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I 권성훈
보도블록이 모르는 이유
권성훈
금이 간 빗방울들이 모여드는 골목
지층의 말로 입을 덮고 있는 보드블록
고여 들면서 적요하게 번져오는 수액처럼
그사이 젖지 않을 만큼 잦아들고
한 번도 새기지 못한 축축한 이별을 나누어 가졌다
그대로 있겠다는 응답뿐인 약속을 베어 물고
떨리는 살점을 파고드는 틈새로 쓸어 담는다
거기서 닫힌 것이 있는데 열어본 적 없는
서로를 이어붙이며 만났던 조각난 서약이
불안한 퍼즐같이 맞춰지지
통행을 위해 통하는 그래서 머물지 못했던
애초부터 일상을 풀어내거나 인도하지 못하는
꿈을 나올 때 씹다 버린 껌처럼
퉁퉁 부어오른 표지판 배치같이 일그러진 변형도
아직 채우지 못한 상처로 아문 구상물을 붙들고 있다
나란히 안쪽에서 생겨나 바깥으로 좌측도
우측도 모르는 각도를 포갠다
성씨들의 모국어
권성훈
참이슬을 마시다가 참이 이슬의 성씨라는 것을 알았다
참은 사실이나 진리에 어긋남이 없이 옳고 바른 것
김씨도 이씨도 박씨도 참이슬 앞에서는
참으로 고개 숙여 가는
한잔의 사람 한병의 사람
탐욕을 이어온 성씨를 버리고 나서
원래 성씨가 없던 족보의 빈칸으로 간다
모두가 여백 위에 뒤섞인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모르고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고
동그랗게 맺힌 이슬 같은 사연만이 빈 병의 증언이 된다
오래 참아온 울음을 웃음으로
고이 간직한 부끄러움을 자랑스러움으로
참사람을 힘주어 주문한다
불안도 치욕도 건배로 꺾고 또 꺾는
거기서 누구나 흔들리며 다시 태어난다
진리값이 높아 갈수록, 참나
명제로 통하는 두 병 세 병 진열되는 어둠을
이미 짙어진 참으로 밝히면서 돌아가라
지금은 습득된 언어를 잊어가며 모국어를 찾아가는
모두가 서약서 없는 맹세로만 충만할 때
유령 노래방
권성훈
모든 가사들이 주술같이 드나들며 흉기로 찌르는
아무도 없지만 아무나 있는 방
구석구석 점멸하는 눈빛을 숨길 수 없었던 거야
얼마나 많은 감정이 사라지고 돌아오며 재생되는
서로가 서로를 머금고 삼키며 뱉어내야 했던
마취의 밤은 아직도 거기에 살지
이 별에서 저 별로 어두워 질 때까지 반짝이다
어디에도 살지 않기에 어디에나 살고 있는
유일한 당신과의 안식처
색이 바래가는 소파와 유독 사랑이 많이 구겨진 노래책
지문으로 흘러내리는 눈자위가 가물거려
한 여자가 부르는 노래를 한 남자가 듣지 못하는
주문에서 생략된 소리보다 가벼워지거나 무거워지네
같은 시간 다른 곳에서도 자라나
퍼져가는 화음으로 중력에서 벗어나고 있으니
오늘 만난 당신을 어제 부를 수 있는 것처럼
내일 부르던 당신을 오늘 만날 수 있는 거지
비누의 환생
권성훈
어제보다 줄어든 아침 비누
보관 중이던 해가 돋는 쪽으로
당신을 부화시킨다
손바닥에서 빠져나간 물거품 가면을 쓰고
날마다 우리는 고개 숙인 할로인 축제
방울방울 같으면서 조금씩 다르게 변해가는
방금 알에서 태어난 눈꺼풀로 풀려난다
무성하게 증식되는 길들어진 소란을 필사하며
흔들리는 촉수에 갇힌 표정들
배회하는 방향같이 가질 수 없는 속도로 껌벅이다가
봄날 실핏줄같이 제 위치를 찾아간다
거울 앞에 묻어버린 침잠함을
잊지 않기 위해 잃어버리는 한때 한때를 벗기며
돌아오지 않을 뒤축처럼 쓰기 위해서 닳아가는
경건한 하얀 거품은 붉은 피의 먼동
환승하는 하루치의 당신을 사방에서 꺼내고 만다
무침
권성훈
무침은 힘이 세다
모든 새싹들이 나물들이 힘없이 쓰러지듯
이내 골고루 서로가 고르게 서로에게 배어들어 무침이 된다
수많이 사무치는 건 나로 벼린 당신을 찾기 위해
뒤 범벅이 된다는 것
수없이 섞이는 계절을 증명하기 위해
공평해진다는 것은 고요해진다는 것
늦게 도착한 참기름 같은 정의로 일제히 번진다
무수한 감정들이 불안한 얼굴을 가렸지만
목격자 없이 나를 명백한 당신으로 공생한다
기름 부은 자여
저편 세계로 가는 뒤축이 달아가는 바닥에서
종국에는 낮은 자세로 봉분하나 묻힐 것이니
마를 때까지 젖지 않는 소금기같은 부끄러운 높이로
안간힘 없이 담겨지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