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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은사(大慈恩寺) 대자은사가 위치한 서한(西漢)은 당나라 때의 도읍으로 당시에는 장안(長安)이라 불리었습니다. 장안은 현장스님이 서역으로 출발하신 시발점입니다. 대자은사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인 628년 황태자가 모후(母后)인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위하여 산시성[陝西省] 창안현성[長安縣城]의 남팔지리(南八支里)에 세운 유서 깊은 고찰입니다. 이 절은 천축(天竺)을 다녀온 현장스님(玄裝:602~664)이 계셨던 곳으로, 고종(高宗) 때인 652년 현장의 발원(發願)으로 대안탑(大雁塔)이라는 7층전탑(七層塼塔)이 건립되었으며, 이 탑은 기단의 각 변이 42m, 높이가 54m에 이르는 서역식(西域式) 불탑으로, 각 층마다 사리를 봉안(奉安)하였는데, 그 후 삼장법사(현장)의 전기인《자은전(慈恩傳)》과《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명상(瞑詳)의《대당고삼장현장법사행상(大唐故三藏玄裝法師行狀)》등의 서책이 보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유서 깊은 대안사를 낮 시간에는 업무를 봐야 하기 때문에 가볼 수가 없었고 부득이하게 밤에 찾아봤습니다만, 시간이 늦어서 관람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안탑은 보수 중 이었구요. 아래의 사진 중 낮 시간대의 것은 자료 사진이고, 야경은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중국 시안(西安) (2016.08) 대자은사 대안탑(보수 중), 현장법사(삼장법사)동상, 대자은사 주변 공원의 야경 子曰(자왈).“晋文公(진문공)은 譎而不正(휼이부정)하고, 齊桓公 (제환공)은 正而不譎(정이불휼)하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晋(진)나라 文公(문공)은 속임수를 쓰고 바르지 않았으며, 齊(제)나라 桓公(환공)은 바르고 속이지 않았다.” (譎 : 속일 휼, 속임수 휼) -논어 헌문 16장-
今釋(茶山의 해석) 공자는 “晉(진)나라의 문공은 권모술수로 제후의 功業(공업)을 이루고 바른 수단을 쓰지 않았으나, 제나라의 환공은 바른 수단으로 제후의 공업을 세우고 권모술수를 쓰지 않았다”라고 하여, 춘추시대의 두 霸主(패주) 진문공과 제환공이 패업을 세운 마음 씀씀이가 서로 같지 않았음을 평하고 있다.
朱註(朱子의 집주) ①朱子(朱熹) 晉文公의 名重耳요 齊桓公의 名小白이라 譎은 詭也라 二公은 皆諸侯盟主니 攘夷狄以尊周室者也라 雖其以力假仁하여 心皆不正이나 然이나 桓公伐楚엔 仗義執言하여 不由詭道하니 猶爲彼善於此요 文公則伐衛以致楚하고 而陰謀以取勝하니 其譎甚矣라 二君他事亦多類此라 故로 夫子言此하여 以發其隱이시니라. 진문공의 이름은 重耳(중이)이고 제환공의 이름은 小白(소백)이다. 譎(휼)은 속이는 것이다. 이들 두 公은 다 제후의 맹주로서 변방족(夷狄)을 물리쳐서 周왕실을 높인 자들이다(존왕양이). 비록 그 힘으로써 仁을 빌렸기에 마음이 모두 바르지 못하나, 그러나 환공은 초나라를 칠 때에 大義에 내세워 말하였고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저것(제환공)가 이것(진문공)보다 나은 것이 된다. 문공은 곧 위나라를 쳐서 초나라를 싸움에 끌어들이고 음모로써 승리를 취하니, 그 속임이 매우 심하도다. 두 임금의 다른 일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이를 말씀하여 그 숨은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②齊氏 齊氏曰 二公之伯는 皆以勝楚하니 楚罪莫大於僭王猾夏이라 孔子於春秋書에 齊曰侵蔡라 蔡潰에 遂伐楚이라하시고 而於晉僅書曰及楚人戰于城濮이라하시니 則晉之有歉於聲罪致討也일새니 亦已著矣라 제씨가 말하였다. 두 공(제환공과 진문공)이 패자가 된 것은 다 초나라를 이겼기 때문이니, 초나라의 죄는 임금을 참칭하여 나라 안을 어지럽게 한 것보다 큰 것이 없는 것이다. 공자께서 춘추의 글에서 (僖公 4년편에서) 제나라를 말씀하시기를 “채나라를 침략했음(侵)이라. 채나라가 무너짐(潰)에 마침내 초나라를 쳤다(伐)”하시고, (僖公 28년편에서) 진나라에 대해서는 조금 써서 말씀하시기를 “초나라 사람들과 성복에서 싸웠다(戰)”하시니, 곧 진나라가 죄를 밝혀서 토벌한 것에 대해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니, 또한 이미 나타낸 것이다. (伯 : 우두머리 패, 猾 : 어지럽힐 활, 潰 : 무너질 궤, 僅 : 겨우 근, 歉 :부족할 겸)
家苑 註(가원 이윤숙 선생의 집주) <家苑 註 1> 춘추시대의 五覇(다섯 제후)인 제환공과 진문공에 대한 공자의 인물 평가이다. 진문공(기원전 697년~기원전628년, 재위 기원전 636년~기원전628년)은 19년의 망명생활 끝에 62세에 군주가 되어서 9년의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제환공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된 인물로, 獻公(헌공)과 翟族(적족)인 狐姬(호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重耳(중이)이다. 당시 晉나라에는 태자인 申生(신생 : 중이의 이복형)이 있었고, 친동생인 夷吾(이오)가 있었다. 헌공의 총희인 驪姬(여희)가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고 신생을 자살로 몰아가고 나머지 형제들마저 죽이려 하자 중이와 이오는 망명했다. 중이는 먼저 어머니의 나라인 적 땅으로 망명했다가 5년이 되던 해에 아버지인 헌공의 상을 당한다. 적 땅에서 문상을 받을 때 秦穆公(진목공)의 사신에게 중이는 고국으로 돌아가 군주의 자리에 오를 뜻을 내비치고 외삼촌인 犯(범)과 상의한다. 이때 犯이 한 말이 “아비를 잃은 사람은 이로써 보배로 삼음이 없고, 어버이 사랑을 보배로 삼는다고 하니라(舅犯이 曰 亡人은 無以爲寶요 仁親을 以爲寶라하니라.: 禮記 「檀弓」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문장은 「大學」편에 재인용됨)”이다. 晉나라에서는 이 사이에 극심한 정변이 일어나고, 동생인 이오가 들어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니 이가 惠公(혜공)이 된다. 혜공에 의해 다시 목숨의 위협을 느낀 중이는 제나라로 가서 제환공의 도움을 크게 받지만 환공의 죽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다시 衛나라와 曹나라와 宋나라와 楚나라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秦穆公(진목공)의 도움으로 晉懷公(진희공 : 혜공의 아들로 秦의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도망쳐 혜공 사후 군주가 됨)의 군대를 무찌르고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춘추좌전 僖公(희공) 27년편을 보면 중이, 곧 晉文公이 군주의 자리에 오른 뒤 2년 동안 백성들을 가르쳐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자, 외삼촌 犯은 백성들이 아직 의리를 모르고 생활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안된다고 하였다. 이후 진문공은 반란으로 자리가 위태로워진 周襄王을 보호하고 반란을 토벌하여 의리를 세우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데 힘썼다. 그런 뒤에 진문공은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였는데 이 때 외삼촌 犯이 백성들이 아직 신의를 모르고 있어 쓸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 뜻을 받들어 진문공은 原땅을 칠 때 그곳 백성들이 항복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그대로 따른 뒤 정복하니, 백성들이 교역을 하는데 터무니없는 이익을 남기지 않았고 약속을 잘 지켰다. 그리고나서 문공이 이만하면 됐느냐고 외삼촌 범에게 물으니 犯은 백성들이 아직 예의를 알지 못해 공경심이 생기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에 진문공은 대대적인 사냥 작전을 벌여 예의로써 모범을 보이고, 또한 관직을 바로잡는 등 백성들에게 의혹됨이 없게 하였다. 마침내 진문공은 구원을 요청하는 송나라의 요구를 빌미로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쳐서 이기니, 이것이 城濮(성복)의 전투이다. 이때 주나라의 양왕이 손수 踐土(천토)지역까지 마중 나와 진문공을 패자로 인정하니, 진문공은 제환공에 이어 춘추시대의 두 번째 패자가 되었다. 천자문에 나오는 踐土會盟(천토회맹)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공자가 진문공에 대해 혹평한 것은 진문공이 비록 정사를 잘 하였다고는 해도 그 목표 자체가 爲民에 있지 않고 오직 패권 국가가 되기 위한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家苑 註 2>공자의 제환공과 관중에 대한 평가의 역사적 배경 주나라가 쇠퇴하여 동쪽으로 천도하고(東周) 주나라의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각 제후국들의 독자적인 세력증강이 전개된다. 그 과정에 철기 문화가 발달하고 농업 생산력이 늘면서 각 제후국들의 규모와 위세에 많은 편차가 생긴다. 이에 제후국들이 서로 나라를 겸병하거나 큰 나라들은 覇者(패자)가 되기 위해 서로 다투는 국면이 나타났다. 이때가 春秋시대(기원전 770년~476년)이다. 춘추란 명칭은 공자의 저작인 春秋에서 나왔다. 공자는 요·순임금을 거쳐 夏· 殷· 西周시기까지 덕치와 위민정치라는 통치 사상의 道와 전통은 유지되어 왔다고 보았다. 그러나 東周시대 이래 각 제후국들이 부국강병을 명분으로 약육강식의 권력쟁탈전을 벌이면서 그러한 道와 전통이 무너졌다. 권력쟁탈을 위해 ‘臣弑其君 子弑其父(신하가 군주를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주역 , 춘추)’ 의 패륜적인 행위들이 일어나자, 공자는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탄식했다. 각 제후국들의 각축 속에 첫 패자가 된 제환공은 각 제후국들의 회합(규구지회:葵丘之會)을 주도하여 ‘尊王攘夷(존왕양이: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변방의 이민족들을 물리침)’를 내세우며 무너진 기강과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하였다. 이에 기원전 651년에 다섯 조항이 담긴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맹자 告子章句 하편 7장). 제후국들의 공동선언문(葵丘之會) ① 불효를 벌하고, 세자를 안 바꾸고, 첩으로 처를 삼지 말라 (誅不孝 無易樹子 無以妾爲妻). ② 어진 자를 높이고 인재를 육성하여 덕이 있음을 빛나게 하라(尊賢育才 以彰有德). ③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손님과 나그네를 잊지 말라 (敬老慈幼 無忘賓旅). ④ 선비는 반드시 대대로 관직을 세습하거나 동시에 여러 직책을 맡지 말라, 선비를 반드시 등용하되 임의로 대부를 죽이지 말라 (士無世官 官事無攝 取士必得 無專殺大夫). ⑤ (물길을 돌리기 위해) 제방을 구부러지게 쌓지 말며, (흉년에 다른 나라로부터) 쌀 사들이기를 막지 말며, 식읍지를 봉(封)하면 천자에게 알려라 (無曲防 無遏糴 無有封而不告). 공자는 이 공동선언문의 내용이 국가기강과 질서를 바로 잡는데 기여하였다고 보았다. 공자가 헌문편(10,16,17,18,19장)에서 제환공과 관중을 높이 평가한 배경이다 <家苑 註 3>제환공(기원전 685-643 재위)의 등극 과정 제환공의 아버지는 희공(僖公 기원전 731-698)이다. 희공의 아들로는 세자 제아(諸兒), 공자 규(糾:제환공의 동생), 공자 소백(小白:훗날의 환공) 등이 있었고, 딸은 선강(宣姜)과 문강(文姜)이란 미인이 있었다. 희공은 동생 이중년(夷仲年)과 그의 아들인 무지(無知)를 총애하였다. 희공의 큰 딸 선강은 위(衛)나라 선공(宣公)의 세자에게 시집을 갔으나, 시아버지인 위선공이 아들을 몰아내고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또한 제나라의 세자인 제아는 방탕하여 이복누이인 문강과 통정을 하였다. 이후 문강은 노(魯)나라 환공(桓公 기원전 712-694)에게 시집갔다. 한편 희공은 조카인 무지를 총애해 세자인 제아와 똑같이 예우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신분에 따른 예악(禮樂) 절차를 무시하는 일이었다. 이에 세자인 제아는 희공의 뒤를 이어 양공(襄公 기원전 698-686)이 되자 사촌인 무지의 직위를 강등시켜 버렸다. 세자 시절 이복동생인 문강과 통정을 하였던 양공은 즉위 4년 되던 해(기원전 694년)에 문강이 노환공과 함께 제나라를 방문하자 또다시 문강과 통정을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환공이 문강을 치죄하고자 했다. 이에 양공은 아들인 팽생(彭生)을 시켜 송별연에서 노환공의 허리를 부러뜨려 죽였다.(시경 齊風편에는 문강과 관련하여 풍자한 시가 네 편이 된다.) 노나라가 제나라에 항의하자 양공은 아들인 팽생에게 죄를 물어 죽였다. 이렇듯 방탕하고 포악한 군주인 양공은 결국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다(기원전 686). 이어 사촌인 무지가 제나라의 새 군주가 되었다. 제 양공이 반란에 의해 죽자 동생인 규(糾)는 모친의 나라인 노나라로 피신했고 소백(小白) 역시 모친의 나라인 거(莒)나라로 피신했다. 이때 이들을 수행한 인물이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이다. 그런데 새 군주인 무지가 한 달 만에 제양공을 추종하던 세력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망명중이던 규와 소백 간에 군주 쟁탈전이 벌어졌다. 대부들 간에도 지지세력이 분열되어 두 공자 중 먼저 제나라에 입국하는 사람이 군주가 될 상황이었다. (공자 규를 따르던) 관중의 소백에 대한 암살 시도가 실패하면서 결국 소백이 먼저 입국하여 군주가 되었다. 이 사람이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인 제환공이다. <家苑 註 4> 춘추좌전 희공(僖公) 4년 봄에 제환공이 제후들의 군사를 거느려서 채나라를 치고 채나라고 무너지자 마침내 초나라를 쳤다. 그러자 초나라 성왕(成王)이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당신들은 북방에 살고 나는 남방에 살아 마소가 바람나 서로 도망갈 일도 없는데(風馬牛不相及), 당신들이 내 땅을 밟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으니, 무슨 까닭인가?”고 하자 관중(管仲)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옛날에 召康公(소강공 : 召公奭을 말함)이 우리 선조인 태공(姜太公을 말함)에게 다섯 등급의 제후와 아홉 주의 우두머리들이 잘못하면 정벌하여 주나라 왕실을 도우라 하였소. 그리고 우리 선조에게 땅을 주심에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황하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목릉(穆陵, 淮南지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무체(無棣, 遼西의 孤竹)에 이르렀소. 당신 나라에서 공물인 苞茅(포모 : 초나라는 荊州땅으로 서경 우공편에 따르면 이 지역 특산물의 하나로 술을 거르는데 쓰는 풀로 가시가 있고 세모진 줄기인 菁茅를 말함)가 들어오지 않아 천자가 제사에 제물을 바치지 못하고 술을 제대로 올리지 못함에 우리 군주가 이를 요구한 것이며, 천자인 소왕(昭王)이 남쪽으로 순수를 나가셔서 돌아오지 않으셨음에 이를 묻는 것이오.” 그러자 초나라의 사신이 말하기를, “공물을 들이지 않은 것은 우리 임금의 죄가 됩니다. 감히 바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소왕이 돌아가지 않음은 저 강물에게 물으시오(昭王之不復, 君其問諸水濱).”라고 하였다. 소왕이 남방을 순수할 때 漢水를 건너다가 배가 부서져 물에 빠져죽은 일을 두고 초나라에게 죄를 묻는다면 억울하기에 복종하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제후국의 군사들이 초나라의 䣆(형)땅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초 성왕이 마침내 대부인 屈完(굴완)을 보내 맹약을 맺도록 하자 제후국의 군사들이 召陵(소릉)으로 물러났다. <家苑 註 6> 管仲(관중)의 등용 소백을 따르던 포숙아는 친구인 관중(?~기원전645)의 출중한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제환공에게 청하여 노나라에서 사형 위기에 처한 관중을 구해온다. 나아가 관중을 재상으로 중용하도록 환공을 설득한다. 환공은 포숙아의 청을 수용하여 직접 교외로 나가 관중을 영접한다. 이를 제환공의 ‘三釁三浴(삼흔삼욕:향을 세 번 뿌리고 목욕을 세 번 함:國語)’이라 한다. 제환공의 인재발탁 능력이 탁월함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이후 관중은 제환공을 보좌하여 제나라를 부국강병의 나라로 만들었으며, 이로써 제환공은 춘추시대의 첫 패자가 되어 주나라 왕실을 높이는 ‘尊王’을 비롯해 각 제후국들의 협약을 담은 ‘葵丘之會(규구지회)’의 회맹을 주도하였다(기원전 651년). 앞서 기원전 662년에는 燕나라와 魯나라 북쪽에 거주하는 이민족인 山戎(산융)이 1만의 병사를 동원해 연나라를 침범하자, 제환공은 대군을 동원하여 산융을 포함해 이웃 나라인 고죽국의 항복까지 받아냈다. 이른바 ‘攘夷(양이)’이다. 천자문의 ‘桓公匡合(환공광합)’이다. 제환공이 제후국들과의 회맹에서 만들어낸 치적 중의 하나가 ‘繼絶存亡(계절존망)’이다. 군주의 계승이 끊어진 대를 다시 잇게 하고 망하는 나라를 보존시켜 준다는 의미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노나라에 대한 군사지원을 통해 노나라 僖公(희공)의 군주권을 회복시킨 것이다(기원전 660년). 천자문의 ‘濟弱扶傾(제약부경)’이다.
1, 桓公伐楚 仗義執言(환공벌초 장의집언) : 仗義(장의)는 大義(대의)를 내세우는 것이며 執言(집언)은 어떤 구실을 내세워 상대방을 꾸짖는 명분으로 삼음을 이른다. 당시 楚(초)나라는 天子國(천자국)인 周(주)나라에 貢物(공물)을 바치지 않았는데, 齊(제)나라 桓公(환공)은 楚(초)나라를 정벌할 적에 이것을 大義名分(대의명분)으로 삼아 책망 하였는바, 이 내용은 《春秋左傳(춘추좌전)》僖公(희공)4年條(4년조)에 보인다. 2, 彼善於此(피선어차) : 서로 큰 차이가 없으나 그래도 저것이 이것보다는 낫다는 뜻으로 《孟子(맹자)》<盡心 下(진심 하)> 2章(장)에 보인다. 3, 伐衛以致楚(벌위이치초) : 楚(초)나라를 치려하였으나 명분이 없으므로 楚(초)나라의 동맹국인 衛(위)나라를 공격하여 楚(초)나라를 전쟁에 끌어들인 것으로, 이 내용은 《春秋左傳(춘추좌전)》僖公(희공) 28年條(28년조)에 보인다.
오늘도 고운 날 되시고 행복하십시오.~ -푸른솔(碧 松)- 행복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