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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영성개발
(디모데전서 4:1~16)
박 찬 섭 목 사
(영문교회)
서 론
저는 영성훈련을 하면 할수록 영성의 맨 밑바닥에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면 목회자로서의 영성을 개발하겠습니까?”하고 늘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를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평소에 잘못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것은 영성훈련의 절정으로 올라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평소 1년에 두세 번씩 한주, 두주, 세주씩 금식에 대한 기본훈련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특수한 방법으로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기도원이나 혹은 특수한 장소에 가지 않고 그저 사택에 있으면서, 새벽기도 인도, 주일예배와 삼일 저녁예배 인도 등 기본적인 업무를 감당하면서 했습니다. 그것도 꼭 며칠 작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예배를 인도할 만한 때까지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훈련을 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금식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21일을 했는데 22일째는 새벽기도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하, 내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한계는 21일이구나, 이제는 그만 두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 육체의 한계가 21일 인 것 같다고 말하고 이제부터는 한 시간 한 시간 하나님이 힘주시는 것만큼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놀랍게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빛을 주시며, 하나님의 영의 빛이 제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제 속에서 열이 나고 힘이 나서 2, 3일 금식한 것과 다름없는 기운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는 하루하루 힘을 주시는데 늘, “오늘로서 끝내야지”하면서도 38일째 되는 금요일을 맞이했습니다. 금요일 철야 기도를 하고 나면 활동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철야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 이튿날 39일째 되는 날에는 교인들 중에서 두 분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는데 두 군데 병원을 심방할 만큼 넘치는 힘을 주셨습니다. 40일째가 주일인데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을 했는데도 다행히 그 40일째 마지막 설교는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서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해 본 결과는 이런 것입니다. 차라리 기도원에 가서 금식 한다든가 어떤 곳에 가서 쉬며 하는 것보다 그냥 가정에서 또 교회에서 기본업무를 하면서 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어떤 기도원에 가서 했으면 저 같은 경우 21일하고 끝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 교인이 기도해 주고, 내 기도 시간에 동참해 주는 가운데 “오늘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손에 끌려 40일 금식기도를 은혜 중에 끝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힘주시지 않을 때에는 눈을 감았다 뜰때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조차 힘이 들 정도로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 40일 금식기도를 끝내고 제가 얻은 결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여태까지 해왔던 생각과는 정반대의 것으로서, 40일 금식기도를 통해서 저는 영성훈련의 절정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영성의 가장 밑바닥에 내려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영성이 가장 밑바닥에서 있는 가장 부족한 인간이 과연 하나님의 종이란 말이냐! 가장 부끄럽고 질그릇같이 연약한 나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시작과 끝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 저는 “아하, 여기 맨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인생을 출발하고 영성훈련을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목회를 시작하기로 하고 교회도 성남교회를 사임하고 개척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왜? 내가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인데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영문교회에서 새로운 목회를 계획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 모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학위 논문을 쓰면서 발견한 것입니다.「성령의 은사가 교회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제 목회학 박사 논문입니다만, 사실 세계 교회의 모든 성장은 성령의 은사로 되는 것입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전에는 성령에 대해서 물으면 대답도 분명했고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서도 많이 아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은사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에 대한 논문도 쓰고「성령과 교회성장 발전」이라는 책을 써서 출판하고 나니까 남은 것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하면 “저는 지금 잘 모릅니다”라는 대답뿐입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 그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너무나 크고 방대한 것이어서, 그리고 하나님 은사는 그 주권대로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인간이 성령의 은사는 이런 것이다라고 얘기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라는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영성을 개발해 나가면 나갈수록 인간의 더 작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가장 부족한 자기의 영성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 은혜 중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생명되신 주님께서는, 부족한 종인 저의 못난 모습을, 부끄러운 목회생활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영성을 간증하라고 존경하는 목사님들 앞에 불러주신 것으로 믿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성을 바르게 개발하여 선용하면 그 힘은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무기가 됩니다.
영국에서 제일가는 옥스퍼드 대학의 총장 존 오웬(John Owen)박사는 성령의 은사를 일시적인 은사와 영속적인 은사로 구별한 대 신학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영국의 큰 교회를 마다하고 늘 맨 앞자리에 무릎꿇고 앉아 말씀을 듣는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하고 땜장이 생활을 하면서 설교하는 존 번연의 교회였습니다.
한 번은 당시 찰스 황제가 존 오웬박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대 학자요 신학자이고 총장인 사람이 갈 교회가 없어서 하필이면 땜장이가 설교하는 교회, 그것도 천막 속에서 무릎 꿇고 앉아서 경청한다는데 대체 뭘 들을 것이 있어서 그러는가?” 그러자 존 오웬박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영국에서 가장 영성이 밝은 사람은 존 번연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영성이 개발된 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영국에서 오늘의 작은 예수, 오늘의 그리스도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존 번연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작은 예수께서 설교를 하시고 오늘의 그리스도가 말씀을 전하는데 제가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겠습니까?”
이렇게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얼마나 큰 교회에서 설교를 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도 없고 설 강단도 없어서 천막을 쳐놓고, 일주일 내내 땜장이 노릇을 하다가, 주일날이면 설교를 하더라도 대학 총장이 와서 무릎 꿇고 경청을 하게 만드는 존 번연같은 설교가는 영성을 온전히 개발했다고 생각됩니다.
존 번연은 베드포드 감옥에서 12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한달에 평균 한 번 읽기로 작정하고 1년에 열 두 번씩 성경을 읽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백번 읽고 나니까 그에게 환한 빛이 오고 깨달음이 오기 시작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깨달음을 가지고 쓴 책이「천로역정」이었습니다. 또한 그 깨달음을 가지고 한 설교가 바로 옥스퍼드대학 총장이 와서 무릎꿇고 듣는 설교였습니다. 존 번연은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다가 깨달은 깨우침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는 것이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존 번연이 천로역정을 쓰고 나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한 감독이 그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황제께 잘만 보이고 아부하면 지금처럼 땜장이 노릇도 안하고 유명인사로서 잘 살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삽니까?”
그러자 그는 감독에게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만약에 감독께서 나처럼 가난하게 살 줄 알고 최저의 생활을 할 줄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황제에게 가서 아첨하지도 않고 굽실거리지 않고 살아도 되는데 당신은 그것을 못해서 아첨하십니까?”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 13)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비천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알게 되면 이 세상에서 황제도 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가 있는 기독교 영성을 개발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럼,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땜장이면서도 대학 총장을 무릎꿇게 할 수 있는 그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본 론
기독교의 영성(Spirituality)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속에 충만하게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리고 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게 됩니다. 마치 스데반의 얼굴을 보고 천사의 얼굴을 닮았다고 한 것처럼 “저 사람이 바로 ‘작은 예수’로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오로지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바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면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판단하고 행동하실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작은 예수’로서, ‘오늘의 그리스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또 그것을 어떻게 나타내야 됩니까? 나타냄! 이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속에 가득차서 내 성격이, 내 성품이, 내 인격이 그리스도로서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영성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세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영성의 핵심은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깨달음 없이 영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설교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깨달음이 없는 말은 힘이 없습니다.
흔히, 설교자들이 얘기하기로, 창조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 분은 약 10%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70~80%는 자기 말과 설교를 하고 또한 20~30%는 남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 후에 하는 말은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이야말로 깨달음에 대한 책, 영성의 모본을 나타내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 가운데 옥토에 떨어진 씨 비유 이것이 아름다운 마음, 좋은 마음, 깨끗하고 가난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23)
옥토란 다름아닌 깨닫는 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성의 출발이 깨닫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영성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비유를 18절, 19절에 들고 있습니다. “그런즉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그러니까 길가냐, 돌밭이냐, 가시떨기냐 하는 것은 깨닫는 차이를 말하는 것이고 옥토라는 말은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 하는 것입니다.
20세기 현대 과학문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현대는 깨달음이 없이도 버튼만 누르면 생각까지도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이므로 깨달음과는 상관없는 시대입니다.
현대 과학문명이 인간에게 주는 마음의 병들을 세가지로 이야기합니다.
① 무사 안일주의
어떻게 하면 무사히 안일하게 살 것인가 하는 이것이 전 교회에, 교역자들에게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편하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좀더 쉽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좀더 잘 살 것인가 하는 무사 안일주의가 완전히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② 상대주의
오늘 내게 절대적인 것이 내일이 되면 절대의 권위도 진리도 아닌 것이 됩니다. 지금은 최신 기계이던 것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완전히 고물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다 보니까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해서까지도 절대적인 신앙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절대의 권위도, 절대의 진리도, 소위 말하는 지성소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문제는, 지성소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절대가 없으므로 피땀 흘릴 필요가 없고 고난을 다하면서 진리를 지키고 정의를 지킬 필요도 없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신성 불가침한 것이 없는데 무엇을 노력하느냐 하는 상태에 교회도, 우리 자신도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③ 실리주의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명분과 실리라고 말합니다. 앞에 내거는 것은 명분이나, 뒤에서 계산하는 것은 전부 실리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에게 실리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목회를 하는 우리 목회자들까지도 앞에는 명분을 내세우고 뒤로는 실리를 계산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정은 무시된 채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무슨 짓을 하든지 돈만 많이 벌고, 성장하면 그 다음은 물어 볼 필요도 없지 않느냐 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무사 안일주의, 상대주의, 실리주의가 만연되다 보니 이것이 교회안에까지 침투했고 또 자신도 모르게 목회자들까지도 이 속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습니다.
영성을 개발한 유명한 한 신학자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예언적인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저희 교회에 와서 세상 파멸은 언제이며, 종말에 관한 말씀 그리고 인류의 망함이란 뭔가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신학자는 인류가 망하는 것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이 파멸하는 것, 인류가 망하는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원칙 없는 정책이 행해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망하기 시작합니다. 정부가 도덕성을 잃어버리고 국민이 윤리성을 상실하면 원칙이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랬다 저랬다 편리한 대로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망조의 첫째입니다.
두 번째는 발전, 성장은 하되 연민 없는 발전, 애정없는 성장이 팽배하게 될 때입니다. 이웃의 고난과 아픔은 돌보지 않고 나만 잘되어야겠다 남이야 그것을 먹고 죽든지 말든지 나만 돈벌면 된다는 연민 없는 발전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과연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세 번째는 노동없는 부의 축재, 자기가 노력한 만큼 얻어야 될 텐데 노력은 하지 않고 어떻게든 부를 축재하려고 합니다. 요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탕주의를 추구합니다. 노동 없는 부의 축재에 국민들이 앞서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세상은 망조가 들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의 상황들입니다.
네 번째는 학교에서의 교육이 진리 없는 교육을 시키게 되면 문제가 됩니다. 학교는 출세의 통로가 되고, 인격 아닌 기술양성소가 되고 시험기계를 만드는 상태가 될 때 사회는 병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다섯 번째는 이데올로기를 우상화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우상화, 이북에서는 공산주의, 이남에서는 자본주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이야기하면 다 잡아가고 자본주의 아야기만하면 안 잡아가는 식으로 서로 행동합니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상대적인 것이고 다 문제가 있는 것인데 그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우상화하고 절대화시켜서 그 이데올로기 때문에 인간의 권리가 침해당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망조가 들기 시작합니다. 이미 인류는 시험을 했습니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그 어느 것도 인류를 해방하고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후년이면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 됩니다. 그들의 3대 이념은 자유·평등·박애(사랑)입니다. 이 중 자유는 자본주의에서 도입해서 실험을 했습니다. 또 평등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에서 실험했습니다. 아직 인류가 정치적으로 실험하지 못한 것은 사랑에 대한 것, 박애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를 극복하고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자유와 평등을 합해서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 중 마지막, 사랑의 세계를 이룩하는 것인데 이는 기독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우상화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기독교에서부터,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가 최고이고 공산주의는 다 망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하면, 우리도 이데올로기의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되어 버립니다.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초월해서 그 위에 있는 것이지 그 어느 것에도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깨우침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가 성행할 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깨우침이 없는 형식화되고, 의식화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나라가 망해도 깊이 망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랍 방면을 여행하면서 본 것 중에 놀라운 것이 있었습니다. 12시 종이 치면 모든 회교도인들이 차를 타고 가다가도 내려서 메카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전 국민이 회교를 국교로 해서, 모든 사람들이 1일 5회씩 자동적으로 기도를 하고 믿는 이 나라들이 가장 부패하고 가장 문제가 많은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깨우침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전 국민이 복음화 되고 믿는다 해도 깨우침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게 되면 아랍의 그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똑같이 그러면서도 악과 범죄는 계속되는 그런 나라가 되고 맙니다.
일곱 번째는 영성이 없는 종교입니다. 종교가 영성을 잃을 때, 그때는 세상이 끝나고 인류가 파멸되는 마지막이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종교가 처음 시작할 때는 놀라운 영성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종교가 제도화되고 형식화되기 시작하면 또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갇히기 시작합니다.
불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아주 좋은 역할을 했고 신라 통일의 정신적 지주노릇을 했지만, 국교가 되어 형식화되면서 영성이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조도 유교 때문에 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이 없는 기독교가 될 때 한국의 미래는 어두워집니다. 그 시대의 책임은 그 종교가 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죄와 죄인이 많음을 묻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의인이 많고, 깬 사람이 많고, 깨달은 사람이 많고, 영성을 가진 사람이 많은가 하는 것을 묻습니다. 저부터 시작해서 여기계신 우리 목사님들만이라도 영성을 개발해 밝은 영성을 가지고 살아도 이 나라는 망하지도 않고 심판을 받지도 않습니다.
영성개발은 이런 사람을 만듭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들이 점검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에게 영성개발을 시키면 그 결과는 이런 사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 사회의식은 가지되 어떤 특별한 정당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이 정당에서 하는 것은 옳고, 저 정당에서 하는 것은 무조건 나쁘다 하는 식의 편견을 가지지 않고 분명한 사회의식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섭리에는 순종하지만 운명에는 굴복치 않는 사람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냐, 운명의 장난이냐를 생가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에는 아멘! 하고 운명의 장난에는 도전과 응전으로 승리하는 사람들, 자신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변화시키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영성개발을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는 ‘아멘’을 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적인 것에는 개혁을 단행하는 것, 변화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것에는 십자가를 지고 순종해야 하지만,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적인 것에는 최선을 다해서 개혁하고 혁신하며 혁명해 나가는 것, 이런 것이 영성개발을 한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네 번째, 이렇게 해서 깨닫고 자기 안의 영성을 개발해 나가는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회한이 없어집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라집니다. 현재를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렇게 됩니다. 저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없는데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고 여러번 반복합니다. 기독교의 기쁨이란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깨닫고 영성을 개발한 그 깨달음, 즉 하늘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한 가지 기쁨이 백 가지의 근심을 몰아내는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깨달음의 기쁨 한 가지가 생활의 근심 백 가지를 없애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기쁨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바로 영성을 개발한 사람입니다.
다섯 번째, 깨달은 사람은 하늘과 땅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대하듯이 삼라만상을 평등하게 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해를 의인과 악인에게 비춰주시고 비를 불의한 자와 의로운 자에게 내려 주신 것처럼 모든 것에 평등하게,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너는 의인이고 너는 악인이다, 너는 친구이고 너는 경쟁자다, 너는 공산주의자고 자본주의자다, 이런 한계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깨달으면 영적인 눈이 열려서 알아보는 힘이 생깁니다. 마치 번데기 속에서 날아다니는 나비를 바라다 보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 속에서 성자를, 성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갈릴리의 어부들 속에서 사도들을 찾아 내셨습니다. 베드로를, 요한을, 야고보를 그 보잘 것 없는 죄인 속에서, 어부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만인에게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 속에서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거룩함을 찾아내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매국노라고 침을 뱉던 마태, 세리 속에서 마태복음의 기자를 발굴해낸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사울을 불러서 바울로 만드셨습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이 바울에게 와서 절정에 이른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 그가 깨달음의 사람이었고 영성의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깨달음은 세월이 감에 따라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 속에서 어떤 사건이 생길 때 그 사건과 만나서 부딪힐 때 깨달음이 오는 것이지, 5년 10년 아무리 시간이 가도 자연적인 시간 속에서는 우리의 영성이 개발되지 않습니다. 늘 계속적인 사건이 오고 그 시건 사건에 도전이 올 때 그 도전에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 깨달음이 오고 영성이 개발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신이, 성령이 올 때,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해드리겠습니다.
옛날 중국에서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은 닭싸움 구경을 무척 즐겼습니다. 소위 말하는 투계입니다. 항우와의 전쟁 사이에 쉬게 되는 휴전시간이 되면 늘 닭싸움을 붙여놓고는 그 구경을 하면서 항우를 이길 모든 계책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던 중 한고조 유방은 항우를 이길 묘책을 더 큰 닭싸움에서 찾기 위해 온 나라에 영을 내려서 제일 닭싸움을 잘하는 닭들과 명인들을 불러 대령토록 했습니다. 그러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다 하는 닭들과 명인들이 불려왔는데 그 중에서 최고라는 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좋은 구경거리를 만들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닭들이 환경도 바뀌고 했으니 좋은 닭싸움을 시키려면 좀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아무소식이 없었습니다. 황제는 답답하고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기를,
“아직 뻐기고 있습니다. 내가 중국에서 제일 닭싸움을 잘한다 싶어서 뻐기고 있는 것을 보니 아직 닭싸움을 시킬 때가 멀었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기다리기로 하고 한 주일이 또 지나갔는데 역시 소식이 없었습니다. 다시 불러 묻자 그는 “아직도 닭들이 흥분을 하고 있습니다. 흥분을 하면 진짜 싸움을 못 합니다.” 또 한 주일이 지나갔고 다시 불렀습니다. “아직도 훈련 중입니다.” 그런 여러 날 후 그는 황제에게 나아와 말했습니다. “이제야 할 만합니다.” “어째서인가?” “이제는 부동의 자세가 되었습니다. 뻐기지도 않고, 흥분하지도 않고, 상대를 흘겨보지도 않는 부동으로 설 수 있으니 이만하면 황제께 최고의 닭싸움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드디어 그 닭들이 싸움판을 벌였는데, 종일 서로의 눈과 눈만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죽었는가 할 정도의 부동의 자세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파닥! 하더니 한 마리가 죽고 한 마리만 살아 남았습니다. 완전히 부동의 상태에서 그 부동이 먼저 깨어지는 닭이 지고 죽습니다.
우리도 이것과 똑같은 상태라고 봅니다. 제가 제 자신을 보면, 목사가 되어서는 “이만하면···”하고 뻐길 때가 있었습니다. 늘 흥분 상태에서 목회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또 문제되는 사람들, 이런저런 사람들을 흘겨보는 때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부동의 자세가 되려면 멀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 닭싸움을 하는 닭만도 못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늘 생각합니다.
사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내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배웠고, 내가 가문으로나 학식으로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내가 최고다!” 그렇게 뻐길 때 한 일이 스데반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목회자로서 ‘내가!’ 하면서 자신을 나타내고 뻐기다 보면 수많은 영들을 죽음의 자리로, 잘못된 자리로 인도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 빛을 본 순간에 모든 것이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이 제 1차 선교여행을 할 때,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파송을 받을 때까지 14년이 걸렸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일곱 제자의 이름이 나오고 바울의 이름은 맨 나중에 나왔습니다. 그때가 14년 후인데 다른 이들에 비해 꼴찌, 맨 뒤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자기 자신을 쳐서 정복하면서 철저한 영성훈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바울이, 회개한 지 20년 후에 흥분하지도, 뻐기지도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보통, 서기 1년 출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주후 30년인데, 사도 바울은 3년 후 주후 33년에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도상에서 회개한지 21년 후인 53년경에 제 1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도 21년이 지난 후에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 전에는 자신이 최고의 사도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게바를 책망하고 다른 사도들을 책망했었습니다. 그런데 21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사도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임을 깨닫고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 6년이 지나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서를 쓸 때에는 “나는 모든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자”(엡 3:8)라고 고백합니다.
영성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더 작음을 깨닫고 이제는 사도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 중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 유언 당시, 64년 네로 황제에게 순교를 당하기 직전에 쓴 디모데전서에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딤전 1:15)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성의 최고봉에 올랐을 때 그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한국교회는 영성개발만이 살길입니다.
우리 교회사를 보면서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결론은 영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영성훈련에 한국교회의 사활이 걸려 있습니다. 얼마나 일반 신도들을 제자화시키고, 목회자가 얼마나 영성개발과 영성훈련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요해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교회역사가 그러했습니다. 교회가 가난할 때, 핍박받을 때, 어려울 때, 순교자가 나올 때에는 절대로 교회가 타락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초대 교회 역사를 보아도 똑같습니다. 초대 교회의 300년간, 스데반의 순교 이후 마지막 로마에서 지하교회 카타콤 속에서 숨어 살아야 했던 그때까지는 기독교가 아름다운 전통을 유지했었습니다. 기독교의 순수성을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이 그 300년 동안에 순교자들의 수가 로마제국 안에서만도 400만이었다고 합니다. 로마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까지 그토록 많은 사람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모든 영성훈련의 최고봉은 순교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죽으면 그것이 영성의 꽃이요, 영성개발의 최고 정상이었습니다.
문제는 주후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이 때를 교회사에서는 “콘스탄틴 이후의 기독교”라고 말하는데, 기독교가 공인을 받고 나중에는 국교로까지 되자 기독교를 출세의 수단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모든 집권층이 예수를 믿다 보니 일반 국민들이 모두 신앙으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활의 방편, 출세의 방편으로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공인 이후 6세기, 7세기는 교황이 최고의 권위를 누리던 때입니다. 심지어는 세속정치의 왕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의 기록들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로마 교황이 교황청 높은 꼭대기에 신학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하는 이야기가, “옛날에 베드로가 말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는 이제 교회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세계의 모든 금은보화가 교황청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옥상에서 교황청으로 실려 오는 금은보화를 바라보면서 자랑했던 것입니다. 이 때 수도사 한 명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에게 없던 은과 금이 교황에게는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교황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하는 능력은 잃어버리셨습니다.”
교회에 은과 금이 가득 차기 시작하면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사라집니다. 교회가 처음 개척을 시작할 때,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많은 능력이 나타나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데, 교회가 조직이 되고 안정되고 부자가 되기 시작하면 그런 것이 사라집니다. 교황의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이 있었다면 그것 하나 집어 주었지 일어나 걸어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공인 후 성직자들이 최고 귀족으로서 특권을 누리면서 타락하기 시작하자, 타락한 기독교를 살리기 위해 영성훈련을 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들이 토굴에서, 산 속에서, 광야에 나가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훈련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분들이 들어와서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치고, 남·여 수도원을 만들면서 기독교의 제일 기본적인 ‘영성’을 지켜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절정에 이른 사람이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라고 말합니다. 그를 가리켜 영성훈련의 최고봉에 올랐다고 말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100년사를 넘어 200년사를 향해 가면서 멀잖아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와도 같은 상태에 빠지지나 않은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1884년, 의료 선교사 알렌(Horace Allen)이 입국하고, 1885년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 목사가 처음 선교를 시작한 이후, 1907년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11년에 백만 명 구령운동을 시작하였는데, 1910년 당시 교인이 7만 3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때에는 기독교인의 수가 21만 5천명이었습니다 당시 전 국민의 수가 2천만이었으니 1%에 해당하는 수였습니다. 그 1%인 20만명의 기독교인이 전국을 누비면서 만세운동을 했습니다. 지금의 25%의 기독교인이 못하는 그 일을 1%의 그 기독교인들이 해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1930년에 33만 6천명이었다고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이때는 인구의 1.4%였습니다. 이후 해방될 때의 통계가 40만명입니다. 그 사이에는 신사참배를 비롯해서 대동아 전쟁 등 극심한 박해 때문에 교회가 별로 성장을 못했습니다. 해방 이후 1950년 6·25직전의 통계에 보면 60만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기독교가 겨우 제대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6·25이후부터인테 1960년에 125만명이 되었습니다. 1911년에 백만명 구령운동을 시작했는데 그 구호대로 백만명이 되기까지 50년이 걸린 것입니다. 1960년 이후 1년에 평균 10만명씩 증가했습니다. 1970년이 되어서는 219만명이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획기적으로 자란 것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인데, 1970~1978년까지는 매년 평균 20만명씩 교인들이 증가해서 1978년에는 370만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 역사에 전무후무할 정도의 급속한 성장시가가 있었는데 이때가 1978~1982년 까지 입니다. 1978년부터는 1년에 100만명씩 증가했습니다. 60년대에 연간 10만명씩 70년대에 20만명씩 증가 하던 것이 이 5년 사이에는 매년 백만명씩 증가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983년에 860만명으로 800만을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83년 이후부터는 한국 기독교의 교세가 하향선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80년에 들어서면서 제 5공화국이 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는데 88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장기집권을 하려고 하자 가장 걸림돌이 될만한 것이 기독교였습니다.
만약 지금처럼 100만명씩 자라기 시작하면 88년에는 예수 믿는 후보가 아니면 그 많은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못 받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정책적으로 막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기본적인 방법이 신학교 감축이었습니다. 무인가 신학교를 없애기 시작했는데 없어진 신학교의 수는 기존 신학교의 ⅔에 해당되었습니다. 3분의 1이 남고 3분의 2가 없어진 것입니다. 백만명씩 증가하면서부터 그때까지는 하루에 평균 6개씩 개척교회가 생겼었는데 지금은 개척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성장에 제동이 걸린 것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인가 신학교를 없앤 데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정규 신학을 나온 사람은 대부분 개척을 하지 않습니다. 저부터 시작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나이들어서 비정규 신학인 무인가 학교를 나온 분들은 소명감 때문에, 그리고 기존 교회에서 모셔다가 목회를 시키지 않기 때문에 개척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척교회로 인해 1년에 백만명씩 놀랍게도 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 버리자 교회의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3만 3천 교회에서 1천 2백만명으로 다소 둔화된 상태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다행한 점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 교회의 성장이 둔화된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만약 그 신학교들을 그대로 둔 상태로 매년 백만명씩 자랐다면 지금은 이미 천 5백만명을 넘었을 것입니다. 교회수도 4만이 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지금도 일부에서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만, 성직을 사고 파는 일이 생깁니다. 정부 정책으로 인해 양적인 성장은 멎었으나 질적인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쉽게 말해 기독교는 값싼 종교가 되었을 테고 성직자의 권위도 땅에 떨어지게 되어 아주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입안해서 실천한 사람이 신학교를 마친 사람, 한국 신학대학 출신인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었습니다. 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가, 기독교를 그대로 놔두면 87, 88년에는 1천 5백만명이 넘고, 90년에는 2, 3천만이 넘게 된다. 그러면 다음 정권이 바뀌게 되는 95년에는 기독교인의 수가 2천 5백만 내지 3천만명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예수쟁이 아니면 꼼짝 못하게 되는 세상이 됨으로 이를 막기 위해 신학교를 문닫았다고 합니다.
신학대학 나온 분을 시켜서 신학교 문을 닫았다는 것,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고 핍박을 받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특권을 누릴 때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부가 하는 모든 일에 협조하면서 혜택을 누리고 부를 쌓아가는 교회입니다. 3분의 1정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따라갑니다. 3분의 1정도는 의식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운동권 학생들이 소위 한국의 10대 교회에 편지를 했는데 그것은 “당신들의 교회를 불지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의식 없이, 사회공헌 없이 배부른 돼지처럼 할 일없이 정부에게 무엇이든 잘한다고 박수치는 당신들의 교회를 불지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한국 교회의 소위 100대 교회에 편지를 보낸것입니다. “너희 교회를 폭파하든지 불지르든지 하면 우리가 한 줄 알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놀라운 충격을 받았습니다. 순복음교회가 구로공단에 노동자 기숙사를 짓기 위해 돈을 내놓은 것은 그 편지를 받고 벌벌 떨어서 한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한국의 부자 교회들이 돈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운동권 학생들의 편지를 받고 그러한 것입니다.
완전히 특권계급이 되어 살다 보니까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집에 사느냐, 무슨 차를 굴리고 다니느냐, 골 프장에는 일주일에 몇 번씩 가느냐 하는 것이 목사를 재는 척도로 삼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영적 타락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얼마 안 되어 90년에는 지금 부르짖는 인권의 자유화와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 기독교는 또 한 번 훨씬 더 큰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그때까지 민주화를 부르짖고 가난하게 살면서 고난을 받던 그 교회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부르짖음이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특권계급에 올라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 특권을 누렸던 기득권층과 밑바닥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다가 특권을 누리게 된 신진권력층이 더해져서 다 특권계급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서 ‘자신들 때문에’하는 공로의식을 가지고 교회가 정부의 시책에 관여하고 또한 정부가 꼼짝없이 그에 따르게 되면, 그때부터 기독교는 진짜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인권운동 중에서 제일 큰 취약점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킹을 비롯해서 흑인 인권운동자들에게는 인권운동을 하는 기본적인 훈련이 있습니다. 고문받는 훈련을 합니다. 고문받고, 얻어맞고 굶주리는 훈련을 철저히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고문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생각이 있고 반항하는 생각이 있으면 그때까지 아직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고문하고 굶기고 발가벗겨 때리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는 그 마음이 될 때, 그때부터 자격을 갖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과정없이 인권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마치 원수를 대하는 것처럼, 적을 대하듯이 합니다.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서 인권운동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저걸 없앨까”하면서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승리하게 되면 완전히 공로의식에 사로잡히고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가진 자도 특권을 누리고 밑바닥에서 운동을 하는 자들도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교회가 하는 이야기면 꼼짝 못하고 듣게 됩니다. 카톨릭 신부들이 명동 성당에서 말하자 힘을 가진 정부에서 꼼짝 못하고 학생들을 모두 석방한 것을 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렇게 되고 현 정부가 이런 것들로 인해 넘어가고 다음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 어떤 정부든 교회의 발언을 안 들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는 정말이지 문제가 됩니다. 일관성이 없는 정책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기독교는 특권을 누리게 되고 성직자는 저부터 시작해서 목사된 자들은 활개 펴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가질 때, 기독교는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90년대 이후 더 많은 교회가 생기고 더 많은 성장을 하고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그때에 우리 교회들이 무엇을 하며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이것이 과제입니다.
이를 위해 하는 것이 영성 개발훈련입니다. 이것을 못하게 되면, 지금은 100대 교회만 불지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교회에게, 불교 때문에 고려가 망했다, 유교 때문에 이조가 망했다고 한 것과 같이 기독교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하는 비난을 틀림없이 듣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막아야 하겠습니까? 우선은 우리가 특권의식을 버리고, 겸손히 자기를 죽이고 아무리 교회가 크고 성장했다 하더라도 늘 최저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사회의 문제가 됩니다.
결 론
교회는 자라야 합니다. 교회가 양적으로 자라는 것과 똑같이 질적인 발전과 영적인 성숙을 못하면, 성장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맙니다. 늘 자라기 때문에, 성장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지, 가난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장은 우리에게 축복이 되면서 또한 가장 무서운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교회의 목회자들이, 저부터 시작해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밑바닥 생활을 할 것인가? 이것을 못하게 되면 2천년 이후에는 교회가 한국을 망하게 하는 데 앞장서는, 기독교 때문에 한국이 망하는 것이 됩니다. 마치 러시아가 러시아 전체를 복음화시켜 놓고도, 레닌이 1903년에 17명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해서 14년 후인 1917년에는 4만명이 공산당원이 되었고 이 4만명의 공산당원 앞에 복음화되어서 특권을 누리던 러시아 전체가 공산화되어 버린 것과 같게 됩니다.
기독교도 똑같습니다. 2천년대에 가서는 한국 전체 국민의 3분의 2가 복음화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특권을 누리다 보면 17명의 공산당원이 러시아를 무너뜨린 것처럼 우리도 너무 자만하여 타락하면 무너집니다. 이것은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무서운 역사적인 교훈입니다.
민족의 복음화라는 지상의 과제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 그 과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복음화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영성을 개발하고 영성훈련을 하면 이 나라는 삽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열 사람의 의인들처럼 우리 목회자들이 먼저 깨어서 영성개발을 하면 이 나라는 살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깨달음을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해
교회가 자랄수록 겸손하게 해주시고,
맨 밑바닥 부동의 자세에 들어가서,
나는 목사 중에 제일 작은 목사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보다 더 못한 그런 자입니다.
아니, 안 믿는 죄인들보다도 더 못한 죄인의 괴수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이르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기독교 때문에 나라가 망했고
성직자 때문에 나라가 타락했다는
그런 오명을 쓰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영성이 우리 속에 차고 넘쳐서,
나를 통해 작은 예수를 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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