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돌
김 상 립
30년쯤 전 일이다. 당시만 해도 중국을 드나들기가 쉽지 않은 시기였다. 내가 다니던 회사가 중국 길림시에 공장을 짓고 있어서 비교적 출입이 자유로웠다. 출장 중에 백두산 천지가 너무 보고 싶어, 회사 지프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가는 길이 왜 그리도 험한지, 거의가 포장도 되지 않았고 길이 엉망이었다. 장백폭포가 보이는 곳에서 얼마쯤 더 나아가니 차로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어, 도보로 안내자를 따라 갔다. 천지 가까이 이르니 갑자기 바람도 불고 비가 온다. 황급히 비닐 옷을 꺼내 입고 언덕 위에 섰다. 못에는 구름이 두텁게 끼어 바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천지의 푸른 물을 만나고 싶어 고생고생 하여 올랐건만, 달리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져 나간다.
안내인과 언덕 위 바위틈에 앉아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아래만 내려다보는 처지다. 얼추 1시간이나 흘렀을까? 비가 뚝 그친다. 구름은 걷히지 않았어도 색이 옅어지니 사방이 제법 훤해진다. 옳다 되었다 싶어, 아래로 내려가 천지에 손이라도 넣어보려 몸을 일으켰다. 내려가는 길은 몹시 가팔라서 조심조심 헤매다 보니 천지가 코앞이다. 한 걸음에 달려가 물에 손을 담갔다. 듣기로는 천지 물은 차기가 얼음 같다 했는데 소문처럼 그렇게 차지는 않았다. 손을 씻고 얼굴도 문질렀다. 물가에 선채로 천지 쪽만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안내자가 ‘여기는 해가 빨리 떨어지니 지금 바로 떠나야 한다’고 재촉이다.
급경사의 오르막을 기다시피 올랐다. 큰 바위가 있는 곳을 지나는데 주위에 동글동글한 돌들이 흩어져 있다. 이상하여 하나를 주워들었는데 놀랍게도 너무 가볍다. 급히 내 주먹보다 작은 것 두 개를 골라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 놈들은 검정 색이었고 표면은 마치 잘 구워낸 숯처럼 거칠고 구멍도 많이 보였다. 생긴 게 쉽게 부서질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단단하다.
소임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 돌들을 탈없이 가지고 왔다. 집에 도착하여 다시 한번 자세히 살핀다. 아마 뜨거운 화산열기에 몸은 모조리 타버리고, 뼈나 껍질 같은 것만 남아 용암으로 흐르다 식으면서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작은 돌이 되었을 것이다. 앙상한 돌을 만지다 문득 하늘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난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 시대의 어머니들은 노인이 되면 거의가 허리도 굽어지고 다리도 잘 못쓰고, 골다 공증도 많은 편이었고 몸도 말랐다. 비록 키는 작으셔도 아주 강건하시고 체격도 좋았기에 믿었던 어머니가, 나이 드시니 매 한가지였다. 한 번은 누워계시던 이부자리를 갈기 위해 어머니를 안았는데 얼마나 가볍던지 내가 어림잡은 무게의 반도 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서울로 올라가며 내내 가슴 아팠던 일이, 하필이면 백두산에서 주워온 돌에서 연상되다니.
깊이가 있는 통에 물을 채우고 돌을 띄워보았다. 분명 돌인 데도 그냥 퐁당 하며 순식간에 가라앉지는 않았다. 수 많은 작은 물방울을 내뿜으며 몸을 뒤척이며 아래로 내려간다. 그간의 삶을 하소연을 하는 것 같기도, 아직은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고 알리는 것 같기도 했다. 책상 위에 돌을 세워보니 그 중에서 작은 놈이 엉거주춤 선다. 아, 그 모습. 늘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딸도 없이 사내아이 셋만 낳아 키운 어머니가 그 혹독한 시절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 겨울 며칠 간을 제외 하고는 장독대 한 쪽 구석에 아예 자리를 잡고 우리 형제를 위해 날마다 빌고 계셨던 어머니가 계속 눈에 밟힌다. 아, 그래. 이 돌의 이름을 ‘어머니 돌’ 이라 하자.
‘어머니 돌’을 작은 접시에 담아 내 책상 위에 두고는, 아침이면 돌을 보면서 어머니를 추억하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이상 하게도 간혹 그 돌에서는 어머니의 기운이 맴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떨 때는 따뜻한 온기가 내게로 스며 들어와 가슴이 훈훈해지기도 한다. 우주로부터 한 줌 기운을 빌려 탄생한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심지어 하찮은 돌멩이와도 교감이 가능할 것이라는 뒤늦은 깨달음에 더욱 숙연해진다. 내가 정신공부를 할 때 영혼이 하늘 나라로 가면 새로운 인연이 주어진다고 배웠는데, ‘어머니 돌’을 보면서 받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 하기야 예의 돌로부터 피어나는 어머니의 기운을 나 혼자 느끼고 있으니, 내 재주로는 남이 알아듣게 설명할 방도가 없다. 할 수 없다. 이번에는 내 마음 가는 대로 믿기로 하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 돌’에 소원을 비는 일은 극히 삼갔다. 왜냐하면 만일 어머니가 내 발원을 들어주지 못한다면, 다시는 이 돌을 찾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돌과 나는 서로 부담 없이 세상 얘기도 나누고, 어머니 얘기를 들려 주기도 하면서 잘 지냈다. 그렇게 돌과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다가, 내가 70 막바지에 들자 그 돌에서 느끼던 특별한 기미를 더 이상 감지할 수가 없었다. 하도 긴 세월이 흐르다 보니 내 감각이 변한 것인지, 그냥 무덤덤해진 것인지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어느 날 아침, 나는 그 돌을 보며 이제는 어머니가 돌에서 떠났구나 하는 느낌 을 강하게 받았다. 아마도 내가 80고개를 막 지나고 있으니 언제 이승을 떠날지도 모를 판에, 자주 예의 돌을 바라보며 당신을 생각하는 자식을 멈추어 주어, 내가 보다 자유롭게 남은 시간 보내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그 후 수년이 지나도 단 한번도 어머니의 흔적을 만난 적이 없다. 기운으로나 감, 심지어 꿈속에서 조차 기척이 없다. 이제 나도 돌을 떠나 보내야 할 때가 된 것을 안다. 만일 나와 얽히지만 않는다면 어머니가 간혹 이승이 구경하고 싶을 때, 예의 돌을 다시 찾을 것만 같다. 올 가을을 넘기지 않고 동네 가까운 산 어디 안전한 곳에 두어야겠다. 햇빛도 잘 들고, 소슬한 바람도 닿고, 새소리도 심심찮게 들리는 곳에. “어머니, 부디 제가 하늘 나라로 찾아 갈 때까지 편히 계십시오.”
첫댓글 달관의 경지
남평선생님!
오늘 부터는 욕망의 이야기를 쓰시지요. 최소한 젊은이들을 훈도하는 이야기라도
땅의 것에 대한 욕망이 있어야 장수한다고 합니다.
주제넘은 얘기 같지만
나는 지금 땅에대한 것에
욕망도 없고 하늘에 있는
것에도 욕망도 없고...
장수에 대한 집착도 없습니다. 젊은 이들에 대해 훈도할 처지도 못됨을
잘 알고 있답니다.
그냥 내 삶을 숨김없이
벗겨내고 가는 게지요.
감사합니다.
흑흑~~남평 선생님, 돌과 이별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글을 읽으니 저의 어맴 생각이 간절해 집니다. 친정어맴께서는 우리 집 뒤란 회나무 아래서 자식에 대한 기도 많이 하셨답니다. 늦게 얻은 자식 특히 아들에 대한 기도를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 하신것 같아요.
공연히 울적하게 만든것인가 싶어...공연한 짓
했나?
@남평(김상립) 아닙니다. 가장인간적이십니다.
신이 곳곳에 다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심어 놓았다고 하더군요.
감명 깊은 작품 잘 읽고 갑니다.
이 아침에.
감사합니다. 회장님
내 혼자 느끼는 얘기라
쓸까 말까 한게 10년도
넘었어요. 이제 이별이구나 느끼고 기억으로 남겨
놓고자 쓴것 뿐입니다.
뭉클합니다.
저도 제 아이들의 '돌'이 되어야건만.만 날 사고치는 골칫덩어립니더.반성합니더.
잘 읽었습니다.그 돌 어느곳에서든 기도문이 될 듯요.
본인 스스로 반성한다면
그러지 않도록 삶을 조절
해야되겠지요.
나는 어쩔 수 없다 내 생각대로 해야 한다면 그리
살면 되고요.ㅎ
작품을 읽고나니 구순을 눈앞에 둔 친정엄마 생각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늙으니 쓸데가 없다며 용돈을 주시니 저는 돌에서 엄마를 보지 않을 것 같아 참 복많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돌 떠나보낸다해도 절대 어머니가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겠지요. 가슴 뭉클한 작품이었습니다.
복은 받을 때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법.
복 받은 줄 아니 잘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