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서글픈 느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첫 직장 사우회의 계묘년(癸卯年) 송년모임
누구에게나 첫사랑처럼 살아오면서 처음 하는 경험은 마음이 설렐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기억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첫 직장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대학교 다닐 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등록금을 벌기 위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몸 사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여러 곳을 떠돌며 일을 했으니 처음 몸담았던 곳이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첫 직장은 아무래도 대학교 졸업 즈음에 지원서를 내고 입사시험을 거쳐 합격 통지를 받은 뒤 정식으로 발령을 받고 근무한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 나는 그렇게 첫 직장을 갖게 됐다.
1979년 10월 25일, 회사에 나가 사령장을 받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했다. 그런데 회사 정문 앞에 장갑차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경비의 말로는 새벽녘에 무장한 군인 1개 소대 병력이 장갑차를 몰고 갑자기 회사에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군인들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도 입을 꾹 다물고 계엄군의 지시에 무조건 따르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계엄군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전날 밤 시해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리고 정국이 몹시 혼란한 가운데 회사 분위기 또한 몹시 어수선했다.
어쨌거나 회사에서 신입사원 수습교육을 받을 땐 나름대로 꿈도 있고, 포부도 컸었다. 하지만 수습교육을 마치고 부서 배치 발령을 받은 지 1년여를 근무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앞날을 점칠 수 없을 만큼 몹시 요동쳤다. 어느 날인가 인사 담당자가 전체 임직원을 대상으로 사직서를 낼 것을 요구했다. 잔뜩 주눅 들어 지내던 때인데 뉘라서 감히 그 강요를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직서를 제출한 지 달포 뒤 당시 정권을 좌지우지했던 신군부에 의해 내가 근무하던 직장이 강제 폐사됐다. 당시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게 있어 첫 직장이 강제로 문을 닫은 충격은 실로 적지 않았다. 이때부터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회사가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사 당한 이후 당시 함께 근무했던 사우들이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우회 모임을 만든 지 어느새 43년이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무려 43년 동안 모임을 유지했으니 나름대로 하나의 역사를 이룬 셈이다. 그동안 사우회가 여러 가지 문제로 잠시 해체되었다가 다시 결성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또한 내가 마지막으로 입사한 모임의 막내이니 회원들 모두가 나이 일흔을 훌쩍 넘겼다. 그동안 ‘신종코로나’로 인해 3년 동안 모임을 갖지 못하다가 올해 초,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것을 계기로 다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백여 명이 모이던 모임이 해마다 회원들이 하나, 둘 별세하면서 몇 명씩 줄어들더니 이제는 20여 명이 남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절반이니 두 달에 한 번씩 갖는 모임에 얼굴 대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런데 금년 송년모임에는 4명만 덩그러니 참석했다. 그동안 열심히 참석하던 사우 가운데 어떤 사람은 두 눈이 실명 상태고, 어떤 사람은 치매에 걸렸으며, 어떤 사람은 신종코로나 후유증으로 참석할 수 없다는 전언이었다. 이제는 늙어 거동조차 힘든 사우들이 점점 늘어가니 앞으로 몇 해나 더 모임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우들의 어두운 소식에 공연히 마음이 서글퍼진다.
첫댓글 소중한 추억이살아있는 네분의 모습이 결기가 보이는듯 합니다
새해에는 모든분들이 건강하셔야 합니다
해맞이에서 빌고 빌었던 무탈과 건강이
꼭 이루어지시길 기원합니다
무슨 모임이라도 참석할 수 있다는 게 다행입니다.
앞으로 참석하고 싶어도 참석할 수 없는 때가 오겠지요.
그래서 요즘에는 누가 불러주기만 해도 후다닥 튀어나갑니다.
새해에는 우리 샘재동아리들끼리 자주 어울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