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기니의 역사
1778년에 에스파냐가 페르난도포섬(지금의 비오코섬)을 점령하였으며, 1827년 영국이 이 섬을 에스파냐로부터 조차(租借)하였다. 1843년 영국 해군은 시설을 침례파 교회에 양도하고 철수하였으며, 이듬해 에스파냐는 이 섬을 농업식민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그 후 1850년대에는 본토쪽 리오무니 지역의 식민지 개발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미 가봉을 식민지화한 데다 1880년대에는 독일이 카메룬을 자기 세력하에 두었으므로 리오무니의 면적은 극도로 줄어들었다. 식민지 정청(政廳)은 페르난도포섬의 산타이사벨(지금의 말라보)에 세우고 남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아노본섬과 이 섬을 페르난도포주(州), 대륙의 리오무니와 그 연안의 엘로베이, 코리스코 두 섬을 리오무니주로 편성하여 통치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독립운동이 강화되어 1964년 1월부터 자치정부가 세워지고 1968년 10월에 UN 식민위원회의 권유에 따라 적도기니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1968년 9월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페르난도포와 리오무니의 배분을 고려하여 국민의회를 차지한 4정당의 연립정권을 조직, 에스파냐와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1969년 3월 초 대통령이 반(反)에스파냐적 언동을 했다고 하여 외무장관 등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실패하였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재류(在留) 에스파냐인과 에스파냐 주둔군이 적도기니에서 물러갔다. 1970년 마시아스 응게마는 기성 정당을 통일하여 국민통일당(PNU)을 결성하고 1973년 7월에 채택된 신헌법에 의해서 종신 대통령에 지명되었다. 1973년 대통령은 페르난도포섬을 자기의 이름을 붙여 마시아스응게마비오코섬으로, 수도 산타이사벨의 이름을 말라보로 바꾸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독재정치 강화에 따라 그 후 쿠데타 미수사건이 산발하고 억압정치로 인해 국외 망명자가 인구의 30%에 이르렀다.
마침내 1979년 8월 국방장관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를 주축으로 한 쿠데타로 응게마는 처형되고 군사평의회가 전권을 장악, 에스파냐와의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이때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 후 1981년 4월에도 반정부(反政府) 장교·고관들이 쿠데타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이후 1989년 재선에 성공한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는 정치적 자유화 프로그램의 윤곽을 잡았다. 또한 PAIGC의 지도적 역할을 담은 법령을 폐지하는 것을 포함한 다당 민주주의의 길을 다지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헌법은 정치적 정당의 구성, 언론의 자유, 파업할 권리를 가진 독립적 무역조합등의 허가를 비준하였다. 1993년 후반기까지 적도기니는 12개의 합법적 정치정당이 만들어졌고, 1993년 2월에 선거법이 통과되어 한달 후에는 국가선거위원회가 발족하였다. 그 후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첫번째 다당 선거가 1996년에 실시되어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가 3선되었으며, 1999년 총선이 실시되었다.
연관목차1. 적도기니의 자연2. 적도기니의 주민3. 적도기니의 역사4. 적도기니의 정치5. 적도기니의 경제
참조항목국제연합역사 >서양사
지역 >아프리카 >적도기니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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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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