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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이승만, 하와이로 양자 오자 "4·19때 다친 애들 어찌 됐어?"
중앙일보
입력 2023.09.04 08:00
김준영 기자
이승만 전 대통령 양자인 이인수(왼쪽) 박사가 지난 1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동 4·19 묘역 유영봉안소를 참배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이 이 박사의 부인 조혜자 여사. 뉴스1
이승만 전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92) 박사가 4·19 혁명 63년 만에 국립 4·19 민주묘지를 찾아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던 지난 1일,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탄 이 박사 곁에는 그의 부인 조혜자(81) 여사가 있었다. 이화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페스탈로치 재단 장학금으로 스위스에서 연수를 하다 중앙일보 스위스 초대 통신원으로 일하기도 했던 조 여사는 한표욱 전 오스트리아·스위스 대사의 중매로 이 박사와 결혼했다. 이 전 대통령이 미국 하와이 망명 중 서거하고 3년 뒤인 1968년 결혼해서 시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의 사저였던 서울 종로의 이화장(梨花莊)을 그의 시어머니인 프란체스카(1992년 작고) 여사와 지켜온 그는 남편, 시어머니 그리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들려준 이 전 대통령의 얘기를 누구보다 많이 기억하고 있다. 지난 1일 이 박사의 참배 직후 중앙일보는 조 여사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조 여사는 “이 박사가 (4·19 희생자와 유족에게) 많이 사과하고 싶어했다. 이 양반 소원이 사과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박사 생전에 사과할 수 있을까 했는데 참 감사하게도 국가보훈부가 자리를 잘 주선해줬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에게는 세 명의 양아들이 있었다. 첫째 은수, 둘째 강석(이기붕 전 부통령의 친아들), 셋째가 이 박사다. 이 박사는 4·19로 하야한 이 전 대통령이 하와이 있을 때인 1961년 11월 만 30세가 넘어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같은 전주 이씨에 양녕대군파, 항렬도 아들뻘로 딱 맞아서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주선했다고 한다.
이 박사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 시위 때는 직장인으로 시위에 동참했다. 조 여사는 “당시 이 박사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대에 입사했다”며 “4월 18일에 고대 후배들이 데모하니까 같이 갔었는데, 이기붕씨 집 앞까지 갔었다”라고 말했다. 1년여 뒤 자신의 아버지가 되는 이 전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1968년 결혼을 앞둔 이인수(왼쪽) 박사와 부인 조혜자 여사. 중앙포토
이 박사는 양자 입적 뒤 이듬해인 1962년 12월 하와이로 건너가 이 전 대통령 부부를 직접 만났다. 당시 이 박사를 매우 반갑게 맞은 이 전 대통령 부부가 화환을 목에 건 이 박사와 함께 찍은 사진도 남아 있다. 조 여사에 따르면 당시 이 박사를 만난 이 전 대통령은 “그 다친 애들은 어떻게 됐어”라고 물으며 4·19 때 부상당한 학생들부터 걱정했다고 한다. 이 박사는 “나라에서 잘 치료하고 잘 보살피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을 시켰다고 한다. 다음은 조 여사와의 일문일답.
이 박사가 이 전 대통령에게 사과를 제안한 적은 없었을까요.
“이 박사 제안보다 먼저 당신(이 전 대통령)이 ‘학생들은 어떻냐’고 물어본 거잖아요. 대통령이 다친 학생을 그렇게 많이 걱정했대요. (※이 전 대통령은 4·19 직후인 4월 23일 예정된 국무회의를 취소하고 다친 학생들이 치료받던 서울대병원에 갔다.) 대통령이 다친 학생을 만나고 와서 차 안에서 통곡했대요. 제가 운전기사에게 직접 들은 말이에요. 대통령이 ‘이 늙은이가 맞아야 할 총알을 애들이 맞았다. 이제 내가 국민이 물러서라면 물러서겠다’ 그랬대요. (※이 전 대통령은 4·19 일주일 만인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했고, 이튿날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이 전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어떻게 지냈나요.
“(한국으로) 오시려고 몇 번을 짐을 싸고 그러셨는데, 못 돌아오셨어요. 몇 번 짐을 싸다가 또 못 오게 하니까 또 짐도 풀어놓고 몇 번 그러셨거든요. 한국을 굉장히 가고 싶어 하셨어요. 하와이 생활도 어려우셨어요. 이 박사가 하와이 요양병원에 간병할 때 대통령은 늘 한국 쪽을 바라보고 계셨대요. 어느날 요양병원 원장이 ‘뭘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대요. 그러니깐 대통령이 ‘머니(money)’라고 하시더래요. 이 박사가 직접 옆에서 그걸 보고 깜짝 놀랐대요. 다른 것도 아니고 ‘돈’이라고 하니깐요. 원장도 ‘머니를 왜 그렇게 원하시냐’고 물었는데, 대통령이 ‘머니, 고 백 투 코리아(money, go back to Korea·한국으로 돌아갈 돈)’라고 답하더래요. 한국에 갈 돈이 없었던 거죠. 한국 정부도 막았지만,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던 거죠.”
1991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왼쪽) 여사와 며느리 조혜자 여사의 모습.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듬해 3월 작고했다. 중앙포토
시아버지는 생전에 뵙지 못했지만, 시어머니 프란체스카 여사와는 오랜 기간 함께 지내셨다고 하는데.
“어머님은 친정인 오스트리아에 계시다가 우리 부부가 1969년 애를 낳으니 당신이 직접 손주를 키우겠다며 한국에 오셨어요. (큰아들) 100일 때 왔을 거에요. (※이인수-조혜자 부부는 슬하에 병구·병조, 두 아들을 뒀다.) 어머님은 원래 독립운동 뒷바라지하던 분이고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결혼하셔서 옷을 잘 기워 입으셨어요. 훗날 우리 애들 내복 바지도 기워 입혔어요. 우리 애들이 학교에서 체육 시간에 옷 벗으면 놀림을 받았어요. 그렇게 많이 옷을 기워 입고 다니는 애들이 없으니까요. 애들이 어린 마음에 집에 와서 ‘할머니, 새것 사주세요’라고 말하니까 어머니께서 ‘너희 할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속옷을 꿰매드리면 잘 입으셨단다’고 했어요.”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블로거 찬> :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만세!
그 어느 곳에 슬기였던가?
이승만 박사!
자유민주주의 나라 미국에서 조국 독립운동을 하면서 듣고 보고 배우고 익힌 정치철학의 선구자, 선각자이기에
독립된 조국, 신생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면서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제정.공포하였다.
실로 오천년 초유의 자유민주정치가 한반도에 펼쳐지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
자유의 개념도 모르던 나라와 국민들이 사는 후진 나라에....
6.25 남침을 받아 전쟁에서 나라를 구하고, 한미동맹을 체결하여 나라의 안보를 확보하였으니
해방정국 난세에 그런 선각자 있었음은 이 나라의 역사와 국민에게는 하늘이 내린 크나큰 선물이요 축복이로다.
위대한 국부시다.
뉘
찬양하지 않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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