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이 걷고 있다. 건물들은 수많은 등을 흡입하고 수많은 등을 일시에 뱉어낸다. 사람들은 낙타처럼 자신의 등을 지고 지하철로, 버스로, 자동차로 어딘가로 끊임없이 이동한다. 회색 도시 어딘가 사막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총총히 걸어가는 낙타들, 능선처럼 보이는 사막의 등을 해독한다.
등에도 표정이 있다. 곧고 반듯한 등과 굽은 등, 휘어진 등, 웅크린 등. 등의 표정은 기울기다.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등의 독자는 타인이다. 서로의 등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가라앉은 설렘, 불안한 희망, 요란한 분노, 어리석은 찬란함, 일그러진 고뇌와 깊은 슬픔이 뒤섞인 누군가의 등에서 난해한 추상화 같은 내 등의 얼굴을 확인한다.
볼륨감이 느껴지는 신체의 앞면과 달리 등은 누군가 싹둑 베어낸 것처럼 밋밋하다. 아리스토파네스는 『향연』에서 본래 인간은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어 등과 등을 맞대고 여덟 개의 팔 다리로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마음껏 움직여 다녔는데 인간의 힘이 막강해질 것을 염려한 제우스가 몸이 맞닿아 있던 곳을 잘라버린 뒤로 사람들은 반절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 반절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허기진 골목을 돌아 등과 등을 겹쳐 대륙이동설에 등장하는 해안선처럼 꼭 들어맞는 반절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몸을 뒤집기 시작할 때부터 아기는 이미 등의 용도를 알기 시작한 것이리라. 두 다리가 등을 지탱하기 전까지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아기 등엔 새털처럼 가벼운 찬란함만 얹혀있다. 샛노랗고 조그만 유치원 가방에서부터 점점 더 크고 무거운 가방이 차례대로 자리 잡는다. 가방 안에는 조물조물 만들어 가야 할 날것의 미래가 들어있지만 다져지고 뒤엉키고 굳어져 거대한 바윗덩어리처럼 무거워진다. 학창 시절의 가방을 내려놓아도 져야 할 짐의 무게는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끝없이 가방을 바꿔 메는 일, 공기의 무게마저도 부담으로 느낄 수 있는 자격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등에 무언가를 지고 있지 않아도 익숙하게 굽어있는 등, 무엇을 올려놓아도 언제든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는 등은 명령어를 기다리는 모니터의 커서처럼 지나치게 충직하고 지나치게 왜소하다.
때로는 사람보다 짐이 더 커 보일 때가 있다. 왕복 2차선 좁은 길, 할머니가 리어카를 끌고 간다. 너덜너덜 해체된 거대한 갈색 포장 상자들이 리어카 소리에 맞춰 느릿느릿 춤을 추며 간다. 버스도, 트럭도, 택시도, 배달 오토바이도 할머니를 추월하지 않고 야만의 경적을 차마 울리지 못하는 것은 할머니 생이 온 힘을 다해 걷고 있기 때문이리라. 오래전 누군가의 요람이자 둥지였을 할머니 등, 풍화되고 마모되어 이제는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등에 달그덕 덜그덕 불친절한 바퀴 소리만이 얹혀있다. 한때 할머니 등에 업힌 아기들은 등의 온기를 먹고 자라 걷고 달리며 어딘가로 떠나 또 다른 누군가의 등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은 누군가의 등을 떠나야만 비로소 자신의 두 다리로 서게 되는지 모른다.
크고 유순한 눈을 끔벅이며 모래언덕을 두 덩이나 지고 사막을 넘는 낙타와 커다란 짐을 지고 도시의 시멘트 언덕을 넘는 할머니 모습은 닮아 보였다. 내려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등을 지고 걷는 이들은 숭고와 거룩함의 표상처럼 여겨졌다. 할머니는 리어카가 아닌 자신의 관, 폐지로 가득 찬 그러나 살아있다는 확신, 살아야 한다는 확신으로 가득찬 관을 끌고 가는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할머니의 리어카를 대신 끌어줄 수는 없었다. 리어카 위에 얹힌 지난한 생을 뒤따르는 우리는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조문객들처럼 보였다. 서로의 등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시간이다.
낙타가 된 할머니 등을 따라 저마다의 낙타를 끌고 긴 행렬이 이어진다. 달그덕 달가닥··· 리어카 끄는 소리가 할머니의 심장 박동 소리처럼 들린다. 2차선 도로의 끝, 낡고 추레하고 곧 무너질 것 같은 고물상에 이르러서야 거룩하고 서글픈 행진은 끝이 났다. 비로소 느려진 시간을 만회하려는 듯 낙타들은 속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경적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낙타가 된 할머니는 그곳에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다시 짊어지고 있을까. 할머니 등이 하나의 작은 점이 되어 시야에서 멀어져간다.
기차가 떠날 때 플랫폼에서 배웅하고 돌아서는 등을 보면 공연히 마음이 아리다. 다가오는 이는 등을 보이지 않고 멀어지는 이는 등을 보인다. 숱한 헤어짐의 끝은 등이 내 앞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다. 기차에서 내려 목적지를 향해 총총히 걸어가는 수많은 등의 언어를 해독한다. 희망과 설렘으로 곧추 선 등, 근심을 업고 가는 등. 등을 바라보는 일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그들의 등에서 알베르 카뮈의『이방인』에 등장하는 ‘뫼르소’의 절박한 목소리를 듣는다.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 나는 확신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내 등에 대한, 내 삶에 대해 부끄럽지 않을 확신.
상심한 자의 등은 슬픔의 언어를 품고 있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철제 대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았다. 검은 패딩 아래 파란색 병원 로고가 그려진 환자복 바지가 봄바람에 펄럭였다. 패딩에 가려진 아버지의 등이 유난히 왜소해 보였다. 젊은 날 아버지의 등은 단단하고 곧은 등, 확신에 찬 등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언가가 스멀스멀 빠져나가고 있었다. 며칠 뒤 앰뷸런스 소리와 함께 누운 채로 돌아오신 아버지, 병마에 시달린 고단함을 등에서 내려놓으셨기를 바랐다. 선산 양지바른 곳을 향하는 아버지의 등이 비로소 공기처럼 가벼워 보였다. 어쩌면 그의 등은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등 위의 짐을 하나씩 내려놓게 되지만 언젠가는 아무것도 없는 등도 스스로 뒤집을 수 없는 날이 온다. 등이 점점 더 기울어져 마침내 바닥과 수평이 되는 날, 그날은 무거운 짐을 벗는 날이면서 두 번 다시 짐을 질 수 없는 날이기도 하다. 벌거벗은 몸에 옷 한 벌 걸치고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날, 아무도 읽어낼 수 없는 등의 표정을 오직 자신만은 알 것이다.
또각또각 걸으며 앞선 이의 등을 부지런히 읽고 있다. 낯모르는 서로의 등을 읽어주는 일은 살아있기에 가능한 유희다. 누군가의 등을 읽는 일은 곧 나의 등을 읽는 일이기도 하다. 뒤따라오는 이는 지금 내 등에서 무엇을 읽어내고 있을까? 구겨진 도화지처럼 울고 있지 않기를, 삶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기를 바라지만 오래전 반절이 되어버린 밋밋한 등에는 불확실한 확신, 피어보지도 못한 꿈, 덧없는 것들, 난해한 희망, 허기와 결핍만이 가득하리라. 뒤따라오는 이가 등의 표정을 오독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때로는 오독하기를 바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서로의 등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내 등 위로 폐지 더미에 가려진 할머니의 등이 겹친다. 쇼윈도에 한 마리 왜소한 낙타가 보인다. 생의 확신과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나의 등은 벌써 지쳐버린 것일까. 움츠린 등을 곧추 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