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1월 11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하나님도 못 드는 바위 》
시 61:1~8
〈 1 모순(矛盾)의 모순 〉
“앞뒤가 안 맞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어불성설입니다”
한국인 즐겨 사용하는 이러한 말들을 통틀어 두 글자로 요약해 보세요!
‘모순’으로 답할 수 있을 겁니다. 모순은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했습니다.
고대 중국에 창과 방패를 파는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창을 들고는 “이 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떤 방패도 다 뚫는 창’입니다”
방패를 선전할 때는 “이 방패는 ‘어떤 창’도 뚫지 못합니다”
그때 한 사람이 장사꾼에게 질문했습니다.
“이 보시오, 그러면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찌되오?”
이 질문에 장사꾼은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앞뒤가 안 맞는 논리나 말을 지적하는 단어 ‘모순’이 나왔습니다.
당연히 ‘모’자는 창 모(矛), ‘순’자는 방패 순(盾)을 씁니다.
뚫리지 않는 방패는 있을 수 없고, 모든 방패를 뚫는 창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이가 묘한 질문을 하나 끄집어냈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은 모든 방패를 뚫는 창, 모든 창을 막아내는 방패를 만들 수 있습니까?”
발칙한 질문이지요? ~ 이 질문에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내놓으시겠습니까?
섣불리 대답을 찾기 보다는 질문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창과 방패의 성능은 자체로서 견고해야 되지만,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일 어른이 방패를 잡고 아이가 창으로 공격한다면 결과는 보나마나입니다.
창과 방패는 사용자의 힘과 순간 가속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창과 방패를 든 쌍방이 똑같은 힘과 가속으로 대결하는 것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은 ‘모순된’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바탕으로 ‘모순’이라는 어휘가 만들어져 사용합니다.
수백 년간 ‘모순’이라는 단어를 무심코 사용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는 오류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좋은 질문이 아니라 이렇듯 나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뚫지 못하는 방패, 다 뚫는 창을 만들 수 있느냐?”라는 질문은 어불성설입니다.
☞ 차라리 “하나님은 자기도 들지 못하는 바위를 만들 수 있느냐?”라는 질문은 합당해보입니다.
〈 2 피조물 바위 이야기 〉
중세의 비 기독교인 철학자들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희화화하는 질문을 더러 했습니다.
“전능자는 1과 2 사이에서 자연수를 찾아낼 수 있느냐?”
“전능자는 세모난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느냐?”
심지어 “창녀를 처녀로 만들 수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공격했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사실은 ‘모순’처럼 이치에 안 맞는 질문들입니다.
그 질문 속에 쓸만한 질문이 “하나님은 자기도 들지 못하는 바위를 만들 수 있느냐?”입니다.
☞ 오늘 설교는 비기독교인들의 전능자 하나님에 대한 도발적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여러 질문이 있지만, 질문으로서 흠결이 있으면 대답할 필요가 없지요.
단지 “하나님은 자기도 들지 못하는 바위를 만들 수 있느냐?”에 대한 대답은 하고싶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시편 61장에는 바위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2절)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편을 쓴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바위에 비유했습니다.
“나보다 높은 바위”가 구원이라는 은유입니다.
내가 그 바위에 오른다면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거기에는 오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가장 많이 지으신 것 중 하나가 바위입니다.
사실 산은 거의가 바위로 되어있습니다.
만일 산을 흙으로만 지었다면 장마에 다 씻겨내릴 것입니다.
산에 올라 조금만 흙을 파보면 이내 바위가 나옵니다.
만일 거대한 바위가 겉으로 드러나 있다면, 그곳은 관광자원으로 만점입니다.
미국의 ‘요세미티’가 대표적입니다. 바위 크기가 참으로 어마무시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거대한 바위 앞에 서면 무언가 신비함과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렇게 큰 바위를 누가 만들었을까?’
‘저 바위에 오른다면 아무도 나를 해코자 못할 것이다’
‘저 위에 오르면 세상이 발아래로 보일 터이니 올라 보고싶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의 본능 속에 이런 마음을 심어주셨습니다.
☞ 시편 61장의 시인도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 3 구원을 은유하는 다양한 표현 〉
지구에서 가장 높다는 에베레스트 산 높이가 8,848미터입니다.
거대한 바위 산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인간이 오릅니다.
지금까지 에베레스트 등반을 시도했다가 성공한 이보다 죽은 자가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에베레스트 등반을 멈추지 않습니다.
히말라야 등반을 포함한 모든 탐험 정신의 뿌리가 바로 시편 61장입니다.
(2절)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바위에 올려주시는 것을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않는 사람들, 성급하게 자신의 힘으로 오릅니다.
하나님이 해 주셔야 할 일을 자기가 직접 나서서 한다는 데 첫째 문제점이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점은 바위에 올라 구원을 누린다는 말씀이 비유적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히말라야 등반을 당장 멈추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의 보편적 심정이 틀렸다는 것도 아닙니다.
시편 61편에서 시인이 노래한 바위는 실재하는 바위일 수도 있고 상징적의미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사람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점이지요!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다양한 모습의 바위를 지으셨고요,
사람의 마음속에 바위에 대한 동경심을 넣어주심으로써 구원을 갈망토록 하셨습니다.
시편 61장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류의 구원 사이에 흐르는 긴장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3~4절)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시인은 구원을 바위로 비유하면서 다양하게 메타포하고 있습니다.
피난처, 견고한 망대, 주의 장막, 주의 날개 아래… 바위와 더불어 구원을 이르는 말입니다.
5절이하에도 구원을 뜻하는 말이 계속 등장합니다.
기업(5절) 장수(6절) 인자와 진리(7절) 이 모두가 바위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을 뜻합니다.
☞ 땅끝까지 몰린 시인은 애타게 하나님의 구원을 이토록 절절하게 간구합니다.
〈 4 전능자 하나님이 들지 못하는 바위 〉
시인이 이토록 절절하게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습니다.
(1절)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이렇게 시작한 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시인에게 응답을 하셨는지 여부는 서술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시편 61장을 쓴 시인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을까요?
바위 이야기로 시작한 설교, 바위 이야기로 응답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중세 철학자들은 전능자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전지전능의 뜻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고 그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로 여기지만, 안 믿는 이들에게는 “도무지!!”입니다.
전능자가 있다는 성경부터가 의심스러웠던가봅니다.
“전능자가 있다고? 그러면 전능자는 자기가 들 수 없는 큰 바위도 만들 수 있겠네?”
이 질문은 ‘모순(矛盾)’처럼 모순됨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름 진지하고 빈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질문에 섣불리 대답을 시도했다가는 하나님을 망령되게 일컫게 되기에 ‘딱’입니다.
“전능자니까 당연히 만들 수 있지!” 했다가는 뒷감당이 어렵습니다.
“전능자가 들지 못하는 바위가 만들어졌으니, 그때부터는 전능자가 아닌 거잖아?”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이에 대하여 궁색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전능자이니까 들 수 없는 바위를 만들더라도 금새 능력이 커져 그것도 들 수 있다!”
이 대답으로는 시편 61장의 시인이 기도에 응답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전능’에는 ‘전지(全知)’가 포함됩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 전능이 가능합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니,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이 이런 일로 왈가왈부할 것도 아셨겠지요?
마치 자식이 애비 에미 흉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식을 낳는 부모와 같습니다.
저는 오늘 모처럼 손자를 데리고 목욕탕에 갔습니다. 재롱을 보면서 목욕하는 일!
얼마만한 기쁨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 녀석도 나중에는 이 할애비 흉을 보겠지요?
☞ 하나님도 잘 아십니다. 피조물 인간들이 틀림없이 ‘전지전능’으로 시비를 걸 것이다!
〈 5 사랑받고싶은 하나님 〉
사람들이야 자식이 나중에 부모 흉 보는 일까지 대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오늘날의 ‘전능자도 못 드는 바위’로 시비할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 하나님도 못 드는 바위 》입니다.
하나님은 이 논란에 어떻게 대비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전능자인 자신도 못 드는 바위를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은 그 바위를 만드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자기가 들지 못하는 바위는 안 만들면서 전능자로 불리길 원한다면 그건 부끄러운 겁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들지 못하는 바위를 만들어놓고 전능자 자리를 내놓는 것도 부끄럽지요!
이 문제를 하나님은 어찌 해결하셨을까요?
하나님은 피조물을 만들되,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 받는 파트너를 만들기로 합니다.
엿새쨋날 빚어낸 사람입니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사람에게는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자유의지를 주신 뜻은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겠다는 희망은 오로지 상대방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설령 내가 전능자일지라도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고 자유의지를 부여한 일은 ‘하나님도 못 드는 바위’입니다.
예수 안 믿고 하나님을 안 믿는 자에게 믿도록 뭔가 조치를 한다면 어찌됩니까?
그렇게 조치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했다면요? ~ 그렇게 해서 얻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건반사’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받으려면, 전적으로 사람이 자유의지로써 선택한 결과치여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조작이 가미되었다면 그것은 조건반사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사람을 지으실 때 이 상황을 기꺼이 허락하십니다.
이 일이 바로 ‘하나님도 들지 못하는 바위’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처럼, 자식 사랑에 올인합니다.
심지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하면서까지 사랑합니다.
그렇게 사랑하건만,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대서 결코 어떤 조작도 유도심문도 안 하십니다.
온전한 사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 심판은 하시지요, 단지 생전 심판이 아니고 사후심판입니다. 오호 애재라~
〈 6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
살아있는데, 예수 믿었다고 상을 주고, 안 믿는다고 벌을 준다면 모두가 예수 믿을 겁니다.
상벌이 분명한데도 안 믿는다면 그 사람은 바보입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시간과 햇볕과 비를 주십니다.
믿었다고 교통사고를 피하게 하거나 천재지변을 면해주시지 않습니다.
안 믿었다고 해서 재산 피해를 내거나 단명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시간과 햇볕과 비를 주시듯 공정하게 하십니다. 단지 사후에 심판하십니다.
“전능자라면 자기도 들지 못하는 바위를 만들 수 있어야 하잖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일찌감치 제시되었습니다.
사실은 이 대답은 제가 책으로 펴냈습니다.
2017년에 기독교문서선교회(CLC)를 통하여 “붕어빵”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설교 본문인 시편 61장으로 돌아가 설교를 맺고자 합니다.
시편 61장의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조건에 따라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라를 구한 공을 세우고도 10년 이상 쫓겨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롯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일념으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땅끝까지 내몰렸지만, 큰 바위로 자기를 보호해 주시기를 바라고 노래합니다.
21세기 현대를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니, 하나님도 나에게 이만큼은 해 주셔야지요?”
이렇게 반문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이치로도 자시의 하나님 사랑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시인의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이 땅에 살면서 응답을 확인하려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상급을 바라고 사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세상을 지으시고, 조상님과 부모를 먼저 보내시어 나를 있게하신 분!
마치 부모가 나에게 잘해주니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모이니 공경하는 것처럼요.
하나님 사랑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시편 61편 기자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