여튼 ― 상형문자라고 했지? 좋아,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상형문자를 발전시켜 나가는 편이 옳아. 그것이 사물과 지금 있는 언어와의 간극을 메워 줄 수만 있다면 당장은 난해하더라도 결국은 유용할 테니까.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용기에 감탄해 줘야 해. 그들은 세월의 시금석을 부담으로 안고 있으니까. 즉 애써 창출한 상형문자가 결국은 아무에게도 통용되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의 기호로만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하지만 연금술사는 아무래도 금을 얻지 못했습니다. 결과로 유익했더라도 연금술사의 오류와 화학자의 오류는 구별돼야 합니다. 그런데 ― 현대에는 그런 언어의 연금술사가 너무 많습니다. 땀 흘려 노력하기에는 너무 게으르고, 피 흘려 고뇌하기에는 너무 비겁한…….”
마침내 형섭 씨는 자기가 그 하루 경험한 그 어떤 담보다도 더 견고한 담 밖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과 동시에 그의 인내도 끝장나고 말았다. 지루함을 달래느라 대중없이 마신 양주 탓일까, 느닷없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그들 담 속의 세 사람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이 거짓말쟁이, 이 사기꾼, 뭐? 담이 없다고? 이 악질적인…….”
돌연한 형섭 씨의 성난 외침에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는 동창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간 빈 양주병이 맞은편 벽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불행한 병이었다. 먼 아메리카 어디서 수륙만리 이 땅에 건너와 결국은 한 취객의 엉뚱한 분노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형섭 씨는 어둡고 조용한 밤길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서늘한 밤기운에 격정은 곧 가라앉고 다시 슬프고 외로운 감상만 남았다. 드디어 집으로, 단 하루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어 했던 자신의 담 속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그는 길가의 담벼락을 툭툭 치며 그다음 주정을 잊지 않았다.
“나와라, 이 달팽이 같은 놈들아. 아니, 고개라도 내밀어라. 그리고 ― 이 쓸쓸한 거리를 봐라.”
집은 그럭저럭 찾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사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문이 있어야 할 곳에 대문이 없었다. 칠이 벗겨지고 비바람에 뒤틀린 나지막한 대문 대신에 아득할 만큼 높아 뵈는 새 담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는 몇 번이고 헛되이 근처를 살폈지만 낯익은 대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몽롱한 취기 속을 예리하게 찔러 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막내 욱이 놈이었다. 동시에 잊었던 그 새벽의 꿈이 생생히 떠올랐다. 거대한 감옥 같은 데에 갇혀 자기를 애절히 부르던 욱이 놈 ― 그러자 형섭 씨에게는 순간적인 혼동이 일어났다. 그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그 담 속에 욱이 놈이 갇혀 있다는 확신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다급한 마음으로 문이 있던 자리를 다시 힘껏 밀어 보았다. 딱딱한 시멘트 담은 여전히 끄덕도 않았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위를 살폈다. 퍼뜩 가까운 축대 공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그리로 달려가 큼직한 쑥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욱아 조금만 기다려라 이 애비가 널 구해 주마. 이 애비가…….”
그는 들고 온 쑥돌로 힘껏 시멘트 담을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담에서는 모랫가루가 부실부실 흘러내렸다. 나중에는 그도 그것이 자기 집의 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래, 욱아 너에게는 유년과 친구를, 나에게는 이웃과 자유를, 사람들은 ― 자기의 조그만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담을 쌓지만 사실은 외부의 더 큰 세계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짓이란다. 자기를 가두는 짓이며 이웃을 외롭고 슬프게 하는 거란다…….”
그런 그의 손에서 끈적하게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느끼지 못했다. 저쪽 골목 끝에서 점점 가까워 오는 호루라기 소리도, 밤하늘을 찢는 아내의 금속성 목소리도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1980년)
2016년 11월 2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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