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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6.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토요일. - "자, 우리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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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6. 사순 제3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자, 우리는"
오늘 호세아서는 "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자"라는 말은 뭔가를 시작하려고 할 때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말을 하려고 하거나
누군가와 일을 하려고 할 때 다른 데로 향하여 있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하는 말이지요.
그래서 한 번으로는 시선이 돌아오지 않으면
"자, 자, 자"하며 여러 번 주위를 환기시키지요.
아무튼, 호세아는 "자"라는 말로 말을 시작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소를 하는데
그 호소의 내용은 주님께 돌아가자는 것과 주님을 알아드리자는 것입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저도 오늘 호세아처럼 여러분에게 "자"하며 호소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제 호소를 귓등으로 흘리지 않고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번 대통령 선거 때 참으로 많은 분이 자신이 마치 후보이거나 그 운동원인 듯
과하게 선거에 몰입을 하고는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 분들은
마치 자기가 승라한 듯 승리에 도취해 있고 그 반대인 분들은
너무도 허탈해하고, 분노하고, 멘붕 상태인데 그렇지만
"자, 이제는 주님께 돌아갑시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도록 합시다.
그리고 어머니인 지구가 환경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고 갈등과 전쟁이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데 이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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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6. 사순 제3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3월 26일 토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9.14)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는 겸손
근엄한 바리사이는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세리를 깎아내렸지요. 결국 그는 교만의 죄로 자신의 의로움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반면 거룩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 세리는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지요. 그는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비를 간청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태도로, 가슴을 치는 몸짓으로, 자비만을 구하는 간청으로 스스로를 고발했습니다. 그러니 교만으로 망해 버린 바리사이를 교훈 삼아,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거만한 몸짓은 의로움을 앗아 가고, 건방진 자기 자랑은 그가 받을 상을 앗아 갔습니다. 하느님께서 판결을 내리시기도 전에 자기를 치켜세우며 스스로 판결을 내리다가 비천한 죄인보다 더 못한 자로 심판받았지요. 결코 그대를 다른 사람 앞에, 그가 아무리 나쁜 죄인이라 해도, 내세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겸손은 아주 무서운 죄를 지은죄인도 구원합니다.
-대 바실리우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불타는 자음
성령이 문자 아래에서 감추어진 의미를 계시할 적에, 말씀의 옷인 성경은 예수의 옷과 육체처럼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예수의 “꿰맨 데 없는 겉옷(요한 19,23)은 성경의 단일성을 뜻한다.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께서 우리의 땅 위에 그리신 그림(요한 8.6)은 성경의 겸손함을 뜻한다. 바로 이 모든 것이야말로 거룩한 자음들이 우리에게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이 자음들을 에제키옐의 바짝 마론 뼈들과 비교했다.
이 자음들은 또한 “그의 뼈가 하나도 꺾어지지 않으리라”고 기록된 그 어린양의 뼈들이 아닌가?(요한 19,36: 출애 12,46).(101)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영적 수련 성월 3주간 감사/찬양 ✝️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23-26장
✝️ 1토요일 이웃 종교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
이 스라엘 예언자들의 유일신 신앙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역사의 기원과 시간에 대하여>(1949년)라는 명저에서 인류 문명의 정신적 위대한 기초들은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600여 년 동안에 그 기초가 확고하게 놓여지게 되었다고 보고, 그 시대를 인류 문명의 ‘차축 시대'라고 불렀다. 이 시기에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했고, 인도와 근등에서는 고타마 싯다르타, 마하비라, 조로아스터가 탄생하였고, 중국에서는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이 출현했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 기라성 같은 예언자들이 활동하였다.
야스퍼스가 이 시대를 인류문명의 ‘차축시대'라고 명명하는 이유는, 그 시대 이후에도 물론 인류 문명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해 왔지만, 그 이후 시대 문명은 본질적으로 볼 때는 우주와 인간과 궁극적 실체와의 관계성, 인간다운 삶의 윤리성, 시간과 역사에 대한 비전, 죄와 죽음 등 실존적 부정성을 돌파하는 지혜와 용기 등이 ‘차축시대'에 출현한 위대한 사상가들이 설파하고 가르친 그 정신적 자양분을 토대로 한 것이며, 실질적으로는 그들이 도달한 정신적 . 영적 수준을 오늘날에도 능기히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원전 1250년 무렵 이집트에서 나와 40여 년간 광야를 유랑한 뒤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주하고나서 약 200년 동안 왕을 두지 않은 채 정치적 신앙 공동체인 ‘지파동맹' 시대를 거쳐 욍정 시대에 이르게 되는데, 모세 시대에 확고하게 정립된 유일신 신앙 전통은 이 시기 동안 예언자들의 활동을 통해 그 맥을 이어가게 된다. 이와 같은 예언자들의 정신을 대표할 만한 세 사람이 아모스, 호세아, 미가인테 이들은 모두 기원전 8세기 무렵 에 활동한 예언자들이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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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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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6.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거듭되는 걱정, 불안,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분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부정적 생각에 스스로에 대해서 늘 불만족스럽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어느 신부님을 찾아갔고, 신부님은 이분의 말을 듣고 “당신은 교만한 사람이에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누구나 갖는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감정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고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완벽한 감정을 취해야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한 삶입니다.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 교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긴 예수님 앞에 고개를 숙이며 나왔던 이들은 자기 부족함을 모두 인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부족한 자기 모습을 숨기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교만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으로 자기 존재가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받을 기회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세리는 동족에게 세금을 거둬들여서 로마에 건네고 있었기 때문에, 매국노라는 소리를 듣는 공적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리의 가족은 유다인들의 공동체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법정에서 증언할 자격도 없었습니다. 하물며 세리 본인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성전에 기도하러 갔지만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서서 기도했습니다. 서 있어야 그만큼 하느님께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리는 팔을 펴서 하늘을 향하거나 두 눈을 우러러보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있기에 감히 하늘을 향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리에 앞서 등장하는 바리사이의 기도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선택은 누구였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
오늘 제1독서의 호세아 예언자도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호세 6,6)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를 내세우는 열심보다는 자기를 낮추는 진정한 회개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리사이의 모습을 간직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자기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 자기 생활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자기 생활 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단죄를 하는 사람, 세상일을 잘해서 자기는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 바리사이의 모습입니다.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주님께서 좋아하실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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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며 한 권의 책이다. 얼굴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오노레 드 발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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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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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6.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보는 눈’에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한편에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다른 편에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는 ‘타인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한편에는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다른 편에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는 눈이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말로 기도하지만, 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바리사이는 혼자말로 기도했습니다.”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분을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곧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고. 회개의 마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잖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중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교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주님!
낮추는 이가 되게 하소서.
타인의 평가나 꾸짖음을 물리치지 않게 하시고,
인정할 줄을 알고 굽힐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을 차별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게 하시고,
존중하고 존경하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앞에 서 있는 자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내세우지도, 숨기지도 않게 하시고,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구하게 하소서.
오,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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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6.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겸손한 죄인」
성직자가 좋아하는 신자는 우거지 신자이고 싫어하는 신자는 원불교신자랍니다. 우거지는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적인 신자를 말합니다. 원불교는 원망하고, 불평불만하고, 교만한 신자랍니다. 기왕이면 우거지 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올바른 사람이다.’ ‘나는 아무개 보다 더 낫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해롭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산다고 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게 된다면 알맹이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온갖 선을 행하고 신앙의 규정을 철저히 지켰더라도 하느님의 눈에 들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없고 오로지 냉혹한 비판만 있는 사람이 더 무서운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와 “저는 세리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자랑하는 바리사이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누가 하느님께 의롭게 인정받은 사람인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집니다.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과오요,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오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속마음을 보십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의인처럼 살아도 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겸손한 죄인보다 못합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후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는 한 말씀에 순명한 후 주님을 모시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고기가 보이지 않고 주님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카5,8)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나면 죄로 얼룩진 과거의 삶이 보이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미래의 삶이 보일 뿐입니다. 주님의 소명이 나를 재촉합니다. 나의 허물이 나의 발목을 잡을 수 없고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모두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밖에 있으면 쉽게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밖에 있는 큰 장애물보다 안에 있는 장애물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장애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장애를 없애 주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응답함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행여 자기만 옳다는 과오나 남을 무시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은총의 사순절이 되길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라마크라슈나 우화
한 수도원에 유명한 수사님이 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수도원 가까이에 매춘부의 집이 있었습니다. 수사님은 사내들이 매춘부의 집에 들어갈 때마다 뜰에 돌을 하나씩 주워 모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돌무더기가 점점 커지자, 수사님은 매춘부를 불러 그 돌무더기를 보여주며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매춘부는 두려움에 떨며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날 밤 죽음의 천사가 찾아와서 수사님도 매춘부도 함께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매춘부는 천국으로 가고 수사님은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수사님은 항의 하였습니다. 일생을 금욕과 절제 속에서 하느님을 흠승하며 살았는데 왜 지옥으로 가야 하느냐?
일생을 간음죄만 짖고 함부로 살았던 여인이 천국으로 가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느님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수사님, 하느님의 심판은 공정합니다. 수사님은 평생 수도자라는 자만심과 명예만을 지키며 살면서 죄만 가릴 줄 알았지 사랑을 베풀 줄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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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6.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요 예지다”
오늘은 진정성을 화두와 고리로 삼아 묵상한 강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경고하시는 뜻으로, 기도의 두 유형을 예시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죄악을 숱하게 저지르면서 겉치레로만 의로운 척 하는 위선자의 기도보다는 비록 허물이 있어도 진정으로 통회하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이들의 기도가 하느님께 더 호소력이 있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어제의 전례에서 기념한 성모 영보의 신비도, 거짓 목자들의 가식적인 기도보다는 아나빔들의 진실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결과였습니다. 구약시대에 왕들과 궁정 예언자들과 성전 사제들은 수많은 소와 양들을 번제물로 바치면 그 제사가 하느님께 합당하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제물과 제사를 반기지 않으셨다고 호세아 예언자는 일러주었습니다. 그보다는 신의를 지키고 하느님을 찾는 예지야말로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은 안중근 토마스가 순국한지 112주년되는 날입니다. 1910년 3월 26일, 그는 동양 평화와 대한 독립을 외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위선적인 극동평화론을 앞세우며 일본 군국주의 세력은 당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이미 열 다섯 가지나 되는 죄악을 저지르며 침략의 마수를 뻗쳐오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는 하얼빈 역 광장에서 이토를 척살한 후 수감된 뤼순 감옥에서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동양 삼국이 형제처럼 살아가는 동양 평화를 꿈꾸며 미완의 동양평화론을 저술했고, 그 글은 동양평화를 위해 하느님께 바쳐드리고자 자기 목숨과 맞바꾼 제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 집행을 앞두고 젊은 시절 함께 황해도 일대를 다니면 복음을 전했던 빌렘 신부를 청하여 임종 고해성사를 보았고, 마지막 성체도 받아 모셨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백여 년이 넘은 지금, 그의 진정성에 대한 평가는 대략 세 가지로 발견됩니다.
첫째는 그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용감하게 척살하여 일본 군군주의의 악행에 맞서 저항했다는 의협심과 진정성입니다.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일본 군국주의는 패배했고 안중근은 역사의 위인으로 남았습니다. 일본은 현재에도 과거의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려는 꿈을 실현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세상은 점차 일본의 야욕을 눈치채고 있으며 그들의 속셈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군국주의 일본을 꿈꾸는 한 그 꿈은 또 다시 처절하게 실패할 것입니다. 일본의 위세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백여 년 전에 안중근은 역사의 정의와 민족의 의식을 일깨워준 선각자였습니다. 그가 이토를 척살했지만 일본인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본 왕을 천황이라고 존중했다는 진정성이 알려지자 그를 숭모하는 일본인들의 모임이 수십 년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그가 꿈꾸었던 동양평화의 선진성과 진정성입니다. 그가 백 년 전에 꿈꾸었던 국제 평화가 그의 사후 반세기가 지나면서 유럽에서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서로 적이 되어 살상과 파괴를 사상 최대 규모로 저지르고 나자, 유럽 여러 나라의 정치인들이 더 이상 적대시하며 전쟁하지 말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처음 제안한 이래, 1950년에는 프랑스 로베르 쉬망 외상과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이 호응하여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경과를 거쳐서 2004년에 결성된 유럽 연합은 25개 회원국의 인구 4억 5천여 만 명이 마치 한 나라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안중근이 꿈꾸었던 동양삼국인 한국과 중국과 일본, 더군다나 남북한은 여전히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어서, 언제 동북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올른지 모릅니다. 유럽 연합처럼 동북아시아의 공동체로까지 발전할른지는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중근은 평화의 꿈을 꾸었고 그 꿈을 후대에 남겨 주었습니다.
셋째는 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을 일치시키며 살았고, 죽는 순간까지도 천주교인으로 죽고자 했던 안중근 토마스의 치열했으면서도 일생토록 죽는 순간까지 진정성을 보여준 신앙입니다. 백 년 전 뮈텔 주교로부터 살인자로 단죄되었다가 1980년대에 김추환 추기경이 의인으로 복권시킨 후부터 지금까지 천주교 신자들 안에서 신앙인으로서의 안중근 토마스의 면모는 서서히 알려지고 있는 중입니다. 한때는 시복 청원 대상으로 오르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입교하기 전에 순교자들의 신앙을 담은 서적 120권을 다 읽고 나서 영세한 지성인 신자이고, 고향 청계동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여 전국 최고의 교세 신장 성적을 기록한 관록 있는 선교사였습니다. 그를 흉악한 살인범으로 취급하던 뤼순 감옥의 간수나 검사, 법원장까지도 그의 인품과 신앙을 존중하여 그들 최고의 존칭인 ‘선생’으로 부를 만큼 그의 마음과 행실은 진정성이 있었고 일본인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는데,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진정성으로 살아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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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6.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면서 ‘신청서’를 작성합니다. 신청서에 인적사항을 적으면서 성당에 온 이유를 묻습니다. 친구의 권유를 받아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온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싶은데 이왕이면 성당으로 오고 싶어서 왔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음에 평화를 얻고 싶어서 왔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서 왔다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생활의 목적을 알게 됩니다. 성당에 다니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생활과 그릇된 신앙생활을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헌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헌금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정성된 마음으로 봉헌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할 때도, 단식할 때도, 자선을 베풀 때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면 이미 상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아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한국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도 미국에서 제일 부자인 사람에 비하면 가난한 것입니다. 희생과 겸손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성인들의 삶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입니다. 키가 180인 사람도 2미터인 사람들 앞에서는 작은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세상에서 너무 쉽게 좌절하기도 하고, 교만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상대적으로 평가하거나, 순위를 정하시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들의 모습을 사랑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거짓 희망을 보게 됩니다.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좋아지고, 국민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고 하는 말들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기도와 실천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선하고 착한 사람들은 거두어 주신다는 확신을 통해서 현실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이겨내는 것이 참된 희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희망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배가 항해할 수 있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이 빠지면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면 살이 빠지고 행복해진다고 말을 합니다. 생활이 안정되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생활도 안정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행동 없는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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