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희 최근 충격 근황
Beautiful People
정윤희
丁允姬 | Jung Yoon-hee
정윤희(丁允姬.1954.6.4.~ )
1954년생으로 경상남도 충무시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이사를 가서 부산 당감초등학교, 혜화여중, 혜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다. 유지인ㆍ장미희와 함께 70~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984년 조규영 중앙산업개발회장과 결혼 후 은퇴하였으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지만 2011년 11월,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막내아들이 돌연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2011년 9월 13일 MBC는 한가위 특집으로 정윤희를 다룬 다큐 <우리가 사랑한 여배우들-카페 정윤희>를 방송했다.
【생애】
1954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정윤희씨는 혜화여고를 졸업하고 1975년 영화 <욕망>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탤런트 노주현씨가 상대역이었다. 정씨는 한 영화사가 공모한 연기자 모집에서 떨어졌으나 우연히 영화인들의 눈에 띄어 이경태 감독에게 소개되면서 <욕망>에 출연하게 됐다.
당시 정씨는 모델 에이전시의 소개로 먼저 영화계 거장 신상옥 감독을 만났고, 신 감독이 이 감독에게 정씨를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정씨는 영화 출연 후 처음엔 별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같은 해 해태제과 CF모델을 맡으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TBC-TV(현 KBS-2TV)의 <쇼쇼쇼> MC로 박탈돼 인기가 급상승했다. 이후 TV드라마와 영화에서 주연 연기자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면서 총 36편의 영화와 4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유명 남자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충무로와 방송가에서 ‘캐스팅 영순위’ 여배우로 꼽혔다.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1980년과 1981년 2년 연속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미모뿐만 아니라 연기파 배우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엔 영화 <사랑하는 사람아>로 백상예술대상 여자최우수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정씨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미희, 유지인씨와 함께 ‘3대 트로이카 여배우 시대’를 이끌며 당대 최고의 톱스타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짙은 눈썹과 큰 눈망울,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고전미와 청순미, 현대적 미색을 겸비한 절세미녀로 평가받았다.
정씨는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스타였다. 전 세계에 불고 있는 한류의 원조 격인 셈이다. 정씨의 뛰어난 미모는 일본과 대만 등 해외에도 알려져 외국 감독들의 러브콜이 잇달았다. 세계적인 톱스타들만 참석했던 일본 <동경가요제>에 한국인 최초로 초청받아 영화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 알리 맥그로우와 시상을 했다. 대만에선 정씨의 영화가 개봉됐었는데, 정씨가 대만을 방문했을 당시 공항에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세계적인 액션배우 성룡이 첫눈에 반한 정씨 때문에 한국을 자주 방문했고 한국을 너무 사랑하게 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인기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던 정씨는 1984년 심재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영화배우 이영하씨와 출연한 <사랑의 찬가>를 끝으로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이브날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났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상대남은 조규영 중앙건설 회장. 재벌가로 시집간 것이다. 당시 정씨의 나이는 30세. 조 회장은 38세였다. 친지의 소개로 정씨를 우연히 만난 것으로 알려진 조 회장은 남산초등학교와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국 사립명문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회계학과를 나와 1980년 중앙건설을 설립, 대표이사 회장을 맡았다.
중앙건설의 모태는 조 회장의 부친 조성철 창업주(1981년 별세)가 1946년 설립한 중앙산업이다. 조 회장이 선친의 뒤를 이어 회사를 이끌고 있는 것. 중앙산업은 1950년 6ㆍ25전쟁 이후 복구사업 바람을 타고 각종 건설공사를 수주해 1952∼54년 3년 연속 건설업체 도급순위 1위를 차지하는 등 국내 굴지의 건설사로 성장했다.
정윤희-조규영 부부의 결혼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문제는 조 회장이 법적으로 부인이 있는 유부남 상태에서 사랑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전부인과 이혼절차를 밟고 있는 상황에서 교제가 시작된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1984년 8월 간통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정씨와 조 회장은 함께 집에서 잠을 자다가 급습한 조 회장의 전부인 등에게 발각, 전부인의 고소로 경찰에 연행됐다. 줄곧 간통 사실을 부인한 이들은 유치장에 들어간 지 4일 만에 풀려났다. 전부인은 조 회장과 이혼 조건으로 거액의 위자료를 받고 고소를 취하했다.
1993년 조 회장이 대주주로 있었던 가구업체 모델로 브라운관에 잠깐 등장했고, 1995년 한 토크쇼에서 전화 인터뷰를 한 것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공개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2000년대 초반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정윤희 영화주간’에 여전히 고운 모습 그대로 나타나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정씨가 외부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자 베일에 싸여있는 그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증폭됐다. 항간엔 하도 소식이 없자 정씨를 둘러싼 악성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정씨는 주변의 걱정과 달리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들을 뒷바라지하면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고 있다.
2011년 1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유학중이던 아들이 약물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정씨와 결혼하기 전 조 회장은 전처와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었다. 정씨는 이들 남매를 키우다 결혼 5년 만인 1989년 12월께 뒤늦게 막내아들을 낳았다. 이번에 사망한 아들이다.
이 아들은 국내에서 영재학교를 졸업한 뒤 조 회장과 같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서 유학 중이었다. 정씨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충격에 빠져있을 게 분명하다. 여기에 아들의 괴소문까지 괴롭혀 패닉일 것이다. 은막 최고의 스타로 활약하다 간통 사건이 얽힌 재벌과의 결혼, 돌연 잠적, 이후 평범한 주부로 지내다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정씨의 기구한 삶을 지켜보는 팬들은 안타깝기만 하다.
【활동】
1975년 <욕망>(이경태)에 캐스팅되면서 배우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해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청춘극장>(75, 변장호)에도 출연하였다. 이 초기 출연작에서 그는 뛰어난 미모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곤하였다. 76년과 77년에는 <목마와 숙녀>(76, 이원세) <얄개시대>(77, 석래명) 등의 하이틴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TV 드라마와 해태제과 등의 CF를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1977년 장미희와 함께 <청실홍실>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다. 77년까지 특별한 영화흥행작이 없던 그는 78년 최초로 흥행성공작에 출연하게 된다. 소위 ‘호스티스 영화’ 인 <나는 77번 아가씨>(박호태)가 바로 그것인데 이 작품의 흥행성공으로 그는 장미희, 유지인과 함께 신트로이카 배우로 불리게 되었다. 이듬해인 79년에도 <꽃순이를 아시나요>(79, 정인엽) <죽음보다 깊은 잠>(79, 김호선) <가을비 우산 속에>(79, 석래명) <도시의 사냥꾼>(79, 이경태)의 흥행작에 출연하면서 흥행배우로서의 위치를 계속 유지해나갔다.
1980년과 81년에는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80, 정진우)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81, 정진우)에 출연하여 2년 연속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마침매 연기보다 얼굴이 앞서는 배우라는 평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도 그는 매우 활발히 TV 드라마에 출연하였으며 81년에는 두 방송국과의 자유계약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1984년에는 <속 사랑하는 사람아>(장일호)가 흥행에 송공하였고 임권택 감독의 화제작 <안개마을>(83)에도 출연하였다. 그러나 83년을 지나면서 그는 인기 순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으며 80년대 중반 결혼과 함께 은퇴하였다. 그의 경력에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일본에서의 활동을 들 수 있는데 77년 메이지 초콜릿의 CF 모델과 82년 일본항공의 달력 모델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는 매우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으며 이는 평자들의 비판거리였던 연기에서의 문제를 종종 가리곤 하였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그의 미모는 극단적으로 성적 대상화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특유의 백치미 그리고 성적 수동성과 결합하여 나타나고 있었다. 최초의 영화 성공작인 <나는 77번 아가씨>가 호스티스 영화였던 것은 이러한 점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의 이러한 이미지는 언론에 의해서 강화된 것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성적 매력에 대한 자극적인 묘사를 자주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모든 여배우들은 영화 속에서 성적으로 대상화되었으며 정윤희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79년까지 현대물 중심으로 출연해오던 그의 성적 이미지가 도시적인 개방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면 두 편의 문예물에서 보여진 것은 토속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이는 당시의 영화 경향의 변화와도 연관이 있는 것이지만 토속성이 타자성을 표상 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 두 편의 영화에서 그의 성이 정복/착취의 대상으로 의미화 되고 있음은 분명해보인다. 특히 농촌의 벙어리 처녀로 등장했던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에서는 가난ㆍ무지ㆍ농촌ㆍ장애인ㆍ자연과 같은 한국사회에서의 대표적인 타자성의 요소들이 그의 캐릭터 위에 집중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상】
1980년 대종상 여우주연상
1981년 대종상 여우주연상
1981년 백상예술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
1982년 백상예술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
정윤희/목마른 소녀
https://www.youtube.com/watch?v=1HNcZlGbKy4
정윤희 최근 충격 근황! 아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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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18, 2021
https://www.youtube.com/watch?v=Dyd8X631z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