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May 20th Saturday:
스케치 장소 : 맹사성 고택.
Skech Place is around the House of Maeng-Sa-Sung Old Residence ( Josun Dynasty, Historical site )
, which located in Asan city, Chungcheong South Province, about 100 km distance away from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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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Work:
* Soft Pastel on Canson Paper
* Size : # 10 M ( 53.0×33.3 cm)
* Objects : 고택에서 바라보는 능선 풍경 (View of the ridge from the old house)
사진으로 최영장군( 고려시대 건축물을 특징을 의식적으로 사진으로 담고 공부하려 합니다 , 조선이 1392년 시작이니
이건물은 2023 - 1380 = 623
년이나 된 건축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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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Timelines:
08:35 am 압구정 출발 장소 도착
09:15 아산 목적지로 출발
11:30 am 스케치 장소 도착,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 같다.
11:45 am : 다시 Lunch 식당으로 이동 , 메뉴는 순두부라고 합니다...
12: 20 pm 순두부 + 먹걸리 잘먹고 다시 맹사성 고택으로 이동
13:20 맹사성 행단 산책및 사진
촬영. 입구로 내려가서 스케치 시작 계획..
13:45 pm : 산책하고 사진 정리하다 보니 늦게 스케치 시작
15 : 15 pm : 구도 무척 마음에 드는 것을 대충 ..
13: 45 스케치 시작, 구도는 새로운것을 선정해서 그렸는데 4시10분에 미완성으로 마치고...집에 와서 어제 일요일 마음잡고 했는데.. 기대가 컸는지.. 만족할 수준을 아니었다.. ㅠㅠ 실력이 못미치는 수준 깨닭고 마무리...
16:30 pm 맹사성 기념관 구경
" 괘장" 이라는 것 처음보고.. 아래 인터넷 검색 정보 참고로 올렸다.
화구 정리하고 고불 맹사성 기념관 을 보았다. 청백리에 대표적 인물이라는 것이 생생히 예를 들은 자료 전시..
청 은 맑다는 것+ 백은 어떤것에도 물들지 않는다 라는 의미+ 리 는 벼슬아치 다.
영어로 해설한 단어들을 공부해봅니당**
Ideal government official who is skilled, upright ( 곧은, 똑바로 의마) frugal, ethical, faithful and righteous ( = 청렴,근검, 도덕,경효, 인의 , 정당함...)
16:10 pm 맹사성 기념관 구경
" 괘장" 이라는 것 처음보고.. 아래 인터넷 검색 정보 참고로 올렸습니다..
16:30 pm : Leaving for Seoul
17: 50 pm : 버스는 안성 지문리를 통과중 잔여거리는 62km 앞으로 1시간 20분 더 가아한다
ETA 20:00 pm 예상..
18: 15 pm 죽전에서 쉬었다가
무지하게 빨리 달려 왔습니다.
Tom & Tom Coffee Take-out
잔여 거리 25 km 40분 소요
ETA 19: 10 pm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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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맹씨 행단(맹사성 고택)
맹사성 고택은 설화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배방산을 동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수백 년간 무사히 보존되어 온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 모습을 간직한 집.
고려 말 충신이던 최영 장군이 살던 집으로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가 된 맹사성에게 그 집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牙山 孟氏杏 맹씨행단은
광덕으로 가는 길가의 중리 마을 중간에 있다. 이 마을은 설화산 주봉이 북동 방향으로 이어져 내려오다 양지 바른 들판을 감싸 안은 지형에 생겨났다. 이 마을은 몇 채의 한옥들이 남아 있고 신창 맹씨
들이 중심이 되어 살고 있는 마을
또한 중리 초등학교 옆에는 맹사성 선생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집안의 공덕비가 비각 안에 잘 모셔져 있다. 이 길을 따라 맹씨 집안에 들어가려면 설화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흐르는 다리를 넘어야 한다.
집 앞에는 커다란 회화나무와 거대한 향나무가 서 있어 오랜 세월, 이 터전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대문은 약간 높은 대지 위에 있어 계단을 올라가야 되는데, 좌우에 2단의 화계를 만들어 향나무와 다양한 꽃을 심어놓았다.
봄과 여름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면 바깥마당이 온통 꽃의 군무가 시작된다.
대문채의 규모는 다섯 칸으로, 좌우 반 칸 크기의 창고와 아궁이를 두었다. 대문채는 행단으로 올라가는 방향에 두 칸의 방을 두었고, 우측에는 빈지널을 이용한 곡식창고와 창고가 있다.
대문채에 굴뚝이 따로 없고, 화방벽 중간쯤 높이에 암키와 한 장 크기로 구멍을 내어둔 것이 흥미롭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안채가 나타나는데 맹사성 선생의 21대손이 기거하고 있다.
용트림하는 듯한 느티나무가 인상적인 대문에서 본 바깥마당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높은 단이 형성되어 있어 사랑채에서 안채를 바라보면 지붕만 겨우 보인다.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사랑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끝까지 올라가니 우측에 아름드리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먼저 시선을 잡아끈다. 이 나무는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에 고불 맹사성 선생이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집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는 문화재청과 문중의 말을 들어보면.
이 집은 원래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이 충청도 도순문사의 휘하에서 왜구를 무찔러 전공을 세우던 때에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최영 장군은 공민왕 때 조일신의 난, 흥왕사행궁의 변란 등을 평정하고 홍건족의 침입을 격퇴시켰는가 하면, 고려 우왕 2년에는 왜구까지 무찔렀다 한다. 공을 인정받은 최영 장군은 철원부원군과 수문하시중으로 임명되면서 개성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는 이 집을 손주사위인 맹희도(孟希道, 맹사성의 부친)에게 물려주었다. 그때부터 이 집은 신창 맹씨의 집이 되었다 한다.
맹사성은 고려 우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호는 고불(古佛), 시효는 문정(文貞), 본관은 신창(新昌)이며 고려 전교부령(典敎副令)을 지낸 맹희도의 아들이다. 대사헌으로 일할 때 평양군 조대림을 신문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죽임을 당할 뻔한 적도 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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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 孟思誠
본관 신창(新昌).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 ·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檢閱)을 거쳐 전의승(典儀丞)·기거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1406년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되었다.
1408년 대사헌에 오르자 왕의 허락도 없이 부마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韓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상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풀려나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거쳐 1416년 판서(判書)로 승진, 호조(戶曹)·공조(工曹)를 거쳐 1419년(세종 1)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27년 우의정에 올랐다.
1429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이듬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 1431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하고 1435년 노령으로 사임하였다.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다. 남루한 행색으로 수령(守令)의 야유를 받았는데, 도망하던 수령이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작품에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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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장 几杖: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왕조에서 70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들에게 내린 하사품.
고려시대까지는 자료의 한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시대의 안석은 양쪽 끝이 조금 높고 가운데는 둥글고 오목하였다. 지팡이의 머리는 비둘기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국가에서 궤장의 하사는 연로한 대신을 극히 우대하는 예법으로서 받는 사람들이 큰 영예.
신라시대에는 70세로 치사(致仕)하는 대신들에게 궤장을 내리는 제도가 있었는데, 김유신(金庾信)이 664년(문무왕 4)에 처음으로 이를 받았다. 고려시대에는 치사에 이른 신하들에게 계속 정사를 보게 할 때 궤장을 하사하였다. 강감찬(姜邯贊)·최충(崔冲)·최충헌(崔忠獻) 등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조선시대에는 벼슬이 1품(찬성 이상)에 이르고 나이가 70세 이상으로서 국가의 크고 작은 일 때문에 퇴직시킬 수 없는 자를 예조에서 왕에게 보고, 궤장을 내리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이를 받은 사람이 매우 드물었고, 후기에 이르러 홍섬(洪暹)·이원익(李元翼)·임당(林塘)·이경석(李景奭)·권대운(權大運)·허목(許穆)·남공철(南公轍)·김사목(金思穆)·민치구(閔致久) 등 소수의 사람들이 이를 받았다. 궤장을 하사할 때는 아울러 잔치를 베풀어주었으므로 더욱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일설에는 고려의 권신 최충헌이 나이가 치사에 이르자 오래도록 권력을 잡을 목적으로 편법으로 이 예(禮)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때문에 늙어서도 치사하지 않고 궤장을 받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실상 궤장제도는 그 전대부터 시행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