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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월남 패망시 駐越 한국대사관 경제담당 공사로서 월남 패망과정을 지켜보았고, 월남이 망한 후 월맹군에 체포돼 5년간 억류생활을 한 경력이있는 이대용 육사총동창회장이 "우리와 역사·문화적 배경이 다른 독일에서 통일의 교훈을 찾는 것보
다 월남 패망을 연구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 이라면서 그 당시 상황을 현재 국내정세와 비교 증언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월남과 한국은 일란성 쌍둥이
우리와 월남의 역사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한국 「반만년 배달민족」 , 월남은 「반만년 황룡(黃龍)의 후손」.
1. 지역 감정이 드센 것, 식민잔재 청산 문제(한국은 친일파, 베트남은 친불 친일·친중파)로 인한 정통성 논쟁, 각 정치 세력간의 끝없는 분파(分派)와 이합집산(離合集散), 그리고 정쟁(政爭)을 벌이는 것까지.
2. 1954년 7월21일 북위17도선 이남에는 자유민주주의 정부인 베트남 공화국(越南)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越盟)이 수립됐다
3. 이후 월남은 독자적인 힘으로 자주국방을 하지못해 미군의 도움을 받았고, 결국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파병돼 공산군과 싸움.
4. 야당지도자들이 외세를 물리치고 우리끼리 하나가 되자고 주장함. 결국 월남패망후 공산군의 프락치였음이 밝혀짐.
5. 미국과 월맹이 평화회담. 그로 인한 월남과 월맹의 평화회담의 진척. - 남북평화회담
한편으로는 평화회담을 하면서 한편으로 대남공작을 지속.
6. 1973년 1월 27일 휴전 회담. 미국등 서방은 월남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 철수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破棄)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굳게 약속했다. 월남의 월등한 군사력.
7. 월맹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피폐해진 나머지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자 평화회담에 나섰으나, 그것은 전략은 변함이 없은 채 전술만 바꾼 셈이었다.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것. 이는 지금도 북한이 견지하고 있는 대남전략과 단 한 치의 차이도 없다.
8.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월남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측 지배를 월남 내(內)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9.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저층(底層)에서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10. 캄보디아 국경선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정부의 각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내용이 단 하루후면 상세하게 보고될 정도로 티우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
11. 1967년 대선(大選)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관료들이 모두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간첩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한 사실을 나는 너무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월남 패망 당시, 외적(外敵)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12.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대(對)월맹 경제 원조도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 체제에서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13. 1975년 9월에는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을 유감 없이 연출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2년 대선 주의
14.정규군 58만 명 중 10만 명이 위장휴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군내(軍內)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에서는 「유령 군인」, 「꽃 군인」이라 불렀다.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정의감이 상실되자 일선의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하며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또한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공산군에대한 경계심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군대가, 식량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가장 큰원인이다.
15. 시민·종교단체를 좌익이 장악, 대한민국 이념의 현주소
16.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75년의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17. 우익 ·애국인사 암살
그 무렵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티우 대통령이 수상으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지도자 웬반홍, 사이공대학의 우익 학생 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은 침묵을 선택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 안보와 반공, 국가 정통성 수호를 외치면, 말과 글과 구호로 무장한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 공세를 펼침으로써 「말없는 다수」들이 침묵하는 상황도 25년 전 월남과 다름이 없다. 여론조성의 중요성
18. 이 와중인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오래 전부터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며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각지에 분산·고립된 채 총체적 부패와 전의 상실에 빠져 있던 월남군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19. 반띠엔둥이 이끄는 월맹군이 중부월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월남군은 지리멸렬(支離滅裂)해 버렸다. 그들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한 채 후퇴만 거듭하다가 결국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나 남침 후 한 달이 지나도록 미국은 대월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4월 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됐고, 이로써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월맹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월남은 월맹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20. 통일 후 반체제인사들 숙청시작.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경찰은 무장 해제되고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리고 월남의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도 모두 체포돼「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다. 이중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21. 반정부·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도 모조리 체포 처형됐다. 그들의 수감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것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22. 하층(下層)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이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나는 이 참혹한 패망의 역사를 그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강대국과 맺은 방위공약이나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정은 절대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무질서와 공산 프락치들로 인한 국론 분열에 빠진 월남에 고개를 가로 저었던 미국은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자기 국가의 안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가안보는 미국과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공산당과의 휴전협정도 아닌, 오직 자국(自國)의 군사력이 담보할 뿐이다. 체제가 안정되었다거나 경제력이 우수하다는 말은 조국에 충성하는 국민의식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부 잠꼬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월맹군대는 거지수준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화도 없었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완전무장을 한 월남 군대를 붕괴시켰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 무기를 고철로 만든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공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 「방위조약」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월남의 패망과 아비규환(阿鼻叫喚)에 빠진 월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출처] 심각합니다. 꼭 읽고 전하세요- 베트남공산화 과정과 한국의 유사성 2차요약본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읍니다. 우리 조직 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해야 할것 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반정부 운동을 하다가 적화되면 처형될 사람들 많지요 각종 반미 시위 준동자들 그리고 그 휘하에서 극열시위에 앞장선 사람들 등등.... 또 민주화 인사로 분류받아 어깨펴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을테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토착화 되어있는 평화통일이 되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