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 탱고 /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 조원규 / 알마
* 독서 모임에 다녀와서...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풀리지 않았던 부분 몇 가지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소설 내용이 며칠 짜리일까 궁금했습니다. 기본적인 일정은 2박 3일입니다. 의사의 일정은 다르게 보입니다. 앞의 3장 끝에 에슈티케를 쫒아가다가 의식을 잃습니다. 마침, 집에 돌아가던 켈러멘이 발견합니다. 의사는 잠에 빠집니다. 그리고 기록이 없다가 마지막 장에 몇 주간 마을을 비우고 병원에서 돌아온 기록이 나옵니다. 의사의 시간은 몇 주간이고 소설에 나온 주요 일정은 2박 3일인 것 같습니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지 않습니다. 한 시대의 사건과 경험이 단지 한 두 페이지에 끝나는 반면, 몇 분 동안의 일이 책의 반절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책과 영상물의 차이점이지요. 책이 주는 그 순간의 밀도는 시간과 더불어 또 다른 경험입니다.
에슈티케의 죽음입니다. 소녀의 죽음은 일종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슈미츠 등이 양을 돌려주고 받은 돈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 소설에서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서 소녀가 희생양으로서의 조건에 맞아보입니다. 에슈티케가 죽는 시간, 마을 사람들은 광란의 탱고를 추고 있었습니다. 이 죽음을 딛고서 아리미아시는 마을 사람을 선동합니다. 에슈티케의 죽음이 없었다면 아리미아시의 연설은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순수하게만 포장된 에슈티케도 고양이의 죽음 앞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목이 만들어지는 순간이겠지요. 사탄 탱고
저는 이 소설이 마치 액자 소설처럼 읽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검토한 결과 마지막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구조라고 보입니다. 다음 순환이 가능하다면, 그 순환의 결과는 지금 소설의 본문과는 다른 내용으로 바뀔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사는 관찰자로 남아 있어야 하기에 문에 못질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영화 Edge of Tomorrow에서는 주인공의 죽음이 시간을 Reset 하는 역할을 하는데 여기에서는 순환의 경계를 "종소리"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참고로 의사가 몰두한 것은 주변의 외적인 몰락에 맞서 자신의 기억력을 지켜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기억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기억을 채운 관찰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또한 기록하는 사람의 상태 또한 온전하지 않습니다. 기록은 남습니다. 그런데 남은 기록이 후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어떨까요? 또 다른 사탄의 탱고입니다.
인간 사회는 늘 변합니다. 발전하는 방향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기도 합니다. 소설에서 이 공동체는 지금 쇠락하고 멸망으로 향하고 이를 관찰하고 그 기록을 남기는 역할을 의사가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가 그의 일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매개하지 않으면 쉽게 움직이지 않는 존재인가 봅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축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면의 세계를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다시 살펴보면서 노트에 옮겨놓은 글을 음미해 보았습니다.
거꾸로 6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펼쳐진 책과 같습니다." 세상의 오해는 여기에서 출발하는 듯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자비도 여기에서 출발할 겁니다. 지나는 한순간은 각자에게 그 시간/사건에 대한 밀도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 밀도로 인하여 오해가 생깁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펼쳐진 책이라면 내 책에 쓰인 것을 잘 전달해야 하겠지만, 앞에 놓은 책을 먼저 잘 읽어봐야 할 것입니다. 읽다보면 어느덧 시간은 지나가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고 말겁니다. 남는 것은 상대에 대한 이해일것이구요. 거기서 자비와 사랑이 자랍니다.
에슈티케가 173쪽에서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난 내게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뭐든지 다···."
매력이 있는 책입니다. 매력이란 첫인상과는 다르지요. 가까이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면 사랑스럽다는데,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들과의 대화에서 많은 것의 배웁니다. 그래서 이 자리가 소중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