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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갈라디아서 2:20)]-배영호 전도사(11월 6일)
□ 북한 정권은 350만 명의 북한 주민 목숨과 만수대 궁전을 바꾸었습니다.
- 저는 장로회 신학대 기독교교육과 4학년 재학 중입니다. 저는 북한 함경북도 을왕군 바닷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삼면이 바다여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제가 2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5살 때 새어머니가 3살인 여동생을 데리고 들어오셨고, 2명의 자녀를 낳게 되면서 4명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 8살까지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라다가, 북한법에 의해 아버지에게 들어가게 되었는데, 새어머니의 압박이 너무 심해서 9살 때 가출을 하고, 그때부터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또는 시장에서 소매치기 생활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 당시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제가 통제 안 된다며 함경북도 은성군에 있는 학원으로 보냈습니다. 학원이라고 하길래 그곳에서 공부를 잘하고 싶었으나, 그곳은 배움의 장이 아니었습니다. 가보니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첫날 먹은 밥이 반 그릇도 안 되는 옥수수죽이었습니다. 그리고 농장에 가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겨울에 강제로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봄에는 종자 콩을 심는데, 콩을 몰래 파서 날것으로 먹고, 겨울에는 김치 도둑질을 하며 살았습니다.
- 고난의 행군 시대에, 국가에서 배급을 끊고 학원에서 자체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학원에서는 옥수수가루에 밀가루를 소량 넣어서 식사로 주었습니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기에 억지로 먹었습니다. 그 한 해에 60명이 넘는 아이들이 굶어서 죽었습니다. 학원 뒷산의 살구나무가 있는 언덕에 60명의 시체를 묻었습니다.
- 너무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 학원을 도망쳐 다시 소매치기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전국의 상황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도시와 시골에는 불빛이 없는 암흑이었습니다. 역전과 골목에는 시체가 많이 있었고, 사람들이 가족을 버리고 나와 거지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집을 나와 역전에는 꽃제비가 널려있었습니다. 겨울에 비닐을 발에 묶고 다녔지만 발이 썩어들어갔습니다. 굶주림에 쓰러져가는 어르신도 볼 수 있었습니다.
- 북한 정부는 외신이 본다고 아이들을 잡아다 여관이라는 곳에 잡아두었습니다. 한 방에 40명을 가두고 겨우 목숨만 유지할 정도로 먹였습니다. 하루에 4-5명의 아이들 시체가 들려 나가 어딘가로 치우곤 했습니다. ‘어린이는 나라의 왕’이라는 북한의 외침은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가산을 팔아 쌀로 바꾸기 위해 팔았고, 집을 팔기도 했습니다.
- 장사라는 것은 고난의 행군 이후 좀 나아졌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장사를 못하게 했고, 오직 정부의 배급에만 의존하도록 했습니다. 장사를 하려고 해도 돈이 없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김일성 일가가 저희를 먹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일성 일가에게 초개처럼 모든 것을 바치며 국가에 충성한 사람들은 배급에만 의존했기에 더 어려웠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이라는 존재가 영원히 죽지 않는 신인 줄 알았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350만 명이 죽은 이후에 김일성의 말이 거짓이고, 세뇌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저희 집도 모든 것이 무너졌고,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에 데리고 왔던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두 동생을 키우다가 식량이 없어지니, 집을 없애고 탄광기숙사로 들어갔습니다.
- 제가 방학이 되어 아버지 집을 찾아가 기숙사 문을 열었습니다. 두 명의 동생과 아버지가 가지런히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차마 제가 왔다고 할 수 없어 문을 조용히 닫고 나오는데, 저의 셋째 여동생이 인기척을 듣고 깨어나 저를 찾았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후에 그 여동생은 엄마 찾는다고 역전에서 헤어지고 소식이 끊겼습니다. 막내는 장티푸스라는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 많은 사람이 죽어도 북한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와 헤어지고, 가족이 산산조각이 나도, 북한 주민이 3년간 먹을 수 있는 9천만 달러로 자신들의 우상숭배에 필요한 으리으리한 만수대 궁전을 건설하였습니다. 350만 명의 죽음과 화려한 만수대 궁전을 바꾼 것입니다. 북한 주민에게 준 것은 식량이 아니라 오직 법과 총이었습니다. 매 맞아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 먹을 것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가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 소매치기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중국에서 한 달만 소매치기 하자며 갔습니다. 6월 중순경 두만강 물이 불어서 힘들게 넘어가야 했습니다. 중국 도문이라는 곳에 도착했고, 다음날 도문 남시장에 들어갔습니다. 시장 아주머니들이 다 쳐다보는데, 북한 아이인 줄 금방 아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라고 하시더니 순대 파는 아주머니는 순대를 주고, 떡을 파는 아주머니는 떡을 주셨습니다. 밥도 먹여주고 옷도 입혀주셨습니다. 누구 하나 저희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참 고마운 분들이었습니다. 두 달간 소매치기도 못 하고 아주머니들 심부름만 하고 있었습니다.
- 하루는 시골에서 온 부부가 저희에게 북한에서 왔냐고 하면서 같이 시골에 가서 일하면 한 달에 70원을 준다고 하십니다. 1원이면 북한에서 빵 5개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습니다. 무작정 따라가서 1년간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분이 교회 집사님이었는데, 교회 나가자고 하시는 겁니다. 북한에서 교회에 대해 교육받은 게 있어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눈치가 보여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 버스를 타고 20여 분 지나 변방에 있는 작은 창고교회로 갔습니다. 내부에 빨간 천을 두르고, 십자가도 빨간색이었습니다. 좀 무서운 분위기였습니다. 젊은 청년은 없고 어르신들만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 하루는 일을 하고 있는데, 전도사님이 선교사님이 오셨다고 오라고 했습니다. 모든 선교사는 코가 큰 외국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만나고 보니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습니다. 만나서 포옹을 해주시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하는데 그 말이 너무나 따뜻했습니다. 중국 돈 500원을 주고 가셨습니다.
□ 중국에서 성경공부하며 사역훈련을 받았습니다.
- 교회에서 ‘예수님의 생애’라는 녹화테이프를 보여주셨는데, 저와 친구는 너무 감격해서 울었습니다. 이후에 중국 전도사님의 소개로 캐나다 한인교회가 주축이 되는 과수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북한사람 3-40명이 땅꿀을 파고 그 안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임현수 목사님과 캐나다 한인교인들이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북한사람들을 진심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수많은 물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봐 주었습니다. 그 시절 교회와 선교사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저희들은 살아가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가 사는 그 산에 캐나다 한인교회 청년들이 불을 피우고 밤새 찬양을 했는데, 그때 배운 찬양이 ‘나의 등 뒤에서’와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입니다. 사영리를 통해 저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책들을 저희에게 주었는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과 테이프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산에서 성경에 대해 배우고 싶었습니다. 선교사님과 그 청년들은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산에 사는 이모님의 소개로 중국 산동성에 있는 성경통독반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사역장에 약 3년 정도 머물렀습니다.
- 아침 6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하고, 아침 금식을 하고, 8시부터 11시까지 통독을 하고, 점심을 먹고 1시부터 6시까지 통독을 하고, 저녁 먹고 9시부터 10시까지 말씀 암송한 것을 검사받고, 이런 패턴으로 움직였습니다. 저녁에는 거의 매일 바닷가에 나가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아침에 날이 밝으면 웃으면서 함께 돌아오고, 기도와 말씀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그때 저의 목적은 오직 하나, 말씀을 배워서 복음을 안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저희 사역장에는 북한으로 파송 받은 분도 계셨습니다. 3년 동안 눈물과 회개를 함께 하면서, 북한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철야기도를 드리겠다고 기도하고, 에스더처럼 내 민족을 위해 죽어야 한다면 죽겠다고 기도했습니다.
□ 세 번의 북송과 2번 순교의 현장을 겪게 되었습니다.
- 2년 6개월 되던 어느 날, 당시 사역장을 책임지던 전도사님 북한 부부가 북경 어느 집회에 가셨습니다. 이분들은 붙잡히면 북한에서 총살감인 분들입니다. 사모님은 하루 두 끼를 금식하면서 순교를 위해 기도하시던 분입니다. 사모님의 눈빛은 일반인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했고 초롱초롱한 아름다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모님이 북경에 있는 공원에서 밤에 철야기도를 하시다가 중국경찰에 붙잡혔습니다. 모든 사역자들이 비상기도를 했습니다. 사모님은 북한 온성군 보위부로 북송되었습니다. 사모님이 항상 순교의 기도를 하셨기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두 달이 지나고 연변의 어느 자매님이 사모님의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보위부에서 “너는 당의 배려와 수령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서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냐?”고 물었답니다, “수령은 선물을 주고 공부하게 배려했지만, 예수님은 나에게 진리를 주셨고, 생명을 주셨다.”고 했답니다. 우리 사역장의 첫 순교자였고 믿음의 선배였습니다.
- 3년이 되었을 때, 저와 전도사님, 자매 3명이 산동성 바닷가에서 철야를 하다가 중국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수갑을 채우고 인근 파출소로 연행했습니다. 두 달이 지난 후, 북한 신의주 보위부로 붙잡혀 갔습니다. 도착 후 이틀이 지나서, 평남 보위부 차량이 오더니 전도사님은 끌려가 순교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순교였습니다.
- 저는 풀려났고, 두 번 더 북송이 되었고, 세 번의 북송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북한의 함경북도 회령의 전교리 교화소로 2년의 형을 받고 갔습니다. 교화소 신입반장이 “영호야, 여기는 지옥이야. 여기서 살려면 한 걸음을 걸어도 살얼음 딛는 심정으로 살아라.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소경 3년의 마음으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그곳에서 저는 공화국 창건 특사로 풀려났습니다.
- 다시 중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북한 주민을 무자비하게 잡았습니다. 한국 목사님의 소개로 북경의 성경통독반에 가게 되었는데, 3개월 후에 또 잡혀 북한으로 북송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남조선 도주라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거짓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함경북도 도 보위부로 이송되었는데, 그때 몸무게가 31.5kg이었습니다. 신의주 보위부에서 8개월, 온성군 보위부에서 5개월간 지내다가 도 보위부로 갔기 때문입니다. 도 보위부는 90%가 정치범 수용소입니다. 저를 조사했던 조사관은 중좌(중령)였습니다.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너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 그 사람들은 눈빛만 봐도 무서웠습니다.
- 저희 몸 상태는 걷지도 못할 상태였습니다. 의사도 소생불가라고 판단했습니다.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죽는 게 억울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성경공부한 것밖에 없고, 내 민족을 위해 기도한 것밖에 없는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시지? 하나님께 시름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중국에서만큼은 지켜주실 줄 알았는데.” 두 번째 북송까지는 원망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제가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왜 나를 시궁창으로 몰고 가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가 안 나왔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밤이 되고 잠을 청하면, 찬송 소리가 제 귀에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멀리멀리 갔더니’라는 찬송이 들렸습니다.
- 고문하는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고문하면서 웃습니다. 두려움에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육체는 아프지만 나의 마음은 더욱 강건해지고 주님이 함께하심을 알았습니다. 고통이 더이상 나를 두렵게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죽게 된다면 나에게 할 수 있는 두 가지가 허락되기를 소원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고, 성경책이 갖고 싶었습니다.
- 하루는 도 보위부 구류장에 앉아 있는데, 하나님이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안에서 저의 어렸을 때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도 보위부에는 타격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때리는 고문실이 있는데, 사방에 피가 터지는 곳입니다. 한 사람이 의자를 끌고 오더니,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고, 담배를 피우면서 “야 배영호 머리 들어. 너, 나 누군지 모르겠니? 나 배성일이야.” 이 친구랑 나는 어릴 때 앞뒷집에 살면서 너무나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이 친구는 명단을 보고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았지만, 감히 나를 아는 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 남조선 가려고 한 것 맞아?” 저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식당일 하다 체포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난한 집 아들이었지만, 그 친구는 뼈대 있는 보위부 집안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나타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친구가 저의 보증을 섰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난했고, 그래서 중국에 돈벌러 간 거고, 남조선 갈 정도로 정치사상이 변절될 친구가 아니라고 해서 1년 2개월 만에 풀려난 것입니다.
- 그리고 다시 보안성으로 넘어왔고 재범이라서 다시 4년 11개월의 선고를 받아, 함경북도 전거리 교화소로 들어갔습니다. 전거리 교화소 갈 때 몸무게가 32kg이었는데, 2007년 만기석방으로 풀려났을 때, 60kg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살아서 들어갔다가, 죽어 나오는 곳인데, 저는 거의 죽어서 들어갔다가, 살아서 나온 경우입니다.
□ 한국으로 와서 8년간 하나님을 멀리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 교도소에서 나와 11월에 중국으로 다시 건너갔습니다. 저보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저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제가 중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데려왔습니다. 나에게 한국행은 또 다른 모험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잡히면 어떻게 될지 너무나 두려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틀 금식기도를 하면서 기도하는데, 욥기 8장 7절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할 것이다.’ 12월에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한국으로 왔습니다.
- 대한민국 공항에 도착했는데 기쁘지 않았습니다. 비행기 하루면 오는 이곳을 몇 달을 거쳐서 와야 했고, 사람처럼 살아보려고 대한민국으로 오다가 북송되어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나고 슬펐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렇게 불공평하실까?’라고 생각했습니다.
- 한국에 와서 바로 신학을 하진 못했습니다. 공부할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매일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술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거제도 대우조선소에서 일을 하며 8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너무 답답해서 바위에 올랐는데, 그 바위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저만 아팠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내가 너무 고통받고 있으니, ‘영호야 됐다, 가자!’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바위꼭대기에서 2시간 동안 회개 기도를 하고, 사역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 장신대를 다니면서 아내, 교화소 형님, 학원 친구를 만났습니다.
- 저는 두 번 교화소에 갔는데, 인신매매범으로 걸려 15년 형을 받은 형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중국 하얼빈 쪽에 잠시 계셨던 분입니다. 하루는 감자 두 알 밥을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그 형님이 저를 본 것입니다. 나중에 그분이 휘파람을 부는데, ‘주의 그 사랑 한량없다.’ 그 찬양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서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형님과 저는 “우리는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나누었습니다.
- 제가 장신대 다닐 때 오후 채플 시간을 마치고 페이스북을 보았는데, 모르는 사람이 문자를 보낸 것입니다. 교화소에 있을 때 제 별명은 성이 배씨라 ‘또르배’였습니다. ‘또르배, 나 누구누구야.’ 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교화소에서는 머리를 깎고 살아서 긴 머리를 보니 몰라본 것입니다. 전화번호를 보냈길래 전화를 했습니다. 나 교화소에 있던 누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형님이 페이스북에 내 이름을 검색해서 들어온 것입니다.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 다음 날 아내와 함께 수원에 가서 만났는데 10분 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안고만 있었습니다. ‘형님, 살아와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가끔 기도하면 형님 생각나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만나게 해주시니 너무 고맙다.’고 했습니다.
- 북한 학원 친구도 만났습니다. 한 여자 후배에게 나는 북한에서 종성학원이라는 곳에서 학원생활을 했다고 하니, 자기가 아는 사람도 종성학원 다녔다고 해서 전화 연결이 되었습니다. 북한의 학원은 한 개 반만 있어서 서로 다 압니다. 학원 생활할 때 고난의 행군을 같이 겪었는데, 그 친구가 한국에 먼저 왔습니다. 한동대를 졸업하고 한국 여인을 만나 잘살고 있었습니다. 평택 역전에서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지금 학원 친구도, 교화소 형님도 이 기도회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 저의 아내는 장신대 1학년 때 만났습니다. 저는 너무 가난했는데, 식권으로 밥 사 먹는 것도 아까웠습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갈 때 빚을 많이 지고 들어갔습니다. 한 선배님이 저를 좋게 봐주셔서 아내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때는 노가다를 하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정말 볼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가난하게 해주시는지 불만도 있었습니다. 35살에 학교 들어갔는데 동기들은 20대라서 이야기하기도 힘들고, 일하다 보니 학교생활에 집중하지도 못했습니다. 아내는 신앙 하나만 보고 왔습니다. 집사람이 모은 돈으로 결혼을 했고, 담임목사님이 100만 원 장학금을 주셔서 반지 하나를 마련했습니다. 아내가 가진 인천의 좋은 아파트를 팔고, 서울 노원구 상계동 11평 빌라로 이사를 왔습니다. 아내는 당시 8살 된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참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겁니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이 생기고, 생선이 먹고 싶으면 생선을 누가 주시는 겁니다. 2년 동안 외식 안 하고 정말 알뜰하게 살았습니다.
□ 새터민을 통일 복음화 군사로 세워 주십시오.
- 저는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리고 통일도 원합니다. 그러자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세상의 풍파를 막아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못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자 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 저는 대한민국 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교회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통일세대 탈북민들을 신앙인으로 잘 키워 준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지도자 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북한 사역은 기도와 말씀의 은혜가 아니고는 해낼 수가 없습니다. 남북한이 다른 문화, 다른 교육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양쪽 다 힘듭니다.
- 나는 하나님께서 북한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압니다. 현재 북한이 처한 상황이 하나님을 버린 대가라는 것도 압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보니까, 북한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시어, 저 같은 사람들을 미리 보내신 것입니다. 북한이 아직 건재한 것은 북한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순교했던 당신의 자녀들 때문입니다. 자기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세계의 크리스천들이 있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북한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 통일은 말씀과 기도와 헌신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통일이 되면, 저는 교회를 짓고 싶습니다. 영국의 조지뮬러처럼 내 민족 북한의 어린이를 위해 기도하는 주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못 먹고, 못 입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잠자리를 주고 싶습니다. 말씀으로 양육해서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내게 주신 비전이고 사명입니다. 북한에 길을 열어주시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 땅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말씀 하나 가지고 북한에 들어가는 주님의 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 저는 신학을 하면서 황금길이 열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키지 못했던 사랑하는 동생들과 추운 날 비닐로 발을 감싸고 다녔던 여자아이, 따뜻한 밥 한 번 먹어보지 못한 어린아이들, 굶어 죽어야 하는 이유도 모르고 죽어간 아이들, 복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십자가를 지고 간 벗들과 그들과 함께하지 못한 나의 부족함을 슬퍼하며 신학을 하고 있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을 북한으로 향해 주십시오. 대한민국에 와서 신학을 하고 있는 학생들과 교회를 개척한 탈북민 목회자들을 기도와 물질로 섬겨주십시오. 총과 폭탄으로 저 분계선은 허물 수 있겠지만 저들이 받았던 상처와 아픔은 결코 치유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저들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 지금 새터민교회와 함께하시면, 통일을 앞당기는 지름길이 됩니다.
- 현재 보여 드리는 화면은 전국의 북한교회 숫자입니다. 통일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이곳에 있는 탈북민과 함께하시면 됩니다. 이미 우리 안에서 작은 통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새터민교회와 함께하시면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신학을 하고 있는 분들이 100여 분 되십니다. 이분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아르바이트 하면서 어렵게 신학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장차 복음의 통일을 향해 달려나갈 기도의 군사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과 관심이 저희들과 함께 할 수 있고, 다가오는 통일을 위한 귀한 징검다리가 될 것입니다.
□ 결어 및 기도
- 짧은 시간 동안 말했지만, 그 삶이 얼마나 외롭고 처절했겠습니까? 지내고 보니 하나님의 섭리였지요. 하나님이 모진 고난을 통해 복음을 듣게 하시고, 한국 땅에 와서 신학을 하고, 앞으로 통일 한국을 위해 쓰임 받을 용사로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북한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찬양을 드리겠습니다.(사망의 그늘에 앉아)
- 지금 이 시간, 우리는 나 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1만 4천여 교회 성도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북한의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그 땅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 북한에는 약 3천여 교회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시 북한 땅에 그 무너진 예배당이 세워지길 원하십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이 그 예배당을 허물고 만수대를 짓고 김일성, 김정일의 동상을 세워놓고 그곳에 와서 절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무너지기를, 독재정권이 무너지기를, 다시 한번 성령의 강력한 불이 임했던 그곳 장대현교회가 복원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눈물로 기도합니다. 주님, 그들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그날이 임하기를 원하고, 수용소에 갇힌 많은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허락해 주옵소서. 구체적으로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 이제 저 북한에 독재정권이 무너지게 하시고, 고레스와 같은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주셔서, 북한이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가게 도와주시고, 복음 안에서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복음 평화통일을 위해 이렇게 많은 새터민이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오게 했습니다. 그들이 이곳에서 예수를 만나고 영생을 얻게 하시고, 왜 이곳까지 오게 하셨는지 부르심의 사명을 깨닫게 하옵소서. 북한이 개혁과 개방의 길로 가는 그날에 복음의 전사가 되어 복음의 횃불을 들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주의 복음을 전하여 그곳에 주님의 교회들이 세워지게 하옵소서. 여러분 다 같이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새터민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이제 저 북한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북한 땅에 십자가의 보혈을 덮어 주시고, 성령의 강력한 바람을 불어주시어, 주체사상이 사라지게 하시고, 독재정권이 무너지게 하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고레스와 같은 지도자를 세워주셔서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무너진 3천여 교회가 회복되게 하시고,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이 사라지고 장대현교회가 다시 세워지게 하옵소서. 남북한의 교회가 하나 되어 함께 통일기념 대성회를 갖는 날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남북한의 교회가 하나 되어, 이 마지막 때에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한국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이 땅의 새터민을 올려드립니다. 방황하지 않고 잘 정착하도록 도와주시고, 이곳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옵소서. 주님 만나 구원받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의 소명을 깨닫게 하셔서. 그들이 복음의 용사가 되어 통일되는 그날, 복음의 횃불 들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여 그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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