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풍헌 단종의 마지막 숨결
김윤자
영월은 그 이름에서부터 애련하고 사랑스럽다. 그런데 그 영월에 단종의 아린 족적이 새겨져 있으니, 영월은 한 번 아니라 열 번, 스무 번을 가도 결코 헛되지 않은 걸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가슴속에서 영월과 단종은 하나의 고유어처럼 묶여져 있고,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가을이 짙어가는 계절에 17세로 정지된 단종의 마지막 숨결을 만나고 싶어 남편과 함께 영월을 찾았다. 영월역에 내리니 기와지붕의 웅장한 역 건물이 조선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다. 비운의 단종을 맞이하듯 재조립된 조선의 포근함이다. 역 광장 곁에는 김삿갓이 하얀 석상으로 서서 웃으며 외객을 맞이한다. 그 곁에 정자 쉼터도 있어서 참으로 정겨운 풍경이다. 다음에는 김삿갓의 유적지도 꼭 탐방하자고 다짐하고 떠나려는데 포토존 사각 대형 액자틀이 시선을 이끈다. 전국의 기차역 건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영월역을 그 포토존에서 담아가라는 세심한 배려가 영월에 대하여 더욱 진한 애정을 품게 한다. 영월 시가지 너머에는 높은 산이 고운 가을빛을 선사하여 영월역의 포근함과 그윽한 풍경에 바라보는 마음이 참 평화롭다.
영월역에서 한참을 머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아쉬운 걸음으로 길을 건너 관풍헌으로 향했다. 영월역에서 받은 관광안내 유인물을 들고, 영월 관광지에 대한 설명과 어떻게 가는지 자세히 알려주던 관광안내원의 말을 떠올리며 시가지를 걸어서 갔다. 인터넷에서 찾아 저장한 내 두뇌 속의 영월 시가지 지도를 따라 동강 쪽으로 갔다. 영월과 동강 그리고 단종은 내 마음 속 또 하나의 아픈 고유어다. 세력의 소용돌이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단종을, 그 시신까지도 처절하게 강물에 던진, 그 잔인한 단종의 최후를 본 동강이다. 동강대교는 그날의 진혼곡이라도 울리듯 사장교 높은 설치물이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다. 다리 입구에 시공과 건설에 대한 안대표석이 있다. 2009년에 개통된 다리다. 곁에는 정자가 있어 여행객에게 편안한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다리와 함께 영월을 감싸 안은 우람한 산줄기와 맑은 동강 강물, 강가의 갈대숲 등이 아름다운 영월의 정취를 선사한다. 동강의 다리를 보고, 더하여 동강의 다리를 걸어간다는 것이 나에게는 참으로 큰 의미를 부여한다. 동강대교를 건너며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고, 서러운 세월을 눈감아 주자고, 고운 가을빛 품어 흐르는 동강을, 간간이 멈추어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것만으로도 흐뭇하고 행복한 여행이다. 가까운 거리에 놓인 영월대교도 높은 산 아래에서 동강을 가로지르며 멋진 풍경을 그려낸다. 시간이 되면 영월대교도 건너기로 하고 동강을 건너왔다. 그 외에도 동강 위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놓여 있어 영월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동강 강변에는 농사를 짓는 훈훈한 땅도 있고, 텐트를 친 여유로운 땅도 있다. 맑은 동강물이 여기 물가로 내려오라고 읊조린다. 나는 그래, 내년 여름에 우리 손주들 데리고 아들 가족과 함께 오겠노라 화답하고 고운 마음만 담아 동강을 떠났다. 동강변에서 길을 건너 영월 초등학교를 지나, 관풍헌으로 가는 아담한 길목으로 들어섰다. 자가용으로 다니는 여행은 순간순간을 빠르게 지나치며 여러 곳을 보는 장점이 있지만, 도보여행은 순간순간을 느린 횡보로 지나가며, 단 한 곳을 보아도 그곳에 가기까지의 탐방로와 그 주변에 대하여 자세히 보고 배운다는 장점이 있다. 때 묻지 않은 소박한 도시 영월을 예찬하며 가다보니 어느새 관풍헌을 만났다. 도로변에 있어서 찾기 쉬웠다.
현대풍의 건물들 사이로 둘러싸인 고적한 관풍헌은 옛 정취로 단종의 마지막 숨결을 품고 있다. 관풍헌은 1971년 강원도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관풍헌은 조선 초기 태조 1년인 1392년에 건립된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이다. 그때 지방 수령들이 사용하던 객사였다. 관풍헌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모두 세 채의 건물로 이어져 있다. 아담한 관아 건물이 단종의 슬픈 역사를 전해준다. 옛 지도를 외벽에 부착해 놓았는데 그 당시에는 꽤 큰 규모의 관풍헌으로 보인다. 그런 외적인 역사 외에 더 중요한 것은 단종이 어린 나이에 이곳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아픔은 수많은 세월을 넘어온 오늘에도 기와지붕 추녀 끝에, 창호지 창문에, 마루 나무판에, 뽀얀 흙마당에 단종의 족적이 고인 곳마다 소슬하게 서려있어 눈시울이 붉어진다. 단종은 세조 2년 1457년 6월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어 와서 서럽게 지내왔다. 그해 여름에 홍수가 나자 이곳 관풍헌에서 잠시 피해 있었는데, 그해 가을 세조는 관풍헌에서 단종의 생을 마감시켰다.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으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17세의 나이로 이곳 관풍헌에서 피를 흘리며 죽임을 당했다. 사약을 내린 죄목은 성삼문 등 충신들이 단종복위 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앉은 세조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비극을 연출했다. 기막힌 역사의 마디를 맴돌며,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단종의 피 맺힌 족적을 눈앞에서 본다는 것이, 참으로 시리고 서늘한 눈과 가슴이다. 그날 기와지붕 건물의 창문들이 하얀 핏줄로 울었다고, 아직도 눈부신 슬픔으로 꼭꼭 가슴팍을 묶어 잠가놓았다. 빠끔히 허락한 창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니 흔적도 없이 텅 빈 방, 사각의 틀 안에서 눈멀고 귀먹은 벙어리 침묵만 소슬하게 고여 있다. 현재 이곳은 인근의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마루에 걸터앉아 어느 방 하나에서 금새라도 ‘나 여기 있어요’ 하고 단종이 뛰어 나올 것 같은 환상에 젖을 때, 아담한 정원 한 구석에 올곧게 서서 관풍헌을 환하게 밝히는 노란 큰 은행나무 세 그루가 손짓한다. 사람은 가고 없는데 은행나무는 잘 자라서 고운 빛으로 물들어 있다. 바닥까지도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을 한 줌 움켜쥐고 허공에 날리며 단종의 영혼을 위로했다. 은행나무와 함께 나란히 자리하여 비경을 이루는 정자가 있어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규루와 매죽루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 관풍헌 정원에 있는 누각이다. 바깥 도로에서도 잘 보인다. 원래는 매죽루로 영월군수 신숙근이 세종 10년 1428년에 창건하였다. 단종이 잠시 이곳 관풍헌 객사에 거처하던 시절에 매죽루 누각에 올라가 시름을 달래곤 했다. 누각에 앉아 자신의 뼈아픈 고뇌를 ‘자규사’와 ‘자규시’로 읊었다. 자규란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 또는 두견새를 가리키는 말이다. 단종이 자신의 슬픈 처지를 견주어 지은 것이다. 자규사가 너무 슬퍼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규루라고 부르던 것이 계기가 되어 누각의 이름이 자규루로 바뀌었다. 단종의 슬픔을 티끌만큼이라도 사르고자 또 하나의 이름이 탄생된 것이다. 죽어서나마 단종은 이 자규루 누각을 바라보며 그래도 자신의 족적이 살아있음에 조금은 위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종을 기리는 이름의 자규루, 그날의 슬픈 역사를 지우는 화사한 누각을 바라보며 내 마음도 조금은 편안해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누각은 선조 38년 1605년에 대홍수로 인하여 폐허가 되었다. 그러다가 강원도관찰사 윤사국이 정조 15년 1791년에 영월을 순찰할 때 단종의 족적이 서린 누각을 다시 중건하고 단종의 시 자규루를 봉안하였다니 참 다행스런 일이다. 웅장한 풍채로 그날을 재현하고 있다. 누각은 나무계단을 설치하여 쉽게 오를 수 있게 지어졌다. 누각은 바람만이 부끄럽게 기웃거릴 뿐 덩그러니 빈자리다. 한때는 단종이 저기 높은 누각에 올라앉아 세상 시름을 잊고 잠시나마 편히 쉬었겠구나, 생각하니 마지막 돌아서는 걸음이 조금 가벼웠다. 차도와 인도와 관풍헌 담장이 나란히 있다. 관풍헌에 고인 단종의 마지막 숨결이 담장을 타고 흐르며 외객을 배웅한다. 그리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고, 꼭 단종 닮은 소박한 관풍헌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그리고 다시는 이곳 관풍헌에 홍수나 재난이 없기를, 살아서도 힘든 삶을 엮었던 단종이 잠시 거한 곳이지만 평화롭고 고요한 터전이기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