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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생명의 체험 2021. 04, 04..
오늘은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인생의 최대 문제인 죽음을 이기셨다는 증거이며, 지금도 이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믿는 자로써 당연히 많은 변화의 체험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활 생명의 체험>이라는 주제로 주님의 부활로 주어진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계시록 1장 17, 18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봅니다.
이 장면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럽고 장엄한 모습을 보고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을 때, 주님이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으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되는 순간 그가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른손을 요한에게 얹어주시고 주님이 어떤 분인지 계시해 주심으로 요한의 심령이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를 깨닫고 심령이 되살아나는 부활 생명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4장 25절을 보시면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주님이 죽으신 이유와 다시 살아나신 결과를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이 있기 전에 항상 십자가가 먼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이 다 치러졌고, 그 결과 다시 사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을 증명해 주신 겁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요한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세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과 부활하신 주님이 어떻게 서로 다른가를 보셔야 합니다. 부활하셨다는 것은 죽음의 시험을 통과하여 다시 산자로 사망과 음부를 다스리는 분이 되셨음을 천명해 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사실 우리 주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하신 것은 우리와의 관계에서 곧, ‘구원’의 시작과 끝이 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을 ‘산자’라고 말씀한 것은 주님이 바로 영원 전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말씀한 것만이 아니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는 우리 주님이 우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맛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라고 우리 주님이 인류의 죄 문제 곧,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음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세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이제 죽음을 이겨내신 부활의 하나님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시작과 끝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달라진것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이 죽음을 통과하시기 전에는 다만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때에는 그분 안에는 아직 사람의 인성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늘의 하나님이셨고, 사람은 땅의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이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비밀의 영광이 열린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6, 27절을 보시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써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실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시면,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의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며, 돈을 바꾸는 장사꾼들을 보시고서, 주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실 때, 바로 그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의미는 참 성전이신 주님의 몸이 죽임을 당하시고 제삼 일에 살아나실 그때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참 성전이 되는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가 세워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거듭난 자들이 참 성전으로 지어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주님이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안에 오심으로 새 피조물이 되어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태어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비밀을 알지 못하여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은 알고 있지만, 부활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오늘 부활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생명 주는 영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어 부활 생명을 체험하며 사는 놀라운 삶이 시작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셨고, 사람은 사람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시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말씀을 통해 우주의 역사가 새로운 시대로 열렸음을 말씀해 줍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신 것을 말씀해 줍니다.
이사야 9장 6절에도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한 아기는 메시아의 예언으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로 연합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처럼 반신반인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100% 하나님이시며, 100% 사람이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사람으로 보였겠지만 골로새서 2장 9절을 보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신성이 가득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사람이 되신 것은 단지 비밀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그 나머지 절반은 십자가를 통과한 부활의 비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신성한 생명이 사람의 생명 안으로 들어온 것을 말씀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의 인성이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을 말씀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을 때, 우리 주님은 인자의 모습이셨습니다. 즉 사람의 요소를 가진 하나님으로 그는 부활의 첫 열매로써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이 모습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가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도 그리스도와 똑같은 모습으로 부활하게 되는- 영광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영광의 소망인 것입니다.
왜,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 사이의 그 차이점을 강조하는 겁니까?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많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본성을 사람의 본성과 연합시킬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구약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성을 사람 안으로 가져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수 있도록 바다에 길을 내주셨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으며,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생수를 마셨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은 저들 안에 생명을 넣어주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31장 33절에서 무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시고, (PPT 20) 에스겔 36장 26, 27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분명히 아십시오. 옛 언약인 율법은 돌비에 새겨진 것이지만, 새 언약은 우리 마음의 판에 새겨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많은 기적을 베풀어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가 자기 피로 세우신 새 언약에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기록됨으로써 곧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부어짐으로써-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수 있도록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새 언약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로 지어졌음을 선포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로 생명 주는 영이 되어 오신 주님이 친히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신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주님이 어느 촌에 들어가실 때,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할때 주님이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하셨는데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 발아래 엎드려 사례한 것을 보고서 주님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신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로 돌아와 경배드린 이 한 사람만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이가 모두 기적적인 치유를 체험했지만, 오직 이 한 사람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반드시 분별하셔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두 창조물이 있습니다. 옛 창조물과 새 창조물입니다. 옛 창조물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친히 만드셨지만,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 안에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그래서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아도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셔야 했고 그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영생을 줄 수 있는 생명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0~12절에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 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은 주님이 부활하시고 맨 처음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시고 지금 막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인류의 죄 문제를 온전하게 처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제자들과 모든 믿는 이들을 가리켜 형제들이라고 처음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은 앞에 히브리서 말씀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 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신 말씀대로 이제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영생하는 생명을 받은 거듭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탄생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그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첫 번째 창조물은 비록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것이지만 죄로 인하여 언젠가 죽음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새 피조물은 이미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 생명으로 다시 거듭났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둘째 사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구원은 죄 사함이 전부가 아닙니다. 죄 사함으로 시작된 구원이 온전케 되도록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7~9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는 말씀을 보시면 구원의 시작과 끝에 모두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순종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전부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하며 순종하는 체험으로 이뤄집니다.
빌립보서 3장 7-11절을 보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세상과 그리고 옛사람에 속한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 피조물로 사는 것은 옛 창조물에 속한 것은 모두 허물어져야 합니다. 심지어 나름 선하다고 보는 것까지도 나에게서 나온 것은, 모두 내려놓아야 새 성품이 나옵니다. 저의 변화의 과정을 되짚어보면, 대부분 실패를 통해서 새 성품으로 변화되었음을 봅니다. 교리로만 알고 있는 말씀들이 내 삶에 실재가 되고 성품이 되려면 반드시 겉 사람의 깨어짐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괜찮다고 여겼던 육신에 속한 선한 것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선한 것으로 되지 않음을 철저하게 깨닫고 낮아진 후에 비로소 성령으로 말씀에 순종할 때, 변화된 삶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옛 생명의 무익함과 거짓됨이 드러났을 때야 비로소 부활 생명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 11절을 보시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렇듯 우리가 접하는 고난은 우리의 옛사람의 죽음을 시인하고 성령이 주신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옛 창조에 속한 자아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신성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사람의 본성 안으로 유입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 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하신 이 말씀이 우리로 부활 생명을 체험하게 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아 순종함을 배울 때,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 깨어지고 부활 생명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우리의 속 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하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뤄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든지,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순종을 배우고 부활 생명을 체험하는 진정한 부활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행복과 만족은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6-18)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적절하고 합당한 것으로 우리의 겉 사람을 처리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내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우리가 가진 육체를 신뢰하는 것들을 허물어 가시면서- 때로는 우리의 실수도 허용하시면서, 우리가 겸허해질 때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곧,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는 말씀을 공급해 주심으로 그 말씀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1:8)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확신할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PPT 39)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2)라는 이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는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믿으시고, 날마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부활의 삶이 더해지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뜻깊은 부활절 아침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뿐 아니라, 내 안에 생명으로 오신 부활의 하나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진정 주님의 부활 능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게 해 주시고 어찌하든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자들이 부활에 이르는 체험을 날마다 더 하기를 간구합니다. 실제 우리 삶과 인격에 새 피조물의 성품이 더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로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 피조물의 성품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