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이상하다.
정확히 말하면, 보통의 집들과는 조금 다른 조명과 카메라 프레임 속에서 살아간다.
결혼한 지 마흔다섯 해가 되었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눈만 마주치면 치열하게 대립한다.
아침 식탁의 간이 맞네 틀리네로 시작된 말다툼은 저녁 늦게까지 멈추지 않는다.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온갖 인간의 희로애락을 연기하며 살아온 나와 남동생마저도, 이 집이라는 스튜디오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감정선은 도무지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어릴 적 나는 이 연극이, 혹은 이 영화가 조만간 비극적인 막을 내릴 거라 믿었다.
저토록 매일같이 충돌하면서 어떻게 한 작품을 함께 계속 끌고 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아빠는 용띠, 엄마는 호랑이띠다.
주변 사람들은 농담처럼 "용호상박이라 그래" 하며 넘겼지만, 어린 내 눈에는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정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게다가 우리 집은 식구들의 면면부터가 묘하게 팽팽했다.
한평생 무대와 현장을 누비며 공연을 기획하고 배우들을 조율해 온 제작자 아빠, 그리고 그 밑에서 자라나 대사 속에 갇혀 사는 배우인 남동생과 나.
우리 집에서 ‘말’이란 늘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대본 속 지문처럼 철저히 계산되거나 서로의 자존심을 겨루는 칼날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팽팽한 대치 상태를 한순간에 허물어뜨리는 이상한 소품이 하나 있었다.
어릴 적에는 부모님의 싸움이 시작되면 괜히 방문을 닫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날도 거실에서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유리컵이 식탁 위에 내려놓이는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숨을 죽이고 있던 내 귀에 어느 순간 부엌에서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복숭아를 깎고 있었다.
잠시 후 "먹어." 하는 짧은 말이 들렸고, 집 안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 집에서 싸움의 끝은 언제나 복숭아 한 접시였다는 것을.
여름날, 시장에서 돌아온 아빠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비닐봉지. 그 안에는 어김없이 복숭아가 들어 있었다.
전업주부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엄마는 집안의 숨은 ‘시인’이었다.
엄마가 쓰는 시는 원고지에만 적히지 않았다.
계절의 변화를 읽어내는 눈빛,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혼잣말, 그리고 여름이 오면 집안 전체를 채우는 복숭아 향이 바로 엄마의 시였다.
동생을 가졌을 때도 분홍빛 복숭아가 품으로 쏟아지는 꿈을 꿨다고 했다.
엄마는 복숭아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꿈을 꾸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 하며 웃던 얼굴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여름이면 엄마는 시장을 지나칠 때마다 먼저 복숭아부터 찾았고, 복숭아 향을 맡으며 "올해는 참 달겠다."라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나는 그 말이 복숭아를 향한 말인 줄 알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평범한 하루가 또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엄마만의 기도였는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복숭아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솔직한 언어이자 시상 그 자체였다.
하지만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를 지휘하며 기획안을 만들어내던 제작자 아빠는, 정작 자기 집 안에서는 "당신 좋아하잖아"라는 다정한 대사 한 줄 읊지 못하는 나쁜 연출가였다.
시장에서 돌아오면 툭, 식탁 위에 봉지를 던져놓듯 올려놓을 뿐이었다.
"복숭아 사 왔다."
언제나 똑같이 건조하고 뻣뻣한 플롯.
엄마 역시 그 연출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받아쳤다.
"누가 사 오랬어? 집에 아직 남았는데."
툴툴거리면서도 가장 먼저 복숭아를 냉장고에 넣는 사람은 엄마였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가장 결이 고르고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골라 껍질을 비껴냈다.
아빠는 그 모습을 못 본 척, 무심하게 TV로 눈길을 돌릴 뿐이었다.
나는 마흔이 넘고, 배우로서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수많은 인물의 인생을 관통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정교하게 써 내려간 대사로만 전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빠는 표현의 기술을 배우지 못한 연출가였다.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차마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하는 답답한 사람. 대신 아빠는 시장 귀퉁이 과일가게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상처 없는 것을 뒤집어보고, 향이 좋은 것을 가만히 맡아보고, 가장 단단하고 달콤한 것을 골라내기 위해 묵묵히 프레임을 잡듯 시간을 썼다. 그 둔탁한 손길이야말로 아빠가 평생을 써 내려간 가장 정교한 러브콜이었던 셈이다.
엄마가 그걸 몰랐을 리 없다.
시인의 직관은 늘 언어의 너머를 보니까. "누가 사 오랬어"라는 투덜거림은 엄마만의 고마움의 변주였고, 밤마다 깎아 내던 복숭아 조각들은 아빠의 서툰 연출에 보내는 엄마만의 조용한 찬사였던 것이다.
오늘도 두 사람은 별것 아닌 일로 목소리를 높인다.
아침에는 고양이 똥치우는 일로, 낮에는 창문을 열어두었네 닫았네로 투닥거린다.
그러다 해가 뉘엿해질 즈음, 아빠가 무심한 표정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비닐봉지 안에는 역시나 분홍빛 복숭아가 들어 있다.
엄마는 또 핀잔을 줄 것이다.
아빠는 또 헛기침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식탁 위에는 어김없이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깎인 복숭아 접시가 올라올 것이다.
엄마는 복숭아를 늘 여섯 조각으로 잘랐다.
그리고 가장 크고 예쁜 조각 하나를 아무렇지 않게 아빠 앞에 밀어놓았다.
아빠도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맛있네." 겨우 그 한마디.
엄마는 "그렇지?"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날도 두 사람은 끝내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세상 어떤 말보다 긴 사랑을 들었다.
나는 이제 안다.
우리 집에서 복숭아는 과일이 아니다.
평생 "사랑한다"는 대사를 건네지 못한 한 남자가 무심하게 던지는 가장 다정한 대본 속 지문이다.
그리고 평생 "고맙다"는 답을 쓰지 못한 시인이, 가만히 그 마음을 받아 적으며 써 내려간 아름다운 행간이다.
말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화려한 수사와 화려한 화법이 사랑이라 믿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무대 뒤의 진짜 삶에서는 말보다 깊은 행위들이 존재한다.
시끄러운 말다툼 사이에 조용히 놓이는 복숭아 한 봉지.
마흔다섯 해 동안 서로의 밑낯을 다 보면서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그 서툴고도 향기로운 무언의 인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여름에도 아빠는 시장에서 복숭아를 사 올 것이고, 엄마는 투덜거리며 그것을 씻을 것이다. 배우인 남동생과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관객이자 딸, 아들로서 이 아름다운 명연극의 관람평을 마음에 적어 내릴 것이다.
사랑은 꼭 말로 상연되지 않아도 좋다. 복숭아 향기처럼, 조용히 집 안 가득 오래도록 남을 수 있다면.
첫댓글 수필
한 편의 콩트를 읽는 듯한 여운이 남네요.
공모전에 나오는 글은 무엇인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집을 스튜디오로, 부모님을 배우로, 그런데 그들이 펼치는 행동의 매개체가 복숭아라는 구성이 아주 독특하긴 해요.